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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엄격한 숙부(叔父) 밑에서 수학하였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 등을 경험하면서 사림(士林)의 처세(處世)에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경(敬)의 실천으로 요약되는 그의 일생은 이와 같은 내적, 외적 이력(履歷)의 결과이다. 하지만 퇴계는 이 모든 사실을 훌쩍 뛰어넘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존재감(存在感)을 보여주었다. 퇴계는 한 인간의 의지(意志)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높고 깊은 인격(人格)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활동하였다. 물론 논자(論者)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대략 이 시대 지식인들은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한 분류는 학문에 침잠(沈潛)해 성현(聖賢)의 도(道)를 추구하는데 주력하였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이왕(李滉)과 이이(李珥)를 거론할 수 있다. 이들은 현실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성리학(性理學)을 학문적 바탕으로 하여 내면(內面) 수양의 기초가 되는 심성(心性)의 탐구에 주력하였다.
다음으로는 의리(義理)의 실천에 주력했던 인물로 대표적으로는 조식(曺植)과 송시열(宋時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내면(內面)의 수양(修養)을 전제로 축적된 학문의 실천(實踐)에 주력했던 인물들이었다. 마지막 부류(部類)로, 국가 경영의 경륜을 실천했던 인물들로 조선 전기에 양성지(梁誠之)를 비롯하여 김육(金堉)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 경륜의 실천에 주력하였던 인물들이다.
다만, 당대의 지식인들을 반드시 어느 한 부류에 속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앞서 제시한 이이(李珥)의 경우 의리(義理)의 추구에 주력하면서도 실제 국가 경영의 현장에 참여하며 자신의 경륜을 제시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분류는 경향성(傾向性)의 파악을 위한 편의적인 것일 뿐이다. 이 같은 3가지 분류에서 이황(李滉)은 첫 번째에 해당되는 인물로, 철저하게 의리(義理)의 탐구에 치중하였으며, 그의 주된 관심은 인간(人間)의 본성(本性)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었다.
東邦의 朱子
이황(李滉)의 학문적 또는 사회적 활동은 비리(非理)와 부패로 점철된 시대를 청산하고 도덕적으로는 완성된 사림(士林)에 의하여 주도되는 사회로 나아가려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황의 문인(門人) '조호익(趙浩益)'은 이황(李滉)을 평하여 ' 실로 주자(朱子) 이후의 제일인자 '라고 하였다. 가히 그는 '동방의 주자(東邦의 朱子)'라 할 만하다.
이황의 학문은 당대(當代) 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 사회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가지며 확산되면서 이른바 ' 퇴계학파 (退溪學派) '라는 조선시대 학파의 큰 맥(脈)을 형성하였다. 비록 이후 시기 그의 문인(門人)이나 후학(後學)들이 정치적으로 당대의 주도세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여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학문은 대부분 논자(論子)들이 성리학(性理學)의 정수(精髓)로 인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문집(文集)이 일본(日本)에 유입되어 일본내 주자학(朱子學)의 주류(主流)로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과 대만, 미국, 중국 등 국경을 초월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가 탐구하려고 하였던 큰 주제(主題)가 인간(人間)의 보편적인 본성(本性)에 대한 것이기에,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성인(聖人)의 길을 묻는다. 주자(朱子)는 그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그런 길을 정말 우리가 갈 수 있느냐고... 불가능하다고.. 너무 이상적(理想的)이라고 ... 그런데 퇴계(退溪)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길을 정말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바라보는 자가 아니라 길 위에 서서 걷는 자 ! 하지만 그 길은 이전의 길이 끝난 길이었고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자리이었다. 그렇게 퇴계는 주자(朱子)를 넘어서 버렸다. 주자(朱子)의 삶을 살고자 한 자, 그래서 주자(朱子)가 다다르지 못한길마저 개척하 자, 그럼으로써 주자(朱子)마저도 새롭게 만든 자. 퇴계(退溪)는 주자학(朱子學)의 내부에서 주자(朱子)를 넘어가 버린 유일한 주자학자이었다.
퇴계는 경상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재 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퇴계의 생애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偶)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詩)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 야당(野塘) '이라는 시(詩)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다병(多病)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야당(野塘)이라는 시(詩)는 퇴계가 18세 때 고향에서 가까운 연곡(燕谷)으로 놀러가 즉흥적으로 읊은 시(詩)로서, 퇴계의 공식적인처녀작(處女作)이며, '이(理)' 사상을 궁구(窮究)하다가 지은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하는데, 주자(朱子)의 시(詩)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훗날 퇴계는 이 시(詩)를 스스로 가소로운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로초요요요수애 露草夭夭繞水涯 고은 풀 이슬에 젖어 물가를 둘렀는데
소당청활정무사 小塘淸活淨無沙 고요한 못 맑디맑아 티끌도 없네
운비조과원상관 雲飛鳥過元相管 나는 구름, 지나가는 새는 원래 비추는 것이지만
지파시시연축파 只爬時時燕蹴波 나는 저 제비 물결 찰까 두렵기 하네
중종 22년인 1527년,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科擧)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해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歸鄕)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관계(官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향리에서 3년간 복상을 하였고, 1539년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落鄕)하는 친구 김인후(金麟厚)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省墓)를 핑계삼아 사가(賜暇)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乙巳士禍) 후 병약(病弱)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求道)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任官)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外職)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兄)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피해서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다.
