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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예닮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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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목회 스크랩 김현봉 목사님께서 개척하신 아현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권오수 추천 0 조회 648 15.03.23 22: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 현 봉 목사님!

 

아현 예배당, 김 현봉 목사님께서 개척한 아현 예배당에서 자라왔습니다. 제가 다섯살때 목사님께서는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억에는 없지만 항상 많은 교회 성도님들이 장판에 앉아 말씀을 듣고 또 국수 먹은 기억이 납니다. 식당에는 많은 분들이 점심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어린 저희들은  장판에 앉아 당시 빡빡머리에 연세가 지긋했던 백장로님으로 부터 말씀을 듣고 매주 요절을 외었던 기억이 납니다. 후에 어머니로부터 김현봉 목사님에 대해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어머니와 하늘나라 가신 아버지의 주례를 서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 그늘에서 저 또한 자라왔고 또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김현봉(1884~1965) 목사김현봉(1884~1965) 목사김현봉(1884~1965) 목사김현봉(1884~1965) 목사

 

후에 그분이 귀한 하나님의 종이었음을 알고 제 자신 또한 뿌듯합니다. 이제 그분(김 현봉 목사님)에 대해 더욱 알고자 하여 이렇게 글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 김현봉(1884~1965) 목사

 

 

한국기독교 120년 숨은 영성가를 찾아 (19) ‘중목사’ 김현봉

서울 마포구 아현2동 354-21 아현교회는 1960년대 초까지만도 영락교회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신자가 많았다. 하지만 아현교회는 멋진 예배당도 교육관도 목사관도 없었다. 날로 늘어나는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면 예배당 밖으로 지붕만 얹고 의자를 놓아 예배를 보게 했다. 그렇게 늘리고 늘린 교회는 마치 기운 누더기 같아 그 주변 200여 채의 판잣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살길 막막한 사람들 뒷바라지 교회 지하방 살며 ‘1식 3찬’ 허세 용납 않은 ‘사랑의 사도’

아현교회의 그런 모습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아현교회는 그 일대 판자촌의 상당수를 소유할 만큼 재정적으로 풍족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신 판잣집을 사들여 집 없는 교인들에게 나누어 살게 했고, 먹고살 길이 없는 교인들에겐 뒷돈을 대줘서 소금이나 고무신, 생선 장사를 해서 먹고살게 했다.

 

그런 교회를 만든 이는 김현봉(1884~1965) 목사였다. 작은 키, 땅땅한 몸매에 눈매가 매서웠던 그는 언제나 머리를 삭발하고 있었기에 ‘중목사’로 불렸다. 그런 김 목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촌 창광교회와 염천교회, 신촌교회 등을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 김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10여년 동안 전도사로서 보좌했던 이경자(78) 전도사를 만나러 창광교회를 찾았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 젊은 이 전도사는 김 목사에 대해 “얼굴에서 언제나 사랑이 지글지글 끓었던 ‘사랑의 사도’였다”고 전했다. 김 목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김 목사만큼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오후 6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에 일어나 묵상을 했고, 새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곧바로 연세대 뒷산에 돌로 만들어놓은 기도실로 올라갔다. 그는 그렇게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점심 무렵까지 깊은 황홀경에 잠겨 있곤 했다. 김 목사의 기도의 삶을 따라 그대로 실천해온 창광교회 이병규(83) 목사는 김 목사가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살았다”고 회고했다.

 

나중엔 아현교회의 수많은 신자들까지 김 목사를 따라 나무 하나씩을 정해 그 밑에서 정좌한 채 명상에 잠겨 연세대 뒷산 일대는 장관을 이뤘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동네에서 방앗간 하나 놓으려고 해도 동민들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못 놓는 법이라면서 기독교인들이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부흥회라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해 이웃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찬송은 하나님과 연락해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지 자기 육체가 흥분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요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회개해 양심을 찾아 자신을 만들어야한다는 게 그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누구든지 자기가 된 만큼 밖에 남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니 요는 나 하나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고 누구를 바로 서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김 목사는 산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교인들에게 심방을 갔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안부를 여쭙는 문전 심방이었다. 대신 살림이 어려운 교인들 집에선 방에 들어가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지 바닥을 만져보고 쌀독을 들여다본 뒤 도움을 주곤 했다. 그는 늘 안주머니에 돈을 가득 담아 갖고 다니면서 즉각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겐 돈을 쓰지 않았다. 평생 교회 지하의 방 한 칸에서 지낸 그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못하게 했다. 옷도 두루마기만 입고, 고무신만 신었기에 달리 돈 들 일이 없었다. 김 목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2살 때였다. 그는 양정의숙 법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일제하 조선의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다가 중국으로 떠나 간도와 러시아 등에서 11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1923년 귀국하자마자 체포돼 투옥됐던 그는 석방된 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44살 때 16살 연하의 세브란스 간호사를 만났다. 얼굴이 얽었던 그의 아내는 병으로 이미 자궁을 적출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으나 그는 그런 아내를 택해 결혼했다.

그가 아현교회를 개척한 것은 48살 때인 32년이었다. 아현교회에선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교회도 그렇거니와 신자들의 사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삭발했고, 여자들은 파마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결혼식도 20명 이상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24시간이 지난 뒤 김 목사가 예배를 올린 다음 손수 시신을 손수레로 끌고 가 화장을 했고, 아이가 죽어도 김 목사가 직접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묻었다. 65년 그가 숨을 거두자 교인들은 그의 뜻에 따라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가 화장했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그의 뜻을 지키는 교인은 없었다. 1200여 명의 교인들은 손수레를 따르며 통곡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목회자를 이제 어디서 다시 찾겠느냐는 눈물이었다.

 

 

http://www.ccausa.org/cgi-bin/kimsboard.cgi?db=bbs&action=view&file=6186870.cgi&re=0&no=1&where=CONTENT&KEYWORD=백영희&START=1&category=&p=1

자료제공자 : 윤사무엘목사, 청암논단, 한국교회 경건인물들(3)

김현봉목사님에 대한 자료는 총공회 연구실에서도 관심을 갖고 많이 확보하고 있지만

 이번 자료에서는 총공회에서 제공한 자료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이 있어 한번 참고자료로 올려 봅니다. 

