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아홉에 만난 그리스 12(조르바의 고향 크레타)
2008.07.03~14
크레타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무대이자,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렇게 잊지 못했던 고향이라는 그 곳에 내 두 발이 땅에 닿았고 여행전엔 전혀 몰랐던 조르바가 말한 '자유'를 찾을수도 찾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리스 최대의 섬에 왔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이른 아침 조용한 항구에서 시작된 크레타는 아마도 레팀노에 도착해서 이라클리온, 하니아까지 둘러볼 예정이었지만 크레타 섬의 최대의 도시인 이라클리온애서만 머물게 되었다.
이라클리온 항구다. 여행자의 첫 번째 할일이 숙박지를 정하는 일이다. 여행책자의 정보에 의하면 시내까지는 약 1.5km정도란다. 뜀박질 할때면 땀도 안날 거리지만 무거운 가방에 이른 아침이란 것이 내 몸뚱아리를 힘들게 만들었지만 항구를 따라서 시내로 걸어가는 길이 왠만큼 괜찮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묵었던 아우구스투 거리다(맞나?).
찾아간 유스호스텔의 문은 아침 8시(순전히 내 기억이다)에 오픈이란다. 그래서 기다려야했는데 몸이란 것은 눈을 뜬후 신체활동을 하게되면 연료가 필요한 법이다.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아침을 먹을만한 곳이 마땅찮다. 코렐리 형과 나는 간이매점에서 콜라 두 개와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무려 4.6유로였고 리유형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다. 아, 왠지 불쌍한 여행자같은 기분이 마구마구 들었던 아침식사였다.
리유형의 표현에 의하면 이 곳만이 아니면 어느곳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다고 했던 유스호스텔이다. 개인적인 평가를 하자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지도 않았던 유스호스텔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몇 나라의 유스호스텔을 돌아다녀본 결과 같은 나라 같은 도시에서도 엄청난 시설의 차이를 보이는게 유스호스텔이다. 우리나라도 호텔이라고 모텔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잖아.
여기가 안내 테스크 겸 유스호스텔내의 레스토랑이다. 당근, 밥 안사먹지.
그리고 우리가 묵었던 방이다. 샤워실과 화장실이 거지같았지만 일단 씻을수 있어서 좋았고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니 밖으로 나가려면 썬크림을 발라야지.
이건 코렐리 형이 여행을 다닐때면 빨랫감을 이렇게 해놓고 밤에 빨래를 하는데 이 통은 쓰레기통을 활용한 것이다.
적당한 휴식을 취한후 밖으로 나왔다. 교회다. 교회에 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특별한 관심도 없고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띄었으니 볼 수밖에...
모로시니 분수
17세기에 지어진 베네치아 시대의 분수로 내가 일부러 알아야할 필요는 없지만 베네치아 주지사인 Francesco Morosini의 이름을 따서 모로시니 분수라고 한단다. 4마리의 사자가 인상적이라고 하는데 공사중이어서인지 특별한 인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
우리의 목표물은 크노소소 궁전이었기에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코렐리 형이 너무나도 열심히 사진을 찍길래 따라쟁이(사실 따라쟁이는 코형이다. 내가 찍으면 잘 따라서 찍는다) 한 번 해봤다. 찍어놓고보니 별것 아니네...
여행자답게 이렇게저렇게 물어물어 베니젤로 광장에서 2번 버스에 무조건 탑승했는데 버스표를 구입하란다. 친절한 버스기사분께서 다음 정류장의 슈퍼마켓에서 티켓을 구입(0.9유로)할때까지 차분히 침착히 성질내지도 않고 예쁘게 잘 기다려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거의 10여분만에 크노소소 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안인데 내 주위에 여인들이 있길래 찍어달라고 했다. 모두가 나올수 있게..ㅋㅋ
누가 크레타 사람을 죽였나
그런데 고대 크레타 사람들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신약성경』에서도 「티토서」1장 12절에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 고약한 짐승, 게으른 먹보들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기원전 3~2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우스 역시 크레타 사람만큼 교활하고 잘 속이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 말로 '크레티제인kretizein'은 '크레타 사람처럼 되다'하는 뜻으로, 거짓말하고 속여 넘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 '크레타 사람을 속인다'라는 뜻의 '크로티제인 프로스 크레타'는 '매우 어려운 일' 또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날 때' 쓰는 말이라고 하는데, '사기꾼에게 사기를 친다'는 말이니 정말 어렵거나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일 게다. 크레타인들이 이렇게 평판이 나빴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찍부터 해양을 누비며 변화무쌍하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스파키온 마을 이야기가 말해 주듯, 오랜 피지배 생활에서 나온 악에 바친 자존심과 독립심 강한 면모 때문에? 실제로 겁 없고 독립심 강하기로 유명한 크레타의 스파키온 마을은, 1770년 오스만튀르크에 최초로 항거의 깃발을 들었다. 이때 반란군 지도자였던 요아니스 다스칼로야니스는 포로로 잡힌 동료를 구하려고 터키 군에 일부러 체포되었다. 이라클리온으로 끌려간 요아니스는 산 채로 피부를 벗겨 내는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많은 동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극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며 죽은 요아니스는 지금까지도 크레타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 이후로 터키는 스파키온을 지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윤기의 번역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후기에 있는 다음 이야기는 크레타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잘 보여 준다.
미하리스 대장은 아홉 살 아들을 데리고 터키인들에게 교수형을 당한 기독교들의 발에 입을 맞추게 함으로써 그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하게 하고 명령했다. "잘 보고 죽을 때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 누가 이분들을 죽였어요?" 아버지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자유."
이재범의 「나의 그리스 여행」중에서. |
출처: 뜀도령의 별장 원문보기 글쓴이: 뜀도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