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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통을 생의 체험들 가운데서 따로 뽑아내 호되게 비난할 수
없다. 고통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즉각 반발하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통은 기쁨과 성취에 이르는 필수 단계이다.
나는 인공호흡기를 꽂고, 방독 시트를 덮은 채로 죽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테니스코트에서 칠십 대 노장으로서의 마지막 오버 헤드 스매시를 힘껏 때리고 있든가, 아니면 내 주름진 볼 위에 닿는 물보라를 느껴 보려고 소리 지르며 의기양양하게 폭포로 가는 오솔길을 따라 내달리고 있길 바란다.
내가 만약 마약과 안락과 사치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생애를 바친다면 행복은 나를 피해 갈 것이다.
“행복은 그것을 좇는 자에게서 물러난다.”
행복은 나 자신을 투자한 어떤 일로부터 하나의 부산물로 혹은 놀라움을 안겨 주는 보너스로서 뜻하지 않게 찾아올 것이다. 틀림없이 그 투자에는 많은 고통이 포함될 것이다. 고통이 없는 즐거움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성경은 고통과 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경로를 인간의 장엄하고도 무서운 한 특성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자유라는 것이다. 우리를 날뛰는 돌고래나 울부짖는 사자 그리고 노래하는 새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오직 인간만이 본능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스스로 결정하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의 환경을 조작하고 조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유인은 이 행성에 다른 새로운 것도 들여왔다. 그것은 본래 의도에 대한 반항이다. 우리는 지구가 어떻게 의도되었는지에 대하여 약간의 암시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다름 아닌 인간이 그 틀을 망쳐 놓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체스터턴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곧잘 야생 동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이야말로 유일한 야생 동물이다. 망가뜨린 장본인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다른 모든 야생 동물은 길이 잘 든 동물들이다. 그 종이나 무리의 거친 속을 따른다는 점에서 말이다."
인간은 지구라고 불리는 이 작은 바위 조각 위에서 홀로 하나님과 맞서서 주먹을 흔들며 "나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를 가만 내버려 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키는 벽을 만들었다. 이 벽 안에서, 우리는 실컷 우리 좋을 대로 살고 있다. 물론 가끔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법칙들을 따르기도 한다. 사랑과 평화와 선의 길 말이 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렇지 못하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런 우리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주의 모든 법칙들을 무시하면서까지 (적어도 당분간) 인간이 원하는 대로 행할 자유를 허락하셨다. 세상을 만드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세상을 자유롭게 하셨다. 하나님은 시라기보다는 희곡을 쓰신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계획한 대로는 완전한 작품이었으나 필연적으로 인간 배우들과 인간 연출가들에게 맡겨졌으며, 그 후로 이들은 그것을 크게 망쳐 놓고 말았다.
세상은 반역 가운데 있다. 하나님은 이미 지구 위에 '유죄 선고' 표지를 거셨으며 심판을 선언하셨다. 악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 그래도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이지 잔인성의 증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 없는 세상 혹은 고통이 덜한 세상을 창조하시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성경이 명백히 보여 주는 바, 하나님은 가지 자녀들의 고통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겪었을 심리적인 고통을 생각해 보라. 혹은 친히 인간이 되어 세상 죄를 지신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 회의론자들은 이 사건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결여에 대한 실례로 인용해 왔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이 사건들이 증명해 주는 것은 예컨대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정상, 그분의 가장 충실한 종들을 위해 고통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덜 허용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루 종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그에 대한 대답을 알지 못할 뿐더러 그보다 이전의 질문, 즉 어떻게 해서 특수한 바이러스가 세상에 들어왔는가에 대해 답할 수 없다. 그것은 과연 하나님의 직접적 창조 활동의 하나였을까? 그러나 고통의 실적인 결과는 지구라는 이 행성에 대한 성경적 견해와 모순됨이 없다. 지구는 하나의 오염된 행성이다. 고통이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게 말씀하시기 위해 무엇을 사용하실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지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대로 움직여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줄 것인가?
