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시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성가대의 최고 권위인 지휘자의 인도 또는 성가 대장의 선창에 따라서 회중들이 함께 부르는 찬양입니다. 내용은 상당히 깊습니다. 신학적입니다. 모든 존재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다 파악하여 알고 계시는 여호와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가장 놓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가장 먼 곳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절규하며 하나님의 부재를 한탄하는 자리에까지 충만하게 임재 하여 계시는 여호와의 편재遍在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아무리 몸부림친다 할지라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여호와의 창조創造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신학과 오랜 시간 무수히 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한 탁월한 지혜로도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여호와의 섭리攝理에 대하여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분히 교리적인 시편 또는 조직신학적인 시편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다소 딱딱할 수도 있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특별한 설명 없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단히 신앙적입니다.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인생 말년에 이르러 평안한 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경험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가족의 일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의 방문과 함께 차려진 성대한 잔치자리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형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형들은 실추된 여호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골리앗과 맞대결을 벌이겠다는 그를 꾸짖었습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이후에는 성민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장수로서 탁월한 공적을 쌓았습니다.
출전하는 전투마다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참람한 누명을 뒤집어썼습니다. 호시탐탐 자신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던 사울을 피해서 도망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도망자 생활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라와 민족을 대적하고 유린하는 이방인의 편에 서야했습니다. 모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충만한 능력을 철저히 감춰야했습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부러 미친 시늉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붙잡혔을 때는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성문에 말도 되지 않는 글자를 아무렇게나 갈겨썼습니다. 수염에 침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바로 그때,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보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들이 저를 짓밟고 하루 종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종일 저를 추격하고 있습니다. 저를 대적하는 교만한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두려울 때 (오직) 주를 신뢰하겠습니다.”(시56:1-3)라고 기도했습니다. 도와주심을 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외치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무수히 많은 인생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아니 호흡하는 모든 순간 함께 해 주셨습니다. 동행해 주셨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는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며 으르렁거리던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때에 맞는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면서까지 충성하는 탁월한 장수들을 붙여주셨습니다. 그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의 인생이었지만 여호와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23:1a)라는 고백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에 시인은 자신이 체험한 여호와의 속성을 신앙적인 언어를 동원해서 찬양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몸부림쳐야 했었던 자신의 삶의 단면들을 고백합니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삶을 사는 동안 오직 여호와 한 분만 의지하기로 결단하며 노래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끌어주셨습니다. 오늘도 이끌고 계십니다. 이후로도 영원까지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필요한 모든 환경들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붙여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시인의 찬양은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저를 낱낱이 살펴보셨습니다.”(시139:1a)라고 시작됩니다. “살피다חָקַר(하카르)”는 “꿰뚫고 들어가다, 발견하다, 탐구하다, 밝혀지다, 조사하다.” 등의 뜻입니다. “사람들은 광맥을 찾기 위해 땅을 깊이 파고 아주 어두운 곳을 조사한다.”(욥28:3)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저 찾아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닙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흐르고 있는 물의 근원이나 매장되어 있는 금속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곧 반드시 찾아야할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예리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탐색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누구도 감히 막아설 수 없는 뜨거운 열정Pathos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나 곧 본질을 찾으셨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인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내기 위해서 땅을 깊이 파헤치고 뒤집어엎듯이 살피셨습니다. 관찰하셨습니다. 연구하셨습니다. 찾으셨습니다. 행동의 근거인 마음이 어떤지 찾으셨습니다. 본질이 어떤지 찾으셨습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저를 훤히 알고 계십니다.”(시139:1b)라고 찬양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시인과 관련된 것들을 한 가지도 빠짐없이 모두 다 아셨습니다.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아셨습니다.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주께서”입니다. 강조입니다.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지극히 유한한 인생이 아니라 불가능이 전혀 없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시인을 낱낱이 알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시인의 앉고 일어섬을 아셨습니다.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는 평안할 때를 아셨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이 힘겨워서 “하나님! 제발 좀 살려주세요!”라고 외칠 수밖에 없을 때를 아셨습니다.
