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쌍수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禪定의 상태인 定과 사물의 본질을 파학하는
지혜인 (慧)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서 부터 출발합니다. 지눌스님은
수행의 요체는 定과 慧에 있고, 定과 慧는 한쪽에 치우침 없이 골고루 닦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정혜쌍수로 定은 산란한 마음을 한곳으로 집중하여
정신적 통일을 이룬 선정상태를 말하고 慧는 이러한 마음을 바탕으로 사물의
본질을 파학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했습니다.
~~~~~~~~~~~~~~~~~~~~~~~~~~~~~~~~~~~~~~~~~~~~~~
또 定과 慧는 인간의 심성이 본래 갖추고 있는 자성정혜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수상정혜 두종류가 있는데, 수행의 근본 목표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자성정혜를 발현시키는데 있다 했고, 이를 위해서는 돈오와 점수, 卽 眞心(불성)
을 먼저 깨달은 다음 번뇌를 제거하는 점진적 수행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
점진적 수행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나아간다(進行)라 해야 하고
正精進이 맞으며, 이는 이미 얻은 定(사마타)으로 대상을 살피는 行(慧)입니다.
正精進의 반대는 安住입니다. 작은 禪定을 얻고 편안함에 안주하지 말라
~~~~~~~~~~~~~~~~~~~~~~~~~~~~~~~~~~~~~~~~~~~~~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은 보조국사의 정혜쌍수 이전 달마스님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어쩌면 세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런지.. 성문 연각 보살
三乘이 모두 선정에 안주하여 정진하지 않았던 것은 세존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달마의 二入四行論에서 二入이라는 글자때문에 道로 들어가는데 理入과 行入
두가지가 각기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이를 二와 理 두가지로 표기 했어도 오해는 여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理는 敎가 아닙니다. 定에 해당하며 사마타에 해당합니다.
사마타란 산스語의 音寫語로 三昧라 했고, 止또는 寂靜으로 번역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초기경에 '삼매와 마음챙김의 결합이다' 하셨는데 이것을 훗날
정혜쌍수 지관수행 理入四行 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문자를 새롭게 만들고
해설이 난해하면 이러한 結果가 따릅니다.
고로 二入四行이란
理(定)로 들어가서 四行을하라. 문수와 보현의 관계, 智慧와 行으로 보면
됩니다.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대상)을 觀하라, 수용하라 입니다.
보조국사의 말대로 사물(대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라.
對相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보고 아는 것을 꿰뚫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칭찬을 하거나, 욕을 한다면, 욕에도 화내지 않고, 칭찬에도 좋아하지 않으며 그가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가 를 살펴 양쪽에 끌려가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이 통찰
이고 중도를 향한 정사유입니다. 이유(原因)를 알아야 끌려가지 않을 것 아닌가?
자연은 중도실상입니다. 中道란 法을 말하고 自然法에 끌려가지 않는 法도 버려라
중도를 발견하고 중도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 대열반, 무여열반, 반열반입니다.
無餘涅槃 = 남은 것 없는 열반, 수용이 끝났기에 다시는 어떠한 몸도 받지 않는다.
위 설명과 같이 범소유상이란 물질(모양 色界)과 비물질(無色界)까지를 말합니다.
~~~~~~~~~~~~~~~~~~~~~~~~~~~~~~~~~~~~~~~~~~~~~~~~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若有色 若無色은 쉽게 말해서
보이고 안보이는 눈에 해당하며, 따라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범천과 귀신까지
若有想 若無想은 六識(표상의식)으로 생각이 '있다 없다' 하는 生滅意識에 해당하고
若非有想은 말라식에 해당할 것이요, 若非無想 非無想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렵지만 흔히 말하는 非想非非想에 해당하는 윤회의식
으로 아뢰야식입니다. 결국 물질(色)과 생각의 근본까지 일체(凡所有相)를 사유하라.
반복하지만
생주이멸하는 마음의 理致를 깨치고 그 마음으로 생노병사를 觀하는 사선정입니다.
마음이란 生住離滅로 한 생각이 떠오르면 잠시 머물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때! 찰라에 떠오른 생각으로 멸했던 것을 확인 하는것이
한생각 이전 입니다. 즉 生住離滅에서 다시 生하는 순간, 生이전을 찾는 것, 즉 滅處!
~~~~~~~~~~~~~~~~~~~~~~~~~~~~~~~~~~~~~~~~~~~~~~~~~~
이러한 현상(원인과 결과)을 모르면 活句를 주지 못합니다.