루이스는 "고통, 즉 하나님의 확성기"라는 구절을 소개했다.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고통은 소리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발가락을 어디에 부딪히거나 발목을 삐었을 때, 고통은 나의 두뇌에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소리쳐 댄다.
이와 비슷하게, 내가 믿기로 이 지구상의 고통의 존재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소리치는 하나의 외침이다. 그것은 우리를 멈춰 세우며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가치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삶의 목적이 안락이라고 믿는다.
즐기라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음식을 실컷 먹고, 섹스를 즐기고, 유쾌한 삶을 살아가라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고통의 존재는 이러한 철학을 복잡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의 삼분의 일이 매일 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드는데, 그저 세상이 여기 있으니 나는 실컷 먹을 수 있다고 외치기란 편치가 않다. 십대 소년들이 고속도로 위에 나가 자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 인생의 목적은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믿기는 훨씬 더 어렵다. 만일 내가 그러한 개념을 피해서 단순히 인생을 즐기려고 노력한다 해도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고 나를 따라다니면서 삶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큰소리로 고통은 인간의 전 상황이 빗나갔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초월적 소리'로서 존재한다. 전쟁과 폭력의 삶은 무언가 잘못된 삶이다. 우리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이 세상으로 만족하기를 원하는 사람, 삶을 사는 유일한 이유가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은 솜으로 귀를 틀어막고서야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의 확성기는 매우 시끄럽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마 고통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나약하고 불만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체스터턴이 주목한 대로, 하나의 위대한 그러나 타락한 세상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와 일치하고 있다. 어떤 다른 종교들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감추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고통은 지구가 오염된 행성이라고 폭로하는 기독교의 우주관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확성기인 고통은 나를 그분에게서 멀리 몰아낼 수 있다. 그러한 비참함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을 증오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정반대로, 고통은 나를 그분에게로 데리고 갈 수도 있다. 나는 그분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을 믿으며, 온전한 처소를 만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붙잡을 수 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죽음에 대비할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적절히 개입하시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날씨나 옷이나 월요일 저녁의 축구 경기에 대한 이야기나 하면서 아주 편안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로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기독교의 세계관, 세상은 비극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장소이며 우리는 하나님께로 복귀될 필요가 있다는 것만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었다.
그가 부딪혔던 비극의 영향이 없었다면 로저는 결코 하나님께로 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통, 비록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었을지라도 고통은 그로 하여금 생의 가치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삶의 재정리를 위해서 그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듯이, 로저는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내가 믿기로는 바로 이것이 확성기로서의 고통의 가치이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주는 일반적인 메시지이다. 그런데 이것이 한 특별한 메시지일 수도 있을까? (당신은 이렇게 행하였기 때문에 고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음 항의 질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때로 하나님은 불공평하시거나 혹은 도움을 원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냉담하신 듯이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아버지로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신다.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성 내지는 의존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주는, 고통이나 고난과 같은 너절한 것들 없이도 세상을 충분히 꾸려 나갈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도덕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귀에 대고 외치는 고통의 확성기 없이도 옳게 살 수 있을 만큼 똑똑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틀렸다.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인간은 고통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인 우리 역시 선택권을 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을 비난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그분을 사랑하길 원하신다. 심지어 그 선택이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어떤 상에 매달려서가 아니라 그분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설혹 욥처럼 하나님을 심히 부인할 만한 온갖 이유가 있을 때일지라도, 우리가 그분께 붙어 있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욥의 교훈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탄은 하나님이 욥에게 많은 상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욥은 하나님께서 번창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성실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시험이 증명했다. 욥은 비록 그의 세계가 무너지고 하나님마저 그에게 등 돌리신 것 같은 순간에도 끝까지 하나님께 성실했다. 욥의 경우, 명백히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 단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끝까지 붙잡았다. 욥은 선물을 받고자 선물 주시는 분을 찾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이 하나님의 벌과 그렇게 자주 동일시되고 있는 구약에서도 욥의 모본은 빛나고 있는 것이다. 욥이 감내한 고난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자유로이 드린 사랑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것으로서, 그가 마땅히 지지 않았어도 되었을 그런 고난이었다.
