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2014. 10, 4 ~ 2014. 12. 31
"작가님께서는 이 기간 안이라도 방문하실 때
작품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김준권의 판화 '엣 아일랜드'입니다.
"일본에 [우키요에]가 있다면 중국에는 [수인목판화]가 있고, 한국엔 [수묵목판화]가 있다."
차별성은 돈독한 것이고 우듬한 것이며 가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구별하여 '수묵목판화'라 명명한 장본인.
내 판화는 한국적이며 그것을 내가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섬처럼 빛납니다.
목판화가 이렇듯 회화작품 같고, 수채화의 맛이기도 한 것이 저간에는 없었죠.
다색판화가 몇 가지 색의 중첩을 기초로 한 평면적 컬러품이다면,
이 다색은 '공간 확보'를 위해 농담이 고려된 담채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숲에 원근도 있고 안개도 있으며 여백도 설핏합니다...
'섬'에서도 수평선에 중첩된 약투명의 겹침이 검소한 중색효과를 자아냅니다.
지난 세월의 삼각파도도 없고, 지난 역사의 뱃고동도 보이지 않는
나라는 독자는 한 마리 갈매기의 자격으로 무심히 저 섬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없음부호보다 고요하고 물결소리보다 무심한 고도(孤島)의 적막과 함께 돌아온
우리들의 일상 풍경이기도 하구요.
천성적 감수성이 입체의 영역에 와서 흙을 떡 주무르 듯 즐거운 작가. 김대성에게 조각할 수 있는 환경만
허락되었더다면 우리가 보아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대작들을 둘레에서 자주 볼 수 있었을 것을...
김대성은 조각적 표정이 순정하고 예리한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 어느 시점에서 만들어졌죠.
'최 민'의 다큐 사진에 등장한 옛 인물을 모델 삼았는데,
옆을 보나 뒷태를 보나 앞 표정을 대하나 유연하고 자재로워 생동감이 넘쳐납니다.
흔히 사진을 보고 그리면서 사진보다 더 죽어버린 초상화가 그려지는 것은
그 사실적 묘사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재조 없는 화가의 것이라 하죠.
'사진'은 감성의 재료이고 그 상상력은 손끝에서 살아나
더 선연하고 더 육감적이고 더 기술적이라야 조각가답겠습니다.
평면에서 빠져나와 돌출하는 생기(生氣)는 잘 생긴 조각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반갑습니다.
박종선...
어머니가 한국화 화가시고 아버지가 지역 교육청 수장을 맡으셨던 이력의 귀티나는 아들.
모범적인 교사로부터 슬슬 제 속에 감추인 예술적 본성을 깨뜨리며 밖으로 걸어나오는 듯
근래 작품활동이 활발하답니다.
사실주의 그림이 입맛에 맞다면 조만간 독특한 주제로의 이적이랄까,
삶의 중층이든 생의 서사든 새로운 내용과 감각의 밀도를 더할 궁리에 골똘할 것 같은 행보죠.
학교에 가마를 두고 흙을 주무르거나 어차피 치를 자기갱신의 도발이라면 제차 삼차 개인전을 향한 부대낌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죠. 그 어언 날 나와 또 만나 이번엔 조금 취한 혀로 고시랑거리는 날도 혹 오리라
내심 기대하게 하는 후뱁죠...
모정 이윤숙 화백...
전화 상의 고백이었지만, "오늘날 이렇게 열심히 하는 화가는 본 적이 없다." 예요.
예로부터 화가들 끼리 만나 나누는 첫 마디는 "작업 많이 했어?"가 인삿말이었습니다.
요새는 사라진 문장이고, "어떻게 살어?"로 바뀐지 오래 되었죠.
미술이 더 이상 밥술에 걸맞지 않고 아닌 고독에 자가발전을 필요로하는
외딴섬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는 걸까, 열심히하는 화가들이 많지 않은 시대인 것이 사실입죠.
예술은 삶의 질료로 인간이 빚는다는 사실은 변함 없건만
시대적 변천과 그 개인적 환경의 탓으로 하여 놓고 버리고 감추고 잊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한대한 창작의 동력을 내려놓는 데 이르게 한 참 쓸쓸한 계절인 것.
'모정'은 이 모진 시간대를 작가의 존재론적 기회로 삼은 듯해요. 반드시 옳죠.
서예란 일상이며 돕니다.
내면을 그리는 색채이며 형상이며 공간입니다.
세월이 무심하고 역사가 슬퍼도 잠시잠시 비껴 스스로를 달래고 채찍하며 돌아보고 나아가는
서예는 개인의 솟대고 장승이며 벅수고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생긴 것이 모두 화살표처럼 생겼습니다.
무언의 언입니다.
조창익... 민중운동에 남달리 침착한 본능을 가진 외유내강의 학인.
언제 저런 서필을 손끝에 달고 다녔는지 몰라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김태완...
'민' 자 들어가는 자리라면 무엇이든 손을 잡는 화가.
그의 낙천성은 계산이 없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평범합니다. 설계에 쏟는 시간보다는 실천에 붓는 시간이
더 옳고, 그것의 헛헛한 반추보다는 반동의 장딴지가 더 우람한 동력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삶이 때로 모질고 거칠게 다그쳐와도 칼칼하게 몇 번 웃어버리면 방금 전까지 우울하던 잡동사니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와 영문도 모른 채 함께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쓸쓸하나 고독하지 않고 가벼우나 헤프지 않아, 남 모를 행복감에 치를 떠는 듯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요.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 같은 노래를 부르면
질감은 약간 모자라지만^^ 목성의 토운이나 형태는 밀리지 않은
모창적 재미도 돈독한...!
[다음 호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