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런던올림픽도 '과거'가 돼버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스토리는 자꾸 들어도 새롭기만 하다. 홍명보 감독과 함께 올림픽대표팀 수석 코치로 활약했던 김태영 코치. 그한테 런던올림픽은 영원히 가슴에 남을 '역사'였다.(사진=일요신문 박은숙 기자) |
스포츠 지도자 세계에서 코치는 빛이 나지 않는다. 감독을 보좌하는 자리이다 보니 가급적이면으로 물러서는데 익숙하다. 올림픽대표팀을 이끌었던 김태영 수석코치도 마찬가지의 입장이었다. 선배이자 감독인 홍명보 감독의 뒤에서 감독과 선수들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며 대표팀의 손과 발이 되고자 노력했다.
올림픽대표팀의 일정이 모두 끝나면서 코칭스태프는 자연스레 신분 해제가 됐다. 올림픽까지로 한정된 계약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홍 감독을 비롯한 모든 코치들이 ‘자유인’이 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쁘고 여유가 없다는 김태영 코치를 만났다. 아직도 올림픽 ‘뒤풀이’가 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올림픽 동안에는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김 코치. 그가 말하는 올림픽 뒷얘기를 들어본다.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가까이서 보니 더 젊어진 것 같다(웃음).
“선수 때 얼굴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당시 워낙 노안이었던 탓에 마흔 살 넘으니까 제 나이처럼 보이는 모양이다(웃음). 올림픽 끝나면 푹 쉴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 오라는 데도 많고 갈 데도 많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김태영 코치를 선수 때부터 취재했던 기자로서는 홍명보 감독과 함께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어가는 모습이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두 사람 다 선수였는데 말이다.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지도자를 꿈꾸면서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홍명보 감독 덕분에 정말 중요한 경험을 했고 많은 걸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2009년 이집트 청소년대표팀을 맡기 시작하면서부터 3년 6개월가량 홍 감독과 함께 생활했다. 그동안 위기도 많이 있었고, 또 그 위기의 순간을 극복해나가면서 감독과 코치, 감독과 선수들간의 신뢰와 믿음이 단단히 쌓여간 것 같다. 홍 감독이 정말 대단한 일들을 하셨다. 선수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더라. 감독이 그냥 되는 건 아니었다.”
-홍 감독과는 워낙 친분이 두터웠던 선후배 사이였기 때문에 호흡면에선 이견이 없었을 거란 예상도 했었다.
“아무리 친해도 가끔은 서운할 때가 있더라(웃음). 예를 들어 홍 감독은 선수들한테 큰소리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다. 내 입장에선 이 정도는 선수들한테 얘기를 하고 다그쳐도 될 것 같았지만 홍 감독은 그 조차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게 당시에는 조금 서운했다. 너무 홍 감독 스타일을 고집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돌이켜보면 난 시야가 짧았고, 홍 감독은 지금 당장의 효과가 아닌 더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갖고 계셨다.”
일본과의 동메달결정전에서 승리가 확정된 후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누고 있는 홍명보 감독과 김태영 코치.(사진=연합뉴스) |
-지금은 ‘홍 감독’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지만, 처음엔 그렇게 부르지 못했다고 들었다.
“워낙 친한 형이었기 때문에 대표팀 감독과 코치의 신분이었음에도 처음엔 ‘형’이라고 불렀다. 그러다 나중엔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감독님’으로 부르고 사석에선 ‘형’을 고수했는데 서서히 주위 눈치가 보이기 시작해 모든 호칭을 ‘감독님’으로 통일시켰다.”
-올림픽 얘기를 해보자. 멕시코전부터 마지막 한일전까지 6게임을 치렀다. 어느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나.
“아무래도 영국과의 8강전 경기가 가장 큰 추억으로 남지 않겠나. 여러 가지로 곱씹어볼 장면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2002한일월드컵 때 스페인전의 데자뷰 같았던 승부차기 순간이 환상적이었다. 홍 감독과 코치들은 영국전을 앞두고 네 가지 옵션으로 승부차기를 준비했었다. 선수들이 교체될 것을 예상해서 네 가지 순번으로 선수들 리스트를 만들었었는데 그중에서 첫 번째 키커가 구자철과 마지막 키커 기성용은 모든 옵션에 공통적으로 들어갔다. 승부차기 직전에 홍 감독이 키커들 이름을 호명했는데, 그중에서도 백성동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고 하더라. 자신이 승부차기 키커로 뽑힐 줄은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영국 대표팀의 다섯 번째 키커였던 다니엘 스터리지를 보면서 2002년 스페인전 때의 호아킨이 생각났었다.