김현봉(1884-1965)8)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김현봉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소천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 나라 기독교 최초 선교사가 들어오던 1884년 경기도 여주군 가내면 건장리에서 김현봉은 태어났다.

 

 형이 한 명, 누나가 한 명 있어 막내로 자랐는데, 아주 어릴 때 서울 서대문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예배가 마친 후 목사께서 청년 현봉의 손을 잡으면서 ‘다음 주에 꼭 오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예’하고 대답을 한 것이 예수 믿게 되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갔다.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다. 다시 러시아 영 삼위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 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돌보게 되었다.

 

재학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다. 드디어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소작농민들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사상태에 빠져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못해 일본, 만주 등으로 흩어지고, 국내에 있던 농민들은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했다.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 신궁을 건설한 것을 시발로 해서,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 ?’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200명 넘는 교인이 되자 부엌을 헐어내고 4칸 마루와 건너 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다. 6.25가 발발하자 김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 70의 나이에! 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섰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내기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 김목사는 자신이 길가에 나가 노방전도하고 교인을 늘려갔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김목사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소천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교회 남자 성도들은 김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목사는 후배를 기르는 일에 무척 애를 써서 그의 감화를 받고 김 목사를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중에 이병규(신촌), 백영희(부산 서부교회), 안병모, 이한영, 안길옹(알래스카에서 개척교회) 등이 있다. 안길옹 목사(2001년 현재, 85세)는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있는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안정남목사(나성 성약교회)도 김현봉 목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김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81세의 일기로 김현봉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였다. 장례식은 늘 따르던 이병규 목사(신촌 창광교회, 계약 신학교를 운영함)가 집례했고,  시신은 생전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1200여 명의 교인들은 손수레를 따르며 통곡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목회자를 이제 어디서 다시 찾겠느냐는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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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아현2동 354-21 아현교회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락교회와 함께 서울에서 가장 신자가 많았다. 하지만 아현교회는 멋진 예배당도 교육관도 목사관도 없었다. 날로 늘어나는 신자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지 못하면 예배당 밖으로 지붕만 얹고 의자를 놓아 예배를 보게 했다.

 

그렇게 늘리고 늘린 교회는 마치 기운 누더기 같아 그 주변 200여 채의 판잣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현교회의 그런 모습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아현교회는 그 일대 판자촌의 상당수를 소유할 만큼 재정적으로 풍족했다. 그런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신 판잣집을 사들여 집 없는 교인들에게 나누어 살게 했고, 먹고살 길이 없는 교인들에겐 뒷돈을 대줘서 소금이나 고무신, 생선 장사를 해서 먹고살게 했다.
 
그런 교회를 만든 이는 김현봉(1884~1965) 목사였다. 작은 키, 땅땅한 몸매에 눈매가 매서웠던 그는 언제나 머리를 삭발하고 있었기에 ‘중목사’로 불렸다.  그런 김 목사를 따르던 사람들은 신촌 창광교회와 염천교회·신촌교회 등을 세워 그 뜻을 잇고 있다. 김 목사가 별세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전도사로 보좌했던 이경자(78) 전도사를 만나러 창광교회를 찾았다.
 
나이를 가늠키 어려울 만큼 젊은 이 전도사는 김 목사에 대해 “얼굴에서 언제나 사랑이 지글지글 끓었던 ‘사랑의 사도’였다”고 전했다. 김 목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김 목사만큼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오후 6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어 밤 12시에 일어나 묵상을 했고, 새벽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곧바로 연세대 뒷산에 돌로 만들어놓은 기도실로 올라갔다. 그는 그렇게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점심 무렵까지 깊은 황홀경에 잠겨 있었다. 김 목사의 기도의 삶을 따라 그대로 실천해온 창광교회 이병규(83) 목사는 김 목사가 “세상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살았다”고 회고했다.
 
나중엔 아현교회의 수많은 신자들까지 김 목사를 따라 나무 하나씩을 정해 그 밑에서 정좌한 채 명상에 잠겨 연세대 뒷산 일대는 장관을 이뤘다. 김 목사는 교회에서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동네에서 방앗간 하나 놓으려고 해도 동민들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못 놓는 법이라고 했다.
 
기독교인들이 이성을 잃고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부흥회라고 떠들고 소란스럽게 해 이웃 주민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찬송은 하나님과 연락해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지 자기 육체가 흥분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교회 지하방 살며 ‘1식 3찬’…허세 용납 않은 ‘사랑의 사도’
   
 
  ▲ 김현봉 목사를 회고하는 이경자 전도사. (사진제공 조연현)  
 
김 목사는 산에서 내려오면 곧바로 교인들에게 심방을 갔다. 방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안부를 여쭙는 문전 심방이었다. 대신 살림이 어려운 교인들 집에선 방에 들어가 연탄불을 지피고 있는지 바닥을 만져보고 쌀독을 들여다본 뒤 도움을 주었다. 그는 늘 안주머니에 돈을 가득 담아 갖고 다니면서 즉각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겐 돈을 쓰지 않았다. 평생 교회 지하의 방 한 칸에서 지낸 그는 고기도 먹지 않았고, 세 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못하게 했다. 옷도 두루마기만 입고, 고무신만 신었기에 달리 돈 들 일이 없었다.
 
김 목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2살 때였다. 그는 양정의숙 법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일제하 조선의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다가 중국으로 떠나 간도와 러시아 등에서 11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1923년 귀국하자마자 체포돼 투옥됐던 그는 석방된 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44살 때 16살 연하의 세브란스 간호사를 만났다. 얼굴이 얽었던 그의 아내는 병으로 이미 자궁을 적출해 아이를 가질 수도 없었으나 그는 그런 아내를 택해 결혼했다.
 
