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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첫째 날 오후 론세스발에서 세탁물을 옥외 건조대 두 곳에 나누어 늘어놓았다. 위쪽에 늘어놓은 속옷은 그날 저녁 거두어 배낭 속에 넣었다. 그런데 아래쪽에 늘어 놓은 손수건과 양말을 찾으려 갔으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가서 확인했으나 바람에 날렸는지 흔적도 없었다. 파리에서 모자 분실에 이어 분실 2호 사건이다. 그러나 배낭 속에 스포츠타월과 여분의 양말이 있어 1호 사건에 비하여 파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나는 분실 1호 사건 2호 사건 공히 성지에 들어서기에 부족한 순례자를 정신적으로 정화 시키는 경고 메시지로 받아 들였다.
순례 둘째 날 아침 일찍 식수를 채우기 위해 물통을 들고 밖으로 나갔더니 먼저 온 사람들이 물을 받고 있어 잠시 기다렸다. 아래 쪽 초지에 눈길이 가 누군가 했더니 어제 피레네 산을 넘어 온 카나리 섬 출신 스페인 부부(부인은 독일 출신)가 텐트를 거두고 있었다. 아마도 개와 함께 옥외에서 야영을 한 것으로 보였다. 순례 첫날 개를 자신의 가족처럼 극진히 돌보면서 피레네 산을 넘는 모습으로 보아 그런 정성이라면 간밤에 개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야영도 불사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보았다.
순례 둘째 날 아침 한국 학생 보연양을 통하여 알베르게 모퉁이 휴게실이 와이파이 가능 지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순례자들이 아침 일찍 출발한 후 나 혼자 휴게실에 머물면서 가족과 친지 몇 사람에게 순례 서막이 순조롭다는 카카오 톡 메시지를 보냈다. 통신비를 절약하기 위해 한국에서 휴대폰 데이터를 차단하고 왔기 때문에 순례도중 알베르게나 바에서 제공하는 와이파이를 이용해서 순례소식을 전해야 만 했다. 데이터 차단 상태에서 문자 메시지는 단 2줄 밖에 허용 되지 않는다.
순례 둘째 날 론세스발 알베르게를 나와 순례 길로 들어서는데 청년 한 사람이 다가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큰길을 따라 쭉 걸었다. 아일랜드 출신인 이 청년과 한참 이야기를 하며 걷다 허전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 보니 뒤따라 오는 다른 순례자들 모습이 한 사람도 안 보였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1KM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니 건물 벽 한 구석 눈높이에 노란색 화살표(amarillas flechas)가 순례길 방향을 오른쪽으로 표시 하고 있었다. 바른 길로 들어서 네델란드에서 온 부부와 합류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 묻고 인사를 나눴다.
아침 햇살이 따가워 지자 선 크림은 발랐으나 모자 없이 걷는 내가 측은해 보였던지 론세스발부터 함께 걷는 아일랜드 청년이 자신의 배낭에서 Nautica Rowing Cap을 나에게 내주어 염치없이 받아 쓰니 약간 젊어진 느낌이다. 아일랜드 청년의 걷는 속도가 빨라 나는 뒤 쳐지게 되었고 그 후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여 빌린 모자는 돌려 주지 못했다. 이 모자가 내가 길 위에서 받은 두 번째 선물 리스트에 올랐다. 첫 번 째 선물은 파리 지하철 역에서 중년 신사로부터 받은 지하철 표이다.
론세스발에서 21.8km 지점에 있는 Zubiri에서 휴식을 취한 후 5.3km를 더 걸어 오후 5시 30분경에 Larrasoana에 있는 시립 알베르게에 들게 되여 방을 배정 받았다. 2인용 침대 2개 인 방인데 불란서 SJPP ZUHARPETA에서 함께 지낸 Calorin이 먼저 와 안쪽에 있는 아래층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입구에 있는 아래층 침대를 쓰기로 하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불가리아 순례여인 두 사람이 들어와 각각 2층침대로 올라갔다. 이중 한 여인은 stefka(스테파니)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친구이다. 이리하여 순례 여행 중 둘째 날은 한 방에서 여인들 속에 둘러 쌓여 지낸 오래 기억 할 만한 날이었다. 좀 몸집이 큰 스테파니의 코고는 소리에 잠을 설쳤지만 나는 아침에 헤어 질 때 한국에서 가져간 민속소품 복 주머니를 Carloin, Stefka 그리고 그의 친구에게 나누어 주면서 행운을 빌었다.
