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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만(趙正萬)
[본관] 임천(林川)
[진사] 숙종(肅宗) 7년(168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進士) 1등(一等) 1[壯元]위(1/100)
[생졸년] 1656년(효종 7)~1739년(영조 15)
[수(壽)] 83歲
[거주지] 한성([京])
조선후기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로,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정이(定而), 호는 오재(寤齋). 아버지는 합천군수 조경망(趙景望)이며, 어머니는 진주유씨(晉州柳氏)로 유식(柳寔)의 딸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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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국역문첨록
형조 판서 조공 신도비명 병서(刑曹判書趙公神道碑銘 幷序)
우리나라는 과거를 통해 선발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상상(上庠 성균관)에서 장원이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까닭은 바로 반드시 문장과 행실과 인품과 지벌(地閥)이 고루 출중한 자를 선발하므로 문과에서 단지 문장만을 취할 뿐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림 조씨(嘉林趙氏)는 승지 운강공(雲江公) 원(瑗)으로부터 참판 죽음공(竹陰公) 희일(希逸)과 시직 근수공(近水公) 석형(錫馨)에 이르기까지 3대가 연달아 상상의 장원이 되어 세상에 성대한 명성을 떨쳤는데, 한 대를 건너서 판서 오재공(寤齋公)이 또 장원이 되었다.
명종(明宗), 선조(宣祖), 인조(仁祖),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6대의 백여 년을 거친 뒤에 공이 어렵지 않게 장원이 되어 선대의 발자취를 따르니 지금까지도 사림들에게 부러움과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에게 단지 여사(餘事)일 뿐이다.
공은 어려서는 효도와 우애를 다하니 부모가 순하게 여겼고, 젊어서는 명예와 절개를 닦으니 유로(儒老)들이 큰 그릇으로 여겼다. 장성해서는 어진 스승이 무고를 당하는 것을 보고 글을 올려 통렬하게 변론하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성모(聖母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중전에서 폐위되는 욕을 당하자 울면서 행궁(行宮)에서 사직하고 곧바로 집의 문을 닫고 스스로를 깨끗하게 지켰다.
만년(晩年)에는 자취를 굽혀 군읍을 다스려서 호남(湖南), 영남(嶺南), 관서(關西), 해서(海西) 등의 지역에 가는 곳 마다 뛰어난 공적을 남겼으니, 어새(御璽)를 찍어 유서(諭書)를 내리는 상전(賞典)을 받았다. 늙어서는 공의(公議)가 공의 벼슬길이 엄체(淹滯)되어 있음을 안타까워하여 가장 먼저 풍익(馮翊)과 부풍(扶風)으로 발탁하니, 방백(方伯)으로 융숭하게 위임하는 것과 좌이(佐貳)로 높이 선발하는 것도 공의 경우보다 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형조 판서로 승진하여 임금을 모시는 가까운 반열에 참여해 중한 대우를 받음이 문재(文宰)와 차이가 없었으나, 번번이 뒷걸음치며 물러나 사양하고 병을 핑계로 숙배(肅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초연히 시를 짓고 술 마시는 것으로 회포를 풀며 세상일을 묻지 않았으니 공의 뜻과 기상을 어찌 구구한 과거(科擧)와 공명(功名)으로 얽어맬 수 있겠는가.
공의 정신과 식견은 늙을수록 더욱 왕성하여 기거함이 젊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82세의 나이로 가마를 타고 나를 찾아오니 내가 매우 놀라서 묻기를, “공의 연세로 남을 방문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이 팔좌(八座)의 지위에 올랐으니 자식들이 반드시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울 것이오. 그러니 나를 위해 비문을 지어 주시오. 이 때문에 찾아왔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께서는 비록 나이를 드셨으나 안색과 용모가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으니 앞으로 백세를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나이가 69세로 노쇠함이 이미 심하여, 제가 죽고 난 뒤의 일을 공에게 부탁해야 할 형편인데, 도리어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3년 뒤에 공이 별세하였다.
공이 별세하고 장례를 지낼 무렵 공의 아들 명규(明奎)가 상복 차림으로 가장(家狀)을 감싸 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선고의 유지(遺旨)입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늙고 병들어 쇠잔한 기운으로 어찌 문장을 완성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생전에 나에게 몸소 비문을 부탁한 뜻을 더듬어 생각해보건대, 소요부(邵堯夫)와 구양숙필(歐陽叔弼)의 고사에 견주더라도 이보다 더욱 진실하고 간절한 듯하다. 마음속에 감개(感慨)함이 없을 수 없어 마침내 차마 고사(固辭)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家狀)을 살펴보았다.