그가 아현교회를 개척한 것은 48살 때인 32년이었다. 아현교회에선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교회도 그렇거니와 신자들의 사치도 허용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대부분 삭발했고, 여자들은 파마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결혼식도 20명 이상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신자가 세상을 떠나면 24시간이 지난 뒤 김 목사가 예배를 올린 다음 손수 시신을 손수레로 끌고 가 화장을 했고, 아이가 죽어도 김 목사가 직접 지게에 지고 가 산에 묻었다.
 
65년 그가 숨을 거두자 교인들은 그의 뜻에 따라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가 화장했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그의 뜻을 지키는 교인은 없었다. 1,200여 명의 교인들은 손수레를 따르며 통곡했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목회자를 이제 어디서 다시 찾겠느냐는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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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김현봉목사님의 강단 설교모습니다.

1.김현봉목사님의 신앙흐름

평생 검정 물 들인 무명 한복에 검은 고무신으로 살았으며 혼자 고요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 하나로만 길로 삼고 기도 하나로만 힘을 삼아 나간 평생이었습니다. 혼자 방 안에서 예배 드리고, 찾아 오는 사람 하나 더 보고, 다녀 본 사람이 좋아서 한 사람 더 데려 오게 되어 좁으면 벽을 털고, 더 많아지면 옆에 집 하나 사서 이어갔습니다.

하나님 두려워 하고 양심껏 믿고 나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조용한 말씀에는 능력이 역사하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교인들은 생사를 같이 할 제자들이 되어 있었고 그를 아는 교계의 지도자들은 감히 그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의 당대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1965년 돌아가실 때는 서울 최대의 교회가 되었으나 세상이 좋아하는 외부와 외형은 무시하려 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눈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던 분이었기 때문에 일반 세상적 기록과 기준으로 그를 연구하거나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정도입니다.

2.간단한 기록들

1985년 출생하여 1932년이 되던 48세에 현 서울시 마포구 아현2동 354-21 번지 아현교회 예배당 구역에 개척을 하였으며 평양신학교를 다녔습니다. 6.25때는 경남 창녕으로 피난하였으며 그 당시 잠깐 머물렀던 곳에도 그의 신앙 영향을 받아 평생 그 길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복 후 계속 교회가 부흥되었고 1965. 3. 12. 81세의 연세로 돌아가실 때는 개척 후 33년이었고 교인이 1500명에 이르러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으며 또 교인의 신앙생활의 철저함과 경건함 등으로 비교할 교회가 없었습니다.

가족은 사모님 뿐이었고 자녀는 없었습니다. 물질과 세상 모든 종류의 욕심 등에 대하여 엄격한 평생이었으며 부부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목회를 위해서라도 결혼을 해야 했고 선 볼 때 예정된 분과 함께 따라 나온 친구가 있었는데 얼굴이 많이 얽었고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은 자신이 아니고는 결혼할 사람이 없겠다는 마음이 들어 원래 예정된 분을 제쳐두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모님은 당시 수간호사였습니다.

목사님 사후 교회는 2층집을 사모님 사택으로 마련해 드렸고 평생 아현교회를 다녔으며 1980년대에 고령으로 돌아갔습니다.  

3.아현교회

김현봉목사님과 아현교회는 늘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서부교회, 손양원목사님의 애양원교회와 같은 의미입니다. 1965.3.12 김현봉목사님이 돌아가신 직후 현명도목사님이 6개월 정도 시무하였으며 신앙노선의 문제로 700여명 교인과 함께 창광교회로 개척하여 분립되었습니다. 이 창광교회는 후에 이병규목사님이 맡아 현재 2천명 교인이 넘는 교세와 계약신학대학원을 중심으로 100여개 정도의 소속 교회를 가진 교단이 되어 있으며 이 계약신학대학원에는 정식 교수 10명 중 4명이 총공회 현 소속 또는 과거 소속의 목회자들입니다.

1966.3.에 아현교회의 후임으로 이한영목사님이 3년을 목회하였으며 3년을 시무한 후 1969.3.에 150명의 교인이 염천교회로 분립되었으며 현재 이 염천교회가 이전 김현봉목사님 당시와 외모나 생활습관까지 그대로 지키며 현재까지 내려오는 교회입니다. 지금도 머리를 깎고 여자들은 치마 저고리 남자들은 검은 물들인 무명 한복을 입고 생활하고 있으며 김현봉목사님의 가르침을 외형적으로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의 위치는 이화여대 입구쪽에 있습니다.

1972.2. 정연발목사님이 아현교회를 6년간 담임하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1977.12. 이종구목사님이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1년 도로 확장 때문에 장소를 조금 옮겨 연건평 840평, 교인 300여명이며 소속은 합동측으로 되어 있습니다.

4.좀더 자세한 연락은
다음 전화번호를 참고하시되, 문의하시는 분의 심정으로는 염광교회로 문의를 하여 김현봉목사님을 소개받는 것이 가장 깊은 세계를 알 수 있는 길이겠다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대개 훌륭한 종들은 그 세계가 너무 깊기 때문에 그 깊은 세계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을 때는 그분들에게 가장 큰 감화를 받았던 이들을 통해 참고하는 것이 낫겠다는 상식에서 추천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분들은 원만한 대화가 어렵고 세상과 멀리 떨어진 생활로 인해 다소 투박함과 거친 면은 있으리라 봅니다만, 그래도 생전의 김현봉목사님의 분위기는 외부 뿐 아니라 그 이면까지 비교적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현교회 02-362-7140
창광교회 02-392-9697
신촌교회 02-717-3062
염천교회 02-325-5509
나성 주님의 교회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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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봉? 통해 본 백영희)

-김현봉과 백영희
김현봉목사님의 생애를 비교적 많이 소개합니다. 김목사님의 생애를 통해 1950년대와 60년대의 백영희 신앙생애와 목회 모습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전혀 다른 배경에서 신앙을 출발했고 각자 하나님께 붙들려 따로 걸어가던 성자들인데 1960년 안팎에 우연히 알게 되고 수년 간 접촉했으며 마치 서로가 상대방을 베낀 듯이 같은 점이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한국교회사 1960년 안팎의 20여년 시기를 한국교회 제일 신령한 위치에 있었으나 김목사님의 신앙생애가 먼저 교계에 소개된 자료가 있어 그를 통해 당시 백영희의 신앙모습을 참고해 보겠습니다.