*만약 우리가 회교도들처럼 모든 고통과 고난을 그저 교훈으로 인정한다면 그 다음의 논리적인 단계는 피할 수 없는 운명론이 될 것이다. 만일 소아마비, 콜레라, 말라리아, 역병, 황열병 같은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것들이라고 한다면 왜 사람이 이것들과 대항해서 싸워야 한단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고 그것들을 보내셨는데 말이다.
기독교 교회는 사실상 이 교리에서 과오를 범했으며, 세속 작가들은 우리의 약점을 통찰력 있게 파헤쳐 냈다.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에서 하나의 모순에 괴로워하는 가톨릭 사제, 파늘루 신부를 그리고 있다. 사제는 그 역병과 싸우는 데 진력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교구민들에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도록 가르쳐야 할까를 놓고 고민했다. 결국 그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맞습니다. 한 어린아이의 고통은 감정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굴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점이 바로,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또한 이 지점에서 파늘루 신부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신 바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은 그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 곧장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의 고난은 우리들의 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빵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은 영적 굶주림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수년 전, 시카고 대학과 서턴 일리노이 대학 출신의 두 조사원이 전국을 휩쓴 토네이도의 희생자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발견한 사실은 건물의 자재와 같은 요인들을 참작하고서라도 중서부에 비해 남부에서 토네이도와 관련된 사망사례가 많다는 것이었다.
보다 종교적인 남부 사람들은 재난에 대해 숙명론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즉, “닥치면 닥치는 것이요 그것을 막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태도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서부 사람들은 일기 예보에 귀를 기울이고, 허술한 장비들을 든든히 하고, 토네이도 경보 지역 밖의 안전한 장소로 대피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질병과 절망과 싸우며 지구상에서 그의 생을 보냈다. 그는 결코 숙명론적인 태도나 고난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 오염된 행성의 구성원들로서, 인간의 타락이 가져온 부작용들과 투쟁해야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잘못된 삶이라고 해서 항상 고난 가운데 있지는 않듯이, 선한 삶이라고 해서 잔인한 고통을 면제 받지는 않는다. 사실 성경 특히 신약 성경에는 좀 덜 고통스럽고 평안하게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이 거의 없다. 적어도 이생에서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위협적인 쪽으로 결정이 났다.
야고보와 베드로의 서신들 그리고 히브리서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 받을 준비를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전당에는 매 맞아 죽은 사람, 채찍에 맞은 사람, 옥에 갇힌 사람, 돌에 맞은 사람, 광야에서 굶어 죽은사람들이 들어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 특히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강조하는 이들은 그들의 믿음과 대치되는 성경의 이러한 부분들로 인해 당황한다. “왜 성경 시대에 하나님은 좀더 많이 개입하지 않으셨을까? 왜 그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고쳐 주시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어떤 값을 치르고서라도 고통을 피해 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치유 은사 특집의 잡지나 TV 프로그램을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빈번히 나타나는 부작용이 있다. 병 고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러한 개념을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아름답게 확대시키고 있다. 여기에 그 한 부분을 옮겨 보겠다.
“우리는 천국에 계신 아버지보다는 천국에 계신 그저 좋기만 한 할아버지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바라는 이 할아버지가 우주를 위해 생각해 놓으신 계획이란, 마치 하루가 끝나는 마지막 시간에 "오늘도 다들 좋은 시간을 보냈구나"라고 말씀하실 만한 만사형통한 계획이다.
나도 그러한 무사안일주의로 지배되는 우주 안에 살기를 원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명백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을 만한 이유를 내가 갖고 있는 이상, 나는 사랑에 대한 나의 개념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고난과 사랑의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 이라는 단어에 천박한 의미를 붙이고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로 남게 될 것이다.
