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山이 이룬 섬에서 낙조의 황홀경에 빠지다 전득이고개~해명산~낙가산~보문사~석포리 미니종주
바쁜 도시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삶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어디로든 무작정 떠나고 싶은 요즘. 조용하고 한적한 섬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푸른 바다와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섬 여행은 삭막한 도시인들에게는 더 할 나위 없는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씩 걸리는 섬 산행을 선뜻 찾아 나선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런데 서울에서 하루 남짓 시간이 나면 언제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섬이 있다. 강화도 끝자락에 숨어 있는 섬 속의 섬 석모도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1.5km 남짓 뱃머리를 돌리면 금방 닿는 곳이다. 며칠씩 걸리는 남해의 먼 바다 섬들을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좋다.
▲ 석포리의 간척지 바둑판 논과 멀리 보이는 마니산 능선.
석모도 보문사는 3대 관음도량의 하나
석모도는 산과 바다, 갯마을이 조화를 이뤄 이국적인 풍광을 이루고 있으다. 또한 3대 관음도량으로 불리는 고찰 보문사가 있고, 해명산(327m)·낙가산(245.7m)·상봉산(316.1m)을 잇는 등산로가 잘 나 있어 3~4시간의 산행도 함께 즐길 수 있어 좋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석모도를 바다보다는 산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석모도의 행정지명도 강화군 삼산면(三山面)이다.
삼산이란 해명산·상봉산·상주산(264m)을 뜻한다. 삼해면(三海面)이 아니라 삼산면이 된 것은 바다보다 산이 좋다는 뜻이었으리라. 석모도는 자연 그대로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아무곳에서나 볼 수 없는 상봉산의 아름다운 낙조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여객선을 타고 잠시나마 섬 여행의 낭만을 느낄 수도 있으며, 뱃전에서 바라보는 갈매기 떼의 장관은 석모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재미다.
날씨가 무척 변덕을 부리더니, 석모도에 도착해 전득이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빗줄기와 검은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득이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마치 깊은 산중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산행길 입구에는 잔디밭 공터와 산행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 (위) 310m봉 너럭바위에서 바라본 민머루 해변과 간척지.
(아래) 눈썹바위와 마애관음좌상.
등산로 초입 목재 계단을 따라 신록의 숲길을 조금 올라 첫 번째 조망처에 서니 바둑판 같은 염전과 간척지의 풍요로운 논, 잘 보존된 회색 개펄과 푸른 바다, 그리고 올망졸망한 섬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섬 산행의 즐거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멀리 바라보이는 마니산의 범상치 않은 산릉은 강화의 한 서린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며, 한강과 예성강이 합쳐지는 강화만 일원의 북한 땅까지 한눈에 들어와 잠시 안타까운 마음에 빠져들게 한다.
아침에 서울을 떠나 올 때 흐리던 날씨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강하게 쏟아지는 따가운 햇살은 숲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며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땀방울은 벌써 몇 번째 손수건을 쥐어짜게 한다. 산길에서 마주친 다른 등산객들도 온통 땀에 흥건히 젖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벼랑에 핀 해맑은 원추리 꽃은 땡볕에도 고개를 곧추세우고 있어 당당하고 강인한 생명력을 느꼈다.
숲길을 조금 오르니 이번에는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고고한 소나무 한 그루가 한여름 산행에 지친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아 넋을 잃고 바라보다 소나무의 고아(高雅)함을 가슴으로 스케치해 침묵으로 화제(畵題)를 썼다.
▲ 낙가산에서 바라본 보문사와 소송도 대송도·송전탑.