백영희의 생애를 ‘시대적 고난’이라는 관점에서 넓게 살펴본다면
첫째, 일제 말 신사참배를 중심으로 닥쳐온 2계명 중심의 고난기가 있었고
둘째, 해방 후 6.25전쟁기까지 신앙 전반에 걸친 전반적 환란기가 있었으며
셋째, 전쟁 후 부산을 중심으로 진리를 전하는 그에게 교계적 환란기가 있었습니다.

교계적으로 본다면
첫째 시기는 주기철 주남선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교계적 대표인물이고
둘째 시기는 주남선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있으며
셋째 시기는 김현봉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독특하게 살다간 성자였습니다.

위의 세 종류 인물들을 잠깐 소개하는 것은 백영희 신앙생애는 각 시기의 대표적 인물들과 비교를 할 때 각 시대를 대표하는 그들의 당시 신앙생애와 같은 점이 너무 많아서 백영희 신앙생애를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깊은 본질적 방향이나 그 시대에 남다르게 고난을 겪은 과정이 마치 백영희의 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각 시기별로 예를 든 분들은 당시에 이미 교계적 중심 인물이었고 그 대신 백영희는 그 당시 그들에 비하여 묻혀 있었거나 아니면 그분들만큼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영희의 이후 전체 생애를 가지고 다시 비교해 본다면 상기 인물들은 한국교회의 일반 지명도에서는 백영희를 훨씬 앞서지만 내면 신앙 차원에서는 백영희의 일부를 대신할 정도이지 백영희와 수평 비교할 정도의 인물은 없습니다.

백영희의 신앙생애는 첫째와 둘째 시기 그리고 그의 생존 마지막 기간인 1970년대 시기는 우연한 기록이나 의외의 자료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재구성할 수가 있는데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친 20여년의 시기는 백영희의 목회와 교계 활동 전반부에 해당되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구체적 재구성이 어려웠으므로 김현봉을 통해 백영희의 목회성향면과 교인지도면을 살펴보겠습니다.

- 간단한 소개
1884년 경기도 여주에서 출생하고 서울 서대문에서 자랐으며 1905년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갔다가 예배 후 목사님이 다음 주에도 꼭 오시라고 부탁하자 ‘예’하고 대답한 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1912년 중국과 러시아에서 학교를 세워 이주민 자녀를 교육한 적이 있었으나 일본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이송되었습니다.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장로님들 때문에 교회를 사면하고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1965년 별세 할 때 1천명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생활이었습니다.

한번 결심하고 출발한 후에는 흔들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했다는 점
해외 경험을 통해 선진과 후진의 차이를 알고 평생 어려운 교인의 세상 면까지 지도한 점
판에 박은 형식과 반복만 무조건 따르지 않고 하나님 뜻을 찾아 개혁의 길을 걸은 점
말씀 하나만 전하는 목회자로서 신령한 면과 목회 실력 면에서 당대 최고 지도자였던 점
그리고 풍부에 처할 수 있다 해도 가난한 복음으로 일관한 점 등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 결혼
재학 중 1927년 그의 나이 44세에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이었던 28세 처녀 박천선과 결혼했습니다. 원래 선보러 갈 때 예정된 사람은 따로 있었으나 들러리로 나온 분이 심한 곰보였으므로 자기가 아니면 결혼하기 어렵겠다는 마음이 들어 원래 예정된 분을 제쳐두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 부부라는 이름과 복음을 위해 협력자로만 살기로 약속하고 결혼했으며 이 약속은 평생 지켜졌습니다. 목사님 사후 교회는 2층집을 사모님 사택으로 마련해 드렸고 평생 아현교회를 다녔으며 1980년대에 고령으로 돌아갔습니다.

- 목회(일반 목회)
1923년 출감하고 192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며 신학생 시절에 광명리 교회, 시흥군 서면 한이 교회, 구읍 교회, 군포장 교회, 안양 붙임말 교회, 수원 학현교회 등을 차례로 목회했습니다.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교회를 맡게 되었고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 아현교회 개척
교회 사임 후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7명으로 아현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고 큰 소나무들이 들어 차 있었으며 1930년대 초 경제 궁핍으로 시골사람들이 대도시로 몰려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 보려고 할 때 그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고 자연스럽게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현봉은 집 짓는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김현봉은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 생활을 크게 깨닫게 됩니다. 해방 후 교인이 200명이 넘게 되자 예배당 옆의 부엌을 헐고 4칸 마루와 건너방을 터서 예배실을 늘렸습니다. 6.25가 발발하자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6.25때는 경남 창녕으로 피난하였으며 그 당시 잠깐 머물렀던 곳에도 그의 신앙 영향을 받아 평생 그 길로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수복 후 계속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했고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도 피했습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혔고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습니다.
 
건물 미관엔 관심이 없었으나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게 하려고 창문을 많이 냈습니다.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것이 그의 예배당 건축관이었습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예배당을 늘릴 때마다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일을 했고 예배당 안에도 확장을 할 때마다 기둥이 많이 생겨서 ‘기둥 교회’ ‘누더기 교회’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누더기로 이어져 별세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 교회 부흥의 방법
교회 부흥은 자신이 길가로 나가 노방전도를 해서 교인을 늘려갔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을 가지고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물리쳤으며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친 자식을 낳아서 길러가듯 교회를 성장 시켰습니다. 81세 별세할 때까지 그는 목회를 계속했고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습니다.
혼자 방 안에서 예배드리니까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 예배 보는 사람이 하나 더해졌고, 그 다녀 본 사람이 좋아서 한 사람 더 데려 오게 되어 사람이 많아지니까 방의 벽을 털어 예배 보는 곳을 좀 넓혔습니다. 더 많아지면 옆에 집 하나를 사서 이어갔습니다.