"의문을 가지고 죽어라" 찾아온 납자에게 의문을 가지고 죽게 해줄수가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화두주고 죽지 말라고 다구치니 어느세월에 산놈으로 죽은 놈을 발견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죽어야 살아나는 이치의 현상은 모르고 말로만 '죽어야 산다' 고 합니다.
먼저 숨어있는 여우를 찾아내고, 여우가 어데로 도망갈 것인가를 먼저 알아채고
여우보다 한발 앞서서 도망갈 길을 차단하는 지혜가 없으면 여우사냥은 못합니다.
이론으로 이해했다고 사냥이 되겠는가? 이론은 정형화된 하나의 모델일뿐입니다.
다양한 방편의 그물이 없으면 여우사냥은 못합니다. 현상계는 다양합니다.
여기서 깨달음의 순차를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화두타파란, 은산칠벽의 칠통에서 소리에 부디치는 순간! '앗~!' 하고 살아나오는 것
그리고 모릅니다. 고로 답하길 "나도 모르고 일천성인도 모른다" 도둑이 빈방에 든 것
같다. 모르는 놈을 깨쳤다. '不識(모른다)'입니다. 부처도 조사도 없는 적멸 空으로
無心을 깨쳤다, 이것이 理入의 사마타로 寂觀입니다. 마음은 밝아졌지만 모릅니다.
~~~~~~~~~~~~~~~~~~~~~~~~~~~~~~~~~~~~~~~~~~~~~~~~~
중도의 발견은 은산철벽에서 살아 나온 마음(定)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마음
(平常心), 편안한 마음, 순일한 마음, 텅빈 마음, 분별없는 마음으로 대상의 흐름을
사유하는 것으로 죽은 놈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산 놈이 산 놈을 발견하는 것]
理로 事(中道)를 발견하는것, 순일한 마음으로 사유하여 진공묘유를 발견하는 것,
理와 事, 두가지를 모르고 12연기를 말하면 지해풀이입니다. 12연기는 色의 흐름과
受想行識의 흐름을 병행하여 나열했기에 理(空)卽 事(色)를 모르면 不思義입니다.
************************************************************************
正思惟는 滅定이 아니고, 순일한 마음으로 보고 듣는 대상을 사유하라 입니다.
신수심법의 위빠사나는 하나의 정형화시킨 방편일뿐입니다. 法을 사유하는 것,
法을 사유하면 법문이 됩니다. 이미 정해진 글자나 경전이 아니고 일상에서 부디치는
현상에 대한 통찰이 法의 思惟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사유하며 받아들이는 受用心
싯달타의 사유
~~~~~~~~~
싯달타는 의식도 비의식도 아닌 무색계에 이르렀다. 다시 정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모든 감각과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수상멸처에 들어갔다. 그것은 완전한 소멸의 경지로
니로다(niroda,멸정)의 경지였다. 그것은 옛 스승 알랄라와 웃다까의 경지를 넘어선 것
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삶과 죽음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리는 아니였다. 다시
명상에서 깨어나보니 조국과 부모 자식들이 떠오르고 모든 욕망들이 또다시 살아났다.
그것들은 실로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마구니의 화신들이였다. 싯달타는 다시 집중하여
전과 같은 수상멸처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순일하고 유연해진 마음가짐으로 자기 자신을
통찰하기 시작했다. [주: 보십시요 身受心法(위빠사나)을 어느 경지에서 하는 것인가 를]
몸은 부모로 부터 만들어져 음식으로 지속되는 사대의 조합이며 이러한 육체란 끊임 없이
변하는 가운데 손상되고 마모되고 부서지고 있음을 보았다. 이러한 육신과 맞물려 일어났다
사라지고 또다시 일어나 흐르는 의식을 꿰뚫어 보았다.
육체와 마음이 어떻게 서로 의존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다. 이러한 통찰에 의하여
육체와 정신의 화합체로 인간은 마음이라는 지혜를 갖게된 것이다. 이러한 지혜로 하나의
인간이 이세상에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十二緣起입니다]
[세번만 보시면 싯달타께서 무엇을 깨치쳤는지 확실히 이해가 될겁니다. 중도실상에 대한]
~~~~~~~~~~~~~~~~~~~~~~~~~~~~~~~~~~~~~~~~~~~~~~~~~~~~~~
여기서 중생들의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때로는 비참하게, 혹은 고상하게, 아름답게,
추하게 또는 행복하게 불행하게 사라지고 또다른 생을 이어간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자기
행위의 영향을 물려받고 반복하는지, 즉 업(행위)에 의한 결과(보)의 인과관계를 꿰뜷어
보았다. 이러한 원인이 貪(탐욕) 嗔(증오) 痴(어리석음)가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을 깨닳고 모든 번뇌로 부터 해방되어 해탈했을 뿐 만 아니고 자신이 해탈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드디어 무명과 집착과 모든 미혹으로 부터 벗어나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
생각의 지향성을 보고 그 생각에 알맞는 모습으로 진행하는 것을 발견할수 있습니다.
