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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누정 정원 스크랩 우암 송시열 선생 사적공원 남간정사 탐방
이장희 추천 0 조회 112 14.09.03 13: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文正先生 當於正寢西 結芽數架 鑿沼種蓮 雜植杞菊 名以杞菊齊

 懷德南有鮮堤 前臨大潭 周可數里 春水方生 鏡面無際 夏柳成蔭

 秋荷動春香 蓋日區勝地也 孝廟系已 我文正先生卜居干此"

 

"문정(宋時烈)선생은 일찍이 정침 서쪽에다 초가로 여러 채를 얽어매고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으며, 여러 가지 기국을 심었더라, 그리고 이것을 이름 하여 기국제(杞菊齊)라 하였다. 회덕남쪽에 소제(小堤)가 있는데, 앞에는 큰 연못이 있고, 주위는 수 십리라. 바야흐로 봄물이 생기면 거울 같은 표면이 한없이 넓다. 여름에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그늘을 이루고 가을에는 연꽃이 향기를 품어내더라, 한구역의 경치 좋은 곳이로다. 효종대왕 계사년에 우리 문정선생이 이곳에 터를 잡아 살았도다."


- 이는 우암 송시열이 젊었을 때 남간정사의 원래 살림집이던 본제(本第)가 있던 소제동(小堤洞) 송자고택(宋子古宅)에 자신의 정원을 만들면서 그의 자연관과 철학을 단적으로 표현한 시문이다 -

 

 

우암 송시열((1607~1689,선조40~숙종15)은 충북 옥천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났으나 8세 때부터 어린 시절을 이곳 대전의 소제(송자고택), 송촌(동춘당), 비래(비래암) 동에서 생활하였다. 따라서 우암은 1686년(숙종 12년)만년에 조정에서 물러나 본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곳을 못 잊어 정사건물을 짓고 별서정원을 조성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정원생활을 즐기며, 제자들과 지방 유림들에게 주자학을 강론하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저씨뻘 되는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집에 가서 함께 공부를 했고, 12세 때부터는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웠다. 송시열이 연산으로 가서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제자가 된 것은 18세 때 한산 이씨와 혼인한 무렵이었다. 송시열은 김장생과 김집(金集:1574-1656)부자로부터 1630년 성리학과 예학을 공부하였고 1632년 송준길의 요청으로 대전 회덕 송촌으로 이사하여 송준길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였다.

 

1633년 생원시에서 장원급제하여 2년 후 봉림 대군(鳳林大君: 후일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그러나 다시 사직하고 1636년 회덕 비래동에 서재를 지었고 1637년에는 노모를 모시고 보은 노곡에 살다가 1638년 32세 되던 해 영동 황간 냉천리 한천정사 터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646년에 논산 돈암 서원에서 강론하면서 호남지방을 유람하였다. 1663년에는 금강산유람을 하고 논산 황산에 팔괘정 (八掛亭)을 건립하였으며, 속리산 유람을 한 후 옥천에 경헌당을 지었고,1666년 60세에는 화양동 구곡에 들어가 암서재를 짓고 생활하였다.1674년에 명나라 의종의 어필을 화양동 암서재 근처 바위에 새겼고, 함경도 덕원, 전남 장성, 거제도, 충청도 청풍 등으로 유배를 다니다 1680년에 풀려나 조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1681년 75세에 화양동으로 다시 들어갔고, 1683년에 금강산을 유람했으며 1686년 80세에 흥농동에 있는 서재에 우거하면서 남간정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우암 송시열은 선조~숙종 대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과 노론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자연을 대상으로 한 시문을 무수히 남겼고, 전국의 수많은 경승 처에 자신의 족적을 남긴 인물로서 조경가로서도 주목할 만하다.

 

우암은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 속에 정원을 직접 경영했으며, 다른 선비들이 조영한 정원에도 관심이 많아 기문을 많이 남겼다.