- 경건
스스로 낮아지고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생활을 시작했으며 직접 농사를 짓고 생활하며 교회에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를 없앴습니다.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평생 검정 물만 들인 무명 한복에 검은 고무신만 신고 살았습니다. 그는 혼자 고요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 하나로만 길을 삼았으며 기도 하나로만 힘을 삼아 나간 평생이었습니다.

- 자기 절제
김목사님은 저녁 6시가 되면 전기불을 꺼버립니다. 늘 명상하고 기도하니까 켜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 백목사님도 주변 교인들에게 거처하는 방에 불 꺼놨다고 자는 줄로 알고 방심하지 않도록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1분 지각도 사과
김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예배 시간 3분 전에는 와야 한다고 강행을 하다가 자기가 2분 전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교인들 앞에 당신이 1분 늦은 것을 정식으로 사과했습니다. 교인들과 목사님은 입장이 다르다고 옆에서 만류를 해도 기어코 사과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목사가 1분 늦은 것을 앞장서서 사과하니 교인들도 1분이라도 늦어서 사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 절제
아현교회는 절제 면에서 전국 교회 중 전무후무한 교회였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도록 가르쳐 그 교인들이 육적인 모든 욕심을 죽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현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그 얼굴에 모두 윤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잘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부부라 해도 이성면에서 초월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녀를 생산할 때나 서로 만나지 그냥 즐기기 위해 만나지를 않는 차원에서 살았습니다. 김목사님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 교인들이 다 흩어졌는데 과거 배운 것을 잘 살려서 지키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 예배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꾸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동행하며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2시간이나 되도록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고 남반들은 목사님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를 입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김목사는 키가 작고 삭발에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별명이 ‘중목사’였습니다.
여반들도 사치하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습니다. 모든 형식을 무시했고 때때로 설교를 하다 강대 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지방에 사경회를 가게 되면 파리채 하나를 들고 가는 분이었습니다. 말씀은 모두 마음 안에 옳겨놓았고 교인들의 실제 생활에 위생문제부터 가르칠 모범을 보였던 것입니다. 사경회 도중에 힘이 들면 강단 위에 올라 앉아 설교를 하는 수도 있었습니다.

- 양심설교
김현봉 목사님의 교훈 중심은 양심이라고 할 만 했습니다. 교인들은 그 말씀대로 실행합니다. 백영희가 청량리교회를 개척할 때 노방 전도를 하면서 그 밑에 배운 신재인조사님과 둘만 함께 전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한 시간 동안 마이크를 들고 노방 전도를 하면서 양심 말만 하고 있었습니다. 김현봉 목사님이 심어 줬기 때문에 그 아현교회 교인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때로서는 아주 제일 아름다운 교회라고 불렸습니다. 교인들이 모두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니까 남들이 조롱을 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전국 최고였습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 찬송을 조용히
김목사님은 찬송을 소리 크게 내어 부르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마음에 정성들여 하지 않고 하나님 찬양 없이 성의 없는 것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그 목사님 집회하는 데는 찬송가를 신명나게 부르는 것이 없습니다.

- 주일학교 새벽기도
김목사님은 주일학교 새벽기도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장년반 새벽기도도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새벽에 2시 되면 일어나서 산으로 기도를 갑니다. 교인들도 산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또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그 신앙에 맞추어 인도를 해야 되지 어른 욕심대로 열심히 끌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 생활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깁니다. 그리고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 뒷산에 마련한 작은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갑니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 뒤에 오후에는 심방을 다녔습니다.
주일 오전예배를 마치면 사모님이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대신하여 오후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로 가서 화장했습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를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한번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었습니다.

- 교인지도(심방)
아현동 일대 교인 집을 하루 70호 심방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심방을 할 때는 일일이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한번 묻고 지나갔습니다.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방바닥에 손을 대보는 정도가 그분의 심방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습니다.

- 교인지도(생활력 양성)
아현교회 청년들은 누구든지 무슨 일을 해서라도 먹고 사는 생존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현교회 청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뭐 하고 삽니까?’
‘노트 팔아서 살고 있습니다.’
‘노트 장사해서도 생활이 되나?’
‘4시간만 움직이면 생활이 됩니다. 남는 시간에는 성경 보고 기도하고 전도합니다.’
‘우리 교인들도 그렇게 가르쳐야겠습니다. 또 더 말 좀 해 보십시오.’
‘우리 교인들은 다 그렇습니다. 노트 하기 전에는 연필 장사 했습니다.’
‘연필 장사도 생활이 되요? 그 전에는?’
‘그전에는 핀 장사 했습니다.’

- 인재 양성
백목사님은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도 장로나 집사로 세워서 그 직책을 가지고 사람들을 길러가는 방법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김목사님은 교회 일꾼으로 쓸 사람은 일꾼을 세워 놓고 만들어 가지고 일을 시키려고 하지 말고 이미 일꾼이 된 사람에게 일을 맡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을 시킬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을 3번 내쳐 보고 그래도 참고 견디면 쓸모 있다 해서 써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백목사님은 두 방법을 함께 사용해 왔으나 85년 12월 19일 목요일에 과거 김목사님이 가르친 인재 양성 방법론의 필요성이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 모든 사람은 도둑놈
세상을 모르는 목회자는 세상사람을 다 믿으라고 가르치는데 그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대하거든 어떤 사람이든지 이놈은 도둑놈이다, 이놈은 전부 사기 협잡꾼이다, 이는 속이는 놈이다, 저 시장에 가면 여기는 전부 거짓말하는 속이는 도둑놈들이 앉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을 접해라 하고 인인관계를 가르쳤습니다. 그 교인들은 속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그들은 남을 속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물건을 살 때
김목사님은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 깎는 일이 없습니다. 그대신 여러 집을 다니며 남들 사는 것 구경도 하고 물건 값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나면 원가와 운반 수고비와 장사하는 사람 이익을 얼마 붙여 줘야 하겠다고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값을 물어보고 너무 많이 달라고 하면 ‘장사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면 안 되지요.’ 하고 다른 집으로 갑니다. 손님이 그냥 나가니까 주인이 붙들고 깎아 주겠다고 합니다.
 
