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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수강산 길 따라 걷기 원문보기 글쓴이: 와야(정유순)
진도 찍고 목포를 가다
(2016. 10. 12∼10. 13)
瓦也 정유순
해마다 봄·가을이면 ‘양평문인협회’ 주관으로 문학기행을 가는 연례행사이지만, 갈 때마다 마음은 소년처럼 항상 설렌다. 이른 아침 6시에 출발한 버스는 팔당대교를 건너 서울외곽순환고속도를 타고 경부선을 지나 천안 공주 부여 서천을 거쳐 서해안고속도로 종점인 목포를 스치며 모 대통령당선자께서 “교통에 방해가 되던 전신주를 뽑아” 이름이 알려진 영암삼호산업단지를 가로질러 해남의 화원반도의 울돌목(鳴梁해협) 진도대교 입구에 당도한다.
<진도대교>
임진왜란 때 명(明)의 심유경(沈惟敬)과 왜의 고니시유키나와(小西行長)가 한강을 중심으로 조선분할(朝鮮分割)협상이 결렬되고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자 옥고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한 충무공 이순신(李純信)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선조에게 “전하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戰船)이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장계를 올리고, 장병들에게는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 정신으로 무장하여 왜선(倭船) 130여척을 물리쳐 전쟁의 승기를 잡았던 역사적인 현장이 울돌목이다.
<명량해협(울돌목)-바다건너 진도전망대>
울돌목은 해남 화원반도와 진도(珍島) 사이에 있는 해협(海峽)으로 물살이 빨라 흐르는 물소리가 ‘울음소리 같아’ 붙여진 이름으로 명량(鳴梁)으로 불리는데, 연륙교(連陸橋)인 진도대교가 들어서기 전 까지는 이곳에서는 도선을 이용해야만 진도에 들어 갈 수 있었다. 35여 년 전 문상(問喪)을 갈 때 배위에서 싱싱한 조개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건넜던 추억이 기억의 맨 끝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명량해협 지도>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斜張橋)인 진도대교(길이 484m, 폭 11.7m)를 건너 진도읍에 당도하니 배가 고프다. 가는 길목이 진도장날(2, 7일)이 열리는 오일장으로 진입이 어려워 다른 길로 우회하여 식당을 찾아간다. 예술의 고장답게 식당 벽에는 시(詩) 서(書) 화(畵)가 걸려 있다. 그리고 이곳의 명주(銘酒)인 ‘진도홍주’가 붉은 빛을 띠며 식욕을 당기게 하며 기분을 상승시킨다. 진도문인협회의 협조로 문화해설사 분과 함께 운림산방으로 이동한다.
<진도홍주>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8∼1893)이 1856년 9월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타계하자 고향에 내려와 초가를 짓고 이름을 운림각이라 하였고 거실은 묵의헌이라고 하였다. 마당에는 연못을 만들고 다양한 화훼와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尖察山, 485m) 주위에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지는 깊은 산골에 조석(朝夕)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 하여 지었다고 한다.
<남도전통미술관>
그 후 허련이 사망하고 아들 등 가족들이 다른 사람에게 매각하고 떠나면서 옛 모습을 잃어버리자 손자가 다시 매입하였고, 그의 다른 손자인 남농 허건이 1982년에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산방으로 가는 길목에는 제법 큰 연못이 5각으로 되어 있고, 중앙에는 둥근 작은 섬에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어 중앙을 나타낸다. 이는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난다)의 사상이 배려된 듯싶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고택이나 사찰의 정원에는 이런 방식이 많이 채택되어 있다.
<운림산방>
남도전통미술관 옆으로 하여 잔디마당을 지나 연못을 따라 들어가면 소치가 그림만 그리던 다섯 칸 팔작지붕의 (ㄷ)자형 기와집이 운림산방이다. 첨찰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사천저수지를 임수(臨水)로 하여 터를 잡은 것 같다. 뒤로는 살림을 하던 집이 있다. 안채는 일(一)자형 다섯 칸 초가집으로 중앙의 안방 앞쪽으로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안채 전면 우측으로는 소치가 머물던 사랑채가 있는데 네 칸 규모의 일(一)자형 초가집이 있다.
<우측이 살림집-앞면이 행랑채>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숨결을 확인하려는 듯 툇마루에 앉아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가 이웃에 있는 소치기념관으로 간다. 1980년에 세워진 기념관에는 5대째 운림산방의 화맥(畵脈)을 잇는 상세한 가계도가 걸려 있다. 그리고 한국화(6점)와 서예(9점), 사군자(8점), 민속유물(176점), 수석(95점), 고서(33점), 복사품(97점)이 전시되어 있다. 남종 문인화의 대가인 소치와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瑩) 남농 허건(南農 許楗)의 삼대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소치기념관>
<운림산방 화맥도>
<전시실 내부>
바로 옆에는 진도역사관이 있어서 들러본다. 상설전시관으로 선사∙고대로부터 고려 때 대몽항쟁의 대표적인 용장산전투와 삼별초이야기, 조선시대 무기모형과 명량대첩 관련 모형 유물, 조선시대 목칼과 형틀 등 유배문화와 관련된 유물, 강강술래와 진도씻김굿 등 민속자료와 화로, 베틀, 쟁기, 홀테 등 생활도구를 전시하는 향토문화실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진도역사관>
<대몽항쟁도>
다음 행선지는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열린다는 ‘신비의 바다’로 간다. 이 신비의 바닷길에는 “뽕할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조선조 초기 제주도로 유배 가던 손동지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었는데, 호랑이의 침입이 잦아 마을 앞섬 모도로 피신하던 중에 떨어진 뽕할머니의 정성스런 기도로 바닷길이 열려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이때부터 해마다 음력3월이면 영등제를 지내며 풍어와 소원성취를 기원하고 회동마을과 모도사람들이 어울려 해산물을 채취하며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바다가 열리는 광경은 상상만하며 팽목항으로 달려간다.
