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4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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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 4월 24일
에스파냐 남부 엘비라
(오늘날의 그라나다 Granada 교구)의 주교였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항한 신앙의 승리자들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시종일관 이단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359년에 열린 리미니(Rimini)
공의회에 참석한 몇 명의 주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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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성 네온(Neon)
성 레온티우스(Leontius)
성 론지누스(Longinus)
축일 4월 24일
그리스의 축일표에 의하면 성 에우세비우스(Eusebius),
성 네온, 성 레온티우스(Leontius)와
성 론지누스(Longinus)는 성 게오르기우스
(Georgius, 4월 23일)의 순교 당시 이를 목격한
구경꾼이었으나 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가 순교하였다.
이 성인들의 전설은 성 게오르기우스의 순교와
연결시키려는 부자연스런 의도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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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보바(Bova) 또는 보나(Bona)
성녀 도다(Doda)
축일 4월 24일
성녀 보바(Bova)는
성 발데리쿠스(Baldericus, 10월 16일)의 여동생으로
다고베르트(Dagobert) 왕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덕으로써 왕궁과 나라 전체를
교화하였다. 성녀 보바는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결혼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빠인 성 발데리쿠스가 639년
몽포콩(Montfaucon)에 수도원을 설립한 이후
랭스(Reims)에 베네딕토회 수녀원을 설립하자,
성녀 보바는 680년 죽을 때까지 수녀원장으로서 살았다.
성녀 보바의 조카딸인 성녀 도다는 그녀의 발자취를
따랐고 그녀를 이어 수녀원장직을 계승하였다.
두 성녀의 유해는 후에 랭스의 성 베드로(Petrus)
수도원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비록 두 성녀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0세기에
그곳 수녀들과 관련된 전승들이 작가에 의해 다시
기록되었다. 성녀 보바는 보나(Bona)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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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
(Mary a santa Euphrasia Pelletier)
축일 4월 24일
성녀 마리아 아 산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 연안의
누아르무티에(Noirmoutier) 태생으로 투르(Tours)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성 요한 에우데스
(Joannes Eudes)가 세운 수도회 소속이었다.
이 때문에 로사는 ‘피난처이신 사랑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11년 뒤에는 원장이 되었고
앙제(Angers) 지방에 새 수도원 건립을 성공적으로
이룩하였으나, ‘착한 목자’와 관련되는 새로운
수도회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 회는 1835년에 성좌의 승인과 더불어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설립자가 서거했을 때 이미
착한 목자 수녀들의 수효는 2,760명이었다.
그녀는 1940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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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멜리토(Mellitus)
축일 4월 24일
성 멜리투스(또는 멜리토)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Gregorius I)가 영국으로 수도자들을 파견할 때
제2진에 속한 수도자로서, 604년에 에식스(Essex)의
초대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그곳의 국왕인 사버트를
개종시켜 선교의 기반을 다졌던 인물이다.
그러나 국왕의 아들은 부친이 사망하자 그를
축출했는데, 그 이유는 아직 영세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체’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멜리투스는 로체스터(Rochester)의
성 유스투스(Justus)와 함께 프랑스 지방으로 갔으나,
즉시 귀환하라는 명을 받고 돌아와서는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619년 성 베다(Beda)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귀족 출신인 그는 귀족적인 마음을 지닌
인물이다.” 캔터베리의 성 마리아 성당의 건축자도
바로 성 멜리투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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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 멘니(Benedic Menni)
축일 4월 24일
성 베네딕투스 멘니
(Benedictus Menni, 또는 베네딕토 멘니)는
1841년 3월 11일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에서
루이지 멘리(Luigi Menni)와 루이사 피지니
(Luisa Figini)의 15명의 자녀 중 5번째로 태어났다.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로디(Lodi)의
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후 로마(Rome)의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성 베네딕투스는 1866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를
부흥시키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1881년 5월 31일
예수 성심 의료 수녀회(Congregation of Hospitaller
Sis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노인들과 버려진 아이들 그리고 소아마비의
희생자들과 정신적으로 질병을 앓는 이들을
돕기 위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들었다.