순례 셋째 날 비가 오락 가락 했다. 뉴질랜드 출신 변호사 Josh, 나 그리고 미국 배우를 닮은 독일인(나는 그의 얼굴 생김새를 어네스트보그나인으로 기억하고 있음)이 한 팀이 되어 Pamplona까지 걸었다. 도중에 싸발디카에 있는 성스테파노성당에 들러 순례지 Passport에 Stamp를 찍고 13세기에 축조한 종탑계단을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 보며 종을 쳐 보 기도 했다.
Larrasoana에서 Pamplona까지 거리는 약 16km에 불과 하지만 일찍 도착해 인구 20만의 도시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그날은 짧은 거리를 걷기로 한 것이다. 독일출신 어네스보그나인의 딸과 SJPP ZUHARPETA에서 나와 함께 지낸 SAM이 한 팀이 되어 우리 3인 뒤를 쫓아 오고 있었다.
Josh는 변호사이다. 그런 그가 “나는 너의 엉덩이를 좋아해”라고 한국말로 농담 할 정도로 유머가 넘치는 친구이다. 이런 Josh에게 내가 웃으면서 “You are a lady’s man(너는 여자에게 환심을 사려고 안달하는 사람 같구나 )”이라고 말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내가 “여자들에게 좀 친절하다는 말이겠지”라고 수정을 요구해 그렇다라고 받아들여 일단 한국말 농담에 대한 우리 사이에 사소한 알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날 세 사람이 순례 길을 걷다 三人行에 必有我師焉이라(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내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다) 라는 공자님 말씀이 생각났다. Josh는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고 여행에 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지나치게 여행 안내서에 의존하게 되면 여행객이 편견에 사로 잡혀 여행 안내서를 작성한 사람의 시야를 벗어 나지 못한다는 단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여행지에서 관심의 대상은 역사적인 장소와 기념물보다 현재 여행지의 풍경을 이루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그의 여행철학을 들려 주었다. 우리나라 여행 도매상들이 싼 가격으로 관광객을 유인하여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소포 꾸러미 같이 이동시키는 소위 말하는 페케지 여행은 정말 개선 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길을 가다 모르는 것은 현지인에게 물어 볼 수 있고 여행하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테마를 정해서 탐사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그날 오후 2시경 Pamplona에 도착하여 Jesus Y Maria라는 알베르게에 등록했다.
배낭을 알베르게에 내려놓고 PamPlona의 구 시가지를 관광한 후 우체국으로 가서 순례 길에서 엽서를 쓸 때 필요한 우표를 넉넉하게 샀다.
점심 시간에는 Josh, Sam, 나, 독일출신 어네스보그나인 그리고 그의 딸 과 함께 카우초라는 전통있는 bar에 가서 그 집 전문접시요리 Tapas(snacks)와 백포도주를 마셨다. 그날 와인을 두잔 마셨는데 대단히 맛있었고 두 번 째 와인은 일행을 위해 내가 솼다.
얼마간의 자유 시간을 가진 후 저녁 시간에는 Josh, 보연 학생 그리고 나 셋이서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Plaza Del Castillo 식당에서 적포도주를 곁들여 식사 했다. 우리는 이 지방의 특산물인 오리와 양고기요리를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식사가 끝난 후 각각 3유로의 입장료를 내고 민속 춤 제전이 벌어 지고 있는 장소를 찾아가서 2시간 동안 관람했다. 그곳에서 내가 우리 일행을 위해 맥주 한잔을 솼다. 숙소로 돌아오니 소등 시간이 되여 양치질을 하고 바로 침대로 직행 꿈나라로 떠났다.
순례 셋째 날 Pamplona에 도착한 후 내가 묵고 있는 알베르게 부근 상점에서 구입한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다음 날 온전한 순례자의 모습을 되찾았다. 물론 모자 하나의 가격은 좋은 식당에서 저녁 한끼를 사먹는 것보다 훨씬 고가였다. 그러나 태양이 강한 나라에서 모자의 효용 가치는 한번 먹는 맛있는 음식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았다.