연화지가 말하길 "참으로 이상합니다. 가끔 만나는 사람인데 절름바리로 보여질때가
있습니다" 정진화가 말하길 "평소 젊잖게 생각했던 분인데 쥐의 형상으로 비쳐집니다."
사람들은 현재의 고집체인 걷 모습만 봅니다. 생각의 지향성을 보지 못합니다.
찾아왔던 사람에게 "어찌 당신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비쳐지는가?, 정신차리시오!"
몸에서 마음이 나오고,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은 말로 나타납니다.
말이 바르지 않으면 생각이 바르지 않고, 생각이 바르지 않으면 마음이 바르지 않고,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다음 생을 이어갑니다.
가깝게는 흉을 자주보면 입이 삐뚤어지고, 눈꼬리는 삐뚤어 지듯이...
다시 말하지만, 죽은 놈을 아주 죽여 다시 살려 내는 것을 보는 놈은 理가 아닙니다.
따라서 '살아나는 것을 보는 놈은 佛性으로 살아있는 體입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
죽여서 살려내는 것이 아미타의 작용이요, 이때 발견하는 것이 노사나불입니다.
새벽별과 함께 불속으로 녹아지고, 동녁 하늘로 떠오르는 태양 아래로 펼쳐지는 대장관!
~~~~~~~~~~~~~~~~~~~~~~~~~~~~~~~~~~~~~~~~~~~~~~~~~~~~
어느때 스님에게 말하길 "아~ 일체 모든 것이 빛으로 오는군요" 못알아 듣더군요.
어느때 스님과 연화지 넷이 산중턱 찻집에 앉아 창밖으로 보며 "참으로 같고도 같습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모든 대상이 나와 같음을 보는 대장관은 大火焰의 불속에서
살아나오지 못하면 열반은 모두 글자 풀이 입니다.
일체만물은 불(열과 빛)의 작용으로 생성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생도 시켜주지만
소멸도 시켜주는 동시작용을 합니다. 열반은 불을 통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의 입자 힉스를 설명한겁니다. 고로 부디치지 않으면 물질은 없습니다.
중생심은 지속적 부디침 때문에 불속(작용)에 있고, 반열반은 불이 꺼진 소멸입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니, 모양은 보이지 않고 찬란한 빛깔뿐, 보이는 모든 빛깔마다
맑고 깨끗하기가 다름이 없으니 일체가 나와 같음이라... 같음 가운데 다름을 보니
이런 것을 성소작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대원경지라 하는지...? 그런 글자는 모르고
비쳐지는 대로 보고 말할 뿐 [같음을 보고 아는 마음은 참으로 고요하고 고요합니다]
보이는 것(色)은 흙의 성품입니다.
물질은 색깔이 없으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고로 물질이 곧 色(빛깔)입니다.
반복하지만 光과 色은 한글로 같은 빛광 빛색이라 하여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고로 經에는 금색여래라 했는데, 저는 찬란한 無色光(형상없는 빛 = 法華)이라 했습니다
####
요즈음 미얀마의 마하시 명상센타가 위빠사나로 유명한가 봅니다.
누가 "사마타 없는 위빠사나는 불가능 합니까?" 묻기에
불가능이 아니고
사마타 없는 위빠사나란 습행이고, 반대로 위빠사나 없는 사마타는 單空의 지혜입니다.
사마타는 삼매를 말하고, 三昧란 깨어있는 고요를 말하며, 禪定에 해당합니다.
위빠사나는 한마디로 통찰이고, 마음챙김입니다. 고로 삼매와 마음챙김이 결합될때를
선나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사마타던 위빠사나던 습행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타는 頓法의 定이고, 위빠사나는 定으로 대상을 살피는 智慧로 세존당시나 현재나
마음을 멈추지 못하면 위빠사나가 아닙니다. 선재동자(선남자 선여인)가 선지식을 찾아
가는 것이 四行이고 위빠사나가 되며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은 합일되기 전이나
합일 후에나 변함없는 행으로 붓다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보살행(隨緣行)의 연속입니다.
오비구로부터 수보리는 물론 주리반특, 앙굴마라등 아라한들이 사마타를 체득했습니다.