화가가 어린아이를 즐겁게 해 주려고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릴 때는 많은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그는 그림이 자기가 의도한 대로 정확히 그려지지 않았어도 그냥 내버려 둘지 모른다. 그러나 일생의 역작을 위해서라면 그는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어떤 화가가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계속하다가 열 번째에 가서야 그림을 완성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우리는 그 작품을 보면서 이 그림이 1분 만에 그릴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별로 대단하지 않은(덜 힘든) 운명을 계획하셨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는 것은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더 못한 것을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고통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고 계신 교향곡에는 단음, 화음, 불협화음 그리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푸가의 악절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초기 과정들을 통과하여 그분의 지휘를 계속 따라가는 이들의 입에서는 어느 날엔가 새 노래가 터져 나올 것이다.
*"누가 고통을 일으키는가?"라는 질문을 가장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는 부분인 욥기에서,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그 쟁점을 회피하신다. 그분은 결코 욥에게 원인을 설명하지 않으셨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원인의 쟁점에서 반응의 쟁점으로 방향을 돌린다. 즉 "고통과 고난은 이미 일어났다. 그러면 이제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이다. 원인에 대한 토론의 대가들인 욥의 친구들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자리를 떠나고 만다.
성경에서 이 점만은 너무나도 분명히 해 놓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앞에 놓인 진정한 쟁점이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가?"가 아니라, "이 무서운 일이 일어난 지금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고통이 당신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해 주었다.”
나의 견해로는 이것이 고통의 역할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간명한 요약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반응을 강조하는 성경의 노조와 조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예수님께서 다루신 두가지 참사, 즉 빌라도의 유대인 학살 사건과 망대가 무너져 열여덜 사람이 압사한 사건의 경우와도 맞아들어간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잊을 수 없는 경고로 그 각각의 논쟁을 매듭지으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이 참사들이 인간의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님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님을 선포하신 후에 (너는 그들이 다른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죄인들이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곧장 사람들의 반응 쪽으로 초점을 돌리셨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이 메시지가 생의 다른 가치들도 생각해 보고 영원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경고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오듯이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교훈이 된다.…
성경은 마지막 결과,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고통을 사용하셔서 이루실 수 있는 일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결과를 만들어 내시기 전에 그분은 먼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탁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그분께 의탁하는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 "기뻐하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그분은 소망 없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요구하신다. 고난이 우리를 아프게 찢을 때에,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거부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반응하기를 요구하신다. 그분의 지혜를 신뢰하면서 코리가 말한 것처럼 구덩이가 아무리 깊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깊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말이다.
*나와 비슷한 체험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용기로 돌아가 해답을 얻는 것 같다. 욥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고난을 겪은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이상한 것은 욥기가 하나님께서 왜 비극이 일어나도록 하셨는지에 대한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은 그에게 보상해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걸까?” 나는 생각했다. 나의 초점은 하나님께 해명을 요구하는 데서 겸손히 그분을 의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좋다, 나는 마비되었다. 그건 끔찍한 일이다. 난 그것이 싫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마비된 나를 사용하실 수 있을까? 마비된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분은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아마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매순간 내게 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인식하고 있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누가 와서 내게 옷을 입혀 주기를 기다리며 침대에 등을 붙이고 납작하게 누워 있을 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의 요구는 너무도 명백하다. 나는 심지어 혼자서 머리를 빗거나 코를 풀 수조차 없다. 그러나 내게는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 아름다운 경치도 즐길 수 있다. 내 미술 작품을 팔아서 경제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 수도 있다. 이것은 장애자의 꿈이다.
진정 가치 있는 평안은 내적 평안이며, 하나님은 그 평안을 내게 넘치도록 주셨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내게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천국에서 영화롭게 될 우리의 몸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것은 항상 아련하고 낯선 개념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완전히 나을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기회를 빼앗긴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40년 지연된 삶을 지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과정까지도 나와 함께하신다.
