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031-114에 전화를 걸어, 내 핸드폰에 찍힌 전화번호의 국번에 대해 질문했다.
"포천 지역 국번이래요. 그 근처에 생각나는 데 없어요."
머릿속에서 수십 개의 고장 난 백열등들이 느릿느릿 교대로 껌뻑였다.
"...잘, 모르겠어요."
"현실적으로 어머니 혼자 며칠씩 묵으실 만한 데가 흔하지는 않을 거예요. 기도원이나 사찰이 아니라면, 혹시 콘도미니엄 같은 곳이 아닐까 싶은데."
엄마에게는 종교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114를 눌렀다. 포천 근처 대형 숙박시설 몇 곳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더니 차례로 전화를 돌려 "손님 중에 이정례씨가 몇 호에 계십니까?" 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5분여 만에 그는, 산정호수 근처의 리조트를 찾아냈다.
아,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엄마와 함께 그곳에 갔던 기억이 났다. 근처의 부대에서 복무하던 오빠를 면회하고 오던 길이었으니 10년이나 된 일이었다. 그것은, 엄마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이 넓디넓은 세상 천지에 갈 만한 데가 그다지도 없었단 말인가.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안쓰러운 연민으로 가슴이 저몄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
그것은 나 스스로에 대한 물음이었다.
"어머니가 어디 계신지도 알았고, 별 일 없으시다는 것도 알았잖아요."
"..."
"어머니가 정말 걱정돼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이 불안정한 상태를 못 견디겠다는 거예요?"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나는 그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은수씨도 혼자서 자기 자신을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때 있지 않아요" 지금 어머니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계시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가 보고 싶어요."
불쑥 눈물이 났다.
"우리 엄마가 진짜 거기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엄마한테 뭘 따지려는 거 아니예요.그냥 얼굴만 보면 돼요. 정말이에요. 지금 엄마를 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아요."
영수가 휴대용티슈를 건네주며 말했다.
"자, 안전벨트 매요."
"네?... 사무실 들어가 봐야 되지 않아요?"
그가 한쪽 눈썹을 찡긋 했다.
"일에는 우선순위라는 게 있잖아요."
한번 갔었던 길인데도 초행의 느낌이었다. 근처에 거의 다다른 것 같았으나, 목적지는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영수는 국도변에 차를 세우고 지도를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이럴 때 내비게이션 있으면 편한데."
내가 무심히 중얼거리자 영수가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거, 난 좀 무섭더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서 왼쪽으로 가라, 오른쪽으로 가라 정해준다는 게 말예요."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일차선 국도는 한적했다. 자동기어변속기 위에 무방비로 걸쳐 놓은 김영수의 손등에 시선이 머물렀다.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엄마 전 친구들과 같이 서해안의 펜션을 찾아 헤맬 때와는 달리, 불안하다는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결국 목적지를 찾아내어 나를 데려다 줄 거라는 맹목적인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사람 옆에 있다면 적어도 차디찬 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 홀로 서서 우는 일은 없을 것만 같다. 그의 손등 위에 가만히 내 손바닥을 포갰다. 오래지 않아 그는 콘도를 발견했다."
"여기서 기다릴게요."
로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영수가 내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엄마도, 거기 있었다. 엄마와 나는 그 자리에 박제된 채 서로의 눈을 외면했다. 영수가 먼저 깊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엄마가 어정쩡한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나는,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절실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애면글면 걱정하던 엄마와 마주했는데, 어쩌면 이토록 어색한 낭패감으로 온몸이 떨린단 말인가.
엄마가 머무는 방은 적막했다.
"저 사람, 누군지 안 궁금해?"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 조금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누군데?"
"만나는 사람. ...나, 결혼할지도 몰라."
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모른다. 엄마는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기뻐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