퇴계는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곳에 전임(前任)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監事)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에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求道)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그후 홍문관부제학,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동안 서당에 기거(寄居)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明宗)은 예(禮)를 두터이 하여 자주 퇴계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明宗)은 근신들과 함께 ' 초현부지탄 (招賢不至嘆 ... 현인을 초대하였는데도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는 뜻으로, 시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 이라는 제목의 시(詩)를 짓고, 몰레 화공(畵工)을 도산(陶山)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아침저녁으로 '퇴계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그 뒤 명종이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 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했으나, 퇴계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神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이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은 돌연 죽고 선조(宣祖)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퇴계는 신병(身病)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宣祖)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하며 그를 간절히 초빙하였다.
퇴계는 사퇴하였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 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宣祖)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소(疏)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고 한다. 그 후 이황은 노환(老患)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宣祖)에게 바쳤다. 선조 2년인 1569년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還鄕)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 해 11월 종가(宗家)의 시제 때문에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憂患)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梅花)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責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宣祖)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장례(葬禮)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묘비만 세워졌다.
퇴계는 22살 때인 1521년에 '허씨' 부인과 결혼을 하여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결혼 후 퇴계의 가장(家長)으로서의 삶은 한동안 그렇게 순탄치 못하였다. 퇴계는 첫 부인과 후처(後妻) 그리고 한 명의 첩(妾)이 있었다. 그러나 첫 부인 '허씨'는 둘째 아들을 낳고서 불과 한 달 만에 사망하였다.
퇴계의 가족사
첫 부인 '허씨'가 죽은 것은 퇴계가 28세 때이었다. 비록 아내는 죽었으나 사위로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홀로 된 장모를 도우며 죽을 때까지 처가(妻家)와 인연을 끊지 않고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고 도와주었다. 말로만 의리(義理)있는 삶을 부르짖은 백면서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학문에 전념해야 될 퇴계로서는 어린 두 자녀를 돌보며 집안 일을 맡아 줄 여인이 필요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본처(本妻)가 죽고 바로 새 장가를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당시의 관습대로 첩(妾)을 구하였다. 그런데 퇴계가 여복(女福)이 있었던지 첩(妾)은 두 아들을 잘 길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퇴계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이러한 첩(妾)에 대하여 퇴계는 후처(後妻)를 얻고 난 뒤에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존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두 자녀들에게도 친어머니와 같이 대하도록 하였다. 첫 부인이 죽고 약 3년 후에야 '권씨' 부인을 후처(後妻)로 맞아들였다. 후처(後妻)는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권질(權瓆)의 딸이었다.
후처(後妻) '권씨'의 할아버지는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賜藥)을 가져갔다는 죄목으로 평해 땅에 유배된 후 사약을 받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관노(官奴)가 되었으며, 아버지 권질(權瓆)은 연산군(燕山君)을 비방하는 언문(諺文) 투서사건으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그녀는어린 나이에 사화(士禍)의 참혹한 광경들을 목격했음인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아버지 권질(權瓆)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해배(해배)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후 무고(誣告)로 인한 옥사(獄事)인 무옥(誣沃)으로 예안 땅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평소 '퇴계'를 눈여견 본 후 자신의 딸을 의탁하였다. 딸을 의탁할 때 자신의 딸이 어려서 차마 당하지 말았어야 할 모진 일을 당한 까닭에 정신(精身)이 온전치 못하여 어떤 남정네도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히 밝혔다. 그리고 모자라는 딸이 처녀(處女)라도 면(免)하게 하여 아비의 원(寃)을 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지 퇴계는 한참 생각에 잠긴 후 ' 고맙습니다. 어머님께 허락을 받고 예를 갖추어 혼례를 올릴터이니 염려마시고 기력을 보존하소서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권질'이 예안 땅에 유배된 지 9년 째 되는 해에 두 번째 아내인 '권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1530년의 일이었다.
권씨 부인은 그 아버지 말대로 확실히 모자라는 구석이 있었다. 퇴계는 이러한 부인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아껴 주었다. 임지(任地)가 어디든 부인과 동행하였고, 죽은 후에도 자녀들에게 친어머니와 같이 예우할 것을 당부하였다. 한번은 일가친척들이 제사를 지내려고 모두들 종가(宗家)에 모였을 때의 일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제사도 지내기 전에 '권씨'부인이 상(床) 위에 놓인 임식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본 일가친척들이 차마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퇴계에게 못마땅해 하는 빛을 보이자, 퇴계는 태연스럽게 ' 제사도 지내기 전에 며느리가 음복하는 것은 예절에 벗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조상께서는 철부지 후손을 귀엽게 여기실 망정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여워하시지 않을 겁니다 '라고 두둔하였다.
또 한번은 상가(喪家)에 조문(弔問)을 가려던 퇴계가 힌색 도포자락이 헤어졌으니 꿰매 달라고 했더니, 권씨 부인은 헤어진 흰도포에다 큼지막하게 빨간 헝겁을 기워왔다. 그러나 퇴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것을 그냥 그대로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 흰 도포를 어찌 빨간 헝겁으로 기웠습니까 ? '라고 물었다.
