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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首爾)의 고개 이름
산골고개綠礬峴 (녹번동)
홍은동사거리에서 통일로를 통해 은평구 녹번동으로 가려면 넘어야 하는 고개를 예전부터 산골고개 혹은 녹번이고개라 하고, 한자로 녹번현(綠礬峴)이라 하였다. 은평구 녹번동 산1번지 일대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산천조(山川條)에는,
녹번현(綠礬峴)은 추모현(追慕峴) 북쪽에 있다. 석벽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캐다가 약으로 사용한다. 중국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1만명이 열지 못할 곳이다.’고 하였다.하였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녹번현에 대하여,모래재 북쪽에 있다. 이 재의 석벽에서 자연동이 산출된다. 이것을 채굴하는 사람들이 쇠정으로 석벽을 파 헤치면 돌 사이에 은싸라기 같은 것이 나오는데 파란 빛의 광채가 난다. 뼈 부러진 사람이 먹으면 신기하게 효험을 본다. 미음과 함께 그 부스러기를 날로 먹는데, 먹을 때 꼭 낫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하면 효험을 본다고 한다. 원래 뼈 부러진 데에 좋은 약인데, 지금은 다른 병에도 좋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고개에서는 옛부터 속칭 산골(山骨)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였고, 숲이 우거지고 험준하여 소름이 끼칠만큼 무서운 곳이었다 한다. 산골은 입방체의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기 때문에 구리로 착각하여 자연동(自然銅)이라 부르기도 하고, 한자로 녹번(綠礬)이라 하였다. 1700년대에 제작된 지도에는 녹번현(綠礬峴)으로 표기되었다.
산골은 뼈에 금이 간 상처에 접골제로서, 또 보혈강장제로서 효험이 있다 하였다. 지금도 이 일대에는 산골을 캐어다 약용으로 파는 사람들이 있다. 조선 건국 초 서울지역에 도성을 쌓을 때 노역에 동원된 인부들이 돌을 나르다 허리를 다치거나 뼈를 다치면 “산골고개에 가서 산골을 먹고 오라.”고 하였다 할 정도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에 산골고개에서 한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제천을 건너야 했는데, 사람들 사이에는 이 개천에서 몸을 씻고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고 도성에 들어가면 횡재를 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다 한다.
현 녹번동의 동명은 이 고개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즉 조선시대에 이곳은 한성부 북부 연은방(延恩坊)의 일부로서 녹번이 나므로 ‘녹번이’라 하였다. 그런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부제(府制) 실시에 따라 미흘산계(未屹山契) 녹현동(碌峴洞)과 양철리계(梁鐵里契)의 번현동(磻峴洞)을 병합하여 녹번리(碌磻里)라 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에 편입되었다.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로 편입되어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녹번리로 되었다가 다시 1950년 3월 15일 녹번리에서 녹번동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골고개 주위에 있는 현 홍은1동 지역은 의주로변에 있었으므로 이 일대에서 제일 먼저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 홍은고가차도 밑으로 마을이 제일 먼저 형성되어 「본동」이라 하였으며, 풍림1차아파트를 포함해서 그 아래 지역을 「환희동」, 풍림2차아파트와 홍은1동 새마을금고 사이를 「보은동」, 벽산아파트 주변을 「실락동」이라 했다. 또 홍은파출소가 있는 일대를 「청량동」이라 했는데, 지금부터 30여년 전만해도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오래 거주한 주민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 한다.
한편 녹번현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방어진지로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해 10월에 프랑스함대가 두번째 침입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이어 문수산성(文殊山城)을 점령하자 당시 양주목사 임한(林翰)이 이 곳 녹번현에 진을 치고 15일 동안 도성을 수비하였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음력 3월 3일, 9월 9일이면 산골을 먹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었는데, 이 때 동네아이들도 한 몫을 하여 산골고개에서 나오는 우물물을 퍼다 주거나 홍제천을 건너다 주고 돈을 받곤 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전에는 북한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사람이나, 배추·무우·호박 등을 팔려고 영천시장 쪽으로 가는 사람 등 산골고개를 넘는 길손들이 요기를 하기 위해 찾던 주막거리가 고개 밑(미미예식장∼홍은동사거리)에 이어져 있었다. 주막에서는 팥죽과 인절미·술 등을 팔았는데, 길 건너편에는 물물이집이라 부르던 설렁탕집들이 있었다 한다.
양천리고개梁鐵峴 (녹번동)
은평구 녹번동 19번지 38호 일대 대성주유소 앞 작은 고개를 예전에는 양천리고개, 한자로 양철현(梁鐵峴)이라 하였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하여 산쪽 동네를 독박리, 아랫동네를 양천리 또는 아래양천리라 불렀다. 현재 녹번1파출소 앞에 개울이 있었는데, 이 곳을 경계로 북으로는 의주까지, 남으로는 부산까지가 똑 같이 1,000리가 된다 하여 일명 양천리(兩千里)고개라고도 하였다. 현 보건소 옆 녹번2파출소 자리에 양천리 이정표가 있었으나 파출소를 신축할 때 없어졌다 한다.
도깨비고개 (녹번동)
은평구 녹번동에서 불광동 쪽으로 가는 고개를 도깨비고개라 하였다. 그것은 예전 이곳에 도깨비가 많이 나타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깨비고개는 이곳 외에 종로구 연건동에도 있었다. 도깨비는 전설이나 설화 속에 많이 등장하는데,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한 잡된 귀신의 하나로 전해온다. 비상한 힘과 재주를 가져 사람을 호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이나 험상궂은 짓을 많이 한다고 하였다.
파일재 (녹번동)
은평구 녹번동 86번지 일대의 고개로서 비가 오면 대단히 질어지고, 빗물로 해서 길바닥이 파였기 때문에 파일재 또는 패일재로 불리었다 한다.
박석고개薄石峴 (불광동)
은평구 불광동 479번지 일대, 불광동에서 갈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 한자로 박석현(薄石峴)이라 하였다.
그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나는 이 근처에 궁실(宮室)의 전답이 있어서 전답을 오가는 사람들이 흙을 밟지 않게 하려고 돌을 깔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이 고개가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위치하여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에 지맥이 깎아지 않게 보호하기 위하여 박석을 깔았던 데서 연유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 고갯길은 중국사신의 내왕로였는데, 고갯길 자체가 울창한 숲언덕길로서 사철 산에서 흘러 내리는 물로 인해 통행에 불편을 겪게 되자 조정에서 이 고개에 길을 닦고 상석(床石) 크기의 돌을 깔았으므로 박석고개가 되었다 한다. 고개마루 왼편에 성황당이 있었는데, 중국사신이 이곳을 지날 때 성황당 앞에서 절을 하지 않으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박석을 깔았던 고갯길이나 성황당은 1968년에 시행된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지금은 넓은 아스팔트길이 된 통일로가 달리고 있을 뿐이다.
관터고개館基峴 (불광동)
은평구 불광동 33-40번지 일대의 고개를 관터골 왼쪽에 있었으므로 관터고개, 한자로 관기현(館基峴)이라 하였다. 그리고 고개가 있던 마을을 관터골, 한자로 관동(館洞)이라 하였다.