<뽕할머니 상>
<신비의 바다 사진>
팽목항은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맹골해협을 지나다가 침몰하여 일어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사고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여 갑자기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세월호에는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4명 등 476명이 탑승하였는데, 그 중 172명만 구출되고 나머지는 사망(295명)하거나 실종(9명)된 사건으로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진실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은 채 유가족과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슬픔을 안겨 주고 있다.
<사고해역 표시도>
<실종자 9인의 얼굴>
“2014년 4월 15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쓴 글씨가 왜 마음에 깊게 새겨지는지∼ 아직까지 생사조차 모르는 아홉 명의 얼굴들이 꿈속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 부두 끝에 노란리본을 달고 밤길을 밝히는 등대도 아직은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걸개에 걸린 노란리본이 바람에 펄럭이며 아직도 구천에 맴도는 영혼들을 향해 어서 오라고 간절하게 손짓한다.
<현수막>
<팽목항 등대>
구름 사이로 가끔 얼굴을 내미는 태양도 각을 낮추어 그림자가 길어진다. 그나마 팽목항이 있어 세월호사고처리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의 숙소가 있는 세방리로 이동한다. 하순영의 ‘세방낙조’라는 시에는 “섬과 섬이/저문 하늘을 내려 받아/바다의 무릎에 눕히는 순간//천지는 홀연히 풍경이 되고/홍주 빛 장엄한 침묵이 되고(이하생략)”라며 아름다움을 속삭인다.
<세방낙조 시비>
앞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어느 곳에서 떠돌다가 와서 멎었는지 베트남의 하롱베이 섬들처럼 고요 속으로 젖어든다. 낙조전망대에서 석양을 보기 위해 여러 사람이 찾아 왔건만 태양은 좀처럼 두꺼운 구름을 뚫지 못한다. “엎어진 김에 쉬었다 간다”고 전망대에 앉아 같이 간 일행들 끼리 작은 음악회를 즉석에서 개최한다. 평상시 실력인지 미리 준비해 왔는지 바다의 파도소리에 맞춰 노래를 잘도 부른다.
<세방리 앞 섬들>
<진도낙조 전>
<진도낙조 사진>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밤새 즐거운 꿈만 꾸다 아침을 맞이한다. 엄지손가락을 닮아 ‘주지도’로 불리는 섬은 엄지를 바짝 세워 또 오라고 한다. 남도의 음식 맛이야 입에 쩍쩍 붙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바 지만 아침밥맛이 꿀맛이다. 조반 후 어제 진도에 들어왔던 역순으로 목포로 향한다. 목포항 앞으로 새로 개통된 다리를 건널 때는 유달산이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주지도>
<유달산 전경>
시인 문병란은 “목포”라는 시의 첫 구절에서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동백꽃처럼 타오르다/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하략)”라고 목포를 노래한다. 노적봉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여 노적봉으로 올라간다. 노적봉은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2절에 나오는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에 나오는 그 노적봉이고 유달산이다.
<노적봉 옆면>
그리고 임진왜란 때 짚으로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었는데, 마치 군량미를 쌓아 놓은 노적처럼 보이게 했고, 또한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을 빙빙 돌게 해서 많은 군사가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영산강에 백회(白灰)를 뿌려 쌀뜨물로 보이게 하였다. 또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우리 민속인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노적봉 앞면>
시민의 종과 다산목(多産木) 등이 있는 노적봉을 한 바퀴 돌아보고 유달산정기를 받아볼까 하고 정상으로 향한다. 가는 길목에는 너무 사랑하여 허리를 끌어안은 소나무연리지가 이난영의 노래비와 함께 ‘목포의 눈물’을 열창한다. 더 올라갈수록 목포의 시내는 더 넓게 보인다. 서북쪽으로는 압해도로 가는 압해대교가 미세먼지 속에 아른거린다.
<다산목>
<목포의 눈물 노래비>
<멀리 보이는 압해대교>
바다를 지키기 위해 설치된 대포는 지금도 포신을 길게 뽑고, 정상인 일등바위 밑에는 밟히지 안하려는 씀바귀가 늦게 꽃을 피워 바위 옆으로 바싹 다가선다. 일등바위가 서 있는 모습은 거대한 신이 큰 바위 얼굴이 되어 목포항을 비롯한 주변 바다와 섬들의 안녕을 지키는 듯하다. 정상에서 내려오니 오전이 후딱 지나간다. 점심에는 어려서 쪄서도 먹고 구워서도 먹던 황새기(황석어) 젖이 고향생각을 나게 했는지 밥 두 그릇을 게 눈 감추듯 한다.