예학(禮學)에 정통한 퇴계가 조문(弔問)을 함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옷을 입고 오자 그것이 문상(問喪)의 예법에 맞느냐고 물은 것이었다. 그러나 퇴계는 아무런대꾸도 하지않고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이렇게 부인에게 너그러웠던 퇴계이었다. 퇴계는 권씨부인을 맞아들인 4년후인 1534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권씨 부인은 퇴계가 47세였던 1546년에 나산(難産) 끝에 사망하였고, 어린 생명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 아버지 말대로 두 아들은 계모(繼母) 권씨가 죽자 그 무덤이 있는 산기슭에 여막을 지어 시ㅛ(侍墓)살이를 하였다. 퇴계는 그 건너편에 암자를 짓고 1년 여를 기거하였다. 평소 퇴계는 자녀들에게 사람들이 친모(親母)와 계모(繼母)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니 그러한 본을 보지말라고 일렀던대로 스스로도 그렇게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의 제삿날이 되면 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손님들에게는 대접할지언정 자신은 절대로 고기와 술을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연고로 첩(妾)이 죽은 후, 그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이적'을 자신의 족보에 올리고, 차후에도 그 후손들은 족보(族譜)에 적서(嫡庶)의 구별을 두지 아니하였다. 이 또한 당시로서는 시대를 넘어선 파격적이고 선구자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성리학자다운 언행일치(言行一致)의 행적이었다.
자찬 묘갈명 自撰 墓碣銘
선비의 품격(品格)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 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病患)으로 강의 (講議))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등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看病)을 하였다.
12월 3일 제자(弟子)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書籍)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遺書)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遺書)에는 1),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屍身)을 염습(殮襲)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기록된 묘갈(墓喝) 좌측에 새겨진 묘갈명(墓喝銘)은 대학자답게 자신의 생애를 4언(言), 24구(句), 96자(字)로 압축하였다. 그야말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이다. 퇴계는 임종(臨終) 직전에 일어나 기대앉아 자리를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평생을 두고 사랑하던 매화(梅花)를 보며 ' 매화분(梅花盆)에 물을 주어라 '하고는 앉은 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저물녘이었고, 어둑어둑한 하늘에서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1570년 12월 8일.향년(享年) 70세
생이대치 生而大痴 나면서 크게 어리석었고
장이다질 壯而多疾 자라서는 병(病)이 많았다
중하기학 中何嗜學 중년에 학문을 좋아하게 되었고
만하도작 晩何稻爵 느지막에 벼슬길에 들었네
학구유막 學求愈邈 학문은 갈수록 멀어지고
작사유영 爵辭癒瓔 벼슬은 마다해도 자꾸 내려지네
진행지겁 進行之迲 나아가기 어려우매
퇴장지정 退藏之貞 물러나 은거하기로 뜻을 굳혔네
심참국은 深懺國恩 나라의 은혜 생각하면 심히 부끄러우나
단외성언 亶畏聖言 진실로 성현의 말씀이 두려웠네
유산억억 有山臆臆 산은 높디높고
유수원원 有水源源 물 쉼 없이 흐르는 곳
파사초복 婆娑初服 벼슬을 벗어던지고 돌아오니
탈략중산 脫略衆刪 뭇 비방이 사라졌구나
아회이조 我懷伊阻 내 품은 생각 여기서 그친다면
아패수완 我佩誰阮 누가 내 패옥을 즐겨하리
아사고인 我思古人 내가 고인을 생각하매
실획아심 實獲我心 고인이 먼저 내 마음을 얻었으니
영지래세 寧知來世 오는 세상에서
불획금혜 不獲今兮 어찌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우중유락 憂中有樂 근심 속에 낙이 있었고
락중유우 樂中有憂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었네
승화귀진 乘化歸盡 조화를 좇아 사라짐이여
복하구혜 復何求兮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퇴계는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70세에 사망할 때까지 140여 직종에 임명되었으나, 79번을 사퇴하였다. 30회는 사표가 수리되었으나, 49회는 퇴계가 뜻없는 근무를 하였던 셈이다. 질병(疾病)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원래 벼슬보다 학문과 교육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물러나기만한 것은 아니고 일단 직책을 얻으면 책임을 다하고 소신껏 일을 하였다.
퇴계가 관직에 있으면서 행한 일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국방책, 침범한 왜적을 용서하고 수교(修交)를 해야 한다는 외교정책인 ' 걸물절왜사소 (乞勿絶倭使疏) ' 그리고 왕도(王道)를 깨우친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 파면을 당하면서도 궁중의 기강을 바로 세운 진언(盡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 나라의 교학을 개혁한 일, 군수로 나가서는 수리시설(水利施設)을 하여 농업을 진흥시켰다.
단양(丹陽)에서는 팔경(八景)을 지정하여 자연을 아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산수(山水)를 기록하여 치산(治山)과 등산하는 법도 등을 남겼다. 충청, 경기, 강원에 어사(御史)로 나가서는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다. 중국 사신을 맞아서는 행패를 막았고,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시켰다. 궁궐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문서 작성 등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동방의 주자 東邦의 朱子
퇴계가 정확히 언제부터 주자학(朱子學)에 몰두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주자(朱子)를 만나면서 퇴계는 인생의 분명한 비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 주자전서(朱子全書)'의 글자가 희미해질 정도로 '주자'를 읽었다. 그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 반드시 성현(聖賢)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본받아서, 조용히 찾고 가만히 익히는 것'이었다. 요컨데 공부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 바쁘게 말하여 넘기고 그저 예시로 외우기만 하는 것'은 가장 나쁜 독서이다. 성현(聖賢)의 말씀과 내 생각이 다르다면 일단 나에게서 문제를 찾는다. 그럴땐 ' 성현의 말을 더욱 믿어서 딴 생각이 없도록 간절히 찾아야 '한다. 이 간절함이 퇴계 공부의 요체이다. 퇴계는 천재라기보다는 노력파이었다. 천지(天地)가 배움으로 가득차 있어 끝없이 질문하는 것에 머물고 싶었던 진솔함, 배움 앞에서는 자신을 잊어버리면서까지 까마득히 몰입해 들어갔다.