원각경에 의하면 사마타와 삼마발제관이 합일되어 원각의 선나를 이룬다 했고
심경에 의하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했습니다.
반야란 지혜(마음)를 말하고, 빈 空, 또는 無心의 智慧 라고 할수 있겠지요, 고로
依반야바라밀이란 '지혜(空)에 의지하여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의 완성이란 삼매와 통찰의 결합을 말합니다
~~~~~~~~~~~~~~~~~~~~~~~~~~~~~~~~~~~~~~
[아래에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지요]
사마타가 頓法인 중거
사마타를 득하면 섭법제일 부르나존자처럼 돈법(唯傳頓法)을 說하고 傳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찰이 안되기 때문에 전법을 떠날때 세존께서 당부하십니다. 이교도가 욕을 하면
때리지 않음을 고맙게 생각하라, 때리면 죽이지 않는 것을... 죽이면 그의 손으로 열반에
드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라. 이런 이치를 몰라서 전법제자 부르나에게 설명 하셨겠습니까.
자비설법으로 상기시켜주기 위함이지요. 부디치지 말아라 受用身이 되라(받아 들여라)
그들이 중도를 발견하지 못해서 수용신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끝없이 중도를 설하십니다.
理를 깨쳤다고 事가 되는가? 보조국사는 물론 경허스님도 안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춘다의 공양으로 열반에 드실때 똑같은 논리로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춘다에게 죄가 없다' 붓다의 受用身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가시는 겁니다.
受用身(노사나불)은 지혜와 자비가 구족될때 비로서 나타나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비웃고 욕하고 때리고 죽이려는 자를 보고,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수용할수 있겠으며
반대로 지혜없는 수용이란 때려도 꼬리치는 길들여진 개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화두타파로 통찰이 된다면 거짓말 입니다. 작금에 화두타파 하신 분들 많을겁니다.
몇분 보았지만 되십니까?. 저역시 안됐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서 無心은 말했으나
부디치면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만일 산속에 홀로 있었다면 계속 편안했었겠지만...
옷벗고 거리로 나와 세파에 부디쳐 봐야 자신의 움직이는 마음을 바로볼수 있습니다.
가녀린 여인의 의심도 풀어주기 전에 화부터 일어납니다. 화는 지혜를 가로막습니다.
몸은 생각(마음)의 그릇이요,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언어로 표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몸짓(행동)과 눈빛 등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여지게 됩니다.
또 말을 하면 그의 생각이 묻어나기에 역시 그가 생각하는 것들을 간파할수가 있습니다.
고로 상대의 뜻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편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평소에 명예가
높다는 선입견에 주눅이 들어 있다면 상대는 올바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법을 말하면 귀는 멀어지고 사람을 추종하는 삿된스승이 되는 단초가 되기때문에 명예의
옷을 벗고 저자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중생심은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고향에 가지말라'는 마조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한치라도 높으면 상대의 정수리가 보이지 않는 법
누가 나를 알아본다면, 알아보는 사람의 눈이 더 밝은 것입니다.
~~~~~~~~~~~~~~~~~~~~~~~~~~~~~~~~~~~~~~
道人도 옷을 타는가요? 하고
비웃을 때는 비웃는 마음속에 잘못 입력된 정보가 있습니다. 깨치면 뭔가 달라질 것이다.
신통술로 옷도 안탈 것이다 등, 가끔 도인이라 칭하면서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하며
대단한 신통을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처럼 정보가 전달되지 않던 시대에나 통했던
짓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tv가 이러한 환상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오감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으면 장애인 입니다. 주눅이 들면 노예가 되고, 말려들면 최면에 걸립니다.
어느때 남전 귀종 삼산이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납니다. 가슴을 졸이며 무사히 지나친후
남전이 귀종에게 묻기를 '방금전에 호랑이를 만났었는데, 그 모양이 어떠하던가" 귀종이 말
하길 고양이 같았소. 삼산에게 물으니 "개를 닮았소" 남전에게 되물으니 '호랑이 같이 생겼소'
인간의 오감은 긴장하거나 놀라거나 두렵거나 주눅이 들면 정상작동을 못합니다. 교통사고때
다친 것도 모르고, 전장터에서 총맞은 것도 모르는 이치와 같아서 진실로 두려움 없는 마음이
되어야 생사를 올바로 인식하고 갈수가 있는데 작은 비웃음도 이유를 모르고, 참지를 못하고,
화부터 낸다면 그의 마음에 걸려있는 잘못된 인식을 제거해 줄수가 없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묻기를 '참선할때 방바닥에 점이 두개 세개로 보여서 집중이 안됩니다'
누구에게 물어봤습니까? 했더니 "화두를 놓쳐서 그러니 화두에 집중하라" 하더랍니다.
