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사르내 마을전경 |
모래가 많아 ‘사르내’, 적벽암 동쪽에 있어 ‘적동’ 100년 한옥, 문수역사, 관사, 양조장, 토담집 등 보존 문수면 적동1리(사르내) 가는 길 시내를 벗어나 남산고개를 넘으면 탁 트인 서천백사장과 적서농공단지가 펼쳐진다. 농협 퍼머스 앞을 지나면 문수로 가는 길과 평은으로 가는 길이 국도와 철길, 옛길 등 여러 갈래로 복잡하다. 문수로 가는 길은 중앙선 철길과 나란히 가는데 한가하고 평화롭다. 서천 강둑에는 오래 묵은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알곡을 머금은 금빛물결 위를 잠자리 떼들이 타고 넘는다. 낮은 언덕길을 올라 적동1리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문수교(굴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좁은 길을 조금 내려가면 문수초등학교가 나타나고 학교 앞에는 ‘사르내’라는 시내가 흐르고 있다. 마을은 사르내를 따라 길쭉하게 자리 잡았고 논밭 풍경은 농부가 그린 한폭의 그림이다. 지난 18일 적동1리에 가던 날 이 마을 전상선 주민자치회장의 안내로 고창길 이장, 고재석 노인회장, 석임 부녀회장을 만날 수 있었고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마을의 유래와 근대사 100년 이야기를 들었다. |  | | ▲ 한필상 가옥 |
사르내 마을의 유래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마을 이름을 ‘사르내’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시내가 예전에는 넓고 모래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래 사(沙)자와 내 천(川)자의 음과 뜻을 따서 ‘사르내’라 하였다 한다. 이는 ‘모래가 많은 내’ 또는 ‘모래가 흐르는 내’라는 뜻이라고 고창길 이장이 설명해 줬다. 고 이장은 또 “이 마을은 약 300여년전 한씨가 마을을 개척했고 그 후에 임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했다. 적동리는 조선시대 때는 영천군 적포면(赤布面)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영주군 문수면 적동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적동(赤東)’이라 한 것은 당시 문수로 가는 탑거리 부근에 ‘적벽암(赤壁岩)’이란 붉은바위가 있어 적벽암의 적(赤)자를 따 서천을 경계로 동쪽은 적동, 서쪽은 적서라 하였다고 한다. 어떻든 적동리는 붉을 적(赤)자와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  | | ▲ 문수교(굴다리) |
영주에서 가장 오래 된 다리 문수교 적동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수교는 중앙선 철길 위에 놓여 진 다리로 난간머리에 단기 4272년 10월 준공이라 새겨져 있다. 이 다리는 중앙선 영주구간이 개통(1941.7.1)되기 전인 1939년 10월에 준공되어 70여년간 적동마을의 문지기였고 사르내 사람들의 추억의 다리였다. 중앙선철도 영주구간 공사는 1936년부터 시작되어 1941년 쯤 완공되었는데 당시 지역민들은 노임을 받고 공사에 동원됐다고 한다. 이 마을 정춘옥(86) 할머니는 전해들은 이야기라며 “당시 문수 사람들은 기부도 잘 하고 협조를 잘 해서 마을 가운데로 철도가 나고 마을 가까이 역을 세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는 도로와 교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역이 들어서고 철도가 지나가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고 한다. |  | | ▲ 문수역 |
|  | | ▲ 문수역 선로반처소 |
|  | | ▲ 옛 문수역장 관사 |
문수역과 역장(驛長) 관사 문수역은 1941년 7월 1일 보통역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 교통수단이 없던 때라 한 해 4만 8천여명이 문수역을 이용했다고 한다. 역사(驛舍, 40평 규모)는 1939년 건축물로 지붕만 여러 차례 개량됐을 뿐 기본 골조는 옛것 그대로다. 역사 옆에 있는 선로반처소(21평 규모)는 목재비늘판벽 건물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근대사 건축 연구가들이 자주 찾는 관심 대상 건물이다. 문수역 플랫폼 건너편에는 역장과 역무원들의 관사가 4채 있었는데 다 헐리고 현재 1채 남아있다. 농촌 가옥이 모두 초가일 때 철도관사는 지역민들이 부러워하던 집이였고 여기에 사는 역무원가족 또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 보릿고개 등 우리의 아픈 역사와 함께한 문수역은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들의 추억의 장소로 아스라한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  | | ▲ 문수양조장 |