사단칠정론 四端七情論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분석이다. 사단(四端)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樣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7정(七情)은 예기(禮記),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을 말한다.
사단(四端 .. 네 가지의 실마리)은 맹자(맹자)의 공손축(公孫丑) 상편(上篇)에 나오는 말로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네 가지 본성(本性)이다. 1. 측은지심 (惻隱之心) ... 맹자는 인(仁)을 꽃피우는 실마리는 남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마음이다. 2. 사양지심(辭讓之心) ... 예(禮)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자기의 이익을 버리고 남을 밀어주는 마음이다. 3. 수오 지심 (羞惡之心) ... 의(義)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거짓을 미워하는 의로운 마음이다. 4. 시비지심 (是非之心) ... 지(智)를 꽃피우는 실마리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다. 칠정(七情)은 위에 적은 바와 같다.
이황(李滉)은, 4단(四短)이란 이(理)에서 나오는마음이고, 칠정(七情)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理)와 기(氣)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理)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氣)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善)과 악(惡)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四端)은 이(理)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주리론적(主理論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李滉)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理)와 기(氣)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 (理氣二元論的 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율곡(栗谷)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른다.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論)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하여 스스로 전(전)에 말한 것이 온당하지 못함을 근심하였습니다만,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四端)의 발(發)은 순수한 이(理)만의 발(發)인 까닭에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七情)의 발(發)은 기(氣)를 겸한 발(發)이기 때문에 선악(善惡)이 있다 .. 이처럼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위의 글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고봉 기대승 (高峯 奇大升) '에게 보낸 이 편지로부터 역사적인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이 시작되었다. '사단칠정논변'이란 쉽게 말하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라는 마음의 두 양상을 분석하고 토론한 것이다. 두 사람은 나이와 세대, 직위와 경륜 그리고 지역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어 우리 정신사(精神史)에 길이 남을 역사적 논변(論辯)을 만들어 낸것이다. 극진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권위에 주눅 들지 않았던 고봉(高峯)의 패기와 학문과 경륜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퇴계(退溪)의 개방적인 자세가 돋보이는 논쟁이었다.
퇴계와 고봉은 각각 19살의 나이에 사화(士禍. 퇴계 ; 기묘사화. 고봉 ; 을사사화)를 목격하엿고, 또한 형(퇴계)과 숙부(고봉)가 사화로 희생된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인연은 학문적 동반자 이상이었다. 퇴계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지막으로 선조(宣祖)를 만났을 때 고봉(高峯)을 조정의 인재로 천거하였으며, 고봉은 퇴계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을 정도이다. 서로 믿음과 존경과 사랑으로 일어진 관계이었던 것이다.
퇴계와 고봉의 만남
세상 살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것이 있으면 사람들의 놀림과 배척을 면치 못하고 끝내 몸이 위태로워지거나 뜻을 억눌러야 하는 데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한탄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16세기 중반 이제 막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감히 편지를 보낸다. 학문과 벼슬, 인생의 가치 등을 놓고 고민하던 젊은 선비의 편지를 받고 퇴계는 답장을 쓴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아무에게도 속지 않을 만큼의 식견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世俗)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처음 만난 건 1558년 명종(明宗) 13년 10월이었다. 기대승(奇大升)은 과거(科擧)를 보러가는 길에 처음으로 이황을 찾아갔고 그 해 12월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 동안 계속되었다.
서로 처음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이황(李滉)의 관직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립서울대학교 총장이다. 반면 기대승(奇大升)은 갓 과거에 급제한 때였으니, 고시를 통과한 연수원생쯤 되었을 것이다. 나이는 이황이 58세, 기대승이 32세로 26살의 차이가 났다. 지역적으로 보면 이황은 경상도 출신이었고, 기대승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이었다. 기대승은 당대 최고 권위의 학자에게 자신의 철학적 소신을 거침없이 제기하였고, 이황은 기대승이 보내오는 편지에 성심성의껏 답장을 썼다.
사단칠정논변 사단칠정論辯
그런데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당대의 두 지성이 그 방대한 주자대전(朱子大典) 연구를 통해 쌓은 내공을 총동원, 무려 8년(1559~1566)의 세월을 투자하며 논쟁을 벌였을까. 그것은 주자학의 심성론(心性論) 때문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처하(修身濟家治國平天下)의 이상을 지향하는 실천학문(實踐學問)인 주자학(朱子學)은 ' 인간 (人間) '에 주목한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최종적인 해결의 단서는 인간(人間)의 심성(心性)에 있다고보는 것이다. 퇴계와 고봉은 사화(士禍)라고 하는 타락한 시대의 문제의 본질을 인간의 문제로 보았다.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은 16세기 명종(明宗) 때 학자 ' 추만 정지운 (秋巒 鄭之雲) '이 성리학 이론을 집약한 '천명도해 (天命圖解)'가 발단이 되었다. 1553년 '추만'은 퇴계를 만나 '천명도해'의 개정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때 퇴계는 '추만'이 '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한 것이다 .. 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 '라고 한 부분을 '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로 고쳤다.