“당시 홍 감독이랑 어깨동무한 채로 스터리지가 킥 하는 순간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홍 감독이 이런 말을 했었다. ‘김 코치, 아무래도 왼발잡이 저 친구는 골 못 넣을 것 같아. 왠지 느낌이 그래’라고. 그런데 바로 스터리지가 주춤거리면서 킥을 했고 (이)범영이가 그 공을 막아내는 게 아닌가. 순간 스페인의 호아킨이 생각나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홍 감독은 또 다시 마지막 키커로 나선 (기)성용이를 보면서 ‘성용이가 마무리하고 끝낼 거야’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홍 감독이 말하는 대로 이뤄졌다. ‘작두’ 탄 홍 감독이었다.”
일본전 이후 라커룸에서 제대로된 파티를 즐긴 대표팀 선수들. 김태영 코치 말에 의하면 거의 '난동' 수준이었다고 한다.(사진=기성용 트위터) |
-동메달 획득 후 라커룸에서 ‘파티’가 벌어졌다고 들었다. 그때 피를 흘리는 부상을 당하지 않았나.
“코치, 선수 할 것 없이 모두가 물을 뿌려대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범영이가 얼음이 들어있는 아이스박스 통을 나한테 뿌리는 바람에 얼음을 맞아 얼굴에 상처가 나서 피가 흘렀다. 그런데도 그 당시에는 그조차도 상관없다는 듯이 선수들과 어울려 뛰고 난리를 피웠다. 만약 다른 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범영이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웃음).”
-경기장에서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기도 했었다.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헹가래를 받다보면 두 번째까진 기분이 좋다가 세 번째가 되면 은근히 불안해진다. 워낙 장난기 많은 선수들이라 세 번째 헹가래 친 후 날 받지 않고 그냥 땅으로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도 조금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선수들이 경기 후 홍 감독과 맥주 토크를 하면서 ‘야자 타임’을 했다고 하던데.
“난 그때 너무 피곤해서 방으로 돌아갔고 홍 감독이 끝까지 혼자 남아서 선수들과 동메달의 여운을 즐기다 그런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홍 감독 입장에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선수들과 하는 마지막 자리에서 격식과 계급장을 떼고 선수들을 대하려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야자타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내심 일찍 자리를 떴던 게 다행이란 생각도 들더라.”
올림픽 본선 진출까지 동고동락했던 선수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마음 아파했다고 말하는 김태영 코치.(사진=일요신문 박은숙 기자) |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들이야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최종 엔트리 명단에서 빠졌거나 대표팀에 뽑혔다가 부상으로 낙마한 선수들을 생각하면 굉장히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지금도 그 선수들을 떠올리면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올림픽 예선전을 치르며 좌우 날개 역할을 맡았던 김민우와 김태환, 그리고 서정진과 김동섭, 윤빛가람, 홍철 등 올림픽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끔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선수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게 대단히 가슴이 아팠다. 그 선수들은 얼마나 우리를 원망했겠나. 얼마나 상심이 컸겠는가. 더욱이 홍정호 장현수 한국영 등 부상으로 올림픽을 함께 하지 못한 선수들이 갖는 상처는 표현 못할 정도이다. 국영이는 발등 부상으로 멕시코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귀국 조치가 내려졌는데 국영이랑 치료실에 앉아 껴안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올림픽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국영이가 있었더라면 하는 상황이 몇 차례 있었다.”
-한국영은 한국에서 떠날 때부터 발등에 부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코칭스태프한테 제대로 얘길 못했다고 하더라.
“선수 입장에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2002년 월드컵 때는 최종 엔트리에 들기 위해서 몸이 아파도 치료실에 안 가고 일부러 참고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최종 명단에 들어간 후에도 게임에서 뛰기 전까진 부상을 당해도 의료팀한테 ‘괜찮다’라고 얘기했다. 국영이가 부상을 참고 어떤 마음으로 런던에 왔는지, 그리고 뛸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더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엔 부상이 악화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국영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올림픽 최종 엔트리가 18명인데, 올림픽도 월드컵처럼 23명으로 늘렸으면 좋겠다. 골키퍼 2명 빼고 필드플레이어 16명으론 훈련 자체도 버겁다.”
-올림픽 직후 전남 드래곤즈 사령탑이 공석이 되면서 전남 감독 내정설이 나돌기도 했었다. 물론 하석주 감독이 그 자리를 맡게 됐지만 내심 서운하진 않았나.
“전혀 아니다. 그런 소문이 기사화되면서 내 입장만 곤란해졌었다. 직접 얘길 들은 적도 없고 아무런 접촉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설’로 기사화되니까 애매해지는 기분이 들더라. 올림픽 기간 동안 22세이하 청소년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었다. 아직 축구협회에서 아무런 말이 없는 터라 내 거취를 이렇게 저렇게 정할 상황이 아니다. 일단은 푹 쉬다가 천천히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김 코치에게 올림픽도 경험했으니 기회가 된다면 월드컵대표팀의 코칭스태프에도 도전해 볼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준비가 돼 있고 팀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답했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는 김태영 코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