물건 하나를 사면서도 그 시장 장사꾼들의 거짓을 전부 깨뜨리고 박살을 냈습니다. 사야 할 물건을 파악하게 되니까 주인이 허튼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까지 자기를 조심해서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되도록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속에 말씀으로 성화가 되어 그렇습니다.

- 교인지도(봉사 절제)
교회에 70여 세 되는 불편한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방 안에 드러누워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희생과 충성에 불타는 젊은 교인들이 물을 날라다 주고 서로 돕고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김목사님은 책망을 했습니다. ‘왜 그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나!’ 그리고는 김목사님이 그 집에 가서 식사를 하겠다고 들어갔습니다. 미리 아무도 그 집에 도우러 오지 못하게 해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앉은 자리에서 물바가지 하나 들고 고생을 했는데 그 어려운 목사님이 식사를 부탁한다고 기쁜 마음으로 앉은뱅이처럼 움직이다가 나중에는 일어나서 좀 쉬어가면서 하다가 마지막에는 물동이를 들고 와서 식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온 교인들을 불러놓고 할머니에게 물을 들고 오라니까 물동이를 들고 날래게 움직였습니다. ‘왜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나!’

- 이웃 사랑
전쟁 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이웃에 대한 적극 봉사와 구제를 하기도 했습니다. 70세 나이에도 그는 토요일마다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아현교회에는 주일날 시내의 거지들이 다 모여들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한 줄로 서게 하고 100원씩 주어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때 교인수가 500명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 교회의 경제 처리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했으나 그는 자녀가 없고 평소 절대 검소하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만 사용했으므로 모두 그분의 경제 관할을 믿었습니다.
 
고생하는 교역자들과 어려운 교인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했고 어느 교단에도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습니다. 목사 사례금은 따로 정하지 않고 별도 연보함을 만들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습니다.

- 모범적인 교회
1960년대 아현교회는 당시 1천명 출석으로 당시 대형교회로 알려진 전국교회는 서울의 영락교회 충현교회 또 부산의 초량교회 삼일교회와 대구의 제일교회 신정교회 등입니다. 출석 교인 기준으로 잡으면 3-4백 명 정도였고 1천명을 넘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속으로는 늘 시비요 싸움입니다. 겉으로는 서로 손을 거머쥐면 팔이 떨어질 만치 막 흔들고 악수를 해도 속에는 악과 독이 가득 찬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현교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김목사님 말이면 죽는 시늉이라도 합니다.

- 외빈내화
‘아현교회는 모두 핫바지 광당목 옷 입은 그 등신들 그런 것만 모여 있기 때문에 목사 말에 순종하는 것이라’ 그런 소리를 일반 교계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다른 교회는 교인들이 모두 다 똑똑하니까 제직회 하면 이 사람 주장과 저 사람 주장이 충돌을 하는데 아현교회는 김목사님 말 한 마디면 전부였습니다.
 
심지어 아현교인들은 핫바지만 입고 다니는 무지한 사람만 있어 목사가 무슨 말을 하든지 순종만 하고 살며 제 주장들이 없다고 조롱하며 훼방하는 외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백영희는 김목사님 차원을 알기 때문에 속으로 탄식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그분은 가르치는 권위가 있고 지도자들이 그를 따를 수 있도록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교인들에게 오랜 세월 많은 경험이 있어 순종을 하는 것이다. 그분 외에 누가 그곳에 가서 말해 봐야 그들이 듣는가!’
 
그들이 순종한 것은 그 목사님이 말한 것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실상이 이루어지니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광목 바지저고리 시커멓게 물들여서 해 입히라' 하니까 그들의 수준이 핫바지라서 핫바지를 입은 게 아니라 핫바지 입은 것도 명령을 어기면 안 되는 줄 알고 핫바지 입었던 것입니다.
그후 그분이 떠나고 나니까 거기 있는 교인들이 원래는 다 잘 난 사람들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에게도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후임으로 별별 사람들이 왔지만 누구에게도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다 흩어졌는데 뒤에 보니까 교인 중에는 세상적으로 아주 유력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 김현봉 이후의 아현교회
김목사님 사후 그 교인들이 다 흩어져 가는 곳마다 그 사람들이 장로가 되고 또 사회적으로도 출세한 사람 사장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바드대학교에는 ‘하바드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장로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자녀 손주들 20여명 전부가 하바드 출신입니다. 그도 아현교회 출신입니다.
 
국회의원도 있고 큰 회사 사장들이며 인간적으로도 아주 건전하고 경건하고 똑똑했습니다. 아예 속이는 일도 안 하고 속는 일도 안 하는 헛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목사님 사후에 분열이 되니까 ‘봐라, 그 교회는 제도가 없어 목사님 죽고 나니까 그렇게 됐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분은 참 특수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좀 더 지나고 나니까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양심도 쓸 때는 쓰고 안 쓸 때는 쓰지 않으니까 즉시 일반 교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김목사님 한 분이 살아 있어 자꾸 가르치는 덕분이었습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 깊은 성경 깨달음
김목사님에게 배운 분들이 마태복음 25장 열처녀비유에서 문이 닫히고 바깥 어두운데 쫓겨났다는 것을 두고 택자들도 그럴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슬기 없는 다섯 처녀도 구원을 얻었다는 그 부분은 서로 교리상 일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달란트비유에서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했으니 이 부분은 서로 깨달음이 달랐습니다.
 
김목사님은 ‘이를 갊’이 있다 하는 말씀은 불택자로 해석을 했고 백목사님은 택자의 심신의 기능을 가리켜서 말한 것으로 깨닫기 때문에 서로 대화를 했지만 교리상 일치를 보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 박형룡조직신학에 대한 평가
박형룡박사는 참 유력한 신학자였습니다. 그 분이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후 조직신학을 다시 정리했는데 그는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니 그분의 책을 보면 많은 신학자들의 신학 서적을 다 보는 것처럼 효과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학설을 소개한 것은 좋은데 그들의 말에 대하여 소개만 했지 자기 생각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김목사님이 그 글을 평하면서 ‘이 글들은 생명이 없는 글들이다.’
학자들의 글은 책 보따리지 자기가 어떻게 믿는다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명은 없고 글만 있으므로 죽었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아주 깊이 깨달은 말입니다.