"잘들으십시요, 본래 점이 몇개였습니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한개지요?"
"저런.. 그렇게 잘알면서... ...) 본래 한개인줄 알았다면 왜 헛 것에 끌려 가십니까"
대상에 끌려가는 마음을 잡아 주는 가르침입니다. (불입색성향미촉법)
잠시 머뭇대더니... 환한 미소로 합장하더군요. 집중(定)의 바른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
定와 慧는 몸과 마음에 해당하고 . 이것을 體와 用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體를 燈이라 하고, 慧는 빛이라고 하며,
반야심경으로 말하면 體는 色이요, 用은 受想行識입니다.
따라서 體는 물질(색)등 현상계에 해당하는 事요,
用은 비물질계에 해당하는 수상행식(마음)등 理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相이 없으면 用(지혜)도 없습니다.
주장자를 내려치고 부디치지 않으면 소리도 없다.
주장자를 던지고 물질이 없으면 소리는 역부여시
空이 있어서 色이 있는 것이 아니고, 色이 있어서 空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를 달리 찾지마라 중생이 곧 부처니, 空이 곧 色이요 色이 곧 空이다
물은 본래 없습니다. 만약에 물에서 물결이 일어난다고 하면 空없는 色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고로 色卽空이 안됩니다. 부디쳐야 물결이 나타나듯 물결자체가 공
입니다. 고로 힉스입자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부디치는 순간 물질이 나타나듯,
물은 본래 없습니다. 고로 無法입니다.
~~~~~~~~~~~~~~~~~~~~~~
그러므로 범천의 질문에 "相이 먼저 있고 智慧가 있다" 고 대답을 하신 겁니다.
이것이 色이 對相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마음을 六根 六境 六識(18경계)라 하고
줄여서 體相用이라고 합니다.
用은 지혜요, 빛이 智慧(마음)입니다.
燈(체, 육신)이 불에 녹아버려야 집짓는 자가 보입니다.
시달타께서 정등각하는 순간!
-------------------------
"새벽별이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동쪽하늘로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이러한 장관을 보시고 "나는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게송으로
많은 생을 윤회하며 나는 헛되이 치달려 왔고 보지 못하였다.
집짓는 자를 보지 못하여 괴로운 생은 거듭되었다.
집짓는 자여 그대 이제 보여졌구나
이제 다시는 집짓지 못하리 그대의 골재들은 무너졌고 서까레는 해체 되었다.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췄고 갈애는 부서져 버렸다.
중도란 "새벽별이 불로 사라지고 만물이 새롭게 빛나는 묘색여래를 보는 것!"
法은 華로 빛깔의 화현입니다.
물질은 색깔이 없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흙의 성품으로 빛깔로 보여집니다.
~~~~~~~~~~~~~~~~~~~~~~~~~~~~~~~~~~~~~~~~~~~~~~~~~~~
훗날 三身四智라고 풀어놓은 이유는 법신 보신 화신을 자각하는 지혜가 있는가?
이때의 자각이란 열반을 뜻하고, 이때의 자각을 사선정이라고 합니다.
고로 사선정이란 마음의 흐름(生住離滅)을 아는 것을 말하고, 마음의 흐름과
지수화풍(육신)과 마음의 흐름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고로 定慧란 몸과 마음의 흐름을 보고 아는 것으로
定의 體인 色空을 발견하면 마음(慧)은 자동(역부여시)입니다.
*******************************************************
따라서 통찰은 노사나불(보신불)의 몫으로 위로는 적멸처를 알고 아래로는
눈썹아래 천백억화신불을 보고 아는 지혜를 말하니,
무엇으로 보고 아는가? 노사나불(受用身)의 작용(智慧)을 인식하는 백호입니다.
~~~~~~~~~~~~~~~~~~~~~~~~~~~~~~~~~~~~~~~~~~~~~~~~
수미정산의 寂靜處(정수리)와 눈썹 아래 육근의 작용을 동시에 보고 아는 지혜
이것이 삼매와 통찰,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합일된 三身四智 입니다.
************************************************************
따라서 三身을 자각하면 四智는 자동입니다.
성소작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대원경지는 글자가 아닙니다.
이말은
色과 受想行識의 관계, 몸과 마음의 관계
燈불과 빛의 관계로 등불이 있으면 빛은 자동으로 비춰진다 입니다.