공은 휘가 정만(正萬)이고 자가 정이(定而)이며 관향은 가림(嘉林)이니 지금은 임천군(林川郡)에 속한 곳이다. 시조 천혁(天赫)이 고려(高麗) 때에 가림백(嘉林伯)에 봉해졌고, 선고 휘 경망(景望)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 증 정부인(貞夫人)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진흥군(晉興君) 식(寔)의 딸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자품이 있었고, 차츰 장성하자 재기(才氣)가 넘치고 문사(文思)가 샘솟아 시를 지으면 번번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에 성균관에서 문예를 다투어 마침내 진사의 장원을 차지하였다. 한 시험에서 7번이나 장원을 차지하니 재주와 명성이 세상에 더욱 알려졌다.
그러나 일찍부터 본말(本末)과 화실(華實)의 구분을 알아서 일찍이 송 동춘(宋同春 송준길(宋浚吉)) 선생에게 학업을 청하였다.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등 여러 공과 함께 풍계(楓溪)의 태고정(太古亭)에서《대학혹문(大學或問)》을 강론할 때에 특별히 공에게 정자 위로 올라와 강론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기대하고 면려하기를 몹시 극진하게 하였다.
우암이 문인 윤증(尹拯)에게 모욕을 당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는데, 공이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하자 성상이 속히 개납(開納) 하였다. 비록 선류(善類)들이 이 덕분에 기운을 얻게 되었으나 공이 훗날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게 된 것도 이 일 때문이었다. 얼마 후 궁위(宮闈)의 변고가 일어나자 공은 홀로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고는 과거공부를 그만두니, 논자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에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자 가장 먼저 금오의 낭관에 제수되었고, 6품의 관직으로 승진하였다. 이후로부터 십수 년간 내직과 외직에 출입하였다. 내직으로는 공조와 호조의 낭관, 제용감과 군자감의 판관, 상의원과 사복시의 첨정, 예빈시와 장악원의 정이 되었고, 외직으로는 강서 현령(江西縣令), 평양 서윤(平壤庶尹), 광산 현감(光山縣監), 안악 군수(安岳郡守), 청송(靑松)과 성천(成川)의 부사, 나주(羅州)ㆍ능주(綾州)ㆍ청주(淸州)ㆍ양주(楊州)ㆍ상주(尙州)의 목사가 되었는데, 청주는 부임하지 않았다.
임인년(壬寅年, 1722, 경종 2)에 여러 흉적들이 큰 옥사를 일으켜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지려 하였다. 공을 꺼리던 자가 공에게 묵은 원한을 가진 자와 합세하여 공을 벽동군(碧潼郡)에 유배 보냈다가 얼마 후 영변(寧邊)으로 이배(移配)시켰다. 공은 매일《희경(羲經)》을 외우면서, 어려운 환경에 처하였어도 마음은 형통한 듯이 하다가 4년 후에 새로운 교화를 만나서 마침내 조정으로 돌아왔다.
선공감 부정을 거쳐 군자감 정으로 전직하였는데, 상신(相臣)이 공이 세운 절개를 칭찬하고 성상 또한 장려하고 가상히 여겨 특별히 당상관으로 초계(超階)시켰다. 이어서 수원 부사(水原府使)에 제수되었고 다시 충청도 관찰사로 발탁되었으나 여러 번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장례원 판결사, 호조와 공조의 참의에 두루 제수되었으며, 장릉(長陵)의 표기(表記)를 써서 바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한성부 좌윤,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며 부총관과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일찍이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에 입시하여 ‘인욕(人慾)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한다.
[遏慾存理]’라는 말을 거론하면서 반복하여 경계의 말씀을 올렸다. 성상이 이를 경청하고 공에게 이 네 글자를 써서 올리도록 명하고는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손수 타이르는 뜻을 써서 내리니 온 세상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735, 영조 11)에 공이 만 80세가 되었다. 상신이 공의 지난 업적이 장려할 만하고 나이가 또 대질(大耋 80세)이며 아들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올랐음을 낱낱이 아뢰자, 성상이 특별히 품계를 뛰어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지돈녕부사, 한성부 판윤, 공조와 형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도감에서 수고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고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성상은 공이 연로하고 또 그 지위와 대우가 보통의 격식에 견줄 바가 아니라는 이유로 특별히 우대하고 여러 번 음식을 넉넉히 내려주도록 명하였으며, 멋대로 공을 비난하거나 모욕하는 자가 있으면 노인을 공경해야 하는 의리를 알지 못한다고 엄하게 책망하였다.