- 백영희의 지적
김목사님 집회에 여러 번을 따라 다녔습니다. 설교 중에 일반 교계가 들으면 이단 시비가 날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두고 김목사님같이 위대한 인물이 없지만 과거 이용도목사님을 매장시켰듯이 외식하는 자들은 진실한 성도를 매장시키면 자기들이 커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교 중에 오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때 그분을 아끼는 마음으로 조용히 나가서 호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잘 받고 헤어졌는데 그 뒤에 강단에서 배우러 왔으면 조용히 배우기나 하지 다른 말을 한다며 교만하다고 야단을 칩니다. 알고 보니 이목사님이 김목사님께 가서 내가 다른 마음이 있다고 헐었습니다. 둘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어 틈이 벌어지게 하고 이목사님은 양쪽을 잡고 있었습니다.

- 김현봉과 백영희
백영희는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했다 해서 책망을 들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김목사님은 강단에서 책망을 자주 했고 억울한 소리도 많이 했습니다. 누군가 김목사님에게 백목사님을 좋지 않게 말을 전했고 김현봉목사님이 강단에서 백목사님을 교만하다고 야단을 치며 반복하자 백영희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 놓고 조용히 출입을 절제하고 있었습니다.
 
김목사님은 백영희가 참석하지 않은 예배에서도 마치 백영희가 아현교회 후임을 탐내는 것처럼 야단을 쳤습니다. 누군가 후임을 원하는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되는 백영희를 김목사님에게 이간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두고 김목사님과 일치된 것이 많았지만 배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세상 뜰 때까지 자주 아현교회를 간 것은 그 분에게 본 받을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를 통해 크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책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너는 교만하다.’
‘너는 강퍅하다.’
‘너 양심을 쓰지 않는다.’
백영희에게 그런 소리를 해 주는 분은 그 분 뿐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싶어 아현교회를 들렀습니다. 그런 책망을 듣고 삼각산에 가서 노트에 적어두었다가 그 면으로 부족한 것을 찾기 위해 삼각산을 찾아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의 단점은 건너편에서 봐야 보이는데 김목사님이 그렇게 봤으니 어떤 면으로든지 그런 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교만이나 강퍅한 단점이 있으니 책망을 했을 것이고 만일 현재는 없다면 앞으로 그런 위험성에 빠질 것을 보고 책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그런 단점을 찾아 나서니 그분을 찾아 수입 보는 재미였습니다.

- 목사님 안수설교  
1960년 11월 29일, 김현봉목사님과 그 밑을 따르는 이병규 한순직 김응익 이용규목사님 등 5명이 백목사님 안수를 위해 서부교회를 찾았습니다. 백영희는 고신에서 상회불복종으로 제명당하고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하고 나왔는데 김목사님이 안수를 주관했습니다.
 
당시 서부교회 예배당은 2개 가옥을 연결하였고 바닥이 아주 초라한 다다미방에 강대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곳에 김현봉목사님을 초빙하여 안수를 받을 때 김목사님이 설교 중에 목사안수를 했다고 해서 다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니 백조사는 목사다운 목사가 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백목사님이 그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목사다운 목사! 얼마나 어려운지! 백목사님은 평생 목사로 걸어갔습니다.  

- 이목사님의 고백
1961년 1월 30일 서울 성은교회 집회 때 창세기 1장과 계시록 17장으로 한 주간 공부를 했습니다. 세상의 시작과 함께 세상 마지막을 동시에 가르쳤습니다. 이목사님이 참석을 했기 때문에 오전공부를 마치고 전송하려고 나오자 잠깐 저쪽 한편으로 가서 고백을 합니다.
'조사님, 오늘 오전 말씀대로 내가 그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시기를 해서 조사님을 김목사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잘못 소개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공연히 후계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했습니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말하지 않으면 모를 일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김목사님 아현교회가 제일 큰데 이목사님이 후계가 되고 싶었으나 백조사님이 가운데 들어와서 그 후계가 바뀌게 되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백목사님이 서울로 초청을 받아 교역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전에는 김현봉목사님이 주로 가르쳤고 그 밑에서 이목사님이 또 교역자들을 가르쳤는데 백목사님이 조사로서 서울을 출입하게 되자 성경 가르치는 권위가 있어 내심 그 자리가 탐이 났던 것입니다.
 
시기심도 있고 교권욕도 작용을 하니까 그만 어두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백목사님은 그곳 후계자를 하라 해도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직접 배웠기 때문에 김목사님에게 따로 배울 것이 없었고 그 교인들은 모두 고집이 있어 자기들대로 믿고 나갈 사람들이므로 일방적으로 나가고 있었으니 백조사님이 전면적으로 원만하게 나가는 길과 맞지를 않았습니다.

- 조용한 분리 (서울과 부산으로)
이후 이목사님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어지러운 교계에 변질되지 않고 충실하게 전할 분이므로 서로 겹치지 않도록 나누어서 이목사님은 서울에 계시니 서울에서 진리를 전하고 나는 부산에서 전하겠습니다. 이후 총공회 노선이 급격하게 부흥하게 되자 또 내부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놓은 곳에서 설교를 하는 그 권위가 부러워 집회나 강사 기회를 따로 갖기 위해 운동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 장례식
1965년 3월 12일 오전 9시 50분 81세를 끝으로 별세하셨고 장례식은 늘 따르던 창광교회 이병규목사님이 주관을 했으며 생전 말씀에 따라 리어카에 싣고 가서 화장을 했으며 그 뒤를 1,200명 교인들이 따라 갔습니다. 백영희에게는 누구보다 먼저 연락이 와야 하고 또 장례나 사후 안현교회 처리 문제를 두고 의견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장례식에나 겨우 참석할 정도로 연락이 왔습니다.
 