관터골, 즉 관동(館洞)의 명칭 유래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이미 관동(館洞)의 명칭이 보인다. 관동은 원래 불광동에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불광동의 연혁을 살펴본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에 해당되었으며, 갑오개혁(1894) 때에는 한성부 북서(北署) 연은방(延恩坊) 불광리계(佛光里契)와 갈현계(葛峴契) 일부의 불광리(佛光里)·박석동(薄石洞)·사정동(射亭洞)·관동(館洞) 일대였다. 그 후 일제 때인 1914년 4월 1일 경기도에 편입되어 고양군 은평면 불광리가 되었으며, 광복 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대문구에 속하여 은평출장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79년 10월 1일 은평출장소가 은평구로 승격되자 불광동은 은평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까 갑오개혁 때 불광리의 일부였던 관동(館洞)은 이 일대에 관(館)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관(館)이란 조선시대에 공용여행자의 숙식과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해 각 주·현의 대로(大路)에 50리마다 설치하였던 국영 여관시설을 말한다.
칡고개葛峴 (갈현동)
현재 갈현1동사무소 뒷편에 위치한 고개 언저리에는 예전에 칡뿌리가 많았으므로 이 고개를 칡고개 또는 갈고개라 하고 한자로 갈현(葛峴)이라 하였다.
지금의 은평구 갈현동(葛峴洞)의 동명은 이 고개가 있으므로 해서 유래되었다. 갈현(葛峴)은 갈고개(葛古介)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한성부 북부 연은방(延恩坊) 갈현계(葛峴契)였다. 그런데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나 『육전조례(六典條例)』에는 갈현계(葛峴契)를 갈고개계(葛古介契)로 소개하고 있다.
이 칡고개는 한성부 행정구역의 경계지점이었다. 즉 조선 개국 초부터 한성부의 행정구역은 북한산 기슭의 우이동과 가오리(加五里)·뚝섬·양화진·수색·칡고개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일컬어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하였다.
칡고개는 서울과 의주 방면을 잇는 길 가운데 한 고갯길로서 보부상(褓負商)과 파발(擺撥) 및 중국의 사신들이 다니던 길목이다. 중국사신들이 지금의 구파발을 지나 서울로 오려면 먼저 칡고개를 넘어 박석고개·산골고개·무악재 등 큰 고개들을 넘어야 했다. 예전 칡고개에는 수백년 묵은 거목들이 많아 숲이 울창하였으며, 특히 칡넝쿨이 무성했다 한다. 주민들은 칡뿌리를 캐 약제로 팔거나 줄기를 벗겨서 햇볕에 말려 갓을 만드는 재료로 썼다. 기근이 들어 식량이 부족할 때는 식용으로 대용하였다 한다.
벌고개罰峴 (갈현동)
은평구 갈현 2동의 옛 자연부락인 궁말에서 서오릉으로 넘어 가는 갈현동 308번지 일대의 고개를 벌고개라 하며, 한자로 벌현(罰峴) 또는 봉현(蜂峴)이라 하였다.
벌고개의 명칭 유래는 풍수지리상 이 고개가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는 추존왕(追尊王) 덕종(德宗)과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의 능인 경릉(敬陵)의 청룡(靑龍)에 해당되는데, 지반이 낮고 약하여 사람이 지나다니면 더욱 낮아질 염려가 있다 하여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만일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큰 벌을 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로 해서 벌고개(罰峴)라 하던 것을 후세에 발음상으로 같은 벌고개(蜂峴)라 한 것이다.
경릉은 사적 제198호로서 서오릉(西五陵) 중의 하나이다. 소혜왕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陵制)도 왕릉의 형식을 갖출 수도 있었으나 덕종이 세자로 승하하였고, 또 부왕인 세조의 박장주의(薄葬主義: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는 것)와 소혜왕후의 소원에 따라 세자묘제(世子墓制)로 하였다. 그 후 추존한 임금도 능으로 모시는 예에 따라 석물(石物)도 왕릉·왕후릉 모두 화강석으로 능제(陵制)대로 하였다.
까치고개 (증산동)
은평구 증산동 217∼222번지 일대로서 수색과 증산동을 잇는 고개를 까치고개라 하였다. 고개 양쪽으로 높은 산이 절벽을 이루고 있는데다 큰 나무가 울창하여 까치가 유난히 많이 서식하였기 때문에 까치고개라 불리었다. 고개 주위에는 장자나무와 서낭당이 있었다. 이 고개의 특징은 여름에도 바람이 많이 불고 겨울에는 수색 쪽에서 센 바람이 불어닥쳐서 넘나들던 사람들이 넘어질 정도였다 한다. 이 고개는 경의선 철로 부설 때 많이 깎여 평지화 되었다.
서대문구
무악재毋岳峴 (현저동)
해발 338.2m의 인왕산(仁王山)과 해발 295.4m의 안산(鞍山) 사이의 고개로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악재, 한자로 무악현(毋岳峴)이라 한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무악(毋岳)은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비스듬이 뻗어 추모현(追慕峴)을 이루고 솟은 산으로, 한 가닥은 남쪽으로 뻗어 약현(藥峴)과 만리재(萬里峴)가 되어 용산까지 갔고, 다른 한 가닥은 서남쪽으로 뻗어 계당치(鷄堂峙)까지 이른다.
고 하였듯이 인왕산에서 한 뿌리가 서쪽으로 뻗어 추모현 곧 무악재를 이루었다.
무악은 한양 정도 후 도성을 쌓을 때부터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즉 도성은 인왕산에서 직접 남산으로 이어져 있지만, 당초에는 인왕산에서 일단 무악으로 건너 질러서 거기에서 금화산 능선을 따라 가다가 약현으로 해서 남산과 연결하도록 도성을 쌓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그 후 성종 때에도 그와 같은 의견이 대두되곤 하였다.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당시 북악 주산론에 앞서 하륜(河崙)에 의해 무악주산론이 유력하게 대두되었고, 태종 때에 이것이 다시 논의된 사실이라든지 세종 때에 무악을 주룡(主龍)으로 삼고 연희궁(延禧宮) 이궁(離宮)을 경영하였을 만큼 무악의 비중은 매우 컸다. 예전 무악재는 좁고 가파른 매우 험한 고갯길이었다.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는 무악재에 대하여,
여기에는 천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천명 군사만을 이기겠는가. 서쪽으로 하나의 관문길을 바라보니 겨우 말 한필만 지날 수 있겠다.
라고 하였고, 그 주석(註釋)에,
홍제동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5리도 못되어 하늘이 만든 관문 하나가 북으로 삼각산을 잇대고 남으로 남산과 연결되어 그 가운데로 말 한필만 통할만 하여 험준하기가 더할 수 없다.
고 하였으니, 당시 무악재의 험준한 모양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명칭 유래
서울에서 개성·평양·의주로 가는 의주로(義州路)에 있는 무악재는 국방·교통·통신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시대에 따라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 이름들은 무악재(毋岳峴)·모래재(沙峴)·길마재(鞍峴)·추모현(追慕峴)·무학현(無學峴)·모화현(慕華峴)·봉우재 등으로 불리었다. 근래에는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홍제동고개라 하기도 한다. 서울에 있는 고개 가운데 이 고개 만큼 많은 이름과 사연을 간직한 고개도 없을 것이다.