心經에 의하면 色卽空이면 수상행식은 역부여시다.
智慧가 몸(色)에서 나오듯, 빛역시 등불에서 나오니
수상행식(마음)의 空을 깨치고 色空을 말하면 智解(解空)입니다.
어느때 모선사를 만나 이것 저것 두가지를 묻기에 대답을 하고
되묻기를 '이런 말로 검증이 됩니까?'
잠시 묵묵히 있다가
창문 앞에 있는 서있는 반송을 가르키며 "보십니까?"
묵묵부답이기에 "내가 말하지요, 둘이 아니다"
相이 있으면 慧가 있어야 하는데 묵묵부답 寂이면 송장이지요..
반대로 體를 모르는 慧는 실체를 모르기에 귀신의 지혜입니다.
보여주면 보고 들려주면 듣고 말을 해야지요.
다시 반송을 가리키며
다시 한마디 하라면, 뜻은 같으나 글자는 다르게 말해야 하니 體를 알면 자동입니다.'
生死가 둘이 아니듯 모양과 소리가 다르지 않으니 삼라만상이 그러하듯 대원경지가
그러하고, 같고 같음(如來)의 평등성지는 妙色을 관하는 것이니 나와 대상이 하나로
돌아감이라, 보지못하고 진공묘유를 말하면 장님이 본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
삼매와 마음챙김이 결합된 지혜란 무엇인가? 定慧를 보여 드립니다.
============================================================
새벽 5시에 집에 도착하니 마누라가 없습니다. 없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 전화를 걸고, 왜? 라는 이유를 따지고 시비가 일어납니다.
설사 이유를 알았어도 '나를 무시했다' 고 화부터 냅니다. 我相 名相이지요.
내버려 둡니다.
그런데 내버려 두는 것도 사유를 알고 때에 알맞게 내버려 둬야 합니다.
때를 놓치면 어긋납니다. 때는 緣입니다. 때를 모르고 새벽에 전화를 하면
'곤한 잠을 깨웠다' 고 도리어 화를 낼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화를 내면 '그것도 모르냐, 내가 어데를 가겠느냐?' 집안 일도
모른다 하며... 평소 집안 일을 통찰하지 못한 질타를 받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안된다 생각하고 말없이 가버린 겁니다.
때란 멈추지 않고 흘러가며 변하고 있습니다. 9시가 넘어도 찾지를 안으면 거꾸로
화를 냅니다. 중생심은 자신의 잘못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 행위를 합리화 시킵니다.
나뿐 습도 이렇게 고착되면 합리화 되고 그렇게 고착된 생각으로 남을 평가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궁굼하지 않느냐?, 무심하다..등..적반하장을... 受用이란 밝게 아는
지혜로 때를 알고 때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慈悲란 적반하장의 씨앗을 제거해서
다시는 싹트지 않게 해주는 것입니다. 중생제도란 중생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항순
중생으로. 반복되는 가운데 상대의 마음이 열리고 그러면서 습도 바뀝니다.
때가 중요합니다. 때는 緣을 말하고, 조건이 성취되는 때를 말합니다.
~~~~~~~~~~~~~~~~~~~~~~~~~~~~~~~~~~~~~~~~~
찾아온 사람에게 "미리 연락을 하고 오셔야지요" 했더니 "卽心卽行한다" 하기에
"참으로 고생이 많소, 그럼 시간이 날때까지 기다리던지 아니면 다음에 오십시요"
대꾸없이 내일만 했습니다. 그대 마음과 내 마음이 다름은 어찌 알지 못하는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알지못하니 나는 무시이래 그대와 한번도 같아본 적이 없다
~~~~~~~~~~~~~~~~~~~~~~~~~~~~~~~~~~~~~~~~~~~~~~~~
그가 말하는 卽心卽行이란 마음의 空한 理致만 깨치고 事를 전혀 모르는 행입니다.
몇분 만나보니 때가 없는 것은 잘 알면서, 때가 있는 것은 전혀 모르더군요. 이래서
현상계는 모르고 이치만 알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理(空)과 事(色)의 관계입니다.
노파가 덕산에게 '어느 곳에 점을 찍으렵니까?' 理를 깨치면 때없는 理致는 알아서
굶지는 않겠지만 때는 현실세계 實로서 事와 같으니 "점 찍는 곳을 말해 보십시요?"
혹여, "찍을 곳 없는 곳에 찍는다" 하면 귀신의 지혜와 같아서 무간지옥행이 됩니다.
