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신수(石霜信首,1872~1947)】
굶주린 이 먹을 것 주고 목마른 이 마실 것 준다
세속을 떠난 곳 속리(俗離)에 ‘법이 머무는 도량(法住)’이 속리산 법주사이다.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의신(義信)스님이 천축(天竺,인도)에서 경전을 구해 귀국한 후 창건한 고찰이다. 석상신수(石霜信首,1872~1947)스님은 10여년간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며 도제양성과 중생구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의 생애와 수행일화를 비문 등을 참고하여 구성했다.
“굶주린 이 먹을 것 주고 목마른 이 마실 것 준다”
‘탈속한 천진보살’로 대중의 존경 받아
조국해방 원력으로 미륵대불 조성 추진
○…법주사 경내에 있는 석상스님 비문에는 한글로 스님의 모습을 기록해 놓았다. 제자 호경(湖鏡)스님이 1949년 5월5일 선()한 이 글은 생전의 석상스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단서이다.
“우리 스님은 우람스러운 몸집에 진중하고 둥근 머리가 아늑하고 조촐하며 아담하고 은은한 얼굴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워하고 짐승도 닮고 싶어 했다. 부드럽고 희망을 머금은 몸가짐과 조심스런 태도는 그 성스러움을 범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어려워하며, 높고 높은 하늘 밑에 발� 디지지 않고 땅둘레가 한이 없어 가볍게 걸으셨다. 땅넓이가 끝이 없되 오고 감이 드물었으며, 눕는 것을 싫어하고 앉음을 좋아했으나, 책상다리하는 것을 꺼렸고, 요와 이불을 깔거나 덮지 않고 오뚝이 누웠다.”
<사진> 석상스님 진영. 출처=보은 법주사
○…스님은 1941년 3월 서울 선학원에서 열린 유교법회(遺敎法會)에 증명법사로 직접 참석했다. 이 대회는 박한영 스님과 송만공 스님을 비롯한 당대 고승들이 조선불교의 정통성 수호하려고 모인 자리였다. 당시 기념사진을 보면 석상스님은 박한영.송만공.채서응 스님 등과 함께 맨 앞줄에 앉아 있다. 당시 조선불교에서 석상스님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석상스님은 1928년부터 1940년까지 12년간 법주사 주지를 역임했다. 스님은 이때 당대 최고의 조각가 김복진으로 하여금 ‘미륵대불’을 조성하도록 했다. 가산 김수곤 불자와 뜻을 같이해 ‘세계에서 제일 큰 미륵불상’ 조성을 추진했다. 이때가 1939년 3월로 일제가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조선을 수탈하던 시기였다. 미륵대불을 만들게 된 것은 절망에 빠져있던 조선인들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기 위함이었다.
○…1939년 3월16일자 동아일보에는 ‘충북 속리산 법주사에서 대미륵존상’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이렇다. “충북 속리산 법주사에서 대미륵존상(높이75척)의 기공식이 거행되다. 그 건조비는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김수곤(金水坤)이 기진(寄進)하다. 스님의 비문에는 “말하잖아도 일이 스스로 되어가고 구하잖아도 정재가 저절로 모아들었다”고 건립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석상스님을 두고 ‘탈속(脫俗)한 천진보살(天眞菩薩)’이라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수행으로 일관했던 스님은 계행과 학덕, 선덕을 두루갖춘 인욕보살이었다. 당신 생애에 단 한번 화를 냈는데, 그것은 보은군수가 법주사에 왔는데, 합장을 하지 않고 법당앞을 지나갈 때였다고 한다.
○…호경(湖鏡)스님은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한글 시를 바쳤다.
“…바람아 부지마라 솔남게 흰꽃 진다 /
말없는 청산 속에 값 없는 물 마시고 /
산집에 무심한 설월로 함께 놀다 가리라 /
한뉘를 그냥저냥 단칸방 지켜오니 /
반칸은 내차지나 반칸은 구름 차지 /
강산은 디딜에 없어 둘러두고 보리라 /
덧 없는 궂 세상에 눈같은 맑은 계행…
숲새에 우는 학이 솔남게 깃들이니 /
고라니 짖는 밤달 이슬에 젖겼어라 /
이대로 본명하니 냄잠잡고가리라 /
봄바람 부는 곳에 마른가지 잎이 피고 /
가을잎 지는 적에 돌 사람 우짖으네”
○…스님이 기차안에서 한 일본인을 만났다. 일본인은 스님에게 “화상은 무얼하는 스님이냐”고 비꼬듯이 물었다. 필담을 통한 문답이 이뤄졌다.
스님은 ‘有時乎參禪(유시호참선) 有時乎布敎(유시호포교)’라고 썼다. “때로는 참선하고 때로는 포교도 한다”는 뜻이다. 일본인은 “如何布敎(여하포교)” “어떻게 포교를 하느냐”고 했다. 이에 *飢者與食(기자여식) 渴者與飮(갈자여음)이라고 답했다. “굶주린 이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이에게는 마실 것을 준다”는 뜻이다.
일본인의 무례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飢者與食(기자여식) 渴者與飮(갈자여음) 不飢渴者如何濟度(불기갈자여하제도)’라며 빈정댔다. “주리거나 목마른 자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겠지만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은 자는 또 어떻게 다루겠느냐)”는 것이었다. 스님은 머뭇거림 없이 답을 주었다.
