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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잉걸
들리는 바에 의하면 볼티모어인가 어딘가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기 위한 전당대회가 열린다고 하는데, 주로 신문 편집인들과 직업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하건대,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이 독립심과 지성을 갖춘 한 존경할 만한 인사에게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전당대회의 결과에 관계없이 우리는 그의 지혜와 정직성의 혜택을 보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얼마쯤의 독립표가 있는 것을 기대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 나라에는 전당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많은 개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게 아닌 것이다. 소위 존경할 만한 인사는 곧 자기의 소신에서 벗어나 방황하며, 이 나라가 돌아가는 꼴에 절망감을 느낀다. 그의 이런 모습에는 오히려 나라가 더 절망감을 느껴야 하리라. 곧 이어서 그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후보들 중의 하나를 가능한 유일의 후보로 받아들인다. 그의 이런 행동은 그가 자신이 선택한 그 선동 정치가의 어떤 목적에도 이용당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표의 가치는 아무런 정견(定見. 일정하게 자기의 주장이 있는 의견 - 인용자)이 없는 어떤 외국인이나, 미국 태생이라도(따라서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도 - 인용자) 돈에 매수된 사람의 그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아! 사람다운 사람, 내 이웃이 말하듯이 ‘등뼈가 있어 남의 손에 결코 놀아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통계는 잘못되어 있다. 인구가 실제 이상으로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나라에는 몇 천 평방 마일 안에 사람들이 얼마나 살고 있을까? 평균 한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사람들이 와서 정착해 살 만한 매력을 전혀 갖지 못했는가?
미국인은 하나의 ‘오드 펠로우(Odd Fellow. 서기 18세기에 영국에서 창립된 일종의 비밀 공제조합의 회원 - 옮긴이)’로 전락해 버렸다. 오드 펠로우는 떼지어 사는 군거 기관의 발달과, 지성과 발랄한 자신감의 명백한 결여로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의 첫 번째 관심사, 주된 관심사는 양로원이 잘 수리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요, 합법적으로 성년복을 입기도 전에 장차 생길지도 모를 과부와 고아를 위해 기금을 모으는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죽은 다음에 제대로 장례식을 치러주겠다는 상호보험회사의 약속을 듣고서야 인생을 살아갈 엄두를 내는 사람이다.
한 인간의 의무가 어떤 악을(비록 그것이 엄청난 악일지라도) 근절하는 데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는 물론 할 수 없다. 그는 그밖에도 다른 할 일들이 있는 것이며, 그것들을 추구할 온당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그 악과 관계를 끊을 의무가 있으며, 비록 더 이상 그 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그 악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이 없도록 할 의무가 있다.
내가 다른 사업이나 계획에 전념하고 있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를 괴롭히면서 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그 사람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자신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실지로는 얼마나 큰 모순이 용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나는 우리 마을의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정부가) 나보고 노예폭동을 진압하러 가라거나 멕시코 전쟁에 나가라고 명령하는 것을 들어보고 싶어. 내가 나갈 것 같애?”
그러나 바로 이 사람들이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충성심으로, 간접적으로는 자신들이 내는 돈으로 대리병을 한 사람씩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옳지 않은 전쟁에 나가기를 거부하는 군인이, 그 전쟁의 당사자인 옳지 않은 정부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고 있다. 이 군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이 사람들의 행위와 권위를 무시하고 멸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다. 마치 국가가 죄 짓는 행위를 잠시나마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죄는 짓고 있으면서도 사람 하나를 사서 자기를 채찍질하는 정도의 회개를 하는 셈이다.
이리하여 질서와 시민 정부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비열함에 경의를 표하고 그것을 지지하게 되고 만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지만, 곧 무관심하게 된다. 부도덕(도덕적이지 않은 상태 - 인용자)은 무도덕(아예 도덕이 없는 상태 - 인용자)이 되고 마는데, 그것도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이 된다.
가장 광범위하게 잘못이 행해지려면 가장 사심없는 덕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애국심이라는 미덕은 흔히 가벼운 질책을 받는데, 그 질책은 고결한 사람들일수록 가장 받기 쉽다. 정부의 성격과 처사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충성과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의심할 나위 없이 정부의 가장 성실한 후원자들이고, 따라서 개혁에 가장 심각한 장애가 될 경우가 많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주(州) 정부더러 합중국(合衆國. ‘아메리카 합중국’, 그러니까 ‘미합중국’을 줄인 말 - 인용자)을 해체하고 대통령의 요구를 묵살하라고 진정서를 내고 있다.