기미년(己未年, 1739, 영조 15) 4월에 공은 병환이 들자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사생(死生)은 주야(晝夜)와 같으니, 어찌 족히 마음에 둘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임종할 때에도 정신은 여전히 흐려지지 않아서 묵묵히 고서(古書)를 욈에 한 군데도 틀린 곳이 없었다.
또 죽은 뒤의 일에 관하여 꼼꼼하게 전부 지시하고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편안하게 서거하니, 여기에서 또 정력(定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날이 바로 같은 달 13일이었고, 춘추는 84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조회를 중지하고 조문과 부의를 의례대로 하였다. 인천(仁川) 오봉산(五鳳山) 해향(亥向)의 언덕에 장사지내고 전부인(前夫人)과 후부인(後夫人)을 합장하였다. 전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참의 주국(柱國)의 딸로 일찍 별세하여 딸 하나만을 두었고, 후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묘서 영 진명(晉命)의 딸이다. 두 부인 모두 부덕(婦德)을 갖추고 있었다.
공은 4남 5녀를 두었으니, 장남 명두(明斗)는 교관이고, 둘째 명익(明翼) 또한 상상(上庠)에서 장원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대사헌이 되었으며, 막내 명기(明箕)는 참봉인데, 세 아들 모두 공보다 먼저 죽었다. 명규(明奎)는 셋째 아들로 관직은 정랑이다. 딸은 각각 도사 이의진(李義鎭), 군수 윤집(尹潗), 사인(士人) 이덕현(李德賢), 수찬 정홍상(鄭弘祥), 관찰사 김상로(金尙魯)에게 출가하였다.
명두는 아들이 없어 아우 명익의 아들인 덕수(德洙)를 양자로 삼았다. 명익은 마침내 종형의 아들인 덕순(德洵)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으며, 딸은 각각 이익배(李益培), 민백증(閔百增), 홍범해(洪範海)에게 출가하였다. 명규의 아들은 덕호(德浩)이고 딸은 김수묵(金守默)에게 출가하였다.
명기의 아들은 덕봉(德鳳)이고 딸은 이수(李)에게 출가하였다. 덕수의 아들은 학증(學曾)이다. 이의진의 아들은 준(浚)이고, 윤집의 딸은 각각 신경민(申景閔), 이석중(李石重)에게 출가하였다. 이덕현의 아들은 사원(思元)이고, 정홍상의 아들은 존중(存中)이며, 김상로의 아들은 치양(致讓)과 치영(致永)이다. 아직 이름이 없는 나머지 아들과 아직 시집가지 않은 나머지 딸은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내외의 손자, 증손, 현손이 총 약간 명이다.
공은 깨끗하고 온화하고 빼어나고 아름다워 안색과 웃음이 친애할 만하였으며, 내면에는 권도(權度)를 갖추고 있어서 남을 따라 오르내리지 않았다. 가정에서의 행실이 돈독하게 닦여져서 윤리와 의리가 매우 반듯하였고, 친인척들에게까지 베풀어 차이를 두지 않고 두루 구휼하였다.
평소에《소학(小學)》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렸으며, 가문의 일에 힘을 다하여 선대의 비석을 새기고 유집(遺集)을 간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몸소 담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마음가짐이 편안하고 소박하였으며 간략하고 검소함으로 몸을 단속하였는데, 재추(宰樞)의 지위에 올라서는 더욱 청렴결백한 절조를 가다듬으며 옛날에 쓰던 의복과 기물을 새것으로 바꾸지 않고서 말하기를, “사람과 물건이 함께 늙었으니, 굳이 새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항상 말하기를, “세상일은 원만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마땅히 부족한 것에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이를 따라 담박(澹泊)하고 검약함으로써 스스로를 굳게 지켰다. 오로지 유학의 가르침으로써 백성들을 이끌었으며 고식지계(姑息之計)를 일삼지 않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데에 힘썼다.
나주(羅州)와 상주(尙州) 두 고을에서의 정사는 진실로 탁월하였고, 수원(水原)에 있을 때에는 창과 갑옷을 잘 수리하여 이로써 급한 일에 대비할 수 있는 큰 힘을 얻었다. 그런데도 공은 도리어 공적을 자랑하거나 명예를 요구하는 것을 심한 수치로 여겨서 끝내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며, 품계를 올리는 것을 강력히 사양하기까지 하였다.
