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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태평양전쟁의 상관성
임진왜란이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
임진왜란은 15921∼598년 극동에서 치러진 세계전쟁 이였다. 조선과 일본은 7년간의 전쟁을 통해 일본민족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전쟁 이였다. 임진왜란은 조선, 일본, 명나라와 함께 동아시아의 대 전쟁으로 그의 필적할만한 서양의 큰 전쟁은 없었다.
그 당시 일본군의 병력은 20만 명으로 명나라 군대 10 조선군 15만 명 도합 45만 명의 군사들이 조선이라는 좁은 땅에서 7년간에 걸쳐 전쟁을 치룬 것은 전 세계 전쟁사에 없는 커다란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은 16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최대의 전쟁이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지 1백년 만에 동양에서는 일본의 사무라이들에 의해 임진왜란이라는 세계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면서 동쪽을 향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했던 유럽의 무적함대 스페인을 비롯한 포르투갈의 상인과 마젤란 등이 발달된 해양 기술을 갖고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지나 인도양과 남지나해역을 거처 대만을 발견하고 1543년에는 일본에까지 진출하여 일본은 서양제국에 의해 엄청난 군사적 대변혁을 이루게 된다.
동아시아에까지 서양의 배들이 출몰하면서 일본에는 유럽의 최신형 무기인 조총이 전례 되었고 이것이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16세기 일본의 전국시대 때 사무라이들이 칼 대신 조총을 사용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군벌세력인 사무라이들을 평정하여 일본을 천하통일 했다.
당시로선 최첨단 무기인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던 사무라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명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전 일본을 병영화(兵營化) 시켜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조선정벌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군의 특징은 15세기∼16세기 약 2백년간 봉건 군주들 간의 치열한 전쟁 시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쇼군(將軍)들은 싸움과 전투는 곧 그들의 직업으로 일본군의 쇼군들은 전술전략가였다. 사무라이들은 무수히 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전쟁지략가 이었으며 용맹을 떨쳤던 막강한 군대였다.
1543년 포루투칼 상인들을 통해서 조총을 전수받은 일본의 무사(武士)들은 그 이후 50년간 조총을 개량하고 발전시켜 그들 나름대로의 최신무기를 갖춰 임진왜란 때 주력 무기로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사무라이 들은 전쟁에 나가 무사로써 떳떳하고 용맹스런 사생관(死生觀)을 갖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무라이 정신이 조선을 파죽지세로 몰고 간 것이다. 전쟁터에서 선봉에선 장군의 돌격 명령은 죽음을 뛰어넘는 무사정신이었다. 조선인들은 조총소리에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임진왜란 초기 부산의 동래성이 쉽게 몰락되면서 7일 만에 한양(漢陽)을 함락시킨 것이다.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農臣秀吉)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도공(陶工)을 무수히 잡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그 당시 일본에는 영주들 간의 다도(茶道)가 유행으로 조선에서 값비싼 고급다기(茶器)를 수입했었다. 그러나 조선은 밥그릇 에서부터 오줌을 받는 요강까지 모든 생활용품이 가마에서 구워낸 사기 제품이었으나, 일본에서는 숟가락에서부터 모든 생활용품이 나무제품이었다.
일본의 고도(古都) 교토에 있는 다이도쿠샤의 고호 안 이란 암자에는 일본의 일급 국보인 ‘기자에몬 이도’라는 다구(茶具) 한 점이 다섯 겹의 상자 속에 꼼꼼히 비장되어 있다. 그것을 한번 관람(觀覽) 하는데 는 우리 돈으로 3백만 원(2000년 당시)이 든다고 한다. 알고 보면, 놀랍게도 이 일본의 ‘대 명물’은 우리나라 경상도 해안지대에서 서민들이 만들어 새것일 때는 밥그릇으로 쓰다가 허름해지면 막걸리 잔으로나 굴리다가 아무데나 내버린 막사발이다. 막사발이란 말 그대로 흙을 뭉텅 떼어서 대충 빚어 유약 통에 텀벙 담갔다가 그냥 꺼내 말린 사발이다.