어느분에게 一歸何處를 물으니 답하길 "돌아갈 곳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역부여시
주장자가 법상에 부디치는 찰라가 때입니다. 때란 인연의 부디침으로 조건의 성취
'육긍! "네" '보았는가?' 남전이 육긍에게 병속의 거위를 꺼내 보이는 지혜입니다.
~~~~~~~~~~~~~~~~~~~~~~~~~~~~~~~~~~~~~~~~~~~~~~~~~
글자는 비단같이 풀면서 '때를 모른다 때가 없다' 하기에 理만 깨쳤다고 하는겁니다.
때를 모르기에 법문을 미리 준비한다고 합니다. 때란 만나는 순간 보고 아는 겁니다.
또 "망상 그대로가 보리입니까?" 물으니 "망상자체가 없는 것이다" 고 답했습니다.
색즉공을 모르는 소치 입니다. 망상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망상이 없으면
죽은 송장과 같은데 죽은 송장이 망상이 있고(有) 없음(無)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이것은 理(사마타)를 깨친 수상멸처에서 '아무 것도 없다' 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망상이 있기에 그것을 인식하는 육신 존재하는 것입니다. 體를 모르는 소치 입니다.
일념즉 무량겁, 때를 모르기에 납자가 찾아와도 무량겁 전에 준비한 법문을 하니
무량겁 전에 죽어버린 문자를 줄수 밖에 없지요. 이 가페에 어느 스님이 올린글에
잘 나타납니다. 이런 말로 어떻게 이끌고 이끌려 질까요..
찾아온 사람에게 " 당신 혼자 아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 지혜로 몇이나 이끌었는가?"
문자풀이는 잘하면서 정작 사람을 만나면 보여줘도 모르고 들려줘도 모르니...
마조가 개왓장 가는 스승에게 묻기를 "왜 개와를 가십니까?"
스승 "거울만들려고" 마조 "개와가 거울됩니까?" 스승 "앉아있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의정처에 든 것을 알고 분별하는 생각(의심)을 말로 끊어주는 찰라 입니다.
찾아와 묻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觀(염불)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
어떻게 하는 것이, 즉 觀(염불)이 뭔가요? 묻기에 정작 질문한 염불에 관한을 말은
하지 않고 엉뚱한 대답을 해줬습니다. 이때 염불을 설명해주면 교학이 됩니다.
되묻길 "그 생각 하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머뭇 머뭇하더니 "모르겠습니다"
'그때 잠을 잤었는가?' '아니요' 그러면 죽었었는가?" '아니요'
"잠도 안자고 죽지도 않았다면서 왜모른다는 말인가? 바보 아니요!?"
"빨리 대답해보시요!" 서너번 다구쳐도 대답을 못하니 참으로 답답하겠지요.
빠르면 言下요, 진실로 답답하다면 이틀이 안걸립니다.
그가 진실로 답답해 하는가" 를 보고 만일 건성이라면 그 방편은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날 때를 보고 다른 방편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고로 때란 시절인연과 같습니다.
궁굼한 것은 그게 아닌데 전혀 다른 질문을 던져, 그런 생각이 일어나기 전
모르는 곳(不識處)을 집어 주는 것입니다. 이틀이 못되 깨치고 찾아왔습니다.
의정이 소리에 부디쳐 몰록 깨치는 순간과 그 후에 경험들을 이곳에 올려놨듯이
體가 확실해지는 법문이 一乘을 가르키는 법문입니다.
= 범소유상개시허망, 若見(같은 것을 보라) 諸相非相(色 卽 空) =
중생심은 잘못을 지적하면 화를 냅니다. 도리어 핑게를대고 합리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지적해야 하는가 때를 모르는 지혜(지적)는 도리어 화를 일으켜 주고
종국에는 둘다 함께 지옥으로 끌려가는 결과를 만듭니다,
따라서 보고 듣고 순간 합당한 가르침으로 이끌기 때문에 법문이란 미리 준비 할수가
없습니다. 때가 아니면 법문을 해도 안되고, 할수도 없습니다. 상중 근기를 말하는데
근기는 없습니다. 근기를 탓하면 중생을 탓하는 것이요, 오로지 因緣의 때 뿐 입니다.
때란 간극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어느분이 말하길 "왜 글을 안쓰십니까?" 하기에
"緣有가 없었습니다." 대답하고 즉시 緣有가 생겼습니다.
###
대승 소승은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분별심만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함경을 소승경이라 하고 반야경을 대승경이라고 하는데 경전을
이해하지 못해서 반쪽수행을 하기에 사마타(理)를 깨치려는 사람은 자신을 대승
이라고 착각하고, 반대로 앉아서 깨치려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위빠사나(행)
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이변지만 보면 된다 사변지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된다,고 했는데
참으로 불종을 끊는 말로, 이변지는 아는 것이고(空) 사변지가 보는 것(色)입니다.