양조장과 주막 학교 교문에서 건널목 방향 100m 지점에 문수양조장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양조장은 1930년을 전후해 문을 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막걸리를 생산하여 문수면 일대에 공급했는데 일제 때부터 1970년대까지는 호황을 이루다가 90년대부터 농촌인구가 급격히 줄어 2005년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양조장 앞집에 사는 송순남(81) 할머니는 “그 때는 자전차도 없고 리어커도 없던 때라 지게로 지거나 소지르매에 두 말씩 싣고 운반했다”고 하면서 “양조장 앞은 항상 북적이고 장날 같았다”고 말했다. 역 관사 인근에 살고 있는 김진영(79)씨는 “6.25 이후 농촌인구가 늘어나 면민이 3천500명이 넘었고 양조장 부근과 문수역 주변에는 주막과 음식점이 많았다”고 했다. 양조장 건물에는 ‘주류제조 허가번호’, ‘문수주류제조장’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어 잘 익은 막걸리 냄새가 술술 풍겨 나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근대사 100년 가옥 전시장 사르내 마을에는 1900년대 초 목조 한옥을 비롯하여 1930년대 토담집, 1950년대 기와집, 1970년대 스레트집, 1980년대 슬라브 주택, 최근에 지은 양옥집 등 근대사 100년의 가옥을 한데 모은 전시장 같다. 학교 뒤편에 있는 한필상 가옥은 1910년 경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목조기와 건물로 조선시대 건축양식과 일제시대 건축양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지붕을 제외한 기둥과 서까래, 창호, 툇마루, 부엌 등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집 주인 한필상(83) 어르신은 “이 집은 당시 한약방을 하던 임약국(예천임씨)의 집이었는데, 해방되던 해 부친이 초가집을 구입해 기와를 이었다”고 하면서 “당시는 모두 초기집이고 기와집은 이 집 밖에 없었다”고 했다. 사르내 사람들 고재석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현재 80호에 200여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 노인회원이 80명이 넘는다”고 하면서 “면(面)소재지이지만 식당 하나 없고 슈퍼도 없다. 가게는 학교 앞 구멍가게 하나만 딸랑 있다”고 했다. 고 회장은 마을의 자랑으로 ‘경로효친’을 꼽았다. “고창식 이장과 석임 부녀회장이 협력하여 경로잔치, 효도여행 등을 주선하여 노인들을 즐겁게 해줘서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또 “우리마을 전상선(49)씨는 농협중앙회가 뽑은 전국 효부상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면서 “젊은이들이 어른을 공경하는 좋은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마을이며, 효자 효부가 많다”고도 했다. 학교 앞에서 60년을 살았다는 주현주(83) 할머니는 “우리 아이들 6남매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학생수가 700명이 넘었고 운동회 때는 수천명이 붐볐다”고 했다. 이 마을 최상문(54)씨는 “어릴 적 학교 다닐 때는 학교 앞 백사장이 넓어서 거기서 놀고, 달리기도 하고 고기잡이도 했다”고 말했다. 학교 뒤에 사는 유영희(83) 할머니는 운동장 가에 있는 등굽은 버드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는 이 학교 1회 졸업생(1949년 졸업)들이 냇가에서 캐다 심은 나무”라며 “우리 영감(최교창, 85)이 적동학교 1회 졸업생인데 전해 들었다”고 했다. 문수면 적동1리 사람들 |  | | ▲ 고창길 이장 |
|  | | ▲ 고재석 노인회장 |
|  | | ▲ 석임 부녀회장 |
|  | | ▲ 정춘옥 할머니 |
|  | | ▲ 주현주 할머니 |
|  | | ▲ 유영희 할머니 |
|  | | ▲ 송순남 할머니 |
|  | | ▲ 김진영 전 노인회장 |
|  | | ▲ 최상문 씨 |
|  | | ▲ 전상선 주민자치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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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현 살아있네....
어디서 찾은겨?
흐흐
히히히! 반가운 얼굴 하나, 맨 밑에 최상문씨는 최화숙씨 동생!
세월이 아쉽다................
열분중에 무려 세분이나 아는 사람!
아 옛날이여 옛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가 좋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