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12, 2010
Justin
고하 송진우
송진우만큼 복잡한 사람에 대해서도 찾기 힘들다. 그는 친일파로도 알려져 있으며 동시에 독립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다. 양쪽 다 나름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조사를 하다 보면 이상한 일이 있다. 송진우 선생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쓴다는 송진우의 독립 운동에 대한 글은 넘쳐나는데, 정작 그 ‘오해’를 만든 글은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송진우는 김성수와 동아일보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김성수와 동아일보 역시도 친일이냐, 독립운동에 역할을 담당했느냐 하는 것으로 시비가 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성수와 송진우가 운영하던 동아일보의 흔적을 보는 것으로 거기에 대한 해답, 내지는 작은 실마리나마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그러므로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이 조선을 떠나서는 또한 조선을 잊어버리고서는 일각일초라도 설 수가 없고 살수가 없다.’ 라는 말은 25년 8월 28일 동아일보의 기사의 일부이다. 민족지로서의 사명을 다한다고밖에 볼 수 없는 글이다. 덧붙여, 송진우는 3.1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도 송진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친일파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식한 소리일 수밖에 없고, 송진우를 독립운동가로 포장하면서 반대 의견들을 헷갈리게 하는 가장 큰 무기인 셈이다.
송진우는 중간에 친일로 돌아선 사람, 이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물론 지금 인터넷은 송진우가 친일파로 인생을 시작했는지 중간에 전향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범벅이 되어 있다.
반대글들은 모두 송진우가 19년동안 사장으로, 주필로, 고문으로 일했던 동아일보는 민족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동아일보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1932년 ‘대불경 사건 돌발/어로부에 폭탄투척/폐하께옵서는 무사 어환행/범인은 경성생 이봉창’이라는 기사를 내보낸다. 무사한 폐하란 일본 천황이다. 민족지 치고는 너무 적극적으로 일본 편에 선 기사이다.
더군다나 동아일보는 항일 투쟁을 폭도로 비하하기도 서슴지 않는다. ‘반만항일군과 조선○○군의 활동은 이즈음 지극히 맹렬하여… 압강구를 습격하여 전 초산경찰서 순사 김용흥의 방에 침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김의 부부에게 중상을 입히고 김의 장남과 장녀를 죽였음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이외의 것을 소개하면 인질납거, 군자금 강징, 반동분자 기타 총살 등 무시무시한 사실이 많다.’하는 것도 동아일보의 기사다. 민족지가, 차라리 기사를 싣지 않던가 하면 했지, 항일 투쟁에 부정적인 시선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다니.
명치 천황의 어성덕을 흠앙하는 3일의 명치절! 이날의 아침부터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갠 하늘은 하늘까지도 이날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37년 11월 4일치 2면 머릿기사) 하는 것도 동아일보의 기사요, 월에 일제는 침략전쟁을 위한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고 조선의 혼을 빼앗는 `교육령'을 개정·공포한다. 이 제도에 반대해 국내 독립운동가들이 투쟁을 벌이다 40여명이 투옥됐지만, 동아일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양 제도의 실시를 축하'하는 사설을 게재했다고 하는 것도 동아일보다.
그 외에도 천황의 생일에 보내는 특별 사설에는 거침없이 우리 나라를 일본과 같이 취급하며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일본에 의해 동아일보가 폐간된 것이 동아일보의 반일투쟁인 듯 포장해 말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과 집집마다 숟가락까지 걷어가야 했던 물자의 빈곤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동아일보 스스로도 사사에서 “이즈음 동아·조선 양대지의 논조와 색채는 이미 매일신보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퇴색해 있었다”(<민족과 더불어 80년>)고 밝히고 있다.
송진우가 주필로, 고문으로,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의 기사는 동아일보와 함께한 19년 송진우의 행적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에 대해, 유명한 일화가 존재한다. 손기정 선수 기사에서 일장기를 지운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으면서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불태워버렸다.’하는 일화이다. 송진우와 김성수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민족 언론을 폐쇄했어야 하는가, 기자에게 책임을 물어 사태를 수습했어야 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송진우의 생각이 살짝 엿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은 기사들을 싣는, 혹은 앞으로 실을 신문이 어디가 민족지라는 말인가? 그런 신문을 지키려고 일장기를 지운 사실을 꾸짖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가 말한 ‘고루거각’이라는 것이 동아일보라면, 그는 동아일보를 민족지로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밥줄로 생각한 것이 틀림에 없다.
만약 후일의 기사들도 ‘민족지 동아일보’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실었던 기사들에 불과하다는 것도 변명거리일 뿐이다. 민족지보다는 민족이 앞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민족혼을 거침없이 깎아 내리고 일본군 지원에 환성을 올렸다는 것은 민족지로의 역할을 버린 것이요, 신문사를 위해 민족을 팔아먹은 것이다.
후일 그가 총독부의 교섭 상대가 되었다가 거절한 것과 한민당을 지도한 것을 그의 업적으로 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고하와의 교섭은 애초부터 여운형에게 시도한 교섭에 비하면 중요도가 훨씬 낮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여운형이 냉큼 치안권을 받아 챙긴 것이 아니라, 총독부에게 5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받았다는 점에서 송진우와의 차이가 보인다. 여운형은 실제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도움이 될 일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한민당의 대부분이 친일파 기득권층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송진우가 한민당의 일원이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또 하나, 그가 신탁통치에 결사반대를 하고 우파였다는 것으로 그를 찬양하곤 하는데, 좌파를 악으로 몰아가는 것이나, 신탁통치에 결사반대를 하는 것이나 모두 틀리지도 않지만 다 옳지도 않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고로 내가 송진우에게 내릴 수 있는 평은 그가 기회주의자라는 것이다. 일제 초반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통치가 길어지자 친일을 한 것이나, 열심히 재산을 쌓아놓은 것이나, 기회주의의 성향이 짙다. 독립운동가랍시고 재산이나 바짝 모아 평생 대통담배나 피운 인물을 독립운동가라고 해 주기에는 너무 부끄럽다.
출처: 인터넷 각지.
첫댓글 송진우에 대한 평가는 그의 해방 이후의 삶을 돌아보면 정확하게 구분 할 수 있어 보인다. 한 논문에 의하면"『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대동신문』(친일파 이종형의 경영) 등 친일 언론인이 관계했던 신문들은 한민당과 이승만의 정치노선에 대한 선전에 광분하였으며, 미군정이 수많은 언론들을 "미군정의 통치에 반대하는 내용을 썼다"는 이유로 정간 혹은 폐간하는 가운데 이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였다" 라고 한다. 그리고 근즌 중경정부 추대라는 입장을 세웠다가 미군정이 중경정부 추대를 반대하자 즉각 그것을 철회하였지...
혹자는 암흑기시대에 부정적인 시각이든, 적의 입장이든 그 사실을 보도 한것 자체가 민족에게 희망을 준것이라고 한다...하지만 , 그것은 지나친 동정론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은 더이상 친일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생존을 위해 친미파로 변신하였다. 윤치호가 자신의 얼기에서 자신의 친일행위는 대세를 따랐을 뿐이라고 한 것이나, 이완용이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랬을 것 아니냐고 말했던 친일파들의 논리는 해방 이후 시기에와서는 그 대상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계속되었다. 해방 이후 단독정부 수립으로 가는 시기 친일파들의 가장 중요한 매커니즘은(계속)
바로 '친미', '반공'이었던 것이다.
이들 친일파들은 생존을 우선에 두었지 이승만에 대한 충성을 우선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 생존을 위한 숙주(宿主)로서 미국을 선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