이 같은 퇴계의 수정(修正) 부분에 고봉(高峯)이 이의를 제기하였고, 1558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상경하던 고봉(高峯)이 퇴계(退溪)와 상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첫 만남에서는 깊은 논의가 이루러지지 못한 채 헤어졌고,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論辯)이 시작된 것이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서로 대응하는 괸게로 보며, 그 존재양식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사단(四端)은 이(理)가 지배하는 영역에, 칠정(七情)은 기(氣)의 영역에 각각 분속시켰다. 사단은 마음 속 ' 인의예지(仁義禮智)에서 나온 순수하게 선(善)한 감정' 인 반면, 칠정(七情)은 바깥 사물이 육체를 자극하여 나오는 것으로 ' 선할 수도 있고 악(惡)할 수도 있는 일반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봉(高峯)은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다 같은 감정으로 이기론적(理氣論的) 논리구조도 같다고 보는 일원론(一元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사단과 칠정 역시 일종의 현상 내지는 사물(事物)이므로 이(理)와 기(氣)의 혼합체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은 칠정(七情)으로 아우를 수 있으며 그 중에서 선(善)한 부분을 사단(四端)이라고 부를 뿐이라는 주장이었다. 즉 칠저(七情)은 전체의 명칭이요, 사단(四端)은 부분의 명칭으로, 사단이 칠정 속에 포함되는 이른바 ' 칠포사 (七包四) '의 관계로 파악하였다.
퇴계(退溪)는 고봉(高峯)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修正)하지만, 사단과 칠정을 나누어 보는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퇴계의 최종 해석은 이렇다. '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한 것에 기(氣)가 따른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한 것에 이(理)가 탄 것이다 ...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
퇴계의 시대는 사화(士禍)의 시대이었다. '인의에지(仁義禮智)'를 지향하는 유학(儒學)의 이상(理想)이 짓밟히고, 훈구척(勳舊戚) 신세력의 부정한 권력과 타락한 욕망이 기승을 부리던 난세이었다. 이기론(理氣論)으로 말하면 기(氣)가 이(理)를 압도하던 시대로, 사단(四端)이 칠정(七情) 속에 포섭된 무기력(無氣力)한 구도로는 난세를 극복할 희망을 논할 수 없었다.
반면 고봉(高峯)은 칠정(七情)을 벗어난 사단(四端)의 독립성(獨立性)을 부정하며, 이상적(理想的)인 사단보다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칠정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질을 설명했다. 그러나 고봉(高峯)은 논변(論辯)의 마지막에 퇴계의 사단 중시설(四端 重視說)에 호응하는 듯한 방식으로 자신이 칠정(七情) 중심이론의 한계를 인정하였다. 마지막 서신(書信) 중에서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에 공감을 표한 것이다.
사화(士禍)의 시대 한복판을 살았던 '퇴계'와 달리 고봉(高峯)은 훈구척신(勳舊戚臣)의 시대에서 사림(士林)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사단과 칠정을 대립적(對立的)으로 보지 않고 일원적(一元的)으로 보았으며, 훈척(勳戚) 지배의 청산과 함께 장차 도래할 사림(士林)의 시대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작용한 탓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아직은 훈척(勳戚) 세력이 잔존(殘存)해 있는 시기이었고, 사림(士林)의 입장이었던 고봉으로서는 훈척시대의 극복을 위하 퇴계의 강렬한 실천적 메시지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칠정 중심 이론이 부당한 현실을 옹호하는 보수적 성격으로 읽힐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나 고봉의 사유(思惟)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의하여 계승된다.
성학십도 聖學十圖
이황(李滉)이 성리학(性理學)의 핵심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한 10개의 도표이다. 68세의 노학자 '이황"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宣祖)에게 군왕(君王)으로서 알아야 할 학문의 요체를 정리하여 ' 진성학십도차병도 (進聖學十圖箚幷圖) '라는이름으로 올렸다. 진(進)은 '성학십도'의 글을 왕(王... 선조)에게 올린다는 의미이고, 차(箚)는 내용이 비교적 짧은 글을 왕에게 올린다는 뜻으로 일명 주차(奏箚), 차문(箚文), 차자(箚子)라고도 한다.
병도(幷圖)는 글과 함께 그려넣는다는 의미이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宣祖)에게 68세의 노학자가 바로 즉위 원년(元年)에 올렸던 소(疏)이었음을 감안할 때, 선조(宣祖)로 하여금 성왕(聖王)이 되게 하여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간절히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저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서론(序論) 격인 '진성학십도차'와 태극도, 서명도, 소학도, 대학도, 백록동규도, 심통성정도, 인설도, 심학도, 경재잠도, 숙흥야매잠도 등의 10개의 도표로 구성되었다. 성학(聖學)이란 말은 곧 유학(儒學)을 지칭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聖人)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의미로 성학(聖學)을 풀이하고 있다.
10개의 도표 가운데 7개는 옛 현인(賢人)들이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을 골랐고, 소학도, 백록동규도, 숙흥야매잠도 등 3개의 도표는 '이황'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아울러 원(元)나라의 정복심(程復心)이 상도(上圖)를 작성한 '심통성정도'에느 이황이 첨가한 중도(中圖)와 하도(下圖)가 있는데, 이 두 그림에서 이황은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의 내용을 정성스레 설명하고 있다. 이 성학십도는 '퇴계문집' 중 내집(內集) 제7권 차(箚)에 수록되어 있다.
태극도 太極圖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는데, 동(動)의 상태가 지극하면 정(靜)하여지고, 정(靜)하여지면 음(陰)을 낳는다. 정(靜)의 상태가 지극하면 다시 동(動)하게 된다. 한 번 동(動)하고 한 번 정(靜)하는 것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陰)으로 나뉘고 양(陽)으로 나뉘어서 양의(兩儀)가 된다.