이변지는 마음(수상행식)의 慧에 해당하고, 사변지는 色(體)입니다.
반야경은 훗날 논사들이 아함경을 정리해서 반야경이라 한 것같습니다. 세존입멸
3~ 4백년후 이치만 깨치면 된다는 상좌부 논사들에 반발해서 상좌부를 소승이라
하고 보살승이 나타난 것 입니다. 보살도가 수연행입니다. 과연 소승이 누구인가?
세존께서 설하신 법문을 생각해 보십시요, 대화의 언어란 정리된 글자와 다릅니다.
설하다 보면 중복도 되고 듣는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로 설명을 해야 하고
설법이 끝난 후에 생각해 보면 오해의 소지와 제자들이 아직 이해가 덜된 부분들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불러 모아놓고 설해야 합니다.
미리 준비된 것이면 책읽듯 하겠지만 즉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짧은 경 수타니파타
는 그렇게 할수 있지만, 정리가 잘된 대승경전은 즉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설이냐 아니냐 논쟁의 대상이 되고, 뜻도 난해서 착각의 단초가 된듯합니다. 고로
많은 사람들이 사마타(寂觀) 空體得으로 理만 알면 끝났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자력 타력 없습니다. 타력을 자력으로 돌리지 못하는 사람만 있습니다.
비유하면, 소 말뚝을 밖에다 세웠느냐, 안에다 세웠느냐의, 차이입니다.
소를 발견하면 똑같습니다. 소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일뿐입니다.
행하는 사람에게 달려있지 본래 구분이 없습니다. 어짜피 반쪽이라면...
타력염불의 최종 목표는 임종시 매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아미타불 十念이 되는가?
어느 분이 모큰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정진의 가장 큰 이유는 임종시 매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데, 평상시에도 화두가 안되는데 숨이 떨어질 때 되겠습니까?
답하길 "진실되게 화두가 순일하게 되면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는다.
화두를 말하지만 질문의 답은 念佛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 어떤 조사는 화두타파한 제자에게 "오늘부터 내시자가 염불 할줄 안다" 했습니다.
자연의 실상은 神衆의 化身이기에 신중의 가호는 戒지킴으로 비롯됩니다.
진언으로 마장을 없애려 해도 신중의 가호가 없으면 헛수고 입니다.
부처의 형상이나 소리(진언등)를 빌려 나타나기도 하기에 보살계는 중요합니다.
중생은 천백을 죽여도 인과가 없다,
아라한 넷이 길을 가는데 독용이 길을 가로막고 비켜주지 않는데,
계를 잘지키는 수행자 한사람이 다가오니 선듯 길을 비켜줍니다.
법의 성품이란 理(空)와 事(色)의 결합체입니다.
무명무상 절일체 (일체 모든 생각이 끊어진 眞空상태)에서
증지소지 비여경 (무엇을 증하고 알아야 하는가?, 비여경이란 물질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불수자성 수연성 (물들지 않는 가운데 인연따라 이루워지는 물질의 경계 中道를 말합니다)
즉, 모양의 경계 (色卽空 = 중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반쪽의 사마타 공입니다.
다만, 證智所知는 見을 모르는 사람의 글자입니다. 證智가 아니고 見(눈)입니다. 證見!
풍수 역시 자연을 따르는 수연행입니다. 풍수를 집착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지 중요합니다.
눈뜬이는 물웅덩이를 피해가듯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물이 있으면 피해가고, 바람이 불면
언덕을 의지하지만 물은 항상하지 않고, 바람 역시 항상 같은 방향으로 불지 않는 것를 알기
에 정해진 풍수를 잡착하지 않을 뿐입니다. 時 時 때 때에 알맞게 중요합니다.
남이 잡은 묘자리는 잘도 보면서
덤불 속에 가려진 명당은 보지 못하는 구나
일체중생 실유불성
본래 있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답답하게 가르치는가.
戒定慧 三學이란 法身 報身 化身을 말하니
戒定慧 三學을 모르거나 닦지 않으면 올바른 깨달음이 아닙니다.
戒定慧 三學이란 戒의 몸인 노사나불이
定, 멈춘 마음으로 자신의 色身(體)를 볼 줄 아는 智慧를 말합니다.
따라서 戒定慧 三學이란 각각이 아니고 하나로 돌아갑니다. /草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