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의 문화유적을 둘러보려는 사람은 먼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방문하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 다양한 유물 유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동대문 쪽으로 좀 더 걸어가면, 동대문을 지나, 대학로 뒷산인 낙산을 넘어, 혜화문을 만날 수 있다. 혜화문에서부터 이어지는 성곽의 흔적을 추적하여 가다보면,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오르는 성곽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길을 즐겁게 걸은 사람은 성곽에 기대어 살았던 많은 삶의 자취를, 어느 정도는 자기도 모르게, 무심히 지나친 셈이다.
[동문조도(東門祖道)]
이간수문을 뒤로 하고 길을 건너 동대문[흥인지문] 쪽으로 가려면 오간수교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 이름은 청계천 물을 흘려 내보내기 위하여 서울 성곽에 나 있던 오간수문(五間水門) 즉 다섯 칸짜리 수문에서 빌려온 것이다. 다리 난간은 성곽을 본뜬 모습이고 다리 아래 산책로에는 오간수문 사진도 붙어있고 오간수문을 연상케 하는 돌장식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곳이 오간수문 자리는 아니다. 동대문 쪽을 바라보면 노점들 뒤로 거기가 오간수문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보인다. 표석 뒤는 동대문 앞 광장이다.
오간수교
오간수문 사진
동대문 광장 앞 오간수교 터 표석 동대문에 식상하였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하여 온 서울 성곽 축조 방식이 다 모여 있는 듯 모양이 규칙적이지 못한 동대문의 방어벽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뒤돌아서면 패스트푸드 가게 앞에 그곳이 경성궤도회사 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1930년~1961년에 그곳과 뚝섬, 광나루 사이를 협궤전차가 다녔단다. 그 전차는 승객 및 물자수송, 교외 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단다. 나들이라 하니 광나루나 뚝섬으로 가는 물놀이가 떠올랐다. 이 전차는 동대문 주변 풍경을 바꾸었다.
모양이 규칙적이지 못한 동대문 방어벽 경성궤도회사 터 표석
정선의 그림 [동문조도]
1746년경 정선이 그린 그림 [동문조도(東門祖道)]를 보면 전차 등장 이전 풍경이 어떠하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그림을 해설한 학자 최완수에 의하면, 옛날 중국의 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여행하기를 좋아하다가 도로에서 죽어 도로신이 된 후, 길 떠나는 이들이 이 도로신[조신(祖神)]에게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때 친지들과 길 떠나는 이가 제사 음식을 나누며 이별[전별(餞別)]하였다고 한다. 조도라는 말은 어떤 이가 길 떠나기 전에 그와 함께 도로신에게 제사지내고 제사음식을 함께 나누는 뒤풀이 [전별연(餞別宴)]를 베풀어 송별한다는 의미란다. 그림 속에 이별의 장면이 담겨있지는 않았지만, 정선은 그가 많은 벗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장소를 화폭에 담았다. 그림에는, 얕은 산과 소나무를 배경으로, 동대문, 오간수문, 동묘 그리고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운 연못이 그려져 있다.
[이화(梨花)] 동대문 북쪽 길 건너 성곽 위엔 기와집과 동대문교회가 있다. 교회로 올라가보니 1910년에 만든 종이 있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 교회는 감리교 교회이며, 1891년에 동대문 부인 진료소의 기도처로 시작된 교회이다. 이 교회의 초대 담임 목사인 윌리엄 스크랜튼의 어머니 메리 플래처 스크랜튼은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연 사람이다.
동대문교회 백년 넘은 종
이화여자대학교 병원이 헐리고 복원된 성곽
20세기 말의 사진 속에 보이는 이화여자대학교 병원 이화여자대학교 교표
그런 인연 때문인지 교회 뒤편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병원이 있었다. 서양의학에 기반을 둔 것으로는 한국 최초였을 부인 진료소 자리에 이화여자대학교 병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공원이 된 병원 터를 보니 이화여자대학교 교표가 생각났다. 그 교표 안에는 대문과 성곽이 그려져 있는데, 이화여자대학교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설명에 따르면 그 대문은 남대문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의 설명이 맞다면, 이화여자대학교는 남대문보다는 동대문과 더 뜻 깊은 인연이 있는 것 아닌가? 동대문교회 뒷동네가 이화동이다 보니 이화여자대학교의 첫 번째 캠퍼스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 같이 정동이 아니라 이곳 동대문 옆 성곽 바로 아래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떠올랐다. 어쨌든 유서 깊은 터에 세워졌던 병원은 성곽에게 다시 자리를 내주었고, 교회는 아직 성곽 위에 남아있다.
[열린 듯 닫힌 낙산(駱山) 산길]
동대문에서 성곽 안쪽으로 낙산 오르는 길 들머리
20세기 말 사진. 빨간 기와가 선명하다. 10여년 사이 스러져간 기와자리에 다른 것이 씌워져있다
20세기 말 종점 앞 가게. 달동네 버스종점이었던 곳.
옆에는 이미 쓰레기가 쌓여가고 있었다. 지금도 종로03 마을버스가 보인다.
20세기 말, 아직 남은 거주자를 아랑곳하지않고 공원화 작업은 시작되었다.