성 베네딕투스 멘리는 1914년 프랑스 디낭(Dinan)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에스파냐(Ciempozuelos)에
있는 수녀원 본원에 안치되었다.
그는 1985년 6월 2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1999년 11월 2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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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보나(Bona)
축일 4월 24일
성녀 보나는 1156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아트워터(Attwater)에게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기록에 의하면, 성녀 보나는 어린 시절부터 환시를
체험했고, 사도 성 대 야고보(Jacobus)의 축복을
받았다. 10살 때 그녀는 스스로 아우구스티노회
규칙에 따라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정하였고,
14살 때에는 예루살렘 근처에서 십자군으로 싸우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보기 위해 첫 번째 여행을 감행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지중해에서 이슬람 해적에게
붙잡혀 상처를 입고 감옥에 갇혔다.
피사의 동료들에 의해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다시금 여행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많은 순례자들과 함께 1천 마일에 이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사도 대 야고보의 유해가 모셔진 곳)까지의 여정이었다.
이때부터 성녀 보나는 성 야고보 기사회의 후원 하에
이 유명한 순례여정의 공식적인 안내자의 일원이 되었다.
그녀는 9번이나 순례를 안내했다.
그녀는 넘치는 열정과 이타적인 마음을 지녔고,
아픈 이들도 그녀의 미소와 함께 기운을 되찾을 정도로
친절했다.
이미 병든 몸으로 그녀는 마지막 순례를 시도했으나
집에서 멀리 떠나지는 못했다. 성녀 보나는 할 수 없이
피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산 마르티노(San Marino)
성당 근처 그녀의 작은 방에서 1207년에 운명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성 크리스토포루스
(Christophorus, 7월 25일)와 함께 여행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인정되었고, 특별히 여행 안내자와
비행기 승무원 등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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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빌리암 피르마토(William Firmatus)
축일 4월 24일
성 빌리암 피르마투스(또는 빌리암 피르마토)는
프랑스의 투르(Tours) 사람으로 아주 젊은 나이에
그곳의 성 베난티우스(Venantius)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군인 내지 의사의 꿈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자신의 금고 위에 앉아 있는
원숭이 모양의 사탄이 그의 탐욕을 경고하는 말을
들었다. 그 즉시 그는 모든 꿈을 팽개치고는
과부인 모친과 함께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모친과 사별한 후에 그는 마옌(Mayenne)의
라발(Laval) 숲 속에 살면서 더욱 엄격한 생활을 했다.
그 후 예루살렘을 처음으로 순례한 뒤에는
브르타뉴(Bretagne)와 프랑스의 여러 은둔소를 두루
다녔다. 그는 두 번째로 성지를 순례하였다.
특히 그는 동물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으므로
농부들은 그를 위대한 예언자로 공경하였다.
그는 양과 염소에게 강론했고, 새들과도 함께
지냈다고 전해온다. 윌리엄 피르마투스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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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바(Sabas)
축일 4월 24일
성 사바는 고트족 태생의 그리스도인 장교였다.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에서 70명의
동료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일부 성인전 작가들은
그를 4월 12일에 기념하는 성 사바 고트인
(Sabas the Goth)과 동일인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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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축일 4월 24일
그리스에서 태어난 성 알렉산데르는
성 에피포디우스(Epipodius, 4월 22일)의 친구이자
동료였다. 그는 프랑스 리옹(Lyon)에서 체포되어
다른 34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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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그베르토(Egbert)
축일 4월 24일
성 에그베르토(Egbertus)는 린디스파른(Lindisfarne)의
젊은 수도자로서 아일랜드에서 학덕과 성덕을 쌓은
앵글로 색슨 사람이다. 그 당시 무서운 전염병이
만연되어 위세를 부릴 때, 그는 라트멜시지 수도원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보상할
기회를 허락하신다면 결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서약하였다고 한다.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프리슬란트(Friesland)와
북부 독일에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을 확신하였으나,
하느님의 섭리는 그에게 다른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의 일은 영광스럽거나 위대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사목하는 지역에는 로마 전례, 특히 파스카
전례를 받아들이는 문제로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는 티터 섬으로 들어가서 13년 동안 이 문제를
위해 기도하고 또 개인적인 덕을 닦았다.