시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일일이 다 또 환하게 아셨습니다. 시인의 공적인 활동은 물론 사적인 활동도 다 아셨습니다. 일하는 모습도 알고, 쉬는 모습도 빠짐없이 다 아셨습니다. 쏟아놓는 말들도 예외 없이 다 아셨습니다. 생각하고 있을 뿐 아직 혀에 올려놓지 않은 말들도 모두 다 아셨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다 아셨습니다. 내뱉은 말에 담겨 있는 은밀한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다 아셨습니다. 마음속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다 아셨습니다. 누구도 듣지 못한 지극히 작은 신음에 담겨 있는 의미까지도 환하게 다 아셨습니다.
차마 꺼내놓지 못한 말도 다 아셨습니다. 시인에 대한 여호와의 지식은 그야말로 구체적이었습니다. 사실적이었습니다. 조금도 더하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모두 다 아셨습니다. 시인의 찬양은 “여호와께서 저의 앞과 뒤를 두루 감싸 주셨습니다. 당신의 (능하신) 손을 저의 머리에 얹어서 안수해 주셨습니다.”(시139:5)라고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시인의 앞에 계셨습니다. 뒤에도 계셨습니다. 오른쪽에 계셨습니다. 왼쪽에도 계셨습니다. 모든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도 계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시인을 두루 감싸주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빈틈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크고 완벽한 계획, 크고 완벽한 목적, 크고 완벽한 섭리 속에 이끌어주셨습니다.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여 주시니 걱정할 것 (전혀) 없어라.”(시23:4)라는 고백대로, 죽음이 깊게 드리워져 있는 절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도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앞뒤를 둘러싸고 지켜주셨습니다. 이끌어주셨습니다. 지극히 능하신 당신의 거룩한 손을 얹어주셨습니다. 안수해 주셨습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높고, 너무나 깊고, 너무나 넓고, 너무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누구도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오! 하나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감히)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롬11:33)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시인은 무수히 많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서워하거나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그에게 대해서 잘 아시는 여호와께서 반드시 필요한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저와 여러분 역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아예 모르고 있는 은밀한 부분은 물론 죄가 보이면 지체하지 않고 달려갈 수밖에 없는 지극히 연약한 부분까지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적나라하게 모두 다 알고 계십니다. 시인의 찬양은 “여호와를 벗어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당신 앞을 떠나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시139:7)라고 이어집니다. 여호와는 어느 곳에나 다 계십니다.
수직적으로 아무리 높아도 거기에 계십니다. 아무리 깊어도 거기에 계십니다. 수평적으로 아무리 멀어도 거기에 계십니다. 지극히 가까운 곳 거기에도 계십니다. 태양이 자신의 화려한 자태姿態를 자신만만하게 드러내는 동쪽 끝에도 계십니다. 태양이 자신의 자취를 순식간에 또 감쪽같이 감춰버리는 서쪽 끝에도 계십니다. 지극히 위험하고, 지극히 두렵고, 지극히 떨리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미한 희망조차 찾을 수 없는 절대절망의 자리에도 계십니다. 거기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보호해주십니다. 인도해주십니다.
여호와께 숨겨질 수 있는 장소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모든 존재를 흔적도 없이 완전히 감춰버리는 흑암조차도 여호와께는 의미가 없습니다. 흑암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고생길을 걸을 때에 이 몸 살려주시며, 손을 드시어 살기 띤 원수들을 치시고 오른손으로 붙들어 이 몸 구해 주십니다.”(시138:7)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흑암 곧 인생에게 닥치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도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감찰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는 여호와의 눈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크고 두려운 고통과 낙심과 이별과 손실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택하신 당신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여호와의 섭리라는 거룩한 측면에서 볼 때는 하등何等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사도에 외침에 따르면,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여호와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선을 완벽하게 이루어내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갖춰야만 하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탁월한 도구입니다. 인생은 생각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도구입니다.