먼저 이 고개의 이름을 무악재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산 이름 무악(毋岳)에서 딴 것이지만 모악재(母岳峴)라고도 하였다는데, 이에 관하여 지봉 이수광(李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항간에서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등에 업힌 것 같은 한성의 부아암(負兒岩)이 마치 밖으로 뛰쳐 나가려는 모양새라 이 산을 어미산(母岳)이라 하여 달아나려는 아이를 달래게 함이고, 한성 남쪽에 있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 한 것은 아이가 달아나지 못하게 막고자 함이었다. 모악의 서쪽에 있는 고개를 떡전고개(餠市峴)라 하는 것도 떡으로 아이를 달래 머물게 함이었다. 그렇듯 이름을 지은 뜻이 깊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아암은 북한산 인수봉을 가리킴이고, 벌아령은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한남동에서 장충단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 것이다. 떡전고개는 서대문구 아현동의 애오개를 말함이다. 다시 말해 북한산 인수봉이 어린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는 형세이므로 아이를 달래기 위하여 안산을 ‘어머니산’ 즉 모악(母岳)이라 했고 그 고개를 모악현(母岳峴)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또 그 서쪽의 떡전고개는 어린아이를 떡을 주어 달래어 머무르게 하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는 뜻으로 남산 남쪽의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고 했다는 것이다.또 모래재 곧 사현(沙峴)이라는 명칭은 고개 북쪽 지금의 홍제동 언저리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현사(沙峴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연유되었다 한다.
길마재라는 이름은 무악이 두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두 봉우리 사이가 잘룩하여 마치 말안장 같이 생겼기 때문에 말안장 곧 길마재라 하고, 한자로 안현(鞍峴)이라 하였다. 명종 때의 풍수지리가이며 예언가인 남사고(南師古)는,
서울 동쪽에 낙산(駱山)이 있고 서쪽에 안산(鞍山)이 있으니, 말과 그 안장이 같이 있지 않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앞으로 조정 신하들이 당파를 지어 동·서로 나뉠 징조이다. 동쪽 낙산(駱山)의 낙(駱)자는 곧 각마(各馬)가 되니 동인은 서로 갈라지게 되고 서쪽 안산의 안(鞍)자는 곧 혁안(革安)이 되니 서인은 혁명을 일으킨 후에 안정될 것이다.
라고 풀이하였다 한다. 과연 그의 글자 풀이대로 당시 동인과 서인이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으며, 서인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후 오랫동안 정권을 잡게 되었다. 안산과 낙산의 이름이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여기서 동인은 김효원(金孝元)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로서 그의 집이 낙산 아래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은 심의겸(沈義謙)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로서 집이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이 고개가 추모현(追慕峴)으로도 불리게 된 사유는 다음과 같다. 영조 45년(1769)에 영조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용두리에 조성하는 부왕 숙종의 명릉(明陵) 역사를 마치고 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서 명릉 쪽을 바라보면서 부왕의 생전 모습을 그리워하며 추모하였다 하여 고개이름을 추모현이라 하기도 하였다 한다.
한편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도읍터를 물색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 남경(南京) 일대를 답사할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 고개를 자주 넘나들었으므로 고개이름을 무학대사의 이름을 따서 무학현(無學峴)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홍제동 쪽에서 이 고개를 넘으면 중국의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慕華館)이 있었으므로 고개이름을 모화현(慕華峴)이라 하기도 했다.
이 고개이름을 봉화재 또는 봉우재라 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무악 두 봉우리에 봉수대가 있었기 때문에 ‘봉수대가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봉화재가 되었고, 세월이 가면서 음이 변하여 봉우재로 불리었다.
홍제원(弘濟院)
무악재는 좁고 가파른 고갯길이었지만, 서울 서북쪽으로 개성·평양·의주 방면으로 뻗는 제1국도였기 때문에 교통·통신상 매우 중요한 관문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한성으로부터 각 지방에 이르는 간선도로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9개가 있었다. 그 가운데 제1로가 돈의문(서대문)으로부터 무악재를 넘어 평안도 의주까지 총 1,086리에 이르는 도로였다. 이 도로는 연행로(燕行路) 또는 사행로(使行路)로도 불리었는데, 중국의 사신이나 우리나라 사신의 통행로로 이용되었으므로 전국 간선도로망 가운데 가장 비중이 컸던 도로였다.
무악재 북쪽 인왕산 기슭 현재 지하철3호선 홍제역 북동쪽 출입구 부근(홍제동 138번지)에 홍제원(弘濟院)이 있었다. 중국사신이 한성으로 입성하기 위해 무악재를 넘기 직전 홍제원에서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예복으로 갈아 입었다. 홍제원은 국립여관이라 할 수 있는 도성 부근 4개의 원(院) 가운데 하나였는데, 중국사신이 이용하였으므로 다른 원보다 규모가 컸으며, 누각이 있고 중국사신이 묵는 공관(公館)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홍제원 건물은 청일전쟁(1894) 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홍제원은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 일행이 환송 나온 사람들과 작별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홍제원 주변에는 술을 파는 색주가와 길손에게 떡을 파는 떡집이 많이 있었다. 떡 중에도 인절미가 특히 유명하여 ‘홍제원 인절미’라면 소문이 자자하였다 한다.
모화관(慕華館)과 영은문(迎恩門)
홍제원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며 휴식을 취한 중국사신 일행은 이튿날 무악재를 넘어 한성에 들어오게 된다. 한성에 들어오면 임금은 모화관(慕華館)에 나와 조서(詔書)를 맞이하여 경복궁 또는 창덕궁에서 외교문서 전달식이 거행되었다. 이어 중국사신은 태평관(太平館)에 나가고 국왕이 연회를 베풀었다.
현저동 101번지에 위치하였던 모화관은 조선 건국 초에는 모화루(慕華樓)라 하였다. 태종 7년(1407) 8월 서대문 밖 반송방(盤松坊)에 송도(松都)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건립하였는데, 건립 당시는 큰 규모가 아니었던 듯 세종 11년(1429)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하고 모화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모화관은 본래 숙소가 없이 영접하고 보내는 장소로만 사용되었으며, 청일전쟁 이후 폐지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에 의해 사무실로 쓰여지면서 독립관으로 개수되었으나 일제에 의해 헐렸다.
모화관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이 있었다. 조선 건국 초부터 모화관 앞에 홍살문이 서 있었는데, 중종 32년(1537) 개축하여 영조문(迎詔門), 곧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중종 34년(1539) 명의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와서 말하기를, “중국의 사신이 올 때는 조서(詔書) 뿐만 아니라 칙어(勅語)와 상사(賞賜)도 같이 가져 오는데, 단지 영조(迎詔)라 함은 마땅하지 않다.” 하여 영은문(迎恩門)이라 바꾸게 한 것이다.
영은문은 조선말까지 남아 있다가 1895년 2월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 의해 헐려서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가 이듬해 1896년 독립협회에서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지금의 독립문 위치는 금화터널의 건설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표지석을 묻어 두었다.
태종 때 모화루를 건립하기 전에는 근처에 있던 반송정(盤松亭)에서 중국사신을 맞아들였는데, 모화루를 건립하면서 그 남쪽에 연못을 파서 모화루·반송정과 더불어 서울의 명승이 되었다. 또한 이 지역은 광활한 공한지로서 군사의 조련과 무과(武科)를 치르는 과거시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옛날 서울여상이 있었던 홍제2동 일대에는 말과 소를 기르고 말굽을 만드는 집들이 있어서 무악재를 넘나들던 우마꾼들이 말굽도 갈고 우마차를 수리하면서 쉬어 가던 곳이 있었다.