Pamplona에서 출발하여 Alto de Perdon 언덕을 오르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자전거여행을 하는 현지 젊은이 두 사람을 만나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배낭 속에 있는 민속소품을 꺼내어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랬더니 한 친구가 나를 보고 만일 당신이 Navarrete(앞으로 통과하게 될 순례길 위 100K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설명해 주었음)에 머물 계획이면 자기 친구가 운영하는 La Casa del Peregrino라는 알베르게에 머물러 보라고 친절 하게 소개 해주었다. 그리고 는 친구에게 자신의 안부(Pamplona에 사는 친구로 지칭) 전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다.
순례를 해본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불란서 SJPP에서 피레네 산맥만 넘어서면 산티아고까지 마치 컨베어 벨트를 타고 가듯이 힘 안들이고 가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Pamplona를 출발 하여 Puente la Reina까지 가는 데에도 해발 800미터 가까운 작은 산을 넘어야 한다. 그리고 산티아고 까지는 해발 1000-1400미터의 산맥 군을 3개나 더 넘어야 하기 때문에 스페인내 여정도 전부 평원이나 밋밋한 숲 속 걷기가 아니다. 정확한 통계는 인용할 수 없지만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탈락하는 순례자의 비율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이는 어느 특정 구간이 아니고 전체 여정이 체력과 정신력을 솥아 부어야 하는 힘든 여정임을 암시하고 있다.
Alto de Perdon 에 지금은 철로 만든 순례자 기념비만 있다. 오래 전에는 이곳에 순례자를 위한 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순례자 숙소를 통상 Albergue 또는 Refugio 라고 부르지만 때로는 Hospital이라고 한다. 병원을 지칭하는 불어는 오텔 디유(hotel-Dieu)인데 이를 직역하면 ‘신의 쉼터’이다. 선행을 통하여 신에게 봉사한다는 중세 가치관에 비추어 그 당시 병원은 결국 신의 쉼터 인 동시에 아울러 지친 순례자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순례자의 쉼터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Josh가 말 한대로 순례 길에서도 순례의 풍경을 이루는 살아 있는 사람이 나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로 다가왔다. 내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인 Puente La Reina에 도착 하기 전 5KM지점에서 남녀 4인의 혼성 피크닉 팀을 만나 사진을 촬영하고 나는 서울에서 온 순례자라고 소개하고 민속 소품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들이 소풍 가서 먹을 맛있는 chorizo(스페인 식 가공 소시지)를 배낭에서 꺼내 나에게 주면서 빵과 같이 먹으라고 일러 주었다. 이것이 내가 길 위에서 받은 세 번 째 작은 선물이다.
그날 Perdon언덕을 넘어 Puente La Reina 시립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20분 경이다.
Hospitalero가 방을 배정한 후 침대는 당신 마음대로 택하라고 해서 지정한 방을 찾아 갔다. 그런데 이미 먼저 온 순례자들이 침대를 다 차지하고 없었고 2층 침대 가운데 하나가 달랑 남아 있었다. 하루 밤 쉴 곳이 결정되자 오래 털 침낭을 침상 위에 펼쳐놓고 빨래를 하러 갔다. 빨래하는 세라믹을 먼저 온 사람이 차지하고 있어 샤워부터 먼저 하고 기다렸다 빨래를 할 수 있었다.
좀 쉬다 이 마을 앞 강인 Argo 에 놓인 여섯 개의 아치를 가진 중세 다리를 구경하러 나갔다. 이 다리는 11세기에 나바라왕 산초 3세왕비의 후원으로 순례자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왕비의 다리(Puente la Reina)’ 라는 뜻의 이 지역 이름이 Reina Dona Mayor왕비의 선행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Argo강은 까미노 순례 여정 중 가장 아름다운 강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왕의 다리를 구경을 하고 돌아 오는 도중 마침 불란서 Bayonne 에서 버스를 타고 SJPP를 갈 때 내 옆자리에 않았던 이태리 친구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 후 근황을 알려주었다. 발에 물집이 생겨 순례일정이 계획보다 늦지만 몇 일 안에 컨디션이 회복 되기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는 지금 막 저녁식사를 하고 오는 중인데 이 길 끝에서 두 번 째 식당이 좋다고 해서 나도 그리로 가 순례자 메뉴를 주문해서 적포도주를 반주로 저녁식사를 했다. 숙소로 돌아오다 멀쩡하게 생긴 젊은 친구가 돈이 없다고 1유로만 도와 달라고 해서 살며시 손에 쥐어 주었다.
