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터를 보면 내 마음에 모종의 바람이 인다. 비어 있지만 충만한 그 무엇이 그곳에서 이 만큼 떨어진 공간 사이로 그 충만의 낮은 목소리로 간절하게 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이 영악한 세상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결코 이루어지는 법 없는 세상이, 또한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는 것도 아닌 채, 온전한 이루어짐이란 단지 이 세상의 멸망 밖에 없음을 은유하더라도, 설령 내가 멸망에 이르러 죽은 내 몸을 이 세상이 멸망 속에 가두어 둔다 해도, 내 마음을 거기 두지 않으면 나는 멸망되지 않음을 믿으려 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루는 이런 무지막지하게 긴 세월의 하 많은 시공 중, 하필이면 지금 이 시각 이 공간 이 희귀한 곳에서 순간적으로 마주 친 너와 나, 그러나 조금 전까지 마주 서서 하필이면 철천지원수로 만나 총알을 어깨 너머로 주고받은 그런 사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믿으려 한다. 어쨌든 우리는 서로 뒤섞여 주고받지 않으면 세상을 이룰 수 없는, 각각 다른 하나의 점 다만 그 점만이 세상을 구성하고, 그리고 그 점으로써 너도, 이 점으로써의 나도, 서로 아무리 부인해도 결코 부인되지 않는 세상 그 자체라는 점을 - 畵 이철수의 판화 / 音 Sabina Sciubba & Antonio Forcione ‘E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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