반송정(盤松亭)과 서지(西池)
모화루 근처에 있었던 반송정(盤松亭)은 큰 소나무정자를 말하는데, 그 가지가 우산처럼 옆으로 퍼져서 그늘이 수십보를 덮었다 한다. 행인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웬만한 비는 나무 아래서 피할 수 있었다. 고려 때 어느 임금이 수도 개경에서 남경(南京: 서울)에 왔다가 비를 만나 이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반송정(盤松亭)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 반송정으로 인하여 조선초기부터 이 일대를 한성부 서부 반송방(盤松坊)이라 하였다. 태조 4년(1395) 종묘와 궁궐이 완성됨과 함께 종묘에 모실 4대 신주(神主)를 개성에서 봉안하여 올 때는 태조와 문무백관이 이 반송정에 나아가 맞아들였다 한다.
반송정은 도성사람들이 서북쪽으로 먼길 떠나는 길손을 전송하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였던 장소로 유명하였다. 한도십영(漢都十詠) 중에 ‘반송송객(盤松送客)’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길 떠나는 길손을 배웅하며 지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가(詩歌)가 많이 전해온다. 조선 세조 때의 문신 강희맹(姜希孟)은 이 곳 반송정에서 친구를 먼길 떠나 보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수레 일산(日傘) 구름처름 모여 먼길을 전송하는데,
술잔 소반 흩어지고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큰길 가에 술은 이제 다한 것이,
가고 남는 그 일을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나니,
애은 노래소리 간장을 에이누나.
잠시 후 서로 떠나면 천리길 멀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장(蒼莊)하기만 하구나.
태종 7년(1407)에는 반송정 근처에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이듬해에는 모화루 남쪽에 연못을 파게 하였다. 연못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길이가 380척, 폭이 300척, 깊이 2장(丈) 내지 3장이었다. 연못이 완성된 뒤에는 개성 숭교사(崇敎寺)의 못에 있는 연뿌리를 배로 실어다 심었다. 그리고 연못에 많은 물고기를 키웠는데, 그 먹이용 쌀이 매월 10두나 되었다 한다. 이 못은 반송정 옆에 있었으므로 반송지(盤松池)라 하였으나 도성 서대문 밖에 있다 하여 주로 서지(西池)라고 불리었다.
한성에는 서지 외에 동대문 밖에 동지(東池)가 있었고, 남대문 밖에 남지(南池)가 있었다. 세 연못 모두 연꽃이 피었는데, 그 연밥은 궁궐에서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서지의 연 규모가 가장 크고 무성하여 반송정·모화루 등 명소와 함께 이곳에서의 연꽃구경은 도성민들의 커다란 즐거움이 되었다 한다. 속설에는 세 연못 가운데 서지의 연꽃이 보다 많이 피면 서인이 세력을 잡고, 동지의 연꽃이 성하면 동인이 우세하고, 남지의 연꽃이 잘 피면 남인이 힘을 얻는다는 말이 떠돌았다 한다. 조선시대 내내 도성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서지는 일제 때인 1919년에 메워져서 죽첨보통학교가 들어섰다가 광복 후에 금화국민학교로 바뀌었다.
서지 가에는 천연정(天然亭)이란 정자가 있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천연정을 소개하면서,
돈의문 밖 서지(西池) 가에 있다. 본래 이해중(李海重)의 별장이었는데, 지금은 경기감영(京畿監營)의 중영(中營) 공청(公廳)으로 되어 있다. 연꽃이 무성해서 여름철에 성안 사람들이 연꽃 구경하는 곳으로 여기가 제일이다.
라고 하였다. 또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집(阮堂集)』에 의하면, 천연정은 무악재를 오가는 관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연회장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천연정 옆에는 청수관(淸水館)이 있었는데, 고종 17년(1880) 일본대리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이 공사관으로 사용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우리 군인과 도성민들의 습격으로 불타버렸고, 그 터에 지금은 동명여자중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무악봉수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악재는 국방·교통·통신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무악에는 2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무악은 동과 서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로 되어 있고 그 두 봉우리에 각각 봉수대가 1개소씩 있었다. 서울에는 무악의 2개소 외에 남산에 5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다. 남산의 봉수대는 일명 경봉수(京烽燧)라고도 하며, 전국 각지에서 경보를 받아 병조(兵曹)에 보고하는 중앙봉수소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악의 봉수대 가운데 동봉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발하여 평안·황해·경기도의 내륙을 거쳐 오는 봉수를 받아 남산 제3봉수대까지 최종 연결하였고[직봉(直烽) 79처, 간봉(間烽) 20처], 서봉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발하여 평안·황해도의 해로와 경기도의 육로를 거쳐 오는 봉수를 받아 남산 제4봉수대에 최종 연결하였다(직봉 71처, 간봉 21처).
봉수제도란 변경의 경보를 중앙으로 전달하는 것을 주임무로 한 국가의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 그 제도는 삼국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 이후부터였다. 봉수는 수십리의 일정한 거리마다 요지가 되는 산정에 봉수대를 두고 밤이면 횃불로서, 낮이면 연기로서, 비가 오거나 안개나 구름이 덮여 있어 연기나 불로서 연락이 어려울 때는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서 릴레이식으로 보고토록 하는 것이다. 원래 봉수(烽燧)란 밤에 불로서 알리는 봉(烽)과 낮에 연기로서 알리는 수(燧)를 합한 말이다. 횃불이나 연기로 변경의 사정을 알릴 때 그 정세에 따라 5거(炬)의 체계를 갖추었다. 즉 무사한 때는 1거,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거,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거, 국경을 침범하면 4거, 우리 군사와 접전(接戰)하면 5거로 하였다.
봉수대의 중요시설로는 연대(煙臺)와 연조(煙)가 있다. 연대는 대체로 높이 25척(7.5m) 둘레 70척(21m), 연대 아래 4면의 길이가 각 30척(9m)으로 쌓아 올리며, 적과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폭·깊이 각 10척(3m)의 참호를 빙 둘러 파고, 다시 그 주위에 길이 3척(90㎝)의 말뚝을 둘려 박아 10척(3m) 폭의 말뚝지대를 형성하였다. 연대 위에는 임시집을 지어 화기 등 각종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간수하게 하였다.
연조, 즉 아궁이는 내지봉수(內地烽燧)의 경우 위험도가 적어 연대를 쌓지 않고 연조만 설치하였다. 연조의 구조는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크게 네모 또는 둥근 모양인데 높이는 10척(3m)을 넘지 않게 하였다. 짐승이 침입할 염려가 있는 곳에는 둘레에 담을 쌓았다. 성종 6년(1475) 이후 모든 봉수에는 연조 위에 반드시 연통을 만들어 주연(晝煙)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각 봉수대에는 봉화군 5명, 화포군 2명, 망보는 망군(望軍) 2명과 이들을 감독하는 감고(監考) 1명이 배치되었다.
광해군 때의 문인 이민구(李敏求)는 무악봉수시를 지어 남기고 있다.
왕궁과 관아가 바로 저기인데,
성곽의 엄한 수비
말안장을 의지했네.