 

그는 조정에 나가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거처 지를 산수가 아름다운 괴산의 화양동 구곡, 영동의 월류동 계곡, 논산의 팔괘정, 서울 도봉서원 등에 거처하면서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특히 이 지방 대전 근교에서 주로 거주하면서 비래동에 있는 서재를 비래암(飛來庵)이라 하고 흥농동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能仁菴)이라 하였는데, 이는 모두 아름다운 남간정사 주변 우암의 초년과 젊은 시절의 강학장소였다.

 

따라서 나중에 건립된 남간정사의 위치도 비래암과 능파암의 높은 산록아래 계곡을 따라 나지막하게 위치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 위치시켰던 것이다.

 

송환기(宋煥箕1728-1807)는 남간정사 중수상량문에서 "이곳의 바위와 샘물은 맑고도 그윽하며, 긴 세월 지나도록 의구하다"고 하였다. 
 

이때 우암은 남간정사(南澗精舍)란 현판을 걸고, 주자(朱子)의 시 남간시(南澗詩) 한 구절을 써서 문 위에 걸었다.

 

남간정사는 기슭에 꽃산(230M)을 배산으로 한 북고남저(北高南底)의 지형에 위치하여 정면 4칸*측면 2칸으로 전체 8칸이다. 정면 4칸 중 중앙 2칸은 우물마루로 넓은 대청이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은 전후 1칸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좌측 1칸은 뒤가 온돌방이고, 앞은 온돌 아궁이의 함실을 설치하기 위하여 대청보다 한 단 높게 만든 누마루로 되어있다. 
 

대청마루 밑으로 간수(澗水)가 흘러나오고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간수가 흐르는 암반 위 양쪽에 축대를 쌓아 마루 밑을 넓게 파놓았다.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워 대청누마루가 시각적으로 물 위에 높게 떠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남간정사 우측 옆에 있는 낮은 내삼문을 들어서서 뒤로 돌아가면 사당인 남간사(南澗祠)가 높은 대지위에 놓였다.
 

1924년 각 지방의 선비들이 기국정과 같이 시내 소제동에 있던 우암의 고택 부속건물을 이건하여 만든 것으로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크기이다. 주변에는 높이 1.2m의 막돌 담장을 둘러놓아 별도의 공간을 구획하고 있고, 경사면에 120년은 되었을 성 싶은 배롱나무가 장관을 이룬다.

 

기국정은 원래 효종5년(1654년)에 우암이 벼슬을 사양하고, 대전의 소제동에 기거하면서 소제방죽을 쌓고, 그 연못가에 세운 정자이었다. 소제에 연을 심고 정자주변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심었는데, 연은 군자를 뜻하고, 은일(隱逸)을 뜻하며, 구기자는 친족의 단란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의 장손 은석(殷錫)이 기와지붕으로 수리하였으며, 1927년에 남간정사로 옮겨 우암의 뜻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남간정사 앞의 연못은 지형 상 곡지형(曲池型)인데, 동쪽에 널따란 바위가 있어 부정형지를 이루고 있다.

 

왕버들이 있는 섬이 가운데 위치하여 신선사상을 나타내고 있고, 주변으로 250년은 됨직한 버드나무가 소폭포 앞에 있으며, 정문 옆 100년 이상은 되었을 법한 배롱나무 꽃이 열기를 더한다. 남간정사 밑으로는 뒤쪽에서 샘물을 통하여 물이 흐르도록 되어있고 우측으로는 담장 밑으로 물길을 만들어 소폭포를 이루어 연못으로 모이게 한 후 대문 옆 배출구를 통해 다시 빠져나가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정원의 형태는 넓지 않지만 오래되어 연못의 모습이나, 오래된 나무, 물의 흐름 등이 아름답고 품격이 느껴진다. 그러나 현재 남간정사는 뒤쪽의 샘물이 말라있어 정사 밑으로 물이 흐르지 아니하고, 동쪽의 담장 밑에서 연못으로 흐르는 물도 수량이나 수로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또한 연못의 배출구도 막혀있어 물의 순환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남간정사는 정사건물이 노후화되어 보수 중이다. 그러나 남간정사 별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멀리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한쪽위로는 정사 대청마루 밑으로 간수(澗水)가 흐르도록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쪽 아래로는 담장 밑으로 물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유도하여 언제나 시원하고 경쾌한 폭포소리가 들리도록 연출하는 일이다.