양(陽)이 변하고 음(陰)이 합하여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를 낳는데, 이 다섯 가지 기(氣 ..五氣)가 순차로 퍼지어 네 계절(四時)가 돌아가게 된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陰陽)이고,음양(陰陽)은 하나의 태극(太極)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無極)이다.
오행(五行)의 생성 시에 각각 그 성(性)을 하나씩 가져서, '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二), 오(五)의 정(精) '이 묘하게 합하여 응결되면 ' 건도(乾道) '는 남성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성을 이룬다. 두 가지 기(氣)가 서로 감화하여 만물을 낳고, 만물이 계속 생성함으로써 '변화'가 무궁하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그 빼어난것을 얻어 가장 영특하다. 형체(形)가 이미 생기자 정신(神)이 지(知)를 발하고, 오성(五性)이 감동하매 '선악(善惡)'이 나뉘고' 만사(萬事)'가 나오는 것이다.
이에 성인이 ' 중정(中正)'과 '인의(人義)'로써 이것을 정하고, 정(靜)을 주로 하여 '인극(人極)'을 세웠다. 그러한 까닭에 ' 성인(聖人) '은 그 덕성이 천지(天地)와 합치하고, 그 밝음이 일월(日月)과 합치하며, 그 질서가 네 계절과 합치하고, 그 길흉(吉凶)이 귀신과 합치한다. 군자(君子)는 이것을 닦으므로 길(吉)하게 되고, 소인(小人)은 이것을 어기므로 흉(凶)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 하늘의 도(道)를 세워 음(陰)과 양(陽)이라 하고, 땅의 도(道)를 세워 유(柔)와 강(剛)이라 하며, 사람의 도(道)를 세워 인(仁)과 의(義)라고 한다 ' 고 하며, 또 이르기를 ' 원시반종(原始反終)하면 사생(死生)의 설(說)을 안다 '고 한것이니, 위대하도다 '역(易)'이여 ! 이것이야말로 그 지극한 것이로다.
서명도 西銘圖
건(乾)을 부(父)라 하며, 곤(坤)을 모(母)라 한다. 나는 매우 작은 존재로서, 혼연히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천지(天地) 사이에 들어찬 것은 나의 몸이며, 천지를 이끄는 원리는 나의 본서(本栖)이다. 모든 사람이 모두 나의 동포이며, 모든 사물이 나와 같은 족속이다. 임금은 내 부모의 종자(宗子)이며, 대신(大臣)은 그 종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는 것은 그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는 근본이며, 외롭고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어린이를 어린이로 보살피는 근본이다. 성인(聖人)이란 그 덕(德)이 천지와 더불어 합치되는 사람이며, 현인(賢人)이란 빼어난 사람이다. 무릇 천하의 늙어 허약한 사람이라든가, 병들어 고통을 받는 사람이라든가, 형제가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든가, 혹은 홀아비나 과부와 같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은 모두 다 나의 형제가 심히 곤란한 처지를 당하고서도 호소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다.
때로 하늘의 뜻을 보존하는 것이 내가 천지의 아들로서 천지(天地)를 공경하는 것이며, 일상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이 효(孝)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하지 않고 천명(天命)을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人)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한다. 악(惡)한 일을 더하는 자는 부재(不才)이고, 천지로부터 받은 천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오로지 부모(父母)를 담는 자이다.
천지의 조화를 알면 그 천지 부모의 사업을 잘 계속하며, 그 조화 속의 신묘함을 다 궁구하면 그 천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방구석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부모를 욕(辱)되게 하지 않는것이며,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데 게으르지 않음이다. 맛 좋은 술을 싫어하는 것은 우가 어버이를 돌보는 것이며,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봉인이 그 효자의 동류를 길이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고생되어도 효성(孝誠)의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아 마침내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은 순의 공이며, 도망할 곳 없는 듯이 죽이기를 기다리는 것은 신생의 공경함이다. 주신 몸을 온전하게 가지고 살다가 돌아간 사람은 증삼이며, 따르는데 용감하여 명령에 순종하기로 손꼽힐 사람은 백기이다. 부귀와 복택은 장차 나의 삶을 두텁게 할 것이며, 빈천과 우척(優戚)은 너를 옥성(玉成)시키는 것이다. 살아서는 천지와 부모를 순하게 섬기다가 죽게 되면 나는 편안하게 돌아갈 것이다.
소학제사 小學題辭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천도의 상(常), 즉 하늘의 불변의 법칙이고,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인성의 강(綱) 즉, 인간의 벼리가 본성이다. 이 인간의 본성들은 원래 선(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네 가지 단서인 ' 사단(四端) '이 풍성하게 감동됨에 따라 드러난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兄)을 공경하며, 임금에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히 대하는 바로 이것이 ' 병이(秉彛)'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 순리적으로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인(聖人)만이 그 본성이 자연적으로 실현되어 하늘과 같이 넓어서, 털끝만큼의 힘으로 더하지 않아도 '온갖 선함(萬善)'이 다 갖추어진다.
일반 사람들은 어리석어 물욕(物慾)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그 도리를 무너뜨리고 서슴없이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진다. 성인이 이것을 가엾게 여긴 나머지 학문을 만들고 스승을 두고 가르치어 그 본성의 뿌리를 북돋는 한편 그 가지를 뻗게 하였다. '소학(小學)의 방법은 쇄소(刷掃)하고 응대(應對)하며, 집안에서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남에게 공경하여 행동이 조금도 법도를 어김 없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완전히 행ㅎ고 난 다음에 힘이 남으면 시(詩)를 외고, 글을 읽고, 노래를 읊조리고, 춤을 추며 모든 생각이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 이 법의 궁구와 깊이 생각하여 몸을 닦음이 이 학문의 큰 뜻이며 목적이다.