변방의 소식이
저물게 들어오는데
날마다 평안 무사하다네.
무악 두 개의 봉수대 가운데 동봉봉수대가 복원되었다. 서울시는 1994년 4월 3일 복원공사를 착공하여 동년 8월 30일 완공하였으며, 서울특별시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였다. 복원된 동봉봉수대의 면적은 115평으로 연대 상부 33평, 연대 하부 93평으로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다. 연조대는 높이 3.2m, 상부직경 1.05m, 하부직경 2m이다. 서봉봉수대 자리는 동봉봉수대 자리로부터 100m 가량 떨어졌는데, 현재 군부대의 통신탑이 서 있다.
현재 서울시내에 있는 남산·무악·개화산을 위시하여 과거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전국 곳곳의 산봉우리에는 오늘날 레이더 혹은 통신시설이 설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그 옛날 봉수대가 있던 산봉우리 하나 하나가 모두 오늘날 레이더를 설치하기에 아주 적합한 지점들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조상들의 밝은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괄(李适)의 난과 무악전투(毋岳戰鬪)
무악재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로 이괄의 난과 무악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이괄의 난은 인조 2년(1624) 1월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인 이괄(李适)이 일으킨 반란으로서 이 난을 평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같은 해 2월 11일 무악에서의 전투였다.
이괄은 강개(慷慨)와 야망이 있는 무인으로, 그가 광해군 15년(1623)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를 즉위시킨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한 것은 이귀(李貴)와 김유(金)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북병사(北兵使)로 부임하기 직전 반정계획에 가담하였고, 한 때 반군의 대장에 추대되는 등 수훈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반정 직전부터 김유와 갈등이 있었고, 또한 반정 성공 후의 논공행상에서 반정계획에 늦게 참여하였다 하여 2등공신에 책정된 데다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자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다. 곧 이어 관서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그를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로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키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인조 2년(1624) 1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반란 음모를 미리 알고 한성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휘하 장수인 기익헌(奇益獻)·이수백(李守白)과 구성부사 한명련(韓明璉) 등과 함께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켜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한성으로 치달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로 삼아 대응하는 한편 반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한성에 있던 이괄의 동생 이돈 등 49명을 처형하였다.
반군은 황주·평산 등지에서 뒤쫓아온 도원수 장만의 관군을 물리쳤으며, 특히 저탄(猪灘)에서는 정부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의 추격군이 합세한 군단을 크게 물리쳤다. 이어 반군이 개성·벽제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오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길을 떠났으며, 한성은 반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영변에서부터 한성에 이르기까지 관군의 강한 반격이나 저지가 예상되면 사잇길을 택하였고, 그 행군 속도가 대단히 빨라 관군의 혼란을 가져 왔다. 영변을 출발한지 20일이 못되어 반군의 선봉기병 30명은 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성 안은 이미 그 전날 인조와 조신들이 공주로 떠난 뒤였으므로 아무런 저항 없이 입성하였다. 이괄은 경복궁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선조의 10째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은 이괄군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러 숙의 끝에 지형상 유리한 무악에 진을 쳤다. 관군이 무악에 진을 치게된 것은 방어사 정충신(鄭忠信)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 안령(鞍嶺)을 점거하여 진을 치면 도성을 내려다 보게 되니 적이 덤비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적은 쳐다 보고 공격해야 하고 우리는 높은 지점에서 싸우게 되니 틀림없이 적을 부술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라 관군은 무악에 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군사 이동을 밤에 하였는데, 이날 밤 동풍이 어찌나 심하게 불었던지 밤새 이동하면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는데도 성안에서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였고, 다음 날에야 관군이 무악을 점거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이 때도 정충신의 지략이 큰 공헌을 하였다. 즉, 먼저 무악의 봉수대를 점령한 다음 속임수로 저녁 일찍 후방에 아무 일이 없다는 신호로 봉화를 한번만 올리게 하여 반군으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는 한편 관군의 진영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게 하였던 것이다.
관군이 무악을 점령한 사실을 다음 날 2월 11일 아침에야 알게 된 이괄은 관군의 세력이 작은 것을 깔보고 도성 내 관민들에게 포고하기를, “장만의 군대 쯤은 단숨에 무찔러 보이겠노라.” “싸움을 구경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성 위에 올라 구경하라.”고 큰소리 치며 지금의 적십자병원(옛 경기감영터) 근방에서 군대를 좌우로 나누어 한 대는 애오개(阿峴)를 지나 대현(大峴) 쪽에서 진격하게 하고 다른 한 대는 경기중군영(京圻中軍營: 현 동명여자고등학교 자리) 부근에서 무악을 향해 치달아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양편 군대는 무악산정에 가까운 험준한 비탈에서 싸우게 되었다. 이 때 무악전투는 인왕산 곡성(曲城) 께로부터 남산에 이르는 성벽을 따라 빼곡히 모여든 도성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개되었는데, 곡성에서 남산까지의 성채가 구경꾼들로 인해 마치 백로떼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한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는데, 처음부터 동풍이 세차게 휘몰아쳐 반군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바람을 타고 급공격을 할 수 있었다. 관군은 죽기로 싸웠으나 수십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살과 탄알이 비오듯 하였으며 반군에게 유리한 가운데 전투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동풍에서 서북풍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무악정상을 쳐다보고 공격하던 반군은 바람머리에 위치하게 됨에 따라 휘날리는 먼지와 모래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에 관군은 용기를 얻어 공격을 가하니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날 묘시(卯時: 오전 6시 30분∼7시 30분 사이)에 시작된 전투는 4시간여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전투는 관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반군 400여명이 죽고 3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후 싸움이 벌어졌던 무악의 동쪽 봉우리를 승전봉(勝戰峰)이라 하였다.
무악전투에서 관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군사가 능히 천명의 군사를 막을 수 있다’는 명의 사신 동월(董越)의 표현대로 실제 무악재는 좌우의 높은 산 사이에 낀 급경사진 협곡인데다, 음력 2월 중순은 계절풍인 서북풍을 타고 중국대륙의 황사가 짙게 날아드는 시기인지라 지리적 특성과 계절풍이 관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패한 반군은 달아나 민가에 숨기도 하고 마포 서강으로 달아나 강물에 빠져 죽는 자도 있었다. 또한 도성민들이 돈의문과 서소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반군들은 곧바로 성내로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서 숭례문을 통하여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이괄은 남은 수백기와 함께 광희문을 빠져 나와 탈출하였고 다음 날 2월 12일 삼전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괄은 이곳에서 그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에게 아들·아우와 함께 살해되었다. 공주로 피난 갔던 인조는 2월 19일 공주를 떠나 2월 22일 한성에 돌아 왔다.
이괄의 난은 반군이 왕도에까지 침입하여 국왕이 남쪽으로 피난 가는 사태에 이른 조선왕조 초유의 반란사건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수도 한성은 미처 재건되기도 전에 내란을 치러야 했다. 또한 국왕의 피난으로 공백이 생긴 한성은 무질서와 혼란에 빠졌으며, 이 때 창경궁의 통명전·양화전·환경전 등의 전각들이 불타 버렸다. 국외적으로도 이 난은 후금(後金)과의 관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게 하였다. 즉 이괄의 부하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후금을 충동하여 인조 5년(1627) 정묘호란(丁卯胡亂)을 겪게 한 것이다.