저녁 10시경 소등 시간이 되자 2층으로 올라가 오리털 침낭 안으로 기어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한참 자다 쿵하는 소리와 울림에 놀라 잠을 깨니 내가 2층침상에서 시멘트 바닥아래로 떨어진 것이 아닌가. 그때가 새벽 한 시쯤 된 시간이었다.
그 방에 자던 사람들이 (순례자들은 대개가 손 전지나 헤드램프를 머리맡에 두고 잠)일제히 내가 떨어진 쪽으로 손 전지를 비추었고 아래층에 자던 일본 여인이 괜찮으냐고 나에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떨어진 상태에서 한 참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얼굴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다행이 피는 나지 않았다. 일어나 화장실까지 걸어 보니 다리도 부러진 상태가 아니었다. 그 길로 내가 덮던 오리털침낭을 들고 식당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서 잠을 청했으나 높은 데서 떨어진 충격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한 시간 동안 미국에 공부 하고 있는 아들과 카카오 톡을 한 후 새벽 3시에 식탁 위에서 겨우 새우 잠을 청 할 수 있었다.
누군가 식당에 불을 켜 눈을 뜨고 보니 아침 일찍 출발하는 일단의 순례 객들이 배낭을 꾸리려고 식당으로 들어 온 것이다. 이들이 불을 켰다 식탁 위에서 자고 있는 나를 보고 놀라서 다시 스윗치를 내리는 찰라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가 막 지난 시간이었다. 내가 비좁은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서 한밤중에 일어난 사고를 설명하고 그들이 부엌에서 배낭정리 작업을 계속하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그날 새벽 사고가 난 내 침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또 떨어질까 두려워 눈을 뜬 채 산 송장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 다른 사람들이 일어 날 때까지 기다렸다.
순례 사흘째 내가 당한 사고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하다. 만일 내가 다리나 허리 뼈에골절을 당했다면 나는 현지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을 것이고 결국 한국으로 후송당 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후유증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생을 감당 해야 하는 운명을 감수 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접골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의 원인을 분석해보면 직접적인 것은 나의 부주의이고 간접적인 것은 침대 난간에 자는 사람을 보호하는 지지 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간접 원인은 원래 나이던 사람은 2층 침대에 재우지 않는 것이 관례이나 그날 Hospitalero 가 나를 2층에 자리를 배정 했기 때문이다. 물론 만실 이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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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고를 나는 이렇게 해석해 본다. 평소 햇살에 건조시켜 강건함이 토기 수준에 불과한 나를 용광로에 넣고 가열 하여 도자기 수준으로 upgrade 시키려는 그분의 의도가 작용 했던 것이라고.따라서 순례 길에서 내가 그분의 주목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 하고 싶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Tagore의 기도가 절실하게 내 마음속에서 우러났다:
Grant that I may not be a coward
겁쟁이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나의 청원을 받아 주소서
Feeling Your mercy in my success alone;
성공했을 때만 당신이 도와 주신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But let me find the grasp of Your hand in my failure.
실패했을 때에도 내 손목을 잡고 계시는 당신을 느끼게 하소서.
이 사고 이후 몇 번의 고비가 더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이 길이 주는 모든 교훈을 나는 열린 마음으로 겸허히 받아 들이기로 작정하고 다음 여정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불란서 SJPP에서 순례여행을 출발한지 벌써 5일이 지났다. 이제는 순례자의 하루가 어떤 것인지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순례자의 반복되는 일상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순례자가 머무는 숙소를 Albergue 또는 Refugio 라고 부른다. 이를 관리하는 자원 봉사자를 Hospitalereo(남자의 경우) 또는 Hospitalera(여자의 경우)라고 칭한다.