풍요로운 고을에 있을 때에는 관직을 그만두는 것을 더욱더 가볍게 여겼다.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번번이 지팡이 하나를 짚고 찾아가 구경하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는 것을 잊었으니 표연(飄然)히 세속을 벗어난 생각이 있었다.
일찍 유문(儒門)에 들어가서 훈계(訓戒)를 가슴에 깊이 새겼으니 우암(尤菴)이 그 지조가 견고하고 확실함을 찬탄하였다. 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등 여러 공들과 더불어 서로 학문을 절차탁마하여 사문(斯文)에 관계된 일이면 반드시 뜻을 다하여 협조하였다.
상주에 있을 때에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사당을 새로 짓고 동춘의 비를 세웠다. 어려서 흉액을 만나 어버이를 잃고는 슬픈 마음에 애를 태우고 피를 말려서 마침내 불면증에 걸렸으나 능히 병든 몸으로 공부를 하여 저절로 정신과 기운이 청명해졌다.
호를 ‘오재(寤齋)’라고 지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삼연은 공의 가장 친한 지기(知己)였는데, 공이 일찍이 삼연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즉시 부정한 색(色)을 물리쳐 없애자 삼연은 선(善)을 받아들이는 공의 용기를 자주 칭찬하였다. 또 공이 고요함으로써 번거로움을 누르고 과거와 벼슬에 급급해하지 않음을 칭찬하였다.
공은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깨닫고 이해하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책을 볼 적에 열 줄을 한꺼번에 읽어 내려갔고 한번 눈으로 본 것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 서책을 매우 좋아하여 앉으나 누우나 손에서 책을 떼지 아니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로부터 조정의 전장(典章)과 국가의 전고, 계첩(系牒)과 여지도(輿地圖)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슴 속에 낱낱이 기억하여 사람들이 이것을 물으면 재미있게 말해주곤 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는 시(詩)에 더욱 뛰어났으니, 업중(鄴中)을 본보기로 삼고 차츰 이당(李唐)에 젖어들어 경룡(景龍 당 중종의 연호)과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의 유풍을 얻어서 물이 용솟음치고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여 번번이 마치 귀신이 도와주는 것 같았다.
해서(楷書)의 필법은 꿋꿋하고 굳세어서 팔순이 된 나이에도 필획은 오히려 쇠하지 않았으니, 훌륭한 재주가 주변의 여러 방면으로 발휘된 것이 또 이와 같았다. 나는 예전부터 공과 친하였는데, 매번 공의 문아(文雅)가 넉넉하고 풍류가 본받을 만함을 흠모하였다. 말세의 풍속이 각박하니 이제 어디서 이런 분을 다시 만나볼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공을 칭찬하는 것 중에 / 世所稱公
문장의 재주에 대한 것이 가장 성하였네 / 詞譽最盛
높은 벼슬은 우연히 내려온 것이니 / 軒冕倘來
또한 마음에 둔 것이 아니었네 / 亦非性命
문장이 비록 세상을 울리고 빛내었으나 / 雖則震耀
실제의 행실을 가릴 수는 없었네 / 莫掩實行
이택하기를 깊이 하고 / 麗澤之深
지조를 굳게 지켰네 / 執守之勁
요화가 한번 닫히자 / 瑤華一閉
피 눈물을 흘리고 달려가서 / 血泣奔逬
해도(海島)로 들어간 경쇠 치는 양처럼 / 入海磬襄
의리로써 스스로를 깨끗이 하였네 / 以義自靖
뛰어난 재주를 잠시 시험하여 / 長才薄試
정사에 베푸니 / 施于有政
열 고을을 다스림에 넉넉하여 / 優優十州
어려운 일이 눈에 보이지 않았네 / 目無肯綮
크고 작은 일에 모두 마땅하여 / 鉅細咸宜
공적이 우뚝하여 볼 만하였네 / 蔚有可觀
상전벽해가 여러 번 일어났으나 / 滄桑百變
평소의 절개는 오히려 온전하였네 / 素節猶完
여러 번 성상의 포상하는 은전에 응하여 / 屢膺褒典
마침내 높은 반열에 올랐네 / 遂陟巍班
학처럼 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 鶴髮鳩筇
벼슬길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수양하였네 / 引恬養閒
성상이 노성한 구신(舊臣)으로 돌보시고 / 聖眷老成
조정에서 장덕으로 우러러 보게 되었네 / 朝瞻長德
복록이 모두 온전하여 / 福祿俱全
진퇴가 어긋나지 않았네 / 進退弗忒
먹고 거두는 것에 / 曰食而收
수명의 장단(長短)을 한결같이 천명에 맡겼으니 / 一任脩促
해가 기우는 때에 질장구 치며 노래 부르고 / 日昃歌缶
결코 탄식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네 / 曾不嗟戚
공의 처음을 돌아보고 마지막을 살피니 / 循始究終
진실로 아름다운 자취가 드러나네 / 寔著懿蹟
내가 이를 비석에 새겨서 / 我銘之貞
먼 후세에 고하노라 / 用詔遐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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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원(瑗) :
조원(趙瑗, 1544~1595)으로,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雲江),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시에 장원급제
하였고 1572년(선조 5)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저서로는《독서강의(讀書講疑)》,《가림세고(嘉林世稿)》가 있다.
