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철환 동북아시아연구소 연구위원
그 이후 보훈증을 분실해 재발급 신청을 했더니 "탈북자 관리는 보훈처에서 통일부로 넘어갔으니 보훈증서를 발급할 수 없다"고 했다. 더 따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탈북자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특히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훈장을 받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것을 놓고 일각에서 이견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기자가 북한을 탈출했을 때 탈북자는 극소수였고 크게 세 가지 부류였다. 11명의 동유럽 유학생들이 있었고, 외교관이나 체육인·공작원 출신들 그리고 정치범 출신이었다. 11명의 북한 유학생이 남한에 망명하자 북한 내 대학에선 온통 그 이야기뿐이었다. 그 성분 좋고 머리 좋은 청년들이 목숨 걸고 대한민국으로 갔다는 자체가 큰 충격이었고 그로 인해 엘리트층의 동요는 아주 심각했다. 외교관 '1호'로 망명한 고영환씨는 처음으로 김정일의 '기쁨조'실태를 폭로하면서 김정일 체제를 흔들었고, 유도 영웅 김창수씨도 정치적 목적에 활용되는 북한의 스포츠 실태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정치범수용소 출신인 기자와 함께 망명한 안혁씨도 베일에 감춰진 정치범수용소를 전 세계에 알렸고 이 역시 북한 내부는 물론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충격이 컸던 만큼 북한에 남은 가족들은 처절한 보복을 당했다. 인민군 총정치국 고위 간부였던 유학생 조승군씨의 부친은 자살했고 가족은 모두 수용소로 추방당했다. 고영환씨의 가족은 연로한 부모들까지 모두 요덕수용소에 끌려갔고, 수용소를 폭로한 안혁씨의 가족은 흔적도 없다. 다른 가족들도 모두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
탈북자들은 이런 가족들 때문에 평생 죄인의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들 모두가 한때는 국가 보훈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에 반대해 그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준 일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지 묻고 싶다. 헌법에 북한은 대한민국이고 북한 인민은 우리 국민이다. 대한민국 편에서 김정일 정권과 싸운 탈북자들의 희생은 크게 보아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인민을 수없이 굶겨 죽이고 정치범수용소에서 수십만명을 학살한 김정일 정권에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처절하게 싸운 사람이 있다면 바로 황장엽씨다. 그의 직계 친척 150명이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고 1500여명의 지인이 현직에서 물러나거나 추방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망명은 북한 체제를 뿌리째 흔들었고 북한이 자랑하는 사상적 무기를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이런 영웅이 죽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 왜 시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대한민국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