김목사님은 평소 말씀대로 살려고 해보니까 자기 육이 반대를 해서 늘 고통이었으므로 미리 자기 죽으면 가마니로 묶어 리어카에 끌고 가서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백목사님도 그 장례식에 참석을 했고 그를 따르는 분들이 많아서 모인 사람이 굉장히 많았으나 유언을 단단히 해 놓았기 때문에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불로 완전히 몸을 사루어 개조가 되어야겠다는 중심은 좋았으나 인론 교리에서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 감화를 통한 영향력
그의 감화를 받고 따르던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신촌의 이병규목사님 안병모 이한영 알라스카에서 개척한 안길옹목사님 등이 있습니다. 안길옹목사님은 2001년 현재 85세로 노인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 공터에 창고 같은 건물을 지어두고 매일 새벽부터 정오까지 머물면서 기도하며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생활을 지금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인 나성성약교회 아들인 안정남목사님도 그 정신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한인교회 임형태목사님이 전하는 소식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고 양심껏 믿고 나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의 조용한 말씀에는 능력이 역사하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교인들은 생사를 같이 할 제자들이 되어 있었고 그를 아는 교계의 지도자들은 감히 그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의 당대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1965년 돌아가실 때는 서울 최대의 교회가 되었으나 세상이 좋아하는 외부와 외형은 무시하려 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눈에 들어와 본 적이 없었던 분이었기 때문에 일반세상적 기록과 기준으로 그를 연구하거나 알아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정도입니다.

- 김현봉 사후의 교회들
김현봉목사님과 아현교회는 늘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백목사님의 서부교회, 손양원목사님의 애양원교회와 같은 의미입니다. 1965.3.12 김현봉목사님이 돌아가신 직후 현명도목사님이 6개월 정도 시무하였으며 신앙노선의 문제로 700여명 교인이 창광교회로 개척하여 분립되었습니다.
 
이 창광교회는 후에 이병규목사님이 맡아 그후 2천명 교인을 가진 교세와 계약신학대학원을 운영하면서 100여개 정도의 소속 교회를 가진 계신측 교단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 대학에는 정식 교수 10명 중 4명이 총공회 현 소속 또는 과거 관련 목회자들입니다.
김목사님 사후 처리를 주관했다가 통제할 수 없는 분란이 일어나자 그때서야 백영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 여지는 이미 없어져버렸습니다. 본인들이 한 일이니 하나님 앞에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잘랐습니다.

1966.3.에 아현교회의 후임으로 이한영목사님이 3년을 목회하였으며 3년을 시무한 후 1969.3.에 150명의 교인이 염천교회로 분립되었으며 현재 이 염천교회가 이전 김현봉목사님 당시와 외모나 생활습관까지 그대로 지키며 현재까지 내려오는 교회입니다. 지금도 머리를 깎고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입으며 남자들은 검은 물들인 무명 한복을 입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김현봉목사님의 가르침을 외형적으로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의 위치는 이화여대 입구 쪽입니다.
1972.2. 정연발목사님이 아현교회를 6년간 담임하게 되었고 그 후임으로 1977.12. 이종구목사님이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91년 도로 확장 때문에 장소를 조금 옮겨 연건평 840평, 교인 300여명이며 소속은 합동측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목사님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못하므로 그분에게 감화를 받고 그 신앙노선을 그대로 이어오는 분들을 통해 간접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훌륭한 종들은 그 세계가 너무 깊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깊은 교제가 없습니다. 또 이전 분위기를 잘 유지하고 있다면 외부 사람들과 원만한 대화가 어렵고 세상과 멀리 떨어진 생활로 인해 다소 투박함과 거친 면은 있겠으나 그래도 생전의 김현봉목사님의 분위기는 외부 뿐 아니라 그 이면까지 비교적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현교회 02-362-7140            창광교회 02-392-9697
신촌교회 02-717-3062            염천교회 02-325-5509

- 김영광이 본 당시 한국교회의 신령계
당시 교계의 경건했던 분들로서는
이인재목사님은 강직하고 단순한 설교를 하지만 이지적이며 명상이 깊지 않고
이병규목사님은 한번 시작하면 밀어 붙이는 힘이 특별하지만 교리에 밝지 못했고
김현봉목사님은 명상은 깊은 것 같은데 역시 교리는 깊지 못했고 아주 단순했습니다.
백영희목사님은 조직적으로 따지며 조리 있게 매사를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4분을 개별적으로 따르고 접했던 김영광의 평가입니다.

이 외에도
통합측에는 안기룡목사님이 신령했고 그들 가운데 말씀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양세룡목사님은 대림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김석준목사님은 후에 대동신학으로 나갈 분이지만 60년대에는 백목사님께 배웠습니다.  

김현봉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고 뿌리 깊은 신앙으로 생각이 많은 분입니다.

독 안에 연보를 넣어 두고 있었던 정도. 5.16후 화폐교환시 주일에 신고를 받았는데 이를 거부했다가 다음날 마다리 푸대에 돈을 담고 리어카로 싣고 갔는데 안된다고 하니까 그냥 돌아가겠지만 그대신 우리 교회에서 누구 정권 때 돈을 바꾸어주지 않았다고 적어 놓겠다고 하자 담당자가 그 자리에서 돈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는 속세를 떠나 살았던 분입니다.

이병규목사님은 교리적 면에서는 밝지 않았고 이인재목사님도 교리적인 면에서 따지고 들어가면 당신의 주장이 없는 분이다.



- 김목사님에 대한 배려
1965년 김목사님이 돌아가신 후 아현교회는 내부 분열이 격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진실한 이들은 고통을 겪고 교권을 잡은 측에서는 여러 교계의 나쁜 폐단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김목사님이 생존했더라면 귀하게 보고 안수를 했을 이한봉조사님은 특히 그곳 견제를 받아 안수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영희는 과거 자신이 안수 받기 어려울 때 김목사님이 교계의 시선에 상관없이 인물만 보고 서부교회로 와서 안수를 했듯이 이번에는 그때 김목사님을 대우하는 의미로 김목사님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있는 이조사님을 우리 진영에 모셔놓고 안수를 해 드렸습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원제 :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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