순례자가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Hospitalero/a가 통상 신발을 벗어 신장에 넣고 스틱도 지정된 장소에 두도록 안내해 준다. 순례자가 소지한 자기나라에서 발행한 Passport를 제시하면 출발지, 국적, 이름, 순례수단을 기록하고 순례자 Passport에 도장을 찍어 준다. 정해진 숙박료(기부(Donativo)의 경우 기부금을 내야 한다. 기부의 경우 에도 무료가 아니므로 최소한 5유로이상을 지불해야 한다)를 내면 Hospitalero/a가 머물 방 번호와 침대로 안내 해주거나 지정해준다. (지정해주지 않는 경우는 자유선택). 이때 Hospitalero/a는 아침출발 시간, 저녁 소등 시간 등 숙소의 규칙을 이야기 해준다.
소등은 대개 저녁 10시 이고 아침 출발 시간은 늦어도 오전 8시 이전에 떠나야 한다. 순례자들이 떠난 후 청소를 하고 다음순례자를 받을 준비를 하는 시간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 대개 오후 1시경부터 새로운 순례자를 받는다. 알베르게가 열려 있지 않는 경우 입구에 배낭을 온 순서대로 놓아 두면 나중에 Hospitalero/a 가 와서 등록할 때 순서대로 방을 배정해 준다. 통상 알베르게 는 환자가 아닌 이상 하루 이상 머물 수 없다.
알베르게에서 담요를 제공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가벼운 침낭을 휴대 하여야 한다. 벼개와 침대 카바는 일회용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샤워는 남녀가 구분된 곳도 있으나 공용인 경우도 많다. 알베르게의 60% 이상이 취사시설과 취사도구를 제공하고 있다. 사용한 식기는 깨끗이 닦아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알베르게에서 아침과 저녁을 제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래 보관 할 수 있는 식 재료나 조미료 등은 다음 순례자를 위해 적절한 표시를 하고 남겨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침 일찍 출발하는 순례자들은 전날 저녁 배낭 꾸리기를 거의 완료하고 자신의 손 전지나 헤드램프를 이용하여 최소한의 바스락거림으로 배낭을 정리하고 출발하여야 한다. 우선 짐을 들고 밖으로 나와 식당이나 복도에서 시간을 가지고 완전한 배낭 꾸리기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직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면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 주의 요함. 숙소에서 의사소통은 소근거림이나 손짓으로 하여 다른 순례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 해야 하는 것이 예의 바른 행동이다.
샤워를 한 후 밖으로 넘쳐 나온 물을 대 걸레로(통상 비치) 닦아서 바닥을 정결하게 하는 것이 좋다. 샤워할 때 더운 물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도 삼가 해야 할 일이다. 나중 오는 순례자들이 찬물로 샤워하지 않도록 배려 해야 하기 때문에.
젊은 순례자의 경우 아래층 침대를 배정 받았다 하더라도 나중에 이층 침대를 배정 받은 연장자가 불편해 할 경우 연장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도 순례지에서 실천 할 수 있는 자발적인 선행 중 하나이다.
지정 받은 침상 위에 자기 침구를 펼쳐놓고 배낭을 침대아래나 곁에 두고 샤워를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시장을 보러 가거나 관광을 한다. 건조대도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도록 최소한의 공간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순례하는 동안 공통 인사는 “Buen Camino”이다. 같은 목표를 향하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면서 함께 걷는 이들에게 이말 한마디로 서먹함을 깨고 생면부지 인사와도 공동체적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대화로 이어 갈 수 있다. 현지인들에게도 올라(Hola!)라고 인사하면 반드시 Buen Camino라는 대답이 돌아 온다.
오늘의 교훈:
“He sent from above, he took me,
he drew me out of many waters.”(Psalms chapter 18 verse 16)
그 분께서 높은 데에서 손을 뻗쳐 나를 붙잡으시고
깊은 물에서 나를 끌어 내셨네. (시편 18장 17절)
다섯 번 째 순례이야기는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끝”
첫댓글 이층침대에서 세멘트바닥으로 떨어지고도 별 이상이 없었다니 대단하십니다. 인용하신 시편'He sent from above,He took me,' 맞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