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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Good Bye List’ - 1. 프로 불평러
본문 : 민수기 11장 4절(1~6절)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새번역>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서는 먼저 비우는 작업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말씀을 삶 속에 가득 채우기 위하여, 먼저 비워야 하는 작업이 선행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안에 비워야 하는 것들을 9월 한 달 동안 ‘Good Bye List’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Good Bye! 좋은 안녕입니다. 억지로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비우고, 기꺼이 비우게 되는, 감사와 은혜로 가득한 작별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 달간 나눌 것을 기약하면서 그 첫 번째 비움, 첫 번째 ‘Good Bye'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하여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한 성경들입니다. 그 성경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또 얼마나 중요한 내용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수많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의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 순간순간 우리를 멈추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더욱 더 도드라지게 알려주는 부제가 ‘불평과 원망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과 원망의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일까요?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절대 금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있을 때 감추고 숨기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불평과 원망을 금지하실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불평과 원망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강하게 그 불평과 원망을 하지 못하도록 벌하시며 막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불평과 원망을 기꺼이 들으셨고, 매번 해결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 불평과 원망의 현장으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바로의 모든 병거와 기마와 그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비하히롯 근처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바로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고개를 들고 보니, 이집트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크게 두려워하며, 주님께 부르짖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말하였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출애굽기 14장 9~12절, 새번역>
분명히 두려움 때문에 생긴 불평과 원망이었습니다. 충분히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것은 ‘주님께 부르짖었다’ 는 것입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모세를 향한 원망 이전에 주님께 부르짖음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첫 번째로 묵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불평이든 원망이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살아가면서 왜 불평과 원망의 시간이 없겠습니까? 황당한 일을 겪을 것이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 생길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 헷갈리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두려움 가운데 불평과 원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해결해 주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장 6절, 새번역>
그래서 이스라엘의 이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유명한 구절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 <출애굽기 14장 13~14절, 새번역>
그리고 이 말씀 이후엔 그 유명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토록 대단한 사건을 직접 경험하며 홍해를 건너갔으니, 바로의 군대들을 멸하신 것을 보았으니, 혹시 이제 불평과 원망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 되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그건 우리의 섣부른 예상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온 뒤에 하나님께 전심으로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그리고 미리암과 여인들이 답가를 부르며 실로 찬양의 축제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그 축제는 고작 3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인도하여 내어, 수르 광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흘 동안 걸어서 광야로 들어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하고 불평하였다. <출애굽기 15장 22~24절, 새번역>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불평과 원망 아닐까요? 당연히 물을 찾지 못했고, 찾은 물도 써서 마실 수 없었으니, 목이 마른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불평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바로, 이번 불평은 ‘주님께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안타까운 일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반복이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던 날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3절, 새번역>
여기서도 이스라엘 자손의 불평과 원망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닌 ‘모세와 아론’을 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은 신 광야를 떠나서, 주님의 명령대로 진을 옮겨 가면서 이동하였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거기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대들었다. 이에 모세가 "당신들은 어찌하여 나에게 대드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시험하십니까?" 하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백성은 몹시 목이 말라서,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가 왜 그들을 이집트에서 데려왔느냐고,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그들이 먹이는 집짐승들을 목말라 죽게 할 작정이냐고 하면서 대들었다. <출애굽기 17장 1~3절, 새번역>
이제는 아예 ‘주님께 부르짖는 것’에 대한 것은 잊어버린 채 불평과 원망을 뛰어 넘어 ‘모세에게’ 대들고 책망합니다.
하지만 정말 다행히도 하나님은 그런 불평과 원망의 순간순간, 말도 안 되는 불평과 원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 해 주십니다. 불평과 원망에도, 자신에게 부르짖지 않았음에도, 인내하시며, 사랑하시며,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실로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참고 기다려 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사건들을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민수기에서는 조금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에게 부르짖지 않고 모세에게 불평과 원망하는 이들을 향해 분명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들으시는 앞에서 백성들이 심하게 불평을 하였다. 주님께서 듣고 진노하시어, 그들 가운데 불을 놓아 진 언저리를 살라 버리셨다. <민수기 11장 1절, 새번역>
이번에는 모세에게 원망한 게 아니라 혹시 주님께 부르짖었던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조금 더 자세한 기록이 등장하는 공동번역을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괴로워하며 불평하는 소리가 야훼의 귀에 다다랐다. 그 소리를 들으시고 야훼께서는 몹시 화가 나시어 불을 떨어뜨려 진지의 변두리를 살라버리셨다. <민수기 11장 1절, 공동번역>
이제 모세 앞에서도, 서로 앞에서도, 하나님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로, 불평과 원망의 소리가 심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사람에게, 사람들끼리, 불평과 원망을 나누고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력하게 임재하심으로 그 불평과 원망에 대해서 단호한 경고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로 묵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사람들과 불평과 원망을 나누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녀사냥’을 하듯 내게 일어난 나쁜 일이나 어렵고 막막한 일에 대한 원인을 어떤 사람에게 책임전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상대방도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모세도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에게 향하는 불평과 원망은 결국 작은 불에서 시작하여 큰 산을 태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평과 원망은 결코 해결책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데 사람을 찾으니 더욱 더 큰 문제로, 해결되어야 할 불평과 원망의 원인은 조금도 해결되지 못한 채 그대로 있기는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보십시오, 심판하실 분께서 이미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야고보서 5장 9절, 새번역>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붓던 모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성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불이 임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었다. 모세가 주님께 기도드리니 불이 꺼졌다. <민수기 11장 2절, 새번역>