왜 그들 자신은 자기들과 주 정부와의 연합 관계를 해체하지 않으며, 자기들 몫의 세금을 주 정부에 바치기를 거부하지 않는가? 그들과 주 정부의 관계는 주 정부와 합중국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그들이 주 정부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주 정부도 합중국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어떻게 단순히 어떤 의견을 갖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 의견을 즐길 수 있겠는가? 만약 자신의 의견에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면 그 의견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만일 당신이 이웃 사람에게 단 1달러라도 사기를 당했다면, 당신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또는 사기를 당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또는 그 사람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사정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즉시 그 돈을 모두 돌려받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쓸 것이고 다시는 사기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할 것이다.
원칙에 따른 행동, 즉 정의를 알고 실천하는 것은 사물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국가와 교회를 갈라놓으며 가족을 갈라놓는다. 심지어 그것은 한 개인조차도 갈라놓는다(개인을 가리키는 영어 ‘individual'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옮긴이). 즉 한 개인 속에 있는 ’악마적인 요소‘와 ’신적인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옳지 않은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금과 같은 정부 밑에서는 다수를 설득하여 법을 개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약 저항한다면 치료(저항을 통해 현실을 고치려는 시도 - 인용자)가 병(잘못된 법이 다스리는 현실 - 인용자)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치료가 병보다 더 나쁜 것은 정부의 잘못이다. 정부가 치료를 더 나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왜 정부는 좀 더 앞을 내다보고 개혁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현명한 소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가? 왜 정부는 상처도 입기도 전에 야단법석을 떨며 막으려 드는가? 왜 정부는 시민들로 하여금 방심하지 않고 항상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시민들이 잘하도록 격려하지 않는가?
왜 정부는 항상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며, 코페르니쿠스와 루터를 파문하고, 조지 워싱턴과 프랭클린을 ‘반역자’라 부르는가?
정부의 권위를 고의적으로, 또 실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정부가 그 가능성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유일한 범죄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정부가 그에 대해 명확하고도 적절하고, 형평에 맞는 처벌을 정해 놓지 않았겠는가? 만일 아무 재산도 없는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주 정부에 9실링을 내기를 거부한다면(9실링은 당시의 인두세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 옮긴이), 그는 곧바로 감옥에 구속될 것이며, 그 기간 역시 정해진 법률 형기가 없기 때문에 구속시킨 자들의 재량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 정부로부터 9실링의 90배를 훔친다면 그는 곧 다시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만약 불의가 정부라는 기계의 필수불가결한 마찰의 일부분이라면 그냥 내버려 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모르긴 하지만 그 기계는 매끄럽게 닳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닳아 없어질 것이다. 만일 그 불의가 그 자체를 위한 용수철이나 도르래, 줄이나 크랭크를 가지고 있다면 치료법이 병보다 더 나쁠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는 게 좋으리라.
그러나 이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겨라. 당신의 목숨이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극력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어쨌든 간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악을 치료하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방법을 받아들이자는 얘기가 있는데, 나는 그런 방법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 방법들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전에 사람의 목숨이 끝날 것이다.
내게는 다른 할 일들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좋든 나쁘든 그 안에서 살기 위해서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가 모든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어떤 나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지사나 주 의회에 탄원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내게 탄원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 아님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내가 탄원을 하더라도 그들이 나의 탄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대비하여 주 정부가 마련해 놓은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주의 헌법 자체가 해악인 것이다.
나의 이런 말이 가혹하고 고집스럽고 비타협적으로 들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그 헌법을 평가할 줄 알고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유일한 정신을 지극한 친절과 배려로 대접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을 격동하게 만드는 탄생이나 죽음처럼, 발전을 위한 모든 변화는 다 그러한 것이다.
나는 서슴없이 말한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몸으로나 재산으로나 매사추세츠 주 정부를 지원하는 일을 지금 당장 중지하여야 한다고. 그리고 정의가 자신들을 통해 승리하도록 노력하지 않고, 한 표 앞선 다수가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만약 그들이 하느님을 자기편으로 두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다른 사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어떤 사람이든지 그가 자기 이웃들보다 더 의롭다면 그는 이미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단 한 사람이라도 도덕적으로 우위면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는 말로, 19세기 미국의 지식인들 사이에 자주 사용되던 어구다 - 옮긴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미국 정부 또는 그 대리인인 주 정부를 1년에 딱 한 번 세금 징수원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정부를 대면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때 정부는 ‘나를 인정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때 당신이 정부에 대해 만족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표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효과적이며 또 현재의 조건에서 가장 불가피한 방식은 바로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실제로 상대하게 되는 사람은 나의 점잖은 이웃이기도 한 세금 징수원이다. 왜냐하면 결국 나는 양피지로 된 문서가 아니라 사람과 다투는 것이며, 내 이웃은 정부의 대리인이 되기를 자원한 사람인 것이다.