대학도 大學圖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新民)에 있으며, 지극히 서(善)한 경지(至善)에서 머무는 데(止) 있다. 머무를 곳을 안 뒤에야 정(靜)함이 있고, 정(靜)한 뒤에야 동요되지 않을 수 있으며(靜), 동요되지 않은 뒤에야 편안할(安) 수 있다. 편안함 뒤에야 생각할 수 있고(廉), 생각한 뒤에야 얻을 수(得) 있다.
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초와 종결이 있으니, 먼저 하고 나중에 할 것을 알면 도(도)에 가까워 질 것이다. 옛날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려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었고, 그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였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참되게 하였고, 그 뜻을 참되게 하려는 사람은 먼저그 앎을 투철히 하였으니, 앎을 투철하게 함은 사물의 이치를 구명하는 데 있다.
사물의 이치가 구명(究明)된 뒤에라야 앎이 투철하여지고, 앎이 투철해진 뒤에라야 뜻이 진실하여지고, 뜻이 진실하여진 뒤에라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라야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라야 집안이 바로 잡히고, 집안이 바로 잡히고 난 뒤에라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라야 천하가 화평하게 된다. 천자(天子)로부터 서민(庶閔)에 이르기까지 하녈같이 모두 몸을 닦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러워지면 말단이 다스려지는 법이 없으며, 후하게 해야 할 데에 박하게 하고, 박하게 해야 할 데에 후하게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백록동규도 白鹿洞規圖
희(喜)가 가만히 살펴보니, 옛날의 성현이 사람들을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하 뜻은 어느 것이나 모두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닦은 다음에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지, 한갓 낡은 것을 외우는 데 힘쓰고 문장을 일삼음으로써 명성이나 구하고 이록(利祿)이나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학문하는 사람들은 이미 이와 반대된다.
그러나 성현(聖賢)이 사람들을 가르치던 법은 경전에 갖추어져 있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숙독(熟讀)하고 깊이 생각하여 묻고 변해야 할 것이다. 진실로 이의 당연함을 알아가지고 자신을 책하여 반드시 이에 따르게 한다면, 준칙과 금방(禁防)을 어찌 다른 사람들이 마련하여 준 뒤에 지켜지기를 기다리겠는가.
근세 학교에는 규약이 있지만, 학자를 대함이 이미 천박하고, 그 법이 또한 결코 옛 사람들의 뜻에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 학당에서는 그것을 되풀이하여 시행하지 않겠으며, 특히 성현들이 가르쳐 학문을 하게 한 큰 근본을 취하여 위와같이 조목을 지어 처마 현판에 제시한다.
제군이 이것을 서로 강명(講明)하고 준수하여 몸소 실행하도록 한다면, 사려, 언행에서 그 계근공구(械謹恐懼)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저 규범보다 더 엄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혹시 규칙 밖으로 벗어나는 점이 있다면, 저 이른바 규약(規約)이란 반드시 취하여야 할 것이지 참으로 생략할 수 없는 것이다. 제군은 그것을 명심하도록 하라.
심통성정도 心統性情圖
마음이 성(性)과 정(情)을 통섭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오행(五行)의 빼어난 것(수 ..秀)을 받아 태어났고, 빼어난 오행에 오성(五性)이 갖추어지고, 그 오성(五性)이 동(動)하는 데서 칠정(七情)이 나옴을 말한다. 무릇 성(性)과 정(情)을 통회하게끔 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런 까닭에 그 마음이 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성(性)'이 되면 '심(心)'의 체(體)이고, 마음이 느끼어 마침내 통하여 정(情)이 되면 ' 심(心)의 용(用)'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 마음은 성(性)과 정(情)을 통섭하였다 '고 하였는데, 이말이 적당하다. 마음이 성(성)을 포함하는 까닭에 '인,의,예,지 (仁義禮智)'를 성(性)이라 하며 또한 '인의(仁義)의 마음'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마음이 정(情)을 포함하는 까닭에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를 정(情)이라 하며, 또한 측은한 마음이니 '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이라 하는 말도 있다.
마음이 성(性)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미발의 중 (未發의 中)'을 이루는 일이 없어 성(性)이 무시되기 쉽고, 마음이 정(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 중절의 화(中節의 和) ' 를 이루는 일이 없어 정(情)이 방탕하기 쉽다. 배우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서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그 성(성)을 기르고 정(情)을 제약한다면 배움의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인설도 仁說圖
인(仁)이란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사람이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을 삼는 것이다. 아직 발(發)하기 전에 마음에 ' 사덕(四德) '이 갖추어져있지만, 오직 인(仁)만이 사덕(四德)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인(仁)은 함육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 생(生)의 성(性) '이니 ' 애(愛)의 인(仁) '이니 ' 인(仁)의 체(體) '이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이미 발동하였을 때에는 사단(四端)이 드러나지만, 오직 ' 측은(惻隱)'만이 사단에 관통되고 있다. 그러므로 '측은'이란 두루 흐르면서 관철되는 것이고 통하지 앟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 성(性)의 정(情) '이니 ' 애(愛)의 발(發) '이니 ' 인(仁)의 용(用) '이니 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 즉 '미발(未發)'은 체(體)이고, 이미 발동한 것, 즉 '이발(已發)'은 용(用)이다 부분적으로 말한다면 '인(仁)'이 체(體)이고, 측은(惻隱)이 용(用)이다.