공원이 된 병원 터를 에워싸고 있는 성곽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낙산에 오르게 된다. 이 산은 조선 한양 성곽의 동쪽 한계, 풍수 관념상의 좌청룡이며, 대학로 뒷산이다. 조선시대 때 이곳은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50년 동안 이곳은 달동네였다. 그러다가 20세기 말, 이곳은 공원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낙산 정상에서 혜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린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지역에는 성벽을 담장으로 삼는 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집들을 헐어내 길을 열고나서야 성벽 바깥쪽에 붙어있으면서 동대문과 혜화문을 잇는 길이 완성되었다.
낙산 정상에 서면 북한산이 보인다.
암문.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20세기 말 암문 밖 풍경
곧바로 혜화문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성곽 옆 길이 있다.
길이 생겼다는 것은 집이 헐렸다는 이야기
20세기 말 길이 생기기 전
성벽은 가톨릭대학교 담장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 가톨릭대학교 담장은 글쓴이의 이모님 댁
담장이기도 하였다. 담장이기도 한 성벽 앞 마당에 모인 친척들. 한편 성벽 안쪽에 붙어있으면서 동대문과 혜화문을 잇는 길은 당분간 열리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밝혔다시피 동대문 쪽 끝에는 동대문교회가, 혜화문 쪽 끝에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부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동대문에서 낙산 정상 사이에서는 20세기 말 달동네가 철거되기 직전의 그곳 풍경이 되새겨졌다. 그때 그곳에서는 종점, 종점 앞 가게와 취객, 철거 직전의 아파트, 아직 거주자가 남아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되던 공원 조성작업을 볼 수 있었다. 낙산 정상에서 암문[성벽에 작게 뚫어놓은 문]을 통하여 성 밖으로 나서서 혜화문까지 가는 길에서는 성벽에 기대있던 집들 즉 산책로가 생기면서 헐려나간 집들의 모습이 되새겨졌다.
[혜화문(惠化門)]
그렇게 걸어서 다다르게 된 혜화문(惠化門)[홍화문(弘化門) 혹은 동소문(東小門)]은 아쉽게도 원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제가 전차를 통행시키기 위해서 문이 있던 자리의 산줄기를 20미터 가량 파내고 그 자리에 길을 열었던 것이다. 지금 길을 비껴 서 있는 혜화문은 1994년에 복원된 것이라 한다. 본시 이 문에는 문루가 없었는데 1744년에야 왕명으로 문루가 세워졌다고 한다.
혜화문이 건너다 보인다.
정선의 그림 [동소문]
성 바깥쪽에서 바라본 혜화문 혜화문 천정 1754년경에 그려진 정선의 [동소문(東小門)]이라는 그림에 18세기 혜화문과 그 주변의 풍경이 담겨있다. 이 그림을 해설한 학자 최완수에 의하면 혜화문은 여진족이 도성을 출입할 때 사용하던 문이라 한다. 그리고 이 문 밖 동네의 이름 돈암은 그곳에 있는 고개 적유현(狄踰峴) 즉 되넘이고개[되놈이 넘는 고개]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정선이 문루가 없던 시절의 혜화문을 기록하기 위해 그렸던 것인지, 문루가 세워진지 10년이 지나 그려진 그림 속의 혜화문에는 문루가 없다. 지금의 혜화로터리로부터 혜화문에 이르는 길은, 지금은 평지가 되었지만, 산줄기를 20미터 가량 파내기 전인 18세기에는, 꽤 높은 고개를 향해 오르는 경사로였을 것이다. 구름을 그려 넣은 자리를 보면, 지금 사람이 붐비는 대학로에서 아주 가까운 그곳이 18세기에는 꽤나 한적한 곳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미터를 깎아낸 절개지에 세워진 혜화문은 성 바깥쪽으로는 굳게 잠겨 져 있었지만, 성 안쪽 도로변과 주택가에서 올라가는 두 개의 계단길은 마치 미로로 접어드는 듯한 재미를 주었고, 문루로 올라서면 멀리 북악산과 북한산이 바라다 보여 시원하였고, 문루 주위의 공간 자체도 넉넉하였다.
집을 이고있는 성곽을 뚫고 나무가 자라났다 성곽 위 혜성교회
성곽 위 경신고등학교 담장 북악산을 향하여 오르는 성곽
주택가에서 혜화문으로 올라오는 계단 쪽을 바라보면 골목 건너 성곽 위에 꽤 큰 집이 지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서울특별시장 공관이다. 그 뒤로 다양한 집들이, 남아있는 성곽 위 혹은 성곽이 사라진 터에, 줄지어 들어서 있다. 그런 모습을 따라 주택가 골목을 걷다보면, 경신고등학교 담장 아래 남아있는 성곽이 혜화동에서 성북동, 종로구에서 성북구로 넘어가는 도로와 만난다. 거기에서 혜화동 쪽으로 내려가면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가 있던 자리를 만날 수 있고, 성북동 쪽으로 내려가면 간송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로를 건너 서울과학고등학교 뒷담장과 돈까스집들 사이를 조금 걸으면 북악산을 오르는 성곽을 만날 수 있다. 혜화문과 북악산을 오르는 성곽 사이 주택가 한적한 길은, 거칠게 다뤄지고 있는 성곽의 초라한 모습만 없다면, 조용하고 깨끗해서 혼자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길이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터에 세워진 올림픽 기념 국민 생활관
1940년대 혜화전문학교 모습. 마치 깊은 산 속에 있는 듯하다.
글, 사진 이유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