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의 『그림이라는 위로』"
가. 그림 읽기
이 책은 저자가 19명의 화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휴식과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그림으로 진정한 쉼을 얻길 바라며 그림을 고르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런 만큼 빠르게 읽기가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쉬엄쉬엄 읽어야 할 책이다.
저자는 이탈리아 미술품 복원사이자 공인 문화해설사라고 한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 해설은 나름의 별미가 있다. 그것이 내가 굳이 이 책을 택한 이유이다. 개인적으로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온전히 개인 몫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보든 그것에서 무엇을 느끼든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아무래도 책을 통해 명화를 대한다는 것은 사실 작품 그 자체보다는 화가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 동안 몇 권의 그림과 관련된 글을 읽었지만 명화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그림에 대한 감동은 느리게 왔기 때문이다. 이 책을 펼치면서 드는 생각이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작품보다는 저자가 소개한 19명의 화가 이야기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러니 <그림이라는 위로>는 애초부터 틀린 모양이다. 이로써 나는 그림에 문외한임을 스스로 드러낸다. 그러나 화가에 대해 이해를 더한다는 것은 후에 그 화가들의 전시회라도 있게 되면 그때 그림을 조금은 더 깊은 마음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그림을 위안, 희망, 치유 휴식 등 네 영역으로 구분하여 그림을 실었다. 그 각각에 19명의 화가를 고르게 배정하고 작품 역시 고르게 하여 100개의 명화를 담았다. 그림을 통해 저자가 느낀 그런 감정의 일부라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긴다.
나. 위안의 미술관
모지스의 그림은 한 폭의 동화 같다. 그의 그림에는 동심이 가득 담겨있다. 모지스의 그림은 두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처럼 동화 같은 그림 이면의 작가의 삶 또한 주목을 받는다. 모지스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나이인 76세부터 그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동화 같은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영락없는 초등학생 수준의 모습인데도 그림은 참 따뜻하고 정겹다. 황혼의 나이에도 그런 깨끗함이 마음 어딘가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구나 지금은 순수가 사라진 시대가 아니던가.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철을 모르는 나이다. 이제부터라도 76세쯤의 나이가 되어서도 무엇인가에 몰두할 수 있도록 나를 차근히 돌아봐야겠다. 창을 열자 <창밖 후식밸리의 풍경> 같은 목가적 풍경 대신 아파트 사이로 도회지의 더운 열기가 훅 하고 몰려든다.
수많은 설명을 읽어도 내게 뭉크는 그저 공포에 잔뜩 질린 얼굴만이 오롯이 남아있다. 하도 유명한 그림이어서 그런지 이 책엔 그 그림조차 싣지 않았다. 책의 주제와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삶은 엉망인 집안 분위기로 불안에 대한 공포와 환청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공포를 화폭에 옮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그런 공포로부터 벗어나기를 꿈꾸었다. 그런 소망을 담은 그림이 <태양>일 것이다. 그림은 모처럼 눈이 시리다. 세상은 환희로 들끓는다.
앙리 마티스는 야수파의 창시자다. 야수파라는 이름은 사실 그를 비난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그의 그림은 그 이전의 그림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거칠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모자를 쓴 여인>은 그 강렬한 색체는 파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조금 성깔이 죽은 걸까? 그림이 조금은 온순해진다. 그러나 <잠자는 여인>은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초등학생 그림이다. 연필선이 드러나고 그림은 최대한 생략되어 단순해진 느낌이다. 더러 채색도 성의 없이 한 것 같다. 그냥 나의 무지를 탓하기로 한다.
카유보트라는 화가는 내게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무척 편안하게 다가온다. 유독 전원 같은 풍경을 좋아하는 탓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발로통의 그림도 내 시선을 붙잡는다. 특히 석양을 좋아하는 내게는 찰떡같은 그림이다.
아마도 그의 석양 그림은 내 스마트폰 속 석양 사진 어디에도 있을 법하다. 다섯 화가의 그림을 둘러보다 보니 다소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하다. 창밖에서 몰아치는 후끈한 열기조차 잊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림이 주는 위로는 참으로 크다.
다. 희망의 미술관
고갱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안락한 삶을 포기한 대담한 인물이다. 그로 인해 그의 삶은 파탄이 났지만 그 대가로 수많은 명작을 남겼고, 미술사에 이름을 뚜렷이 했다. 그는 희망을 발견했을지 모르나 그의 가족은 절망의 길이 아니었을까 문득 세속적인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인생은 자신의 의지로 살 때만 의미가 있는 거야. 얼마나 강한 의지로 살았는지가 중요해”라는 그의 말은 깊은 울림이 아니라 내게는 변명처럼 들린다. 어떻든 그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을 평생 찾아다닌 화가였다고 한다.
진즉에 그에게 나훈아의 <공>을 들려주어야 했었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모네는 빛을 쫓아 그린 화가다. 그는 종일 빛을 관찰했고, 그 빛의 변화에 심취했다. <건초더미>는 그 빛의 연속성을 그린 그림이다. 특히 그는 수련에 심취했다. 연못에는 수련이 있고, 빛이 있고, 그 빛에 흔들리는 물이 있고, 정적이 있고, 물속에 투영된 거꾸로 된 세상이 있다.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평론가들은 마치 적당히 그린 그림에 태양만이 붉게 타오르는 <해돋이, 인상>을 보고 그의 그림에 대해 강렬한 태양만이 인상적이라고 했다던가? 아마 이 역시 혹평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 인상파라고 한다. 앙리 마티스가 떠오른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보는 그림 중 하나가 고흐의 그림들일 것이다.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예술의 전당에서의 열린 <고흐 전>을 다 가봤겠는가,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그런 유명세와 달리 당시에는 그저 별 볼일 없는 그림이었다.