뜻밖으로 웅장한 해명산 산세
가파른 암릉 지대에 설치해 놓은 안전로프를 붙잡고 크레바스처럼 벌어진 너럭바위를 지나 숲길을 조금 오르니 해명산(327m) 정상이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상 조망처에서 바라보니 낙가산과 상봉산으로 이어진 장엄한 신록의 산릉이 청룡의 잔등처럼 살아 꿈틀댄다.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인다. 숲 속에서는 나무를 볼 뿐, 이렇게 장대하고 아름다운 숲의 능선은 바라볼 수가 없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니 숲 속 조그만 공터 나무 그늘 아래 벤치가 놓여 있다. 분위기가 왠지 가을날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져온 강화인삼주를 한 잔씩 마시며 미리 찾아온 가을 이야기를 나누어본다.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일렁이는 파란 잎이 금방이라도 가랑잎 되어 흩날릴 것만 같다. 나는 이 느낌을 스케치북에 옮기고 김주현(런닝라이프 발행인·시인)씨는 시심을 메모하기에 바쁘다. 휴식을 마치고 오르내림이 완만한 능선길을 따라 걷는다. 310m봉까지는 제법 장쾌한 느낌을 주는 능선으로, 봄이면 진달래꽃이 붉게 물드는 구간이다. 신선들이 바둑이라도 두었을 법한 너럭바위가 수시로 나타나 조망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여, 산행시간에 여유를 갖고 느림의 미학을 맛보는 구간이기도 하다.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310m봉에 올라 뒤돌아보면 뜻밖에도 웅장한 해명산 산세에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서쪽으로는 정리된 들판, 남동쪽으로는 민머루해수욕장과 바둑판 같은 염전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염전은 폐허가 되어 소금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공개로 내려서는 갈림길을 지나 능선으로 올라서니 좌우로 내건너마을과 공개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작은 암봉을 지나니 마치 두 연인(戀人)이 이마를 마주하고 굳은 맹세라도 하는 듯, 바위가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다.
맑던 날씨는 다시 구름이 끼고 빗방울이 약간 떨어지기 시작한다. 북쪽 하늘이 트인 것으로 보아 많은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가파르게 내려서는 길은 비에 젖어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다. 길 옆으로는 철조망까지 쳐져 있어 더욱 위험하다.
▲ 석포리 선착장에서 바라본 석모도의 낙조.
육지 산에서는 느끼지 못한 섬산의 신비로움
새가리고개에 이르니 ‘보문사(낙가산) 1.3km 해명산 3.8km 수목공원 0.5km’라고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가파른 숲길을 올라 마당바위 위에 섰다. 상봉산을 지나 석모리 간척지 송개평야를 건너 상주산에 이르기까지 중첩한 산릉이 바다와 들판을 아우르는 듯해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옛 사람들이 석모도를 삼산면이라 하였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육지의 산에서는 느끼지 못한 신비로움을 이곳에서 만난다.
조망처를 벗어나 숲 속으로 접어드니 온통 담쟁이 넝쿨이 모든 나무를 휘감고 돌아 원시림을 느끼게 한다. 소낙비에 젖은 녹색의 나뭇잎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은은한 풀 향기는 코끝에서 맴돈다.
전망 좋은 바위와 기암을 만나는 완만한 등산로를 걷다 보니 좌측에 갑자기 큰 암반이 나타나고 그 아래로 보문사의 지붕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절 앞쪽 바다에는 소송도와 대송도를 거쳐 서도면을 잇는 송전탑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널따란 눈썹바위가 있는 낙가산에 올랐다. ‘상봉산 1.7km 해명산 5.6km 보문사 0.6km’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중국 저장성 바닷가 섬에도 낙가산과 보타산이 있다. 이 둘을 합쳐서 낙가보타산이라고 부르며 중국 불교 4대 명산 중 하나로 관음보살의 도량이다. 이곳 보문사 또한 우리나라에서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3대 관음도량에 든다.
눈썹바위 아래에 마애관음좌상(인천광역시 유형문화제 29호)이 조각되어 있다. 수해(樹海)를 헤쳐 나가는 범선 위에 앉은 듯 나는 가만히 낙가산 정상 눈썹바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멀리 보이는 넓은 갯벌은 콩밭 메던 어메의 검게 그을린 젖가슴을 닮았다.
보문사로 내려서다 마애관음좌상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빌까 생각해 본다.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합장을 하고 빈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니 마음이 편하다.
돌아서서 대웅전으로 내려선다. 보문사는 신록의 여름산이 감싸 안아 포근함을 느끼게 하고 대웅전에서 바라본 넓은 서해는 마치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의 도량으로 느껴진다. 언제라도 문득 찾아 나서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대웅전 앞이 낙조를 바라보기에도 좋다고 하지만 낙조가 물들기까지는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기에 우리는 그냥 석포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도착해 아침에 식사를 했던 삼산식당에 들러 살진 숭어 한 마리를 놓고 강화 인삼막걸리를 마시니 얼굴에 노을이 붉게 물든다.
석모도를 떠나는 뱃머리에서 정말로 황홀한 낙조를 볼 수 있었다. 변덕스럽던 날씨는 끝내 불타는 노을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괭이갈매기 떼의 분주한 비행이 한층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해 더욱 환상적이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석모도는 자석처럼 끌리는 매력이 있다. 산행을 해보면 석모도가 왜 아름다운지를 더욱 확실히 알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