무악재는 또한 임진왜란 때 선조 일행이 북으로 피난가면서 넘었던, 민족의 애환이 서린 고개이기도 하다. 선조 25년(1592)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서울로 진격해 오자, 조정에서는 4월 29일 어전회의를 열고 평양으로 피난가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선조는 이튿날 4월 30일 비 내리는 새벽 돈의문(서대문)을 지나 무악재를 넘었다. 이 때 어가행렬은 선조와 세자, 그리고 왕자·비빈(妃嬪)과 함께 이항복(李恒福)·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 등 100여명에 불과한 신하들이 뒤를 따랐다.
무악재 호랑이
무악재는 지금은 통일로로 연결되어지는 탄탄대로이지만 80여년 전만 해도 혼자서는 넘어가지 못할 험하고 무서운 고개였다. 주로 경기도 고양군에 사는 나무꾼들이 넘어 다녔던 무악재는 서울에서 가장 험난한 고개로 이름나 있었고, 가끔 호랑이가 나타나 행인을 해쳤다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지금 서대문독립공원 자리에 유인막(留人幕)을 설치하여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군사들은 행인들을 유인막에 머물게 했다가 10여명이 되면 고개 너머까지 호송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것도 그냥 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인막에 주둔하는 군사가 화승총을 들고 앞장 서서 행인들을 선도하였고, 비오는 날이면 화승총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총 대신 활과 살통을 메고 행인들을 호위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유인막을 지키는 군사들이 행인들에게서 호송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유인막이 생긴 것은 호환(虎患) 때문이었지만 이 유인막이 그토록 오래 지속된 것은 호랑이 때문이 아니라 그 나름의 부조리 때문이었다. ‘월치전(越峙錢)’이라 불리었던 호송료 갈취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였고, “군사면 유인막 군사냐”라는 말이 나올 만큼 부수입이 좋아 다른 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한다. 반대로 도성민들 사이에는 “무악재 호랑이보다 유인막 호랑이가 더 무섭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개화기 때만 해도 군대의 임무 중 하나가 호환(虎患)을 막는 일이었다고 한다. 한말의 군대 복무규정이라고 할 「병전(兵典)」에 호랑이 잡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인명을 많이 살상한 흉칙한 호랑이를 잡으면 장교는 승진시키고, 하사관이면 면포 20필을 주고, 천인이면 그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잡은 호랑이 가죽은 본인에게 주었다.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가 아니더라도 큰 호랑이를 잡은 자는 면포 10필을 주고 잡은 호랑이의 크기에 따라 상금으로 주는 면포의 필수가 줄어 들었으니, 이를 보더라도 당시 호랑이의 피해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외 무악재에는 호랑이에 얽힌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오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를 더 소개한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 한성부판윤을 지낸 박창선(朴昌先)에게 효성이 매우 지극한 조상이 한 분 있었다 한다. 이 선대조 박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한성의 집에서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한다. 이 날도 박씨가 아버지의 묘소를 향해 가고 있는데, 무악재에 이르자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박씨가 깜짝 놀라 “나는 선친의 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거든 잡아 먹으라.”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호랑이는 박씨 앞으로 다가와서 넙죽이 업드리더니 등에 타라는 몸짓을 하였다. 박씨는 호랑이 등에 탔다. 박씨를 태운 호랑이는 산봉우리를 몇개나 넘어 달렸고 이윽고 당도한 곳은 박씨의 선친묘 앞이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박씨가 묘소에 참배하였는데, 호랑이는 다시 박씨에게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박씨는 올 때와 같이 호랑이 등에 타고 무악재까지 왔는데, 호랑이는 박씨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박씨가 무악재에 이르면 그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다녔다. 이렇게 하기를 몇해가 지났고 박씨가 병들어 죽자 그 역시 고양군 신도면 선영에 장사 지냈다. 훗날 집안사람들이 박씨의 묘에 가 보니 묘 앞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한다. 이 이야기가 대궐에까지 들리자 임금이 감탄하여 ‘하늘이 내린 효자’라 하여 하사금을 내려 묘 옆에 사당을 짓고 효자정문을 세웠다. 이 때부터 그 부근 마을을 효자리라 하였다. 지금도 행정명으로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가 남아 전한다.
또 하나 이야기
인왕산 남쪽 끝자락에는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이름을 범바위, 한자로 호암(虎岩)이라 하였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중턱에는 한 쌍의 호랑이가 있어 무악재를 넘나 들었는데, 사람에게는 전혀 해를 끼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 무악재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노려보며 포성을 질러 혼을 빼놓곤 하였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왕산에 산불이 나서 먹을 것이 없어지자 호랑이가 인가로 내려왔다. 이를 본 강원도에서 온 포수 한 사람이 암컷 호랑이를 쏘아 잡았다. 암컷을 잃은 수컷은 사방천지를 찾아 헤매며 울부짖다가 범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죽고 말았다. 이 때 바위쪽이 떨어져 나가서 그 모양이 죽은 수컷처럼 생겼다 한다. 해가 솟아 햇빛이 중천에 퍼지면 이 바위에 반사되어 마치 호랑이 눈에서 나는 광채와 같았다. 후에 암컷을 쏘아 죽인 포수는 이 빛에 두 눈이 멀어버렸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많은 이름과 사연을 간직한 무악재는 그 옛날 높고 험준했던 고갯길이 오랜 세월 깎이고 깎이면서 지금은 북쪽으로 뻗는 통일로의 시발점이 되었다. 무악재 고갯마루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안산의 허리를 몇차례나 깎아내린 흔적을 볼 수 있다.
일제 때인 1935년에는 서대문∼영천까지 전차노선이 신설되면서 무악재길을 확장하고 낮추는 공사를 하여 동년 9월 23일 개통됨으로써 수척이 낮아졌다. 그리고 1960년대에는 종전까지 도로 폭이 14∼18m였던 독립문-홍제동-녹번동-갈현동-구파발-서울시계 간의 제14호 방사선(총길이 7,400m)를 35m로 확장하는 공사를 벌임으로써 무악재는 또 다시 대폭 깎여지게 되었다. 즉, 1961년에 현저동∼홍제동간 2,640m 가운데 고개마루 250m구간이 35m 폭으로 확장되었으며, 1964년에 1,000m, 1965년에 250m, 1966년에 1,140m가 확장되었으며, 녹번동∼구파발간 도로확장공사는 1966∼1969년에 이루어졌다.
고개마루 250m구간을 35m 폭으로 넓힌 확장공사가 끝난 후 이를 기념하여 1966년 11월 18일 홍제동∼독립문 쪽 고개 마루턱 오른편에 「무악재」 비석을 세웠다. 「무악재」라고 쓴 비제(碑題)는 고 박정희대통령의 글씨이고, 뒷면에 김영상(金永上)이 짓고 박충현(朴忠顯)이 쓴 음기(陰記)를 새겼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고개는 한양 전도 이래 의주대로 상의 좁고 험한 서울 서쪽 관문이었다. 인왕산 건너편 산은 무악(毋岳)이요, 그 생김새가 길마 같다 해서 일명은 안산(鞍山)으로 고개이름을 때로는 길마재라고도 하였지만 오랜동안 산이름을 따라서 무악재라 불러 내려온다.