[주02] 희일(希逸) :
조희일(趙希逸, 1575~1638)로, 자는 이숙(怡叔), 호는 죽음(竹陰) 또는 팔봉(八峰),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1601년(선조 34)
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08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문장과 부(賦), 시
(詩), 서화에 모두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죽음집(竹陰集)》,《경사질의(經史質疑)》가 있다.
[주03] 석형(錫馨) :
조석형(趙錫馨, 1598~1656)으로, 자는 자복(子服), 호는 근수헌(近水軒),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1613년(광해군 5)에 폐모론
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있다가, 1624년(인조2)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로써 조부 조원(趙瑗), 부친 조희일(趙希逸)
에 이어 3대가 연속하여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세마, 시직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후에도 시직, 부솔 등에 여러 번 임명되
었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주04] 풍익(馮翊)과 부풍(扶風) :
한(漢)나라 때에 수도 장안(長安)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관직인 좌풍익(左馮翊)과 우부풍(右扶風)으로, 조선에서는 이를 모방하
여 광주(廣州), 강화(江華), 개성(開城), 수원(水原) 네 곳에 유수(留守)의 관직을 두었다.
[주05] 팔좌(八座) :
재신급(宰臣級)의 8명의 고위 관료로, 각 시대마다 지칭하는 바가 약간씩 다른데, 동한(東漢) 시대 때에는 육조(六曹)의 상서와 영
(令)과 복야(僕射)를 말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흔히 판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06] 소요부(邵堯夫)와 구양숙필(歐陽叔弼)의 고사 :
소요부는 송(宋)나라 때의 학자 소옹(邵雍, 1011~1077)으로 자가 요부(堯夫)이며, 구양숙필은 구양수(歐陽脩)의 아들 구양비(歐
陽棐, 1047~1113)로 자가 숙필(叔弼)이다. 한번은 구양비가 낙양(洛陽)을 지나다가 소옹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는데, 소옹이 자신
의 평생 이력을 매우 자상하게 얘기해 주고, 작별할 때 다시 부탁하기를 “그대는 오늘 내가 한 말을 후일에 잊지 말아다오.” 하였다.
구양비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는데, 돌아와서 부친 구양수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구양수가 “이는 필시 뜻이 있어 하신 말씀일
것이다.”라고 하며 기뻐하였다. 뒤에 소옹이 작고하여 조정에서 시호를 논의하면서 그 시장(諡狀)을 구양비에게 짓도록 하니, 구양
비가 깜짝 놀라며 “선생께서 그때에 말씀해 주신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었구나.”라고 깨닫고 소옹이 지난날에 해 준 말씀을 빠
짐없이 서술하였다.《宋元學案 卷9 百源学案上》
[주07] 우암이 …… 하였다 :
윤증(尹拯)은 본래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었으나, 송시열이 작성한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비문(碑文)에 불만을 품고 이후부
터 송시열을 계속 공격하였다. 이때 조정만(趙正萬)이 올린 상소문은《숙종실록(肅宗實錄)》10년 8월 21일 기사에 자세히 보인
다.
[주08] 궁위(宮闈)의 변고 :
1689년(숙종 15) 기사년에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1680년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제거되었
던 남인(南人)이 이를 통해 다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집권하였다.
[주09] 임인년에 …… 일으켜 :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킨 것을 이른다. 신임사화는 경종(景宗) 즉위 초인 신축년(1721, 경종 1)과 임인년(1722)에 세제(世
弟) 책봉과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옥사이다. 숙종(肅宗)이 승하하고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후사가 없고 병이
많았다.