그는 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삶은 늘 궁핍했다. 그는 고단한 삶을 그림으로 씻어내려고 애썼으며 마침내 그림 속에서 평온을 마주했다. 그런 평온의 끝에 수많은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본 밤하늘을 늘 별들이 하늘 가득했다.
고흐의 밤하늘도 그랬을 것이다. 별은 시시각각 흐르고 더러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그렸을 것이다. 그것은 환상 그 자체였을 것이다.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 본 하늘도 실제로 그랬었다. 그런 밤하늘은 온갖 소음으로 가득한 한낮을 지워내고도 남았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밤의 카페 테라스>가 그렇고,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 또한 그렇다. 그러다 결국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절정을 맞는다. 문득 이런 이름의 오래된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그 시절 참 많은 소녀들이 고요한 선율에 밤을 잊었었다. 물론 도시 불빛으로 별은 사라졌지만.
요즈음은 트로트 시대다. 무명의 가수가 오디오 프로그램에서 횡재를 하더니 지금은 어떤 가수보다 귀한 몸이 되었다. 그야말로 자고 나니 삶이 달라진 것이다. 아마도 구스타프 클림트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싶다.
그는 <철학>이라는 그림으로 비난을 받고 거의 몰락 직전에 <키스>라는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라섰다. 더구나 <키스>는 몽환적이기도 하지만 금세공 기술이 가미된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동양에서는 탱화에나 들어갈 금이 미술작품에 쓰인 것이다.
화가들은 그들의 꿈을 좇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그림에서 위로를 얻고 희망을 얻는다. 그들의 그림 앞에 서 있으면 더러 우주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기도 하고, 햇살에 빨려들기도 한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라. 치유의 미술관
피에르 보나르의 작품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오는 안온함을 가득 담고 있다. 여유가 있는 그림 속 풍경은 시간조차 정지되는 듯하다. 그런 평온은 칼 라르손의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칼 라르손의 작품은 밝고 활기차다. 평온한 일상에 걱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동화 같은 그림이나 사진 같은 그림들은 순식간에 그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런 밝은 그림을 그린 라르손의 어린 시절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도 벅찬 힘든 삶이었다고 한다. 그 어려움을 그는 그런 어둠을 이겨낸 것이다. 그러니 그림이 밝을 수밖에.
윌리엄 터너의 그림은 독특하다. 마치 서양화와 동양화의 접점에 놓여있는 것 같다. 특히 <산 조르지오 마조레 : 이른 아침> 같은 작품이 더욱 그렇다. 격랑 속에 우리를 가두는가 하면, 한없이 평화로운 곳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그의 풍경화는 보는 그림이 아니라 느끼는 그림인 듯하다. “나는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라는 그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기도 한다. 보이는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느끼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근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폴 세잔은 내게는 사과 그림만이 깊숙이 잔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입체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사조에 영향을 주었다. 피카소, 브라크 등도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독특한 화가다. 그림을 잘 그리려하기보다는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 듯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대상에 대해 의심하고 탐구했다. 그는 그런 대상들의 본질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소개된 작품만으로는 그런 분위기를 읽어낼 수 없어 안타깝다.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은 “자연과 사물의 형태를 원기둥과 구, 원뿔로 해석한 독자적인 화풍”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그런데 책에는 그 작품은 없다. 대신에 설명이 없는 작품이 들어가 있다.
인터넷으로 작품을 찾았다. 그림 어디에서도 작품평가와 같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사과는 구모양이지만, 원기둥, 원뿔 같은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한 평가는 오히려 <생 빅투아르 산>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내 무지를 얼마나 더 나무라야할지 난감하다.
마. 휴식의 미술관
내게 클로젠의 그림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서 어린 시절 내가 자란 농촌 풍경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농촌 생활이란 늘 분주하고 먼지가 풀썩인다. 논두렁 밭두렁을 뛰어다니며 잠자리를 잡던 기억들이 아스라하다.
나무 그늘 아래 두 여인이 앉아있다. 모녀 사이 같기도 한 장면이다. 어미는 잔뜩 화가 난 듯하고 딸은 그런 엄마가 못마땅하다. 딸은 농촌에는 이미 마음이 떠난 듯하다. 농촌을 떠나려는 딸, 그런 딸을 붙잡지도 못하고 놓아주지도 못하는 안쓰러운 모정이 있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화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읽을 수도 있지만 그림 속에 투영된 나를 읽을 수도 있다. 어떻게 읽든 그것은 모두 충분히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내가 알고 있는 페르메이르의 유일한 작품이다. 햇빛에 반짝이는 귀고리가 어둠을 배경으로 유난히 눈에 띄기 때문이다. 소개된 그의 그림들은 대체로 밝다. 그는 처가살이로 다른 화가처럼 삶의 굴곡이 그리 없었던 탓인 모양이다. 그림이 편안하다.
알폰스 무하의 그림 속 여인들은 우아하고 아름답다. 육감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선지 자칫 내 시선으로는 예술과 외설의 경계 어디쯤인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 그의 그림이 포스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바쁜 일상에서 잠시 손길을 놓게 한다. 저마다 그림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매혹적인 여인의 시선에 잠시의 휴식을 맡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탓인지 창밖의 햇살이 오늘은 조금 주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