 

그리고 정사 밑으로 흐르는 간수와 정사 옆으로 흘러들어온 소폭포의 물이 합쳐져 연못의 섬을 휘돌아가게 한 후, 바깥 계류로 바로 빠지도록 연못의 출수구를 완벽하게 보수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들어 대전시는 말년의 남간정사를 비롯하여, 우암이 어렸을 적 지냈던 류 상류 쪽으로 약 30,000m2 면적의 우암 사적공원을 탄생시켰다.

 

대전시는 남간정사뿐 아니라 기국정도 관리사 터로 이전하여 역사성은 살리면서, 연못가는 탁 트인 경관을 고양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차제에 상부계류에 보를 막아 흐르는 물이 정사 위쪽으로 가게하여 정사건물 아래로 흐르도록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지금처럼 기존의 담장 밑으로 유입시켜 소폭포를 이루게 하고, 다시 출수구를 통해 바깥계류로 연결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남간정사는 추후 자연의 아름다움은 물론 역사와 인문분야가 살아있는 명승으로 승격시켜 국민들에게 우리선조의 풍류와 멋을 느낄 수 있는 별서정원으로서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정비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이 되면서 관직생활에 발을 내디뎠다.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 뒤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1637년 화의가 성립되어 왕이 항복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게 되자 낙향하여 10여 년 간을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했다.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올라 척화파와 산림(山林)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도 장령에 등용되어 세자시강원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었다.

 

이때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역설하는 글을 왕에게 올려 효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청서파(淸西派 : 인조반정에 간여하지 않았던 서인세력)였던 그는 공서파(功西派 :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서인세력)인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사직했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다가, 김자점이 청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빌미로 조선의 북벌 움직임을 청에 밀고하여 효종이 청에게 추궁을 당하자 영의정 이경석 등과 함께 다시 물러났다.

 

그뒤 충주목사·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

 

* 해동건곤 존주대의(海東乾坤 尊周大義) *

 

1664년(현종 5)에 송시열이 쓴 글씨이다. 장중한 송시열 글씨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가리키고, 건곤(乾坤)은 천지를 뜻한다. 존주(尊周)의 중심으로서 중화문화를 이끌 곳이 청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바뀐 조선중화의식(朝鮮中華意識)의 뜻이 담겨있는 자존.자주의식이 깔려 있다.

 

공자는 노나라 역사책인 춘추를 통해서 정도와 대의를 제시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정신이 바로 존주 정신이다. 주나라가 약해져서 도의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을 주나라 중심의 정도와 대의로 바르게 다스려서 천하의 질서를 회복하고 태평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병자호란 (丙子胡亂)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만주족 후금의 태조(太祖) 누르하치의 아들인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에 제2차로 침입함으로써 발발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 중 하나였으며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인조(仁祖,조선 제16대 임금)는 치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치욕을 겪는 등 가혹한 전쟁의 참화를 입었고 이후 몽고에 대한 항쟁이 40여 년간 지속되었으며, 임진왜란에서는 7년간의 싸움 끝에 왜군을 격퇴한 데 반하여, 병자호란은 불과 두 달 만에 조선의 굴복으로 끝났다.병자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으므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도 한다.

 

송시열에게 있어서 오랑캐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북벌을 추진하는 것은 바로 존주대의를 실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신은 비록 사대주의적 측면도 있으나 오히려 "중화의 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실현되는 자존의식이나 도덕적 명분으로 천하를 통합하고자 하는 도덕적 세계주의"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전하는 민족적 자주의식 등 여러갈래로 해석되고 있다.

 

 

 

김영동 - 귀소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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