이에 노론(老論)의 주도하에 연잉군(延礽君)이 세제로 책봉되자, 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제의 대리청정을 강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론(少論) 김일경(金一鏡) 등이 노론의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이라고 몰아 소(疏)를 올리자, 경종이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 노론 사대신(四大臣)을 파직시켜 유배 보냈으
며, 이 외에도 많은 노론의 인물들을 삭직시키고 소론을 등용하였다.
1722년 3월에 목호룡(睦虎龍)이, 노론 측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하자, 소론은 이를 기회로 옥사를 일으켜 유배
된 노론의 사대신을 사사(賜死)하게 하고, 대다수의 노론을 제거하였다.
[주10] 희경(羲經) :
《주역(周易)》을 말한다. 복희씨(伏羲氏)가 황하(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그림을 보고 팔괘(八卦)를 그어서 처음으로《주
역》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11] 일찍이 …… 올렸다 :
1734년(영조 10) 4월 조강(朝講)에서《예기(禮記)》를 강할 때에 특진관으로 입시한 조정만(趙正萬)이 영조(英祖)에게 아뢰기
를, “방기(坊記)의 방(坊) 자는 바로 사욕(私慾)을 방지한다는 뜻입니다. 신이 일찍이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송
준길이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하다.
〔遏慾存理〕’라는 네 글자를 써서 신에게 주었고, 신의 벗인 김창흡(金昌翕)은 또 일찍이 신이 병통이 있다는 이유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줄인다.〔淸心寡慾〕’에 관한 설을 지어서 경계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이 사우(師友)에게 얻은 것인데, 방기(坊記)
의 뜻과 서로 부합하기 때문에 신이 감히 이 여덟 글자로써 올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10年 4月 20日》
[주12] 을묘년에 …… 명하였다 :
조정만(趙正萬)이 80세였으므로 전례에 따라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가자(加資)하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당시 우의정이던 김흥경
(金興慶)이 품계를 뛰어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할 것을 청하자 영조가 이를 가납하였다.《英祖實錄 11年 1月 3日》
[주13] 사생(死生)은 주야(晝夜)와 같으니 :
죽고 사는 것은 마치 낮과 밤이 갈마드는 것처럼 당연하여 대수로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장자(莊子)》〈전자방(田子方)〉에 “사
생과 종시가 장차 주야처럼 인식되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는데, 더구나 득실과 화복에 마음을 두겠는가.〔死生終始, 將爲晝夜,
而莫之能滑, 而況得喪禍福之所介乎?〕”라고 하였다.
[주14] 업중(鄴中) :
조조(曹操)가 도읍한 업(鄴)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공융(孔融), 진림(陳琳), 왕찬(王粲), 조조, 조비(曹丕) 등 소위 건안칠자(建安
七子)라고 불리던 문인들이 활동한 곳이다.
[주15] 이택(麗澤) :
두 개의 연못이 이어져 있다는 뜻으로,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을 말한다.《주역(周易)》〈태괘(兌卦)〉에, “두 개
의 연못이 이어져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친구사이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고 하였
다.
[주16] 요화(瑤華)가 한번 닫히자 :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된 일을 말한다. 요화는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황후 곽씨(郭氏)가 유폐되었던 궁전(宮殿)의 명칭이
다.《宋史 卷242 仁宗郭皇后列傳》
[주17] 해도(海島)로 …… 양(襄)처럼 :
노(魯)나라가 쇠미해져 예악(禮樂)이 무너지자, 예관(禮官)과 악관(樂官)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다른 곳으로 떠나갔는데, 그중에 경
쇠를 치는 악인(樂人)인 양(襄)은 해도로 들어갔다. 이러한 내용은《논어(論語)》〈미자(微子)〉에 보이는데, 이르기를, “소사 양
(陽)과 경쇠를 치는 양(襄)은 해도로 들어갔다.〔少師陽、擊磬襄, 入於海.〕”라고 하였다.