‘投藥不爲健人(투약불위건인) 說法不爲君子(설법불위군자) 雖然如是(수연여시)
至於如這漢(지어여저한) 夕陽在山群羊下野(석양재산군양하야)’
“약은 건강한 사람을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요
법은 어진 사람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러할진대 같은 놈에 이르러서는
석양이 산에 비끼었는데 뭇 양떼들은 들로 내려오느니라”라고 했다. 이어 스님은
“어떤 것이 석양이 산에 있는데 뭇 양떼들이 들로 내려오는 경계냐”고 경책했다.
마침 기차가 역으로 들어가면서 기적을 길게 울리자, 그 소리에 놀란 제비들이 전깃줄에 있다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일본인은 그 장면을 보고 “저것이 그 경계”라고 대답했다. 이에 스님은 고개를 내저은 뒤
‘淸風江上(청풍강상) 白鷗閑飛(백구한비)’
“맑은 바람 부는 강 위에 흰 갈매기가 한가로이 난다”고 했다.
기차와 제비라는 상(相)을 나누어 생각하며 아직까지 사량분별(二法)에 머무른 일본인에게 평상심과 있는 그대로가 진실인 불법(不二法)을 가르쳐준 것이다.
법주사=이성수 기자
■ 석전스님의 한시 ■
○…석전 박한영 스님의 글을 모은 <석전시초>에는 석상스님에 대한 글이 두 편 실려 있다.
* 贈石霜上人(증석상상인) - 以蓂莢記之(이명협기지)
相逢石上落花雨(상봉석상낙화우)
▨起甘年雲樹情(환기감년운수정)
殘月孤城何所贈(잔월고성하소증)
亂編蓂葉記春明(난편명엽기춘명)
* 追和石霜上人還曆韻(추화석상상인환력운)
峰石森蒼氣蘊玉(봉석삼창기온옥)
橋霜乍冷痕飜花(교상사냉흔번화)
老槐陰落靑如蓋(노괴음락청여개)
那禁鐘聞嶠外家(나금종문교외가)
嗟切楓溪又錦巒(차절풍계우금만)
回思綠▨映池間(회사녹발영지간)
坐來石上論今日(좌래석상론금일)
多謝吾君不染(다사오군불염환)
月黑林間百怪誼(월흑임간백괴의)
滄茫岐路失吾園(창망기로실오원)
請君共老隣芳社(청군공노인방사)
閱盡殘宵達曉暾(열진잔소달효돈)
■ 행장 ■
진하스님 은사로 출가
선 교 율 겸비한 고승
석상스님은 1872년 2월10일 충남 부여군 남면 송학리에서 장홍근(張洪根) 선생의 삼남(三男)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며, 모친은 은진 송씨(宋氏). 스님의 법호는 석상(石霜)이고, 법명은 신수(信首)이다.
스님은 1884년부터 7년간 충남 부여군 내산면 녹간리(鹿澗里)에서 김기상(金箕祥)선생에게 <통감(痛鑑)>과 <사서삼경> 등 한학을 중심으로 한 외전을 깊이 공부했다.
1893년 4월8일 강원도 고성 신계사에서 서진하(徐震河)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청허휴정스님의 16대 법손이다. 같은해 6월 16일 신계사에서 진하스님에게 사미십계를 수지했고, 1895년 7월15일 고성 건봉사에서 진하스님에게 비구 구족계와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스님은 1903년 10월15일 고성 건봉사에서 개강(開講)하고 수선 안거를 성취하며 선교율(禪敎律)을 겸비한 수행에 몰두했다.
<사진> 법주사에 있는 석상스님 부도.
출가 이듬해인 1894년 3월1일부터 이듬해 10월까지는 충남 공주 동학사 김만우(金萬愚) 스님 문하에서 초등과(初等科)를 졸업했다.
1895년 10월15일부터 1896년10월까지는 전북 순창 구암사 박한영 스님에게 중등과(中等科) 가운데 <능엄경>과 <기신론>을 익혔다. 1897년 3월10일부터 1898년 10월까지는 전남 순천 송광사 김금명(金錦溟) 스님에게 <반야경>과 <원각경>을 배워 중등과를 졸업했다. 1899년 3월15일부터 1901년 10월까지는 경남 산청 대원사에서 박한영 스님의 지도를 받고 고등과(高等科)를 졸업했다.
스님은 1913년 7월30일 법주사 선시(選試)에 합격해 대선법계(大禪法階)를 받았고, 1916년에는 중덕법계(中德法階), 1918년에는 대덕법계(大德法階), 1921년에는 대선사법계(大禪師法階)를 수지했다.
선교율을 겸비한 스님은 특히 교학을 통한 도제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1903년부터 1926년까지 30여년간 건봉사와 법주사에서 강사(講師)로 있으면서 후학을 지도했다. 1903년 고성 건봉사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취임했고, 1905년에는 법주사 판사(判事)로 임명됐다.
1912년부터 1925년2월까지 법주사에서 강사를 지냈다. 1912년부터 1916년까지는 법주사 법무(法務) 소임도 겸했다. 스님은 1925년 ‘충북불교청주용화포교당(지금의 청주 용화사)’의 포교사로 선임되어 전법활동을 했다. 1926년에는 다시 법주사 강사로 취임했고, 1928년12월에는 법주사 주지로 선출됐다.
1940년까지 법주사 주지로 있으면서 복천선원을 창건하고 대동강습소를 열었으며, 미륵대불조성에 힘썼다. 또한 스님은 1945년 9월 조선불교 중앙교무회 고문으로 추대됐고, 1947년 5월13일에는 선학원에 설립된 조선불교 총본원의 교정으로 추대됐다. 스님은 1947년 12월23일(음력11월12일) 법주사에서 입적했다. 법랍 54세, 세수 75세였다. 스님의 비와 부도는 보은 법주사 경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