사실 이 부분도 공동번역을 보아야 정확히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백성들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모세가 야훼께 기도하자 불이 꺼졌다. <민수기 11장 2절, 공동번역>
모세도 많이 지쳤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긍휼이 남아 있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모세는 더 많이 지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많은 불평과 원망을 듣게 되면 모세 역시 그 불평과 원망에 파묻힐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고 두고 안타까운 일, 즉 모세 자신도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하게 되는 일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총회를 바위 앞에 불러모았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반역자들은 들으시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당신들이 마실 물을 나오게 하리오?" 모세는 팔을 높이 들고, 그의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 그랬더니 많은 물이 솟아나왔고, 회중과 그들의 가축 떼가 마셨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민수기 20장 10~12절, 새번역>
불평과 원망을 계속해서 나누게 되면, 결국 끝이 이런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과 원망이 있을 때, 그 것을 사람에게 나누는 것을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공동체 안에서 불평과 원망을 공유하고 나누게 되면, 그 불평과 원망을 계속해서 묵상하게 된다면, 결국 공동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갈라짐과 붕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불평과 원망의 순간에 이 말씀도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골로새서 3장 13절, 새번역>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평과 원망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민수기 11장 4~6절, 새번역>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서자마자 ‘또’ 다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놀라울 정도입니다. 방금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세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습관적’ 불평과 원망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누군가를 향해 불평과 원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에 대한 불편이든, 자신을 향한 대우에 대한 서운함과 섭섭함이든, 어떤 좋지 않은 마음이든, 이미 불평과 원망이 자연스럽게 습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불평과 원망이 ‘습관화’ 되는 것을 막아내셔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셔야 하고, 언어를 지키셔야 하고, 혀를 지켜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왜곡된 말을 네 입에서 없애 버리고, 속이는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여라. <잠언 4장 23~24절, 새번역>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8절, 새번역>
결국 습관화된 불평과 원망은 불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란 단어를 지우는 지우개가 바로 습관적 불평과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눌 네 번째는 바로, 불평과 원망의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과 함께 나온 자신들과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고 불평과 원망을 하자 그들도 덩달아 불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평할 수 있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할 방법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섞여 살던 무리가 소위 이집트에서처럼 ‘맛있는’ 것을, 지금 먹고 있는 것보다 ‘더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들도 함께 그 불평과 원망에 동참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은혜가 없었다면 그들은 굶어 죽었을지도 모를텐데 말입니다. 광야라는 상황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보다 더 맛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더’ 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할 때 사용되어져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평과 원망에서 이 ‘더’라는 명확한 이유도 되지 못하는 비교급 단어는 배제되어야 하는 단어입니다. 충분히 자족하고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차를 타고 싶고, 더 좋은 집에 살고 싶고, 더 좋은 옷을 입고 싶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지금 누구와 무엇을 비교하는지도 모르는 ‘더’ 라고 하는 불명확한 비교를 만들어내는 불평과 원망을 통해, 결국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닌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옷, 더 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것에 대해서 누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과 최선이 아닌 불평과 원망만 하고 있다면 그건 정말 반드시 "Good Bye!" 보내주어야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하나님의 징벌 그 이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해서 똑같은 모습을 반복합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낙담하여 아우성과 통곡으로 원망하여 그들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을 가나안행을 허락받지 못하고 40년 광야 유랑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고라와 르우벤 지파의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반역함으로 지진과 큰 전염병이 임하게 되고, 또 물이 없어 비방하고 다투다가 모세까지 가나안행을 거절당하게 되며, 만나가 지겨워 원망하자 불뱀에 물리는 일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품고 모압 사람들의 딸들과 음행하며 모압신에게 경배함으로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는 일도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데까지!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너무도 비참한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이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 나를 원망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을 내가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너희가 나의 귀에 들리도록 말한 그대로,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하겠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이 넘은 사람으로, 인구조사를 받은 모든 사람들, 곧 나를 원망한 사람들은, 이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땅을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하였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다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이 들어갈 것이다. <민수기 14장 26~30절, 새번역>
오늘 주신 이 민수기 말씀을 통하여 저 자신을 먼저 돌아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9월 한 달 동안 ‘불평과 원망’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4가지를 생각하며 기쁨으로 기꺼이 작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불평과 원망이 있다면 주님께 부르짖는 기회로 삼아 기도의 자리로 가져 가시길 소망합니다.
둘째, 불평과 원망을 사람에게 쏟아내지 마시고,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혹여 ‘습관적’으로 불평과 원망하고 있다면 그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넷째, 불평과 원망이 생기는 정확한 이유를 알고, 구하여, 해결책도 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어떤 단어 끝에 연결어미인 ‘러’를 붙이면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이 9월에는 프로 불평러가 아니라 프로 감사러, 프로 찬양러, 프로 기도러가 한 번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의 반석이시요 구원자이신 주님,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생각이 언제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바랍니다. <시편 19편 14절, 새번역>
결단 찬양 - 시편 19편 +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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