[주18] 해가 …… 부르고 :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에 생사(生死)의 이치를 잘 알아서 늙고 쇠약해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편안하고 즐겁게 인생을 마무
리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본래《주역(周易)》〈이괘(離卦) 구삼(九三)〉에 보이는 말로, “서산에 해가 기우는 형상이니, 질장구 치
고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노년을 한탄함이니, 흉하다.〔日昃之離, 不鼓缶而歌, 則大耋之嗟凶.〕”라고 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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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我朝最以科選爲重, 而尤重魁上庠者, 以其必選文行人地之出倫者, 不比文科之只取文而已也。 嘉林趙氏, 自承旨雲江公瑗、參判竹陰公希逸、侍直近水公錫馨, 連三世爲魁, 時名藉甚, 間一世, 而判書寤齋公又爲魁。 歷明、宣、仁、孝、顯、肅六朝百有餘年, 而公容易得之, 追躡前軌, 至今爲士林艶誦。 然此在公特餘事爾。 公幼而盡孝愛, 父母順之; 少而修名節, 儒老器之。 壯而見賢師受誣, 封章洞辨, 拄讆言者口。 値聖母幽辱, 泣辭離宮, 仍闔戶自絜。 晩而屈跡郡邑, 湖、嶺、關、海, 隨有異蹟, 婁膺璽書之賞。 老而公議惜其淹滯, 首擢馮翊、扶風, 方伯隆委, 佐貳高選, 亦無得以先公。 旣而進長爽鳩, 參聞宥密, 見待之重, 勿間文宰, 而輒逡巡退讓, 多引疾不拜, 翛然以詩酒自遣, 不問時事。 斯其標致, 豈區區科名所可囿哉, 公神識愈老愈王, 起居無異少日。 年八十二, 枉駕造不佞, 不佞驚問。 “以公之年能訪人耶” 公笑曰: “吾忝登八座, 兒曹必桓楹我矣。 願爲我作文, 是以來。” 不佞曰: “公雖老, 顔貌不改, 將百歲是期, 而不佞亦七十少一, 衰謝已甚, 正當以身後累公, 顧乃以是爲言耶?” 居三歲, 公卒。 卒且葬, 公之子明奎扶衰抱狀, 血泣而謂余曰: “此遺意也。” 余念朽敗餘氣, 豈有綴成文字之望? 而追思公前日見屬之意, 比諸邵堯夫、歐叔弼故事, 尤似眞切, 不能無槪然于心, 遂不忍固辭, 謹按狀。
公諱正萬, 字定而, 嘉林其出, 而今屬林川郡。 鼻祖天赫, 高麗嘉林伯。 考諱景望, 陜川郡守、贈吏曹判書。 妣贈貞夫人晉州柳氏, 晉興君寔女。 公生而有殊姿。 稍長, 才思烽涌, 出語輒驚人。 辛酉, 游泮宮戰藝, 遂擢進士壯元, 一試七魁, 才名溢世。 而能早知本末華實之分, 嘗請益於宋同春先生、尤菴先生與文谷諸公, 講《大學或問》於楓溪太古亭, 特令公升堂參講, 期勉深摯。 尤菴爲門人尹拯所詆侮, 人莫敢言, 公爲疏首疏上, 上亟賜開納。 雖善類爲之吐氣, 而後來受人齮齕, 亦由是焉。 亡何有宮闈之變, 公獨樹臣節, 仍輟跡公車, 論者以爲難。 甲戌, 坤位復正, 首除金吾郞, 陞六品職。 自後十數年間, 出入中外, 入爲工・戶曹郞、濟用・軍資判官、尙衣・司僕僉正、禮賓・掌樂正, 出爲江西縣令、平壤庶尹、光山縣監、安岳郡守、靑松・成川府使、羅州・綾州・淸州・楊州・尙州牧使, 而淸未赴。