영화롭게 되는 것-지금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다. 그것은 이곳에서 내가 죽은 후, 내가 나의 두 발로 서서 춤추게 될 그때이다.
*감사하게도 우리 중에는 조니나 브라이언과 같은 시련(전신마비)을 겪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들은 고난의 실험대를 통과해서 믿음의 뼈대를 지킨 보기 드문 실례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애는 "고통은 하나의 선물”이라는 개념들과 조화된다. 적어도 그들은 막강한 고난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던 것이다.
구덩이가 아무리 깊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깊다. 그들의 끈기 있는 믿음은 우리들의 고통을 보다 잘 견디게 만들어 준다. 나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승리의 선언을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힘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NTV). 예수님은 평온함과 확고함을 가지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 선언을 들은 열두 제자들의 등에 물을 끼얹는 듯한 동요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그 열두 제자들은 모두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어 버렸다.
그때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어쩐 일인지 죽음 앞에서 쓰러졌고, 그 며칠 동안 세상은 분명히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보였다. 고난의 신비는 기독교의 한 역설이다. 고통은 승리와 다투며 절망과 사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니와 브라이언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이라는 최악의 감옥 안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조지 맥도날드는 그의 ‘산상수훈 강해’ 에서 이 원리에 관해 특히 심
령이 가난한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 심령의 거지들, 마음이 겸손한 자들, 야심 없는 사람들, 이타적인 사람들, 사람을 결코 경멸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칭찬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 자신 안에서는 칭찬할 거리를 찾지 못하며,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서 칭찬 받기를 구할 수 없는 이들, 자신을 주어 버리는 사람들, 이들이 그 나라의 자유인들이요, 이들이 새 예루살렘의 시민들이다.
자기 자신들의 본질적인 가난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 친구가 부족하거나 영향력이 없거나 성취해 놓은 것이 없거나 돈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영혼이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가난한 피조물임을 느끼는 사람들, 자신들에게서는 만족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하며 스스로를 좋게 평가할 만한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들, 자기들의 삶을 값있게 만들려면, 자기들의 존재를 유익한 것으로 만들려면, 그리고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존재가 되려면, 자신들에게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이렇게 겸손한 사람들이 곧 주님께서 복되다고 부르신 가난한 자들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낮고 가난한 사람이다 말할 때, 그의 천국의 문이 그의 앞에 열리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곳은 진실한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요 이 사람은 자신에 관한 진실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즉각 잊어버린다. 그것은 그의 일부요 이미 그의 뒤에 있는 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그가 갖고 있지 않은 것, 그리고 그의 위에 그리고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난한 자들은 복된 것이다. 그들의 매일의 삶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요구되는 겸손을 보다 엄밀히 설명해 준다. 산상수훈의 선포들(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핍박 당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은 하층계급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아상을 개선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던진 빵조각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반영하는 참된 선언들이다.
*다시 한 번, 존 던은 그의 기도서에 나오는 기도 가운데서 그 진리를 포착했다. 그것은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강요될 수는 없는 그러나 한 죽어가는 사람의 붓에서 흘러나온 기도이다.
“오,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 자신의 목적들을 완전히 이루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 병의 첫 번째 고통으로, 나는 필연적으로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 고통이 계속하여 나를 포위해 왔을 때, 하나님은 내가 바로 이 순간에라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처음 중세들로 하나님은 나를 일깨우셨습니다. 그 이상의 고통으로 하나님은 나를 내던져 하나님께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벌거벗기심으로 나를 하나님으로 옷 입히셨습니다. 내 몸의 감각을 이 세상의 붉은 고기와 쾌락에 대해 마비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의 영적 감각을 예민하게 하셨습니다.
내 몸이 녹아질 때에 주여, 내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 일을 더 속히 이루소서.