손으로 마구 빚다보니 무늬도 별로 없고 색조도 누르스름하며 기형도 엉성하다. 일본의 세계적 동양미술학자인 아냐기 무네요시는 1931년 어렵사리 이 막사발 보물을 관찰(觀察)하고서 크게 감탄한다. ‘몇 푼 안 되던 물건이 천금(千金)으로 바뀐’이 막사발이야말로 ‘미에 대한 철학과 생활의 축소판’으로 그 아름다움은 ‘솔직한 것, 자연스러운 것, 무심한 것, 사치스럽지 않은 것, 과장이 없는 것’에 있다고 높은 평가를 했다.
최고의 명품 도자기를 굽기 위해 1300°의 온도를 낼 수 있는 기술은 최첨단 기술로써 오늘날 반도체 산업보다 더 발달된 세계최고의 기술이었다. 온도계도 없던 시절에 불꽃을 보면서 1300°의 온도조절을 할 수 있는 기술은 최고의 과학기술이었다. 온도가 조금만 높거나 낮아도 도자기가 녹아버리거나 깨어지는 그야 말로 최첨단의 기술이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부터 도자기 생산기술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16세기 백자를 구워낼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중국과 조선뿐이 없었으며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수입되는 청화안료(靑華顔料)값이 금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기 때문에 소량으로 제작되었고 또한 사치성향이 있어서 나라에서는 생산량(生産量)을 철저히 통제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군 번천리 에서 소량 생산되어 왕실과 사대부 양반들에게만 공급되었다. 이러한 높은 기술수준을 보유하고 있는 조선의 많은 도공들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
처음에 일본에 잡혀온 조선 도공들은 도자기 굽는 것을 거부하며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면서 강하게 저항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사무라이들과 협상을 통해 2가지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조건으로 조선도공들은 굴복했다.
첫 번째: 조건은 신분에 대한 보장으로 조선 도공들은 천민계급으로 양반벼슬에 한(恨)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중상급 이상의 신분을 보장해 줄 것과
둘 째 : 결혼은 반드시 조선여자와 맺게 해줄 것을 약속 받아냈다.
그들은 결국 부(富)와 권력을 장악하여 일본의 주류사회로 성장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조선도공의 시조(始祖)인 이참평(李參平)을 신으로 모시고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이참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은 아리다 일대에서 도자기 원료인 양질(良質)의 자석광(磁石鑛)을 대량으로 발견하여 도자기 생산의 기반이 되는 조선 도공의 최첨단(最尖端) 기술(技術)과 함께 양질의 도자기 원료가 결합되어 나가사키 지방이 도자기 생산지(生産地)로 정착하여 수준 높은 최고급품의 우수한 청화백자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7세기 초 유럽에서는 왕실(王室)과 귀족(貴族)들 사이에 중국의 도자기 붐이 일어나 앞 다투어 도자기 구입에 열을 올렸다.
중국의 청화(靑華)백자(白磁)는 수입이 쉽지 않고 물량이 많지 않아 구하기가 힘들었으며 이러한 청화백자의 희소(稀少)가치 때문에 도자기 하나가 최고급 저택과 맞먹을 정도로 비싼 값에 거래되어 청화백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곧 부(富)와 명예(名譽)를 상징하는 보물(寶物)이었다.
유럽의 궁전에는 도자기 방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고 독일 베를린의 샤를 로턴 부르크 궁전(宮殿)에는 중국의 고급스런 청화백자로 꽉 들어차있었다. 볼품없는 도기(陶器)와 금속기(金屬器)만을 사용하던 유럽인들에게 동양에서 온 차갑고 단단하며 아름다운 도자기는 유럽귀족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17세기 초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던 청화백자는 중국 장시 성(江西省)의 경덕진(景德鎭)에서 생산된 신상품으로 유럽인들은 도자기 만든 기법을 쉽게 알아낼 수 없는 최첨단 기술로써 전 세계에 독점 수출되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유럽에 수출하는 도자기가 1년에 20만점 이상 되었다.
그런데 1644년 명(明)나라가 만주에서 일어난 청(淸)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중국최대의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이 전란(戰亂)에 휩싸여 유럽으로 수출되던 도자기 생산이 중단되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붙잡혀 온 조선의 도공에 의해 최고급 도자기가 대량 생산되어 일본의 아리다 도자기가 유럽시장을 중국대신 석권(席捲)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일본은 최고급품의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를 확보하였고 제품생산에 필요한 원료가 풍부했기 때문에 값비싼 도자기를 대량생산하여 유럽에 독점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조선도공에 의해 중국도자기를 뛰어 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 냈다.