壬寅, 群凶起大獄, 宗社將傾。 憚公者與宿憾合, 竄之碧潼郡, 已移寧邊。 日誦《羲經》, 處坎如亨, 四年而遇新化乃還。 由繕工副正, 轉軍資正, 相臣颺公樹立, 上亦褒嘉之, 特超緋玉。 仍拜水原府使, 復擢忠淸道觀察使, 婁辭不赴。 歷拜判決事、戶・工曹參議, 書進長陵表記, 陞嘉善, 拜左尹、戶曹參判, 兼副摠管、同知義禁。 嘗以特進官侍經筵, 擧“遏慾存理”語, 反復陳戒, 上傾聽, 命公寫進四字, 特賜虎皮, 手書諭意, 一世聳歎。
乙卯, 公年滿八十, 相臣歷陳前事可奬, 年又大耋, 子爲宰臣同列, 上特命超階資憲。 拜知敦寧、判尹、工・刑曹判書, 用都監勞, 陞正
憲, 拜知中樞。 上以公年老, 又其位遇, 非常調可倫, 加待之, 婁命優致食物, 有橫加侵軼者, 深責其不知敬老義。
己未四月, 公寢疾, 謂子姓曰: “死生如晝夜, 奚足控摶?” 臨終, 精神猶不爽, 默念古書, 無一錯處。 後事纖悉, 澡濯易衣, 逌然而逝, 此又可見定力之過人矣。 寔是月十三日也, 春秋八十四。 訃聞, 輟朝弔賻如儀, 葬于仁川五鳳山面亥之原, 與前後兩夫人同兆。 前夫人豐山洪氏, 參議柱國女。 早卒, 只育一女。 後夫人全州李氏, 署令晉命女。 兩夫人俱有婦德。
公有四男五女: 男長明斗, 敎官; 仲明翼, 亦魁上庠登第, 爲大司憲: 季明箕, 參奉, 俱先公歿; 明奎, 其第三, 而官正郞。 女適都事李義鎭、郡守尹潗、士人李德賢、修撰鄭弘祥、觀察使金尙魯。 明斗無子, 子弟明翼之子德洙。 明翼遂取從兄子德洵而子之。 女適李益培、閔百增、洪範海。 明奎子德浩, 女適金守默。 明箕子德鳳, 女適李(土+秀)。 德洙子學曾。 李義鎭子浚。 尹潗女適申景閔、李石重。 李德賢子思元。 鄭弘祥子存中。 金尙魯子致讓、致永。 餘男未名、女未字者, 竝不錄。 內外孫曾玄摠若干人。 公淸和秀令, 色笑可親, 而中有權度, 不隨人軒輊。 內行篤修, 倫誼克正, 施及戚姻, 周恤靡間。 平居以《小學》自律, 殫誠祀享, 盡力宗事, 爰曁刻先碑、鋟先集, 亡不身自擔夯。 存心恬素, 飭己簡儉, 致位宰樞, 益礪廉白之節, 服用視舊亡易曰: “人與物共老, 何必新之?” 又常言: “世間事苦難圓滿, 宜以不足爲足。” 其爲吏道, 亦放此, 澹約自持。 專以儒術率民, 不事姑息, 務爲經遠之圖。 羅、尙二州之政, 固卓殊, 而在水原善敹戈甲用, 能大得力於緩急。 顧以衒要爲深恥, 終不自言, 至力辭增秩, 在腴邑尤輕於去官。 性喜山水, 聞有佳境, 輒一筇往賞, 嘯詠忘歸, 飄然有出塵之想。 早登儒門, 服膺訓戒, 尤菴歎其志操堅確。 又與農巖、三淵、芝村諸公相磨礱, 事關斯文, 必極意佽助。 在尙新淸陰廟, 豎同春碑。 少遘閔凶, 哀思焦涸, 仍成失睡證, 能以病用工, 自然神氣淸明, 其號寤齋者以此也。 三淵最爲公知己, 嘗因其一言, 卽屛去不正色, 三淵亟稱受善之勇。 又美其以靜制煩, 不數數科官。 公聰明絶人, 悟解出常。 看書十行俱下, 一過目, 終身不忘。 耽嗜竹素, 坐臥不離, 自經史、百家以至朝章、國故、系牒、輿圖, 擧羅列胸中, 人有叩之, 亹亹乎其言之也。 爲文尤長於詩, 規模鄴中, 以浸淫李唐, 得景龍、開元風, 水涌飆馳, 動如神助。 楷法遒健, 八帙之年, 筆劃猶不衰, 才美之旁溢又如此。 不佞故習於公, 每欽其文雅醞藉, 風流可挹, 末俗翦翦, 今安得復見斯人也? 噫! 銘曰:
世所稱公, 詞譽最盛。 軒冕倘來, 亦非性命。 雖則震耀, 莫掩實行。 麗澤之深, 執守之勁。 瑤華一閉, 血泣奔逬。 入海磬襄, 以義自靖。
長才薄試, 施于有政。 優優十州, 目無肯綮。 鉅細咸宜, 蔚有可觀。 滄桑百變, 素節猶完。 婁膺褒典, 遂陟巍班。 鶴髮鳩筇, 引恬養閑。
聖眷老成, 朝瞻長德。 福祿俱全, 進退弗忒。 曰食而收, 一任脩促。 日昃歌缶, 曾不嗟戚。 循始究終, 寔著懿蹟。 我銘之貞, 用詔遐曆。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