<유달산 일등바위>
<유달산 씀바귀>
<유달산 정상 표지석>
오후에는 ‘목포 문화의 거리’로 간다. 문화의 거리는 유달산 동쪽으로 삼학도를 지나서 입압산(121m) 아래 해안가에 위치한다. 우선 눈에 띠는 게 우리나라 최초이고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것 같다. 주차장에서 가장 가까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장으로 향한다. 이 연구소는 바다(海)-사람(人)-문화(文化)-교류(交流)-역사(歷史)를 테마로, 그 안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와 발자취를 연구하고 홍보하는 곳이다.
<배의 닻-해양문화재 전시장 앞>
제1전 시실(고려선)에는 서해와 남해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수중문화재가 전시된 ‘고려선’으로 꾸며져 있다. 제2전시실(신안선)은 중국무역선인 신안선과 동아시아 해상 교역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신안선은 1323년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신안바다에서 난파된 무역선이다. 제3전시실은 우리 인류가 배를 활용하여 세계사를 전개해온 ‘세계의 배’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제4전시실은 한국의 전통 배 ‘한선(韓船)’이라는 주제의 선박사 전시실이다. 아마 지금의 조선강국(造船强國)은 선조들의 기술과 지혜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뻘에 묻힌 청자>
<난파선>
<한-중-일 해상교역도>
해양문화재연구소를 관람하고 나오니 많은 일행들이 안 보인다. 큰길을 건너 ‘목포자연사박물관’으로 간다. 자연사박물관에는 공룡알과 공룡 뼈를 조립한 조형물 등이 전시되어 있고, ‘문예역사관’에는 남농 허건의 수석(水石) 등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1930년대 유달산에서 찍은 것 같은 목포항과 삼학도 흑백사진이 눈길을 끈다. 그리고 바삐 ‘목포생활도자박물관’으로 이동하여 옛날 부엌을 둘러본다.
<공룡뼈 전시>
<공룡알 화석>
<남농의 수석-자화상>
<1930년대 목포항과 삼학도>
<옛날 부엌>
그리고 ‘목포문학관’으로 바삐 간다. 목포는 문향과 예향의 도시이다. 목포 출신이거나 목포를 제2의 고향으로 삼는 문인들로는 한국문단의 최초의 본격적인 여류소설가 박화성, 극작가 김우진과 차범석, 평론가 김현, 소설가 천승세 최인훈 김은국, 시인 김지하 권일송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단일도시로는 가장 많은 예술원회원을 배출한 목포시가 이 분들의 문학과 업적을 작은 공간 속에 표현한 목포문학관이 2007년 10월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목포문학관>
목포문학관 1층에는 50여 년 동안 전통적인 사실주의에 입각한 문예작품을 발표한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차범석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중앙위원과 여류문인 회장을 역임한 한국 최초의 여류작가 <박화성관>, 그리고 문학체험관 등으로 구선되었다. 2층에는 한국의 연극인이라 칭송받으며 신극발전에 공헌을 하고 40여 편의 시와 희곡을 남긴 <김우진관>을 비롯해 창작교육실과 학예연구실 등을 갖추고 있다.
<소설가 박화성 흉상>
<극작가 차범석 흉상>
어찌했던 처음 들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제외하고는 다른 전시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쉽다. 집을 나와 “오래 걷고 시간이 흐르면 집에 갈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말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도 급해지는 가 보다. 조금만 이곳 지식을 미리 알았더라면 목포문학관부터 꼼꼼히 살펴보고, 다른 전시장들은 필요한 것만 골라 보았으면 더 효과적일 것이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멀리 까지 달려와서 평소에 우리가 접하기 힘든 문예(文藝)를 보았다는 것은 뜻 깊은 일이다.
<목포문화의 거리 지도>
더욱이 돌아오는 차 안에서 최근에 한국문인협회에서 추진하려다 접은 가칭 ‘춘원문학상’에 대한 열띤 찬반토론은 우리문학의 시대정신과 문학인들이 가져야할 작가정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귀한 시간이었다. 시인 김춘수가 미당 서정주를 향해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 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라고 평한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꽃무릇-상사화>
첫댓글 목포를 처음 갔을때가- 대학 1학년때- 제주도 무전 여행 갈때 목포- 신진 여인숙서 1박하고- 두번째는 - 은행 지점 감사 갔을때 목포 허농 수석관 갔으때다- 벌써 몇 십년전 이네- 많이도 변했네- 다시 한번 가봐야겠다-
제주행 배- 가야호와 안성호가 두척 뿐이었으며- 목포 선창가서 강철원이를 봤는데- 반갑기는 하는데- 아이스케키 하나 안사주고 너스려 덜든 것이 제일 기억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