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선’ 역들을 돌아보다(전라도 지역)
1. 경전선은 <광주송정역>에서 부산 <부전역>까지 호남과 영남 사이를 운행하는 열차 노선이다. 하루에 4번 오가는 이 열차는 대부분의 다른 열차 노선이 남과 북의 종선 방향으로 운행하는 것과는 달리 동과 서의 횡선 방향으로 달린다. 아직까지 잠재되어 있는 지역적인 갈등은 이 열차 안에서는 사라진다. 열차는 그저 대한민국의 땅을 지나는 것이며 열차 속에서 들려오는 다양한 목소리의 혼합을 통해 역과 역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경계도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는 공간이 된다. 오늘은 역답사의 일환으로 경전선의 전라도 역들을 답사하기로 했다.
2. 광주 효천역에서 시작한 역답사는 크게 3가지 특징으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중심 생활권에 위치한 역들로 <효천역>이나 <화순역>은 주변에 높은 아파트가 위치하고 있어 기차역보다는 전철역과 같은 분위기를 주는 곳이다. <화순역>은 신축된 아파트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어 ‘화순’이라는 이름이 주는 낭만적인 시골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는 역이다. ‘화순’의 느낌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능주역>으로 가야한다. ‘능주’는 과거 ‘능주목’이 있었던 호남의 행정 중심지역이었다. 역 주변은 한산하지만 읍쪽으로 조금 걸어 내려가면 멋진 광경을 만날 수 있다. 과거의 관아를 재현한 건물과 공원 그리고 옛 모습으로 건축한 ‘면사무소’가 오고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다.
3. <보성역>과 <벌교역>은 전형적인 지방 소도시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역이다. 보성의 대부분 인구가 보성과 벌교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벌교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보성’은 작은 공간에 행정시설이 집약되어 있으며 버스터미널, 기차역, 생활시설들이 집중 포진되어 있었다. 보성읍 주변을 걷다 ‘공공도서관’을 발견했다. 새로 지워진 도서관의 열람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잘 만들어진 북카페에는 한 사람만 책을 읽고 있었다. 도서관 옆에 있는 성당이 도서관과 함께 보성의 공적인 거리모습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보성군 행정센터 앞에는 보성의 세 가지 명물이 그림으로 안내되고 있다. ‘차, 키위, 꼬막’이다. ‘꼬막’을 만나러 벌교로 간다. <벌교역>은 관광지 분위기 물씬 풍기는 곳이다. 역에서 조금 이동하면 ‘태백산맥 거리’가 나온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벌교를 배경으로 벌어진 한국현대사의 갈등과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곳곳에 등장하는 거리를 걸으며 과거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슬픈 가락의 <부용산>이 탄생한 ‘부용산’도 보였다. 다음 기회에 하루 종일 천천히 벌교의 모든 길과 부용산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아직 읽지 못한 ‘태백산맥’의 인물과 장소에 친숙해졌기를 기대한다. 벌교는 특별하고 매력적인 걷기 코스이지만, 혼자서 밥을 먹기에는 불편하다. 대부분의 ‘꼬막’가게에서 1인분을 판매하지 않는다. 투덜거리며 걷다가 우연히 만난 백반집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4. 화순의 <이양역>과 보성의 <예당역>, <조성역>은 농촌의 면사무소가 있는 작은 마을역이다. 역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아직 얼마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역 주변에는 고등학교도 보이고 작은 도서관도 보이며 마을 도로 사이로 면사무소와 우체국들도 위치해 있다. 도로가 있고 도로 주변에 지방의 필수 시설이 모여있는 장면, 이것이 전형적인 지방의 면사무소가 있는 곳의 풍경이다. ‘조성’에 있는 중학교는 학교를 개방하여 작은 생태공원을 조성하였다. 학교 산책로를 걷는 주민을 보면서 마을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학교의 변신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5. 이번 경전선 답사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역 두 곳이 남았다. 이 역들은 사실 인구수로만 본다면 폐역이 될 운명이었지만, 역이 주는 멋진 분위기와 관광적인 가치를 인정받아서 생존할 수 있었던 역이다. 보성의 <명봉역>은 이미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역을 장식한 벽화 뿐 아니라 역 주변의 마을 또한 아름답다. 마을 사이를 산책할 수 있는 길 옆에 집들도 갖가지 벽화가 장식되어 있고 주변 습지에는 테크길도 만들어져 있었다. 중심에서 마을을 지키는 나무의 웅장함도 마을의 소박하지만 깊이있는 품위를 은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보성의 <득량역>은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복귀하고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식량을 조달하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가 이 곳을 ‘7080 추억의 거리’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시켰다. 역 주변의 마을은 복고적인 모습으로 단장되었고 과거의 기억은 그림이나 소품으로 재현되었다. 마을길을 걷는 것이 소소한 추억과 그리운 시간과 조우하는 특별한 체험 장소로 변신한 것이다.
6. 하루 동안 간략하게 이루어진 역답사이지만, 충분히 마을역의 정취를 즐길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하는 도심 속에 역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역들은 다시 방문하여 천천히 그만의 매력을 발견하는 여지를 담고 있었다. 특히 <능주역>과 <벌교역>,<명봉역>은 여유롭게 주변과 더불어 답사하고 싶은 장소이다. 하지만 어떤 역도 그만의 모습을 갖고 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각자의 개성이 숨겨져있는 것처럼 드러나지 않은 역들도 각자의 특별함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자세하게 걷고 보아야 한다. 마치 나태주 시인의 ‘꽃’에 관한 글처럼 말이다. ‘역답사’는 특별하지는 않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감춰진 우리의 현재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탐방일지 모른다. ‘
첫댓글 - 사라져 가는 공간들 속에서 붙잡고 싶은 상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