나의 미각은 사라지지 않고 더 높아짐으로 다윗의 상 앞에 앉아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위장은 천국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어린 양의 잔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나의 무릎은 연약하나, 약해짐으로써 쉽게 무릎 꿇고 자신을 주님께 고정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이 모진 병의 덤불과 가시 가운데 나에게 나타나사, 나로 하여금 이 격심하고 고통스러운 시간 중일지라도 하나님을 내게로 이끌어 내가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게 하옵소서.
이 일을, 오 주여, 그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가시로 관을 쓰시도록까지 주님께서 고통케 하심으로써 넉넉히 하늘의 왕이 되게 하신 그분을 위하여 행하시옵소서.”
*콜럼비아 성서 대학 총장인 로버트슨 맥퀄킨에게 이러한 시련에 당면한 나이 든 부인이 찾아왔다.
“로버트슨 씨, 왜 하나님은 우리를 놓고 쇠약하게 내버려 두실까요? 왜 저는 이렇게 아파야 합니까?"
잠시 생각한 후에 그는 어떻게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께서는 청년의 힘과 미를 육체적인 것으로 계획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년의 힘과 미는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인 힘과 미를 점점 잃어버림으로써 영원한 힘과 미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부가 시들어감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집을 진정으로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계속 젊고 강하고 아름답다면, 우리는 떠나기를 결코 원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생존하기 위하여 영혼은 살찌워져야 하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몸을 초월하여 자유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항상 몸에 자원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브라이언 스턴버그도 조니 에릭슨도 수천 번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치유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혼에 초자연적인 힘을 약속하신다. 우리에게 기대고 의지할 다른 아무것도 없을 때, 심지어 우리 자신에게조차 기댈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거기 계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인생관, 즉 몸이 아니라 영혼을 중시하는 인생관을 강조하셨다. "너희의 몸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라. 그들은 너희의 영혼을 죽이지 못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고난에서 해방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우리 주님도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가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고난 당하셨다고 믿게 되었다.
고난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아셨기 때문이다.
-앨런 페이톤
*설마하니 이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그를 사랑했고 3년 동안 그를 따
라다녔던 제자들까지도 그 생각이 희미해졌다. 그들은 그 가짜 왕과 한 패로 취급 당할 것이 두려워 군중 속으로 꽁무니를 뺏다. 세상에 있는 고통과 고난을 쫒아낼 수 있는 한 강력한 통치자에 대한 그들의 꿈은 악
몽으로 변했다.
그 장면, 예리한 못질과 피비린내 나는 죽음과 그리고 십자가가 땅에 박히던 순간의 쿵 하는 흔들림. 경마용 말이나 새끼 물개의 사망소식에도 움찔하는 우리가 이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장면을 다시 이야기하면 꿈쩍도 않는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죽음이었고, 우리가 아는 오늘날의 빠르고 단조로운 처형 방식 곧 가스실, 전기 의자, 교수형과는 전혀 다른 처형이었다. 이 처형은 조롱하는 군중 앞에서 여러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예수님의 인간성과 그가 감당한 짙은 그의 고통의 절정에서 그 사람, 바로 기도를 가르쳤던 그 선생이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때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인간에게서 버림 받은 그는 하나님에게서도 버림 받은 자신을 발견하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쳤다. 마치 지구가 흔들리는 것 같은 외침이었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무덤은 죽은 지 오랜 시체들을 쏟아 내었으며, 태양은 세 시간 동안 가리워졌다. 믿을 수 없게도, 우주의 창조자는 어떤 전능한 절대 군주라도 정상적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마지막 한가지 인간의 특성인 용기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의 영혼은 극한 상황을 통과했으나 파괴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죽음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요 그가 오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당신은 그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복음서는 그 사건의 세부 사실들로 꽉 들어차 있다.