이제 이 고갯길을 35미터 폭으로 확장하였기에 이를 기념하며 옛이름을 새겨두고자 이 자리에 박정희대통령의 친필로 무악재비를 세운다.
큰고개大峴 (대현동)
마포구 아현동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까이 있는 애오개에 비해 크고 높다 하여 큰고개, 한자로 대현(大峴)이라 한다. 이 고개가 있으므로 현재 서대문구 대현동(大峴洞)의 동명(洞名)이 유래되었다. 일명 대현동고개라 하기도 한다.
1940년대만 하여도 애오개길을 거쳐 대현을 넘어가는 일대가 대부분 배추·무우·호박밭이었다. 특히 대신초등학교 주변에서 발원하여 골짜기로 흐르는 개울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했던지 가재가 많아서 이 골짜기를 가재골이라 불렀다.
대현 바로 아래쪽에 마을신을 모시는 서낭당이 있었는데, 일제 때 일본인들이 혹 마을 주변에서 농사를 짓기만 하면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죽었다 한다. 그래서 한동안 일본인이 미우면 “아현동 서낭당골로 보내 버려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다.
서낭당을 지나면 바로 대현 고개마루로 몹시 가팔랐다. 1960년대 주택가가 형성되면서 가파른 고개 허리를 잘라 창내 쪽을 메꾸었기 때문에 대현은 비만 오면 진흙탕길이 되었다. 비오는 날이면 마차 바퀴가 빠져 고개를 넘기가 무척 힘들었으며, 행인들은 신발을 벗어들고 고개를 넘었을 만큼 진흙으로 고개는 뒤범벅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촌로터리에서 대현까지를 잔돌백 또는 잔돌배기(細石里)라고 불렀다. 대현에서 내려오는 자잘한 돌이 많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 대현의 북서쪽에는 망건과 당줄·감투를 만드는 집이 많아 마을 이름을 망건당굴, 한자로 마근동(麻根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대현파출소 뒤쪽에는 ‘신촌역 앞에 서는 시장’이라는 뜻의 ‘역전시장’(현재의 대현시장)이 섰다. 모래내에서 시금치·호박을 받아다가 파는 장사, 마포 쪽에서 새우젓·어물을 받아오는 상인, 고양군에서 오는 나무꾼 등이 모여들었으며, 자연히 이들을 상대로 하는 술집과 국밥집들이 생겨나면서 제법 큰 시장을 형성하였다.
애오개에서 가구점골목을 지나 굴레방다리를 건너면 서강과 마포와 대현 쪽으로 가는 세갈래 길이 나서는데, 그 중 대현으로 가는 길이 ‘애오개길’이다. 이 고갯길은 애오개에서 아현동 가구점골목을 거쳐 아현시장을 지나 이화여대 입구까지의 길로 조선초기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고갯길이다. 이 길목에 있는 굴레방다리는 지세로 말하면 풍수지리상 큰 소가 길마는 무악에다 벗어놓고 굴레는 이곳에다 벗어놓은 뒤 서강을 향하여 내려 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운 형국이라고 한다. 한편 대현이나 애오개를 넘기 위해 굴레방다리 주변에 있었던 대장간에서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이고 굴레를 갈아주었다 하여 이 곳을 굴레방다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굴레방다리를 지나 대현을 넘어가는 언덕을 복수산(福壽山)이라 하였다. 이 언덕 마을에 장수하는 노인들이 많았으므로 그렇게 불리었다 한다.
대현에서 흐르는 물과 금화산에서 능안로를 따라 흐르는 물이 굴레방다리에서 합쳐졌는데, 그 주변 논밭 사이로 아현동 쪽으로 다리가 있었다. 다리 난간이 말굽 같이 생겼다 하여 말굽다리라 하였는데, 현재의 북아현 2동사무소 남쪽, 백상빌딩 앞 육교 쯤이었다.
이 말굽다리를 지나면 행인들이 쉬어 갔다는 ‘너븐바위’가 오늘날 아현고가도로가 끝나는 지점, 백상빌딩 뒷편 북아현동 156번지에 있었다. 그 부근 마을을 너븐바윗골(廣岩洞)이라 했다. 그 옆으로 두께우물이 있어서 대현을 넘어가는 길손이나 넘어와서 쉬어 가는 길손들이 목을 축였다 한다. 두께우물은 물이 아주 맑고 특히 피부병에 좋다 하여 명수우물이라고도 하였으며, 그 주변 마을을 명수우물골이라 하였다.
벌고개罰峴 (신촌동)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학교에서 봉원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벌고개, 한자로 벌현(罰峴)이라 하였다. 고개의 명칭 유래는 이 고개가 조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소인 수경원(綏慶園)의 주룡(主龍)이 되므로 사람이 다니면 등성이 낮아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고개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다니는 사람을 벌하였으므로 벌고개, 벌현(罰峴)으로 불리어졌다.
수경원은 연세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백양로 오른쪽에 있었으나 1969년에 서오릉(西五陵)으로 옮겨져서 지금은 정자각만 남았다. 수경원은 규모는 작았지만 조선시대의 원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수경원의 주인인 영빈이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었으며, 영조 6년(1730) 영빈으로 봉해졌다. 영조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며, 4명의 옹주를 낳은 뒤 영조 11년(1735) 원자(사도세자)를 출산하여 후사를 기다리던 영조를 크게 기쁘게 하였다. 영조 38년(1762) 사도세자가 죽음을 당하는 와중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고 2년 후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매우 애통해 하면서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 지내게 하였다. 이듬해 시호를 의열(義烈)로 추증하였다. 소생으로 사도세자 외에 5명의 옹주가 있었다.
조선초기 이 고개에는 호랑이가 있어 고개를 넘는 사람을 해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세조는 병조판서 김질(金)에게 명하여 호랑이를 잡게 하였다. 김질은 군사를 거느리고 호랑이를 에워싸게 하였는데, 호랑이가 별안간 포위망을 뚫고 나가자 세조가 친히 봉우리에 올라서서 장수들을 지휘하여 호랑이를 잡았다. 이 와중에서 군사 두명이 호랑이에게 상처를 입자 세조는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고 먹을 것을 후하게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금화산고개금화장고개 (북아현동)
서대문구 북아현3동에서 경기대학교로 넘어가는 고개를 금화산 기슭에 위치한다 하여 금화산고개라 하고 혹 금화장고개라 하기도 하였다. 이 곳 금화산 기슭은 일제 때에 택지 조성이 이루어져서 일본인들의 개량주택이 들어서면서 이 곳을 금화장구역이라 한 뒤로 고개이름을 금화장고개라 하였다 한다.
호반재 (북아현동)
서대문구 북아현동 새마음종합병원에서 금화산 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를 호반재라 하였다. 그 연유는 한성 부근에 사는 호랑이들이 새키를 낳으면 새키를 데리고 인왕산 대왕호랑이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길목의 고개라는 뜻으로 호반재라 불리어졌다 한다.
공천고개 (북아현동)
고개의 명칭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경의선 철로 밑 북아현맨션아파트에서 북아현1동사무소를 거쳐 아현천주교회로 가는 고개를 공천고개라 하였다.