조선의 도공이 일본에 끌려 간지 50년 만에 세계최고의 도자기가 생산되어 유럽시장을 석권하게 된 것이다. 아리다 도자기는 결국 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에서 세계최고의 걸작(傑作)인 대상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나가사키 항에는 유럽의 배들이 정박하여 아리다 도자기를 싫어 날랐으며 네덜란드 상인(商人)들은 나가사키 무역항의 외국인 거주지역인 데지마(出馬)에 동인도 회사의 무역관(貿易館)을 설치했다.
17세기중반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엄청난 양의 도자기를 주문하여 1662∼1682년 까지 20년간 4백만 점을 유럽에 수출하면서 다양한 직업이 나타났다. 가마에 불을 피우는 사람, 불꽃을 보면서 온도조절을 하는 전문가들이 나타났고, 또한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포장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그 당시 4백 명 이상의 포장사가 있었다.
원료만을 전문적으로 공급하는 사람, 색상을 내는 안료(顔料)를 공급하는 사람, 그림만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 등 다양한 직업이 나타났다.
일본은 조선 도자기공의 기술적 기반을 토대로 유럽의 도자기 시장을 장악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여 일본경제(日本經濟)는 급속히 성장하면서 약3백년간에 걸쳐 풍요롭고 안정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었다. 이러한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으로 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발원지 나가사키의 데지마(出馬)무역항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사무라이 무사인 쇼군체제를 붕괴시키고 천왕 친정형태의 통일국가를 형성시켜 오랑캐(짐승)를 처부 슨다는 근대 일본의 정치·사회적 변혁. 즉, 일본이 봉건제도인 바쿠후(幕藩)체제를 폐하고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와 자본주의로의 출발점을 이룬 정치적, 사회적 변혁이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의인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세력은 하급무사 출신들이다. 본래 귀족들이 장악했던 조정을 무사들이 빼앗은 사건이 바로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라고 말할 수 있다. 메이지 정부가 탄생한 이후에도 기존의 무사들이 실제의 정치결정을 수행하면서 천왕은 기본적으로 상징적인 역할만을 수행했다.
나가사키 무역항의 외국인 거주지역인 데지마(出馬)의 동인도 회사인 무역관을 통해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 이후 급격하게 근대화된 서구의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서양문물과 학문을 전파하는 통로역할을 하게 된다.
서양 문물도입에 앞장섰으며, 일본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은 수 많은 젊은 하급 무사들을 키워냈다. 그는 능력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면 나이와 신분 경력을 묻지 않고 쇼카촌숙(松下村塾) 이라는 기숙학교에서 인재를 양성했다. 일제 때 이회영선생이 항. 일 무장투쟁을 위해 독립군 양성소를 세웠던 신흥무관학교와 똑같이. 일본 근대화에 산실인 쇼카촌숙 기숙학교를 세워 일본 근대화를 이끌었던 인물들을 배출하여 일본의 힘을 키워 나갔다.
이곳 출신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천민들로 신분장벽에 가로막혀 있었던 하급 무사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일본 근대화에 핵심인물로 일본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백정을 비롯한 7천역의 천민계급신분 때문에 능력은 있으나 천민계급신분에 막혀 아까운 인재들이 관직 등용에 말이 묶여있었던 것과 너무나 많은 차이를 느껴 안타까울 따름이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미국과 유럽의 발전상황을 소개한 책자가 1백만 부 이상 팔려 나갈 정도로 일본 국민들은 서구문명의 높은 관심과 열망은 일본근대화 산업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다.
그 당시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새로운 서양의 국제질서의 가치관으로 바꿈으로서 조선과, 중국에 뒤떨어 지지 않는 또는 그보다 월등하게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이다.
일본 개항의 관문인 요코하마항 에서는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団) 이 서구문명을 시찰하기위해 출항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행정가들과 학자들도 대동하였는데 그 총수는 48명이었다. 그리고 60명의 유학생들을 함께 데려갔는데 그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일본의 중요한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1871년 12월 23일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하여, 워싱턴 디시를 거쳐 영국, 독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러시아, 프로이센, 덴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여행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이집트, 아덴,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홍콩, 상하이를 방문하였다. 1873년 10월 13일 귀국하여 거의 2년 동안 여행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미국과 영국 등 서구열강들의 교육, 과학기술, 문화, 군사, 사회와 경제 구조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 근대화를 촉진하는 일이었다.