그는 그의 사역 전반을 통하여 그것에 관한 암시들과 예언들을 내어 놓았으나, 그 예언들은 사건이 발생한 후에 가서야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꿈이 산산조각 난 듯이 보였던 때에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그의 생애는 너무 빨리 낭비된 것처럼 보였다. 바로 전날 밤에 그가 하신 승리의 말씀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신음하며 고통으로 경련하는 것을 본 제자들의 기억 속에 잔인하게 따라붙었을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이같이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런 모습 - 제한받고 고통받고 슬픔과 죽음을 당할 존재로 만들기로 정하셨든지 간에 그는 자신의 쓴 약을 먹을 정직함과 용기를 가지셨다. 그가 그의 창조물을 갖고 어떤 게임을 하고 계시든 간에, 그는 자신의 규칙을 지키셨고 공정한 게임을 벌이셨다. 그가 인간에게 강요하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가 먼저 자신에게 강요하신 것이 아니면 안 되었다.
그는 가정생활의 사소한 마찰들과, 과로한 노동의 견딜 수 없이 조여오는 속박들과, 돈이 없는 것에서부터 두려움과 수치, 패배, 절망 그리고 죽음이라는 가장 무서운 것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직접 이 모든 것들을 겪어 보셨다. 그가 한 인간이 되셨을 때, 그는 인간의 역을 맡아 하셨다. 그는 가난한 데서 태어나셨으며, 멸시 가운데 돌아가셨고, 그렇게 하는 것을 신으로 가치 있게 여기셨다.
그 어떤 이들에게는 어두운 밤 희미하게 빛나는 창백한 시체의 형상이
패배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위해서 무슨 좋은 것을 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소리를 우리는 들을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인간에게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사랑은 저 외로운 피 흐르는 형상 안에 전 역사적으로 압축되었다. 어느 때라도 천사들을 불러 내려서 참혹한 데서 자신을 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던 그 예수께서, 그렇게 하지 않기를 택하셨다. 우리를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도록 그 독생자를 보내셨다.
몸소 자기에게 십자가를 지우심으로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고통에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가 사실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삶 가운데서 그는 고통의 삶을 택하셨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어떤 사람을 놓고 “저사람은 분명히 어떤 죄를 범했기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 없다. 죄를 짓지 않으신 예수님도 고통을 느끼셨다. 그리고 나는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의미가 분명하다. 그분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홀로 남겨 두셨다"라는 말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셨을지라도 그의 죽음은 인간과 하나님을 한데 묶어 주는 역사의 대승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 끔찍한 날에서부터 하나님은 최고의 선을 만들어 내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예수님도 그러하셨듯이 이 세상의 재난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은 토네이도가 이교도인 이웃집을 지나가는 길에 우리 집만은 넘어갈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세균은 그리스도인의 몸을 피해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베드로는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같이 말해 줄 수 있었다.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성경은 더 나아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라거나 "그의 고난을 온전히 이루라”는 구절들을 씀으로써, 고난이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떨어 버려야 하는 참화가 아니라 우리를 좀 더 하
나님을 닮은 자들로 만들어 주는 은혜의 방편임을 말해 주고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도 개인적인 승리의 해결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는 실수가 없다. 그분은 참새 한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아시며, 모든 사람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헤아리신다. 그분께 올린 모든 기도는 열납되었다. 심지어 공허하고 무익한 듯이 보였을지 모르는 기도일지라도 말이다.
조지 맥도날드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러 오셨다. 그는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시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속히 그 일을 마치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우리의 눈물이 원망 없이 흐르게 하려 하신다. 그 목적을 위해 그는, 애통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오는 위로 때문에 복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위로를 지금 받아들이라 그리고 또한 가까운 장래에 있을 위로에도 대비하고 있으라"
고통과 고난의 역할을 올바로 보려면 전체 이야기를 기다려 봐야 한다. 그에 대한 약속들이 성경 안에 풍성히 들어 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영원하신 영광으로 부르신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잠시 고난을 겪고 난 후에 친히 여러분을 회복시키고 여러분을 강하고 견고하고 굳세게 만드실 것입니다(벧전 5:10. NV 역).”