그는 놀라운 인내심으로 인해 그의 성덕과 학덕은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그를 높이
공경하게끔 하였다. 그가 운명하는 바로 그날,
90세가량 된 이오나(Iona)의 어느 수도자가 역사상
처음으로 서방 교회의 전례에 따라 파스카 축일을
헥삼(Hexham)과 아르질 교구에서 성대하게 지키고
있었다. 성 베다(Beda)는 그가 주교였다고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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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보(Ivo)
축일 4월 24일
영국 헌팅던셔의 세인트이브스와 동 콘월(Cornwall)의
세인트이브스 마을의 수호성인인 성 이보는
램지 대수도원 근교의 슬리프 출신인 듯하나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이비아(Ivia)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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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피델리스(Fidelis)
축일 4월 24일
독일 호헨촐레른(Hohenzollern)의 식마린겐 태생인
성 피델리스는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교를
마치고 법학박사 과정을 밝으면서 그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스스로 회개생활을
시작했는데, 고행자의 옷을 입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1604년 그는 잠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봉직하다가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Alsace) 지방의 아인지스하임
(Ensisheim)에서 변호사로 개업하면서부터
그의 인격과 학문이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또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그는 카푸친 회원이 되어 피델리스란 이름을
얻었다. 그는 유산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 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른 한 몫은 신학교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주교에게 증정하였다.
이윽고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사제로 서품된 그는
주로 설교와 고해성사를 주는 임무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품과 재능을 익히 알고 있던 주교는
스위스 그리존(Grison) 지방의 츠빙글리파
(Zwinglian)에게 파견하여 정통 교리를 수호하도록
명하자, 그는 8명의 다른 카푸친 회원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는데 그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며칠 밤을 기도하면서
지냈다. 1622년 2월 24일 그루쉬(Grusch)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한 뒤 한 동안 탈혼 상태에 빠졌다.
그 후 그는 세비스(Sewis)로 걸어가서 군중들에게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다.”
는 설교를 하자 그를 향해 총탄이 날아왔다.
결국 그는 45세의 일기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츠빙글리파 성직자들이
개종하였고, 1746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
(Benedictus XIV)는 그를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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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호노리오(Honorius)
축일 4월 24일
이탈리아 브레시아 근교의 은수자였던
성 호노리우스(또는 호노리오)는 577년경
그 도시의 주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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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Euphrasia Pelletier)
축일 4월 24일
성녀 마리아 에우프라시아 펠레티에르
(Maria Euphrasia Pelletier)는 1796년 7월 31일
프랑스 서부 방데 연안의 누아르무티에
(Noirmoutier) 섬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부모는
방데 전쟁을 피하여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18세 되던 1814년 10월 20일 애덕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고, 1825년에 투르(Tours)에
위치한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앙제에 수녀원을 설립해 달라는
앙제 주교의 요청을 받고 파견되어
‘앙제의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원’을 성공적으로
설립한 뒤에 투르로 돌아왔다.
그러나 앙제 수녀원이 운영상 많은 어려움을 겪자
다시 앙제로 가서 수녀원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자기 수녀회의
구조를 크게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나
수녀원 내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녀는 야심이 많고 순종하지 못한다는 비난과 함께
‘능력은 있으나 한 나라를 다스려야 적성이 풀릴 사람’
이란 평을 받았다. 마침내 그녀는 앙제에
‘착한 목자 수녀회’를 설립하고, 1835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았다.
이 수녀회는 윤리적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설립되었다. 에우프라시아가 33년 동안
이 수녀회를 지도하는 동안 110개의 수녀원으로
발전하였는데, 현재 이 수녀회의 회원 수는 10,000명이
넘는다. 그녀는 1868년 4월 24일 앙제에서 선종하였으며,
1933년 시복되고 1940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