대궐재(연희동)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었던 연희궁(延禧宮)의 뒤에 있는 고개라 하여 대궐재라 불리어졌다. 그러나 연희궁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이상 대궐재의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궁궐지(宮闕誌)』에는 연희궁에 대하여,
도성 밖 서쪽 15리 양주(楊州)에 있는데 정종이 왕위를 선양(禪讓)하고 나서 이 궁에 머물렀다.
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도성 서쪽 15리 양주에 있고, 조선 2대 정종이 즉위한지 2년만에 동생 방원(芳遠)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일시 머물렀던 곳이나 궁터는 찾을 수 없다. 궁터는 대체로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희궁은 왕실의 이궁(離宮)으로서,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하여 세종 2년(1420)에 중건하였다. 당시 가뭄이 심하였지만 그 해 11월에 완공하였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태종과 세종은 때때로 이곳에 나가 인부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서쪽에 떨어져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서이궁(西離宮)이라 하다가 세종 7년(1425) 8월 정식으로 연희궁이라 하였다.
세종은 궁을 완공한 이듬해(세종 3년) 봄에는 병조에 명하여 궁 뒤 언덕에 소나무를 심어 경관을 좋게 했으며, 궁 주변에 과일나무와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세종 8년(1426)에 세종은 연희궁으로 옮겨와 머무르다가 이듬해 3월 창덕궁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등 이곳에 자주 들렀다. 세종 13년(1431) 4월의 기록에 의하면 연희궁은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로 쓰여 양잠을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세조 때는 연희궁을 서잠실(西蠶室)이라 하여 정5품 관리를 배치하였다. 성종 때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에도 연희궁을 서잠실이라 적고 있다.
그 후 연산군 11년(1505)에는 연희궁을 연희장으로 삼았다가 후에 폐쇄하였다. ‘연희궁 까마귀골 수박 파먹듯 한다.’라는 속담이 생긴 것은 연산군이 연희궁에서 어찌나 질탕하게 놀았던지 여름철이 되면 먹다 남은 참외와 수박을 산더미처럼 내다 버리는 바람에 까마귀떼가 몰려와서 쪼아 먹었기 때문이다.
무악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연희궁은 북쪽에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있고, 동서쪽으로 산맥이 뻗어 나가서 명당터로 여겨졌으므로 조선 개국 초에 하륜(河崙) 등이 도읍지로 삼을 것을 주장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밤고개 (연희동)
연희1동에 있는 서연중학교에서 연희시범아파트를 거쳐 모래내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밤고개라 하였다. 그것은 예전에 고개 주위에 밤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며, 음이 변하여 방고개라 하기도 하였다.
한달고개 (연희동)
연희로를 따라 연희동삼거리에서 서대문구청으로 넘어가는 고개, 곧 현재 연희2동사무소와 대림아파트가 있는 고개를 한달고개라 하였다. 옛날에는 이 일대에 소나무가 무성하고 고개가 매우 험했으므로 고개를 넘기가 힘들고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연희동로터리에서 홍은동로터리까지의 연희로가 1969년에 개통됨으로써 논골에서 한달고개로 가는 길이 직접 열리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홍제천 제방을 지나 백련교를 건너 왕래하였다 한다. 스위스그랜드호텔과 현대아파트가 자리한 곳은 백련산 밑으로 천수답 논농사를 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논골이라 불렀다. 특히 약수가 유명했다 하며 조선말 철종집안의 후예들이 살았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이 지역은 100여년 전에는 13호 정도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복숭아와 살구밭이 많아서 「논골복숭아」로 많이 알려졌다. 논골에서 홍제천을 넘으면 백련교와 서대문도서관 사이 홍제천 제방 밑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서 여기를 「벌사래대」라고 하였다.
지러넘어고개 (홍제동)
서대문구 홍제1동 320번지 고은초등학교 앞 고개를 지러넘어고개, 지름이고개 혹은 기레미고개라고 하였다. 이 고개는 무악재에서 홍은동로터리로 하여 백련사 쪽으로 가지 않고, 여기를 지나 신영중학교를 거쳐 백련교로 질러 넘어가는 길이었으므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현재의 고은초등학교 자리에는 서울시 시립장재장(市立葬齋場)이 있었다. 시립장재장은 1929년 6월 북아현동과 신당동에 있던 화장장이 주택가에 둘러 싸이게 됨으로써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며, 1970년대 초에 경기도 고양군 벽제리로 이전하였다. 또한 고은초등학교에서 북동쪽으로 50m 지점에는 죽은 사람의 유골을 안치하였던 납골당(納骨堂)이 있었다. 1960년대만 해도 비석들이 즐비하여 산들이 온통 비석으로 뒤덮혔다 한다.
새말고개 (북가좌동)
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가 있는 서대문구 북가좌동 733번지에서 서울신탁은행 가좌동지점(북가좌동 1081)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새로 생긴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새말고개라고 하였다.
백련산에서 명지대학교를 거쳐 한양아파트로 이어지는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숲이 울창하여 날이 저물면 인적이 끊어졌다 한다. 50여년 전만 해도 인왕산 호랑이나 여우들이 이 고개 부근까지 내려오곤 하여 당산목(堂山木), 신목(神木)으로 엄나무를 문 앞에 심거나 가지를 문설주에 걸어놓아 잡귀의 침입을 막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숲이 울창한 고개였으나 광복 후 마구 벌목하여 대지로 변경됨에 따라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고개에 있는 화산군신도비는 선조의 제7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손자인 화산군(花山君) 곤(滾)의 신도비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지정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295㎝, 폭 106㎝, 두께 61㎝이며, 귀부(龜趺)와 옥개석(屋蓋石)을 합하면 총높이가 6m가 된다. 비신(碑身)의 4면에 글씨가 촘촘히 새겨져 있는데, 숙종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을 지냈던 화산군의 행적 및 세계(世系)를 기록하였다. 두전(頭篆)은 화산군의 아들인 낙창군(洛昌君)의 솜씨이며, 글은 화산군의 조카 서평군(西平君)이 썼으며 비문은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송인명(宋寅明)이 찬(撰)하였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의 부석은 앞발을 움켜진 형태이나 45도 방향의 입을 벌리고 울부짖는 형상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부석의 재료는 강화도 화강석으로 썰물 때를 기다렸다가 바다 밑바닥 돌을 캔 것이고, 비신돌은 세검정 홍지문 옆 홍제천변 바위에서 떼어낸 돌이라고 한다. 애초에 떼어낸 돌의 덩치가 지금의 비신 크기보다 10배나 더 컸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바위를 운반할 방도가 없어 고심하다가 조정에서 명주 80필과 기생 80명을 하사받아 20세 이상의 장정을 모집한다는 방을 붙이니 순식간에 홍지문 성안으로 수백명이 모여들었다 한다. 장정들에게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인 후 하사받은 명주를 꼬아 돌에 묶고 끌게 하여 몇날 며칠을 걸려서 현재 북가좌동 위치까지 옮길 수 있었다 한다. 비신(碑身)을 덮고 있는 옥개석은 압록강에서 싣고 온 화강암인데, 목조건물의 지붕형태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서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지금 비 앞에는 높이 1.95m쯤 되는 문인석(文人石) 하나가 남아 있는데, 이것으로써 여기가 화산군의 묘소가 있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고개 밑 마을을 능안말 또는 거북골이라 하였다. 묘소의 규모가 커서 임금의 능과 같다 하여 능안말이라 하고 귀부(龜趺)가 거대하여 거북골이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