“우리의 이 환난과 고난들은 결국 아주 작은 것이며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짧은 기간의 고난은 우리에게 영원토록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 앞에 보이는 것,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괴로움들을 보지 않고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천국에 있는 즐거움들을 기다립니다. 괴로움은 곧 지나갈 것이지만, 앞으로 올 즐거움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고후4:7-18, 리빙 바이블 역).”
*당신은 온몸이 아프다. 신음 소리가 들리며, 무섭고 갑작스런 공포가 몰려온다.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당신의 세계는 무너지고 있다. 이제 끝장인 것이 분명하다. 당신은 꿰뚫고 들어오는 눈부신 빛을 본다. 차갑고 거친 손이 당신을 잡아당긴다. 아프게 때린다. 우아앙!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제 막 태어난 것입니다."
죽음도 그와 같다. 이 출생의 하의 끝은 무섭고 두렵고 고통으로 가득 차 보인다. 죽음은 하나의 이며, 우리는 강한 힘에 의해서 그쪽으로 빨려들고 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는 무서워한다. 그것은 압력, 고통, 어둠, 미지의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어둠과 고통 너머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있다. 우리가 죽은 후 그 밝은 새 세상 안에서 깨어날 때, 우리의 눈물과 아픔은 단지 추억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새 세상은 이 세상보다 훨씬 더 좋지만, 우리는 그 세상이 과연 어떤 곳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성경 저자들이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말은 "그때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대신에 하나님의 실재가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돌이 주어질 것이며, 그 돌 위에는 새로운 이름, 다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피조물로의 출생은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계2:17).
때때로 하나님이 듣고 계시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당신의 고통의 울부짖음이 헛되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시다. 그분은 당신만큼 세상의 비극을 슬퍼하고 계신다. 그분의 독생자가 바로 여기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것을 올바로 복구시키시기로 약속하셨다. 아무것도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은 없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현재 통과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 어느 것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해 놓으신 장엄한 미래와 비교할 때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온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에게로 오실 그 놀라운 광경을 보려고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분은 타락하고, 반역적인 세상 가운데서도 여전히 그분의 창조력을 인증해 줄, 이 행성 위에서의 삶을 위해 우리를 무장시켜 줄 한 고통의 체제를 고안하시면서 처음부터 거기 계셨었다.
그분은 우리가 위대한 인생의 예술품들을 조각해 내고, 강한 모험들을 시작하며, 고통과 기쁨이 뒤섞여 있는 이 세상, 이 둘이 너무 밀접하면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정도가 되는 그러한 세상을 견디고 살아나가면서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분은 고통을 가장 심한 형태로까지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향하도록 요구하시며 우리를 가르쳐 오셨다. 그분은 우리에게로 몸을 굽히사 승리를 이끌어 내셨다.
그분은 자기 길을 계속 고집하려는 인간의 계획을 자비롭게도 허용하시면서 이 반역적인 행성이 존속해 나가는 것을 보아 오셨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못쓰게 만든 세상을 가지고 그분을 탓하면서, 더 크고 더 무서운 분노의 걱정으로 울부짖으며 욥의 소리를 반복하게 놓아두셨다.
그분은 부자와 강자들이 흔히 꺼리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한 나라를 세우시면서 친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과 한편이 되어 주셨다.
그분은 우리가 신체적인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라도 우리의 영혼에 영양을 공급할 초자연적인 능력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우리와 연합하셨다. 그분은 상처 받으셨고, 피 흘리셨고 우셨고, 고난 당하셨다. 그분은 고통 받는 자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심으로 언제나 그들을 높여 주셨다.
그분은 지금도 그 영을 통해 그리고 우리를 지탱해 주며 몸된 교회의 머리를 위해 우리의 고난을 덜어 주도록 위임 받은 그 몸의 지체들을 통해, 우리를 섬기시면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
그분은 능력 있는 군대들을 모으시며 기다리고 계신다. 어느 날 그분은 그들을 풀어 놓으실 것이다. 세상은 온전한 승리를 맞이하기 전에 마지막 한 차례의 고통의 폭발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다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새롭고 믿기 어려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