이 여행 중에 이와쿠라는 각국에서 격렬한 쇼크를 받았다. 미국의 근대국가의 모습은 이와쿠라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어,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산조에게 전한 서신에‘은부(殷富)’를 진흥시키는 세상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고 적혀있다.
그 원인은 철도에 있고, 일본의 번영은 철도에 걸려있어 일본의 동서를 잇는 철도 설치가 급선무가 되었다. 이와쿠라가 귀국 후 일본 철도 회사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영국에서는 일본에서 생각할 수 없는 공업기술에 압도되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갖게 된 곳은 신성로마제국이후 독일이 통일된 과정을 살펴본 사절단이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수백 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있던 독일을 통일한 인물인 ‘비스마르크’에 대해 철저히 연구 분석을 하게 된다.
독일에서는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가 1862년에 재상으로 취임하여 통일을 향한 ‘고공행진’을 개시하였다. 비스마르크는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 프랑스(1870년)를 연달아 격파하고 1871년에 드디어 독일 통일을 달성하였다.
이와 같이, 19세기말의 독일은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대결이 소강국면에 접어든 1860년 이후의 이완기를 활용하여 통일을 성취한 바 있다. 1871년 독. 불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일을 일본은 근대국가의 모델로 삶고자 했다.
독일 초대 수상인 비스마르크는 일본 사절단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힘의 논리를 강조하면서 독일은 통일을 이룬 후 경제력과 군사력을 강화시켜 힘을 갖춰야 한고 강조하면서 국제외교의 배경에 가장 큰 힘은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고 일본사절단에게 강조했다. 또한 일본사절단은 독일 헌법과 사법제도와 형벌제도에 관심을 갖고 이를 근거로 이토 히로부미는 입헌 정치제도인 일본헌법을 만들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은 아세아에서 제일먼저 근대화를 이루어 부국강병의 길을 나가면서 제국주의의 발판을 마련하면서 조선침략의 서막을 열게 된다.
태평양전쟁당시 일본본토에 원자폭탄이 첫 번째 투하된 곳이 히로시마 다음으로 나가사키(長岐)였으며 이것은 태평양전쟁의 발원지로 미쓰비시, 미스의, 가와사끼 등 일본의 핵심적인 군수사업체가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을 봐서도 나가사키가 일본의 가장 중심으로 정치, 경제, 산업 등 태평양전쟁당시 일본의 핵심지역으로 그들을 움직인 것은 임진왜란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자기공 후예들은 3백여 년간 일본귀족사회에서 정치를 이끌어갔던 주도적인 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조선을 병탄(倂呑)했던 강경군국주의자들이 바로 조선의 도자기공 후예였다. 미국을 이끌어가는 민족이 유태인 인 것처럼 일본을 이끌고 주도했던 세력이 가고시마의 도자기공 후예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패전 뒤에도 중국과 동남아시아는 포기하더라도 만주는 일본이 언젠가는 다시 지배할 수 있기를 꿈꿨던 영원한 ‘대동아공영권’ 신봉자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그는 한반도 남쪽 해안지대만이라도 일본이 관세 따위의 장벽 없이 내국처럼 거래할 수 있는 지역으로 남기를 고대했다.
그는 태평양전쟁A급 전범으로 처형을 극적으로 면한 뒤 자민당 장기집권 체제의 토돼가된 1955년 보수합동을 주도했던, 기시 노부스케와 일본의 비핵화 선언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수상. 그리고 기시 노부스케가 외할아버지인 일본 극우세력의 선봉장인 아베신조 수상. 그들 역시 조선의 도자기공 후예였다.
조선 도자기공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태평양전쟁 때 A급 전범(戰犯)인 도조 히데키 내각의 외무대신을 두 번이나 지냈던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이었으며 그의 조상은 임진왜란 당시 가고시마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의 후예다.
동경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들어간 이래 그는 조선인 출신이라는 신분이 낙인처럼 따라 다녔다. 그래서인지 그는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조선인핏줄’ 임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의 첫 해외근무지는 중국의 선양이었으며, 스위스 3등 서기관을 거처 독일, 등 8년간의 해외근무를 통해 독일여성 에다와 결혼했다.