그가, 존경하는 이웃인 나를 선량한 이웃으로 대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미치광이며 평화의 교란자로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고, 이웃 간의 정리에 대한 이 장애물을 자신의 행위에 어울리는 거칠고 성급한 생각이나 말이 없이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알고 나서야, 그는 정부의 공무원으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며 어떠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즉, 이 매사추세츠 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정직한 열 사람)이, 아니 정직한 사람 단 한 명이라도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고 실지로 노예제도의 방조자라는 입장에서 물러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시작이 아무리 작은 듯이 보여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껏해야 거기에 대해 토론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면서. 개혁은 수십 개의 신문을 붙들어 일거리를 주고 있으나, 단 한 명의 사람도 붙들지 못하고 있다.
나의 존경하는 이웃인 주 정부의 대사(콩코드 출신 하원의원이었던 새뮤얼 호어를 가리킨다. 캐롤라이나 주가 매사추세츠 주의 흑인 선원들을 배가 항구에 정박하는 동안 가두어 두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 1844년 그곳에 갔으나, 투옥 및 생명에 대한 위협을 받고 철수했다. - 옮긴이)는 매일 주 정부에서 인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바쁘게 뛰는 분이다. 그는 지금 캐롤라이나 주의 감옥에 갇힐지 모르는 위협을 받고 있는데, 그가 그곳의 감옥 대신 매사추세츠 주의 감옥에 죄수로 들어간다면(그 매사추세츠 주 정부는 노예제도의 죄를 자매 주인 캐롤라이나 주에 뒤집어 씌우려고 하고 있고, 분쟁의 구실로 기껏 찾아낸 것이 방문객에 대한 냉대뿐이지만) 주 의회는 이 문제를 다음 겨울까지 통째로 미루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 하나라도 부당하게 가두는 정부 밑에서 의로운 사람이 진정 있을 곳은 역시 감옥이다. 매사추세츠 주가 보다 자유분방하고 풀이 덜 죽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유일한 장소, 또 현 시점에서 가장 떳떳한 장소는 감옥이다. 주는 법령에 의해 그곳에 그 사람들을 몰아 가두었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자신을 추방했던 것이다. 도망 노예나 가석방된 멕시코인 죄수나 자기네 종족이 당하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온 인디언(미국 원주민 - 인용자)이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감옥이다.
격리되어 있으나 실은 더 자유롭고 더 명예스러운 곳, 매사추세츠 주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 감옥인 것이다.
감옥 안에서 그들의 영향력이 상실되고, 그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정부를 괴롭히지 못하며, 그들이 그곳의 담장 안에서는 더 이상 정부의 적이 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진리가 오류보다 얼마나 더 강한가를 모르는 것이요, 감옥 안에서 불의를 직접 겪어본 사람이 얼마나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가를 모르는 것이다.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의로운 사람들을 모두 감옥에 잡아 가두든가, 아니면 전쟁과 노예제도를 포기하든가의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면 주 정부는 어떤 길을 택할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올해 1천 명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세금을 내서 주 정부로 하여금 폭력을 휘두르고 선량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만큼이나 폭력적이고 유혈적인 처사는 아닐 것이다. 만일 평화로운 혁명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평화로운 혁명일 것이다. 만약 세금 징수원이나 그 밖의 공무원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나에게 묻는다면(실제로 그렇게 물은 사람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무엇인가 하려고 한다면, 당신 직책을 내놓으시오.”라고. 국민이 충성을 거부하고 공무원이 자기 자리를 내놓을 때 혁명은 완수되는 것이다.
그러나 피를 흘릴 경우도 생각해 보라. 양심이 상처를 입을 때에도 일종의 피흘림이 있지 않은가? 그 상처를 통해서 그 사람의 진정한 인간다움과 불멸성이 흘러나가 버리며, 그는 영원한 죽음의 피를 흘리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 피가 흐르는 것을 본다.
내가 범법자의 재산 압수보다는 그를 구금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본 것은(비록 그 두 가지가 달성하는 목적은 똑같겠지만), 가장 순수한 권리를 주장하고 따라서 부패한 정부에 대해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재산을 모으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부는 비교적 적은 혜택밖에 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적은 액수의 세금이라도 그들은 엄청난 부담으로 느끼게 된다. 더욱이 그 돈을 육체노동을 해서 벌어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만약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정부 자신도 그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부자는(불유쾌한 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를 부자로 만들어준 기관에게 영합하게 마련이다. 단언하는 바이지만,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덕은 적다. 왜냐하면 돈이 사람과 그의 목적물 사이에 끼어들어 그를 위해 그것들을 획득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가지게 된 것도 무슨 큰 덕이 있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은 돈이 없었더라면 그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유보하게 해 준다.
돈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일한 새로운 문제는, 그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어려우면서도 부질없는 문제뿐이다. 이리하여 부자의 도덕적 기반이 발밑부터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른바 ‘수단’이란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줄어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