신실한 여호와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되든지, 어떤 환난과 시험과 고난과 핍박을 당하게 되든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기소침해 있을 이유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때가 이르면 마침내 이루어주실 놀라운 선을 기대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 됩니다. 시인의 찬양은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시139:14)라고 이어집니다. 저는 가끔 사람을 생각합니다.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저절로 감탄이 쏟아집니다. 감격하게 됩니다.
울컥 눈물이 날 때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지으셨습니다. 그 가운데는 저와 여러분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작정하셨습니다. 당신의 때에 몸을 창조하고 영혼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하루를 살기도 전 아니 단 1초를 살기도 전에 저와 여러분의 삶 전체를 꿰뚫어보셨습니다. 모든 시간을 관통해서 저와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당신의 목전에 두셨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에 불과한 저와 여러분의 처음과 마지막이 되어주셨습니다. 시작과 마침이 되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한 시간의 주인이 되어주셨습니다. 이미 허락하셨지만,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무수히 많은 날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당신의 거룩한 책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구체적으로, 완벽하게 이끌어주셨습니다. 환경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람을 붙여주셨습니다.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당신을 향한 열망과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당신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잘못된 생각과 판단 또는 욕심 때문에 두고 말았던 치명적인 악수까지도 기막힌 묘수로 바꿔주셨습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넘치도록 풍성하게 베풀어주셨습니다. 자기 확신과 과신은 물론 한 순간의 판단 실수 때문에 도망자 신세로 전략하고 말았었던 모세의 굴곡진 인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시기심에 사로잡혔던 형들에 의해서 종으로 팔려가고 말았던 요셉의 험난했던 인생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시는 여호와의 놀라운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 역시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사해주고 계십니다.
시인의 찬양은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습니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습니다.”(시139:17-18)라고 이어집니다. 시인을 향한 여호와의 거룩한 계획, 생각, 작정은 너무나 고귀합니다. 너무나 다양합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누구도 감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세다가 다 세지 못하고 잠이 들고, 깨어서 다시 세어도 여전히 다 셀 수 없습니다.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리를 높여서 목청이 터지도록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서 여호와를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저와 여러분을 저와 여러분보다 훨씬 더 잘 아십니다. 여호와는 저와 여러분을 한순간도 떠나지 않으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함께 하십니다. 여호와는 저와 여러분을 계획하셨습니다. 지으셨습니다.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소유 삼으셨습니다. 거룩한 성전 삼고 임하기 원하십니다. 여호와는 저와 여러분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여호와의 최대 관심사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당연히 저와 여러분에게 집중하십니다.
당신 전부를 쏟아 붓고 계십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것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선지자는 “시온아, 두려워 마라. (손을 길게 늘어뜨리지 말고) 기운을 내라.”(습3:16b)라고 외쳤습니다. 절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계속해서 “너를 구하신 용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습3:17)라고 외쳤습니다.
구원자 되시는 여호와께서 극심한 환난과 시험 중에도 당신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백성들 가운데 친히 임재 하여 거하신다고 외쳤습니다. 함께 동행 하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을 즐거워하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을 기뻐하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들과 함께 안식하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외쳤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많은 제자들 가운데 유독 한 아이를 귀여워하였습니다.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별로인데다 지력까지 떨어지는 아이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원장의 행위가 불만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쌓여갔습니다.
마침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원장은 제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머든 제자들에게 각각 새 한 마리씩을 나눠주었습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누구도 보지 않게 죽여서 다시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절대로 누구에게도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습니다. 해질녘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손에는 그들이 죽인 새가 하나씩 들려 있었습니다. 수도원 마당은 죽은 새들로 가득 찼습니다. 문제는 원장이 아끼는 아이였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구제불능이라는 말을 쏟아놓고 있던 순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원장으로부터 받아들었던 새는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보라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원장은 제자들의 반응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 새를 왜 죽이지 못하고 그냥 산채로 가져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죽이지 못하고 그냥 가져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원장이 아이를 특별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여호와께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 앞에 산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여호와께서 언제 어디서나 친히 함께 동행 하시는 복된 삶, 이끌어주시고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복된 삶, 필요가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복된 삶, 무엇보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 아무렇게나 던져진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