흥미롭게도 에다의 사별한 남편 게오르그는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 헐어버린 조선총독부건물(옛 중앙청)을 기본 설계한 기사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폭격(1941년 12월8일)즉, 대미 선전포고가 있기 두 달 전에 외무대신으로 발탁됐다.
그는 일본이 미국을 향해 선제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려하자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전쟁을 막으려 저지하였다. 미국과 전쟁을 벌이면 무조건 진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외교를 펼치는 한편, 군 출신인 도조 히데기 수상을 비롯한 전쟁광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군부내각은 전쟁을 피하자는 도고 시게노리를 외무대신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미국과 일본이 맞붙은 태평양전쟁은 도고 시게노리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본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도고 시게노리는 다시 스즈끼 간타로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발탁되어 맥아더 사령부와 종전(終戰)협정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수하여『수백만의 일본인과 일본천황의 목숨을 구한 인물로』평가받고 있다. 또한 러. 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또한, 가고시마출신의 조선도공의 후예다.
러. 일 전쟁당시, 러시아해군의 발틱 함대는 순양함을 포함한 9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세계최강이라는 자부심과 명성이 대단했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해협에 정박 중이었던 발틱 함대는 일본을 공격하기위해 출항했다. 유럽에서 출발해 아프리카대륙의 희망봉을 돌아 중동의 아라비아반도를 거처 아시아의 인도양을 지나 남지나해협을 통과해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일본의 대마도해협에 도착 하자마자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공격을 받고 세계최강이라는 발틱 함대는 무참하게 침몰했다.
세계최강이라는 명성과 함께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허망하게 침몰하게 된 원인은 일본이 영국과 맺은 영. 일 동맹을 통해서 영국의 적극적인 협조로, 영국의 식민지국가인 아프리카대륙 국가들과, 인도와 홍콩 등 여러 나라들이 러시아의 발틱 함대입항을 거부하여 생필품인 물과 식량보급을 받지 못하였고, 러시아 병사들이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위급한 환자가 속출하여, 많은 장병들이 죽어가는 최악의 상황에서 대마도 해협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해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러시아의 발틱 함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 한 체 처참하게 침몰 당했다.
러시아의 로제스트벤스키 해군제독이 포로가 된 뒤, 일본해군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포로가 되었을 당시 기함 포격을 받았을 때 입은 부상으로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던 상황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의 병문안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다.『그대와 같은 이에게 패했다는 점 때문에 나는 나의 패배가 결코 수치스럽지 않소.』라고 로제스트 벤스키 해군제독이 말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큰 적에게서 그런 칭찬을 받았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 또한 그의 승리를 축하하던 기자들이『제독님은 마치 영국의 넬슨 제독과 같으신 분이십니다.』라고 칭찬을 하자.『넬슨 제독과 비교한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한다면 거절하겠소. 나는 그분의 부사관 노릇이라도 할 만한 능력도 없는 자이올시다. 이유는 넬슨은 온 국민의 성원을 받으면서 싸워 이겼지만 이순신장군은 그를 잡아 죽이려는 관료들 가운데 싸워 이겼으니 말 이죠.』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일 전쟁에서 이순신장군의 전법을 응용하여 승리했다. 이와 같이 구한말 우리민족을 침략한 일본의 주도세력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도자기공의 후예들로써, 그들은 한반도를 식민지 삶는데 앞장섰으며, 우리민족에게 더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일본 천왕을 위해서는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목숨과 명예를 걸었던, 일본 군국주의세력의 핵심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첫댓글 한국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에 패하고 있다. 패함의 이유는 바로 당파 싸움이다. 고대로 부터 한반도는 문신들이 지배하며 무신들을 인격격으로 배격하며 천대하였다. 무신들은 문신들의 학대에 일본으로 건너 가 일본 사무라이를 만들었다. 뿐만 조선의 기술자들인 도자기공들은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으로가 일본 산업혁명을 일으킨다. 일본으로 건너 간 무신과 도자기공들은 일본 문화 발전의 중추이다. 한반도의 정치 권력자들은 이들을 배척하며 당쟁에 휩싸여 국력을 약화시켜지만 일본은 이들을 활용하여 일본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지금도 한반도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