천지(天地)의 마음은 그 덕(德)을 네 가지 가지고 있다. 원(元), 형(亨), 이(刺), 정(情)이 그것이다. 그런데 원(元)은 이것들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이것들을 운행하면 '춘,하,추,동'의 차례로 되는데, 이 중에서도 봄을 생하는기운이 제 계절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도 네 가지의 덕(德)이 있다. 곧 '인,의,예,지'가 그것이다. 공자의 말씀에 ' 극기(克己)하여 예(禮)로 돌아가면 인(仁)을 하게 된다 '고 한 것이 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면 작이 사심(사心)을 이겨내고 천리(天理)에 돌아갈 수 있으면 이 마음의 본체가 다 있게 되며 이 마음의 장용이 모두 행하여지게 됨을 이르는 것이다.
심학도 心學圖
적자(赤子)의 마음은 인욕(人慾)이 물들지 않은 양심이지만, 인심(人心)은 욕구에 눈을 뜬 것이다. 대인(大人)의 마음이란 의리(義理)가 모두 갖추어진 본마음이고, 도심(道心)이란 곧 의리(義理)를 깨달은것이다. 이것은 두가지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형기에서 발생되면 모두 인심(人心)을 얻을 수 없게 되고, 성명에 근원하면 도심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정일(精一)과 택집(擇執) 이하의 것은 ' 인욕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 '하게 하는 공부아닌 것이 없다. 신독(愼獨) 이하의 것은 ' 인욕을 막는 점 '에 관한 공부인데, 반드시 '부동심(不動心)'에까지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빈천)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위무(威武)가 마음을 적지 못하게 되어, 그 도(道)가 밝아지고 덕(德)이 세워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릇 마음이란 ' 한 몸을 주재 '하는 것이고, 경(敬)이란 또한 ' 한 마음을 주재 '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들이 ' 주일무적 (主一無敵) '의 설이라든가, ' 정제엄숙 (整齊嚴肅) '의 설과 ' 마음을 수렴하고 항상 또렷한 정신 상태로 있어야 한다 '는 설을 깊이 궁구(窮究)한다면 그 공부가 더할 나위 없게 되어, 성인(聖人)의 경지에 충분히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경제잠도 敬齊箴圖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 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를 대하듯 하라. 발가짐(足容)은 반드시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手容)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여야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이까지도 밟지 말고 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에는 손님을 뵙듯 해야 하며, 일을 할 때에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일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입 다물기를 병마게 막듯이 하고, 잡념(雜念) 막기를 성곽(城郭)과 같이 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경솔함이 없도록 하라. 동쪽을 가지고 서쪽 가지 말고, 북쪽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지말며, 일에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씀을 ㄷ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여라.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직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피도록 하라.이러한것을 그치지 않고 일삼아 하는 것을 곧 ' 경(敬)을 유지함 ' ,즉 지경(持敬)이라 하니,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어그러짐이 없고 겉과 속이 서로 바로 잡아주도록 하라.
잠시라도 틈이 벌어지면 사욕(私慾)이 만 가지나 일어나 불꽃도 없이 뜨거워지고 얼음과 같이 차가워지느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자리를 바꾸고 삼강(三綱)이 멸(滅)하여 지고 구법(九法) 또한 못쓰게 될 것이다. 아 ! 아이들이여 ! 깊이 마음에 새겨두고 공경할지어다. 먹을 갈아 경계하는 글을 씀으로써 감히 영대(靈臺)에 고하노라.
숙흥야매잠도 夙興夜寐箴圖
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顔色)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 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孔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安子)와 증자(曾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辯)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아라. 천명(天明)은 밝고 밝은 것,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일에 응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곧 예전의 나대로 되어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동(動)과 정(靜)이 순환하는 중에도 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에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 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을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心身)이 돌아와 쉬게 하라.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靜)이면 원(圓)에 돌아오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라
고봉 기대승의 도움
이황과 매화 그리고 두향(杜香)과의 사랑 이야기
퇴계 이황(李滉)은 매화(梅花)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서 ' 내 평생 즐겨함이 많았지만 매화(梅花)를 혹독하리 만큼 사랑한다 '고 매화시첩(梅花詩帖)에 적었다. 조정에 나아가 국사를 처리하며 어려운일을 당했을 때에는 매화(梅花)와 문답(問答)으로 풀어나갔고, 눈 내리는 겨울 밤 홀로 분매(盆梅)와 마주 앉아 술상을 가운데 놓고 ' 매형(梅兄) 한 잔, 나 한 잔 '하며 밤을 지새워 시정(詩情)에 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음의 시(詩)를 보면 퇴계가 매화를 얼마나 끔찍히 여겼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내 전생은 달이었지 /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 前身應是明月 / 幾生修到梅花 . 퇴계가 매화(梅花)를 노래한 시(詩)는 일백 수(首)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단양군수(丹陽郡守)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 이황(李滉)은 21세에 '김해 허씨'와 결혼하였지만, 아들 셋을 낳고 6년만에 병으로 사별(死別)의 아픔을 맛 보았고, 두 번째 아내를 얻었으나 여러 번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정신병(精神病)으로 고통을 겪다가 이황의 나이 46세 되던 해에 죽었다. 그 후 2년 뒤 이황은 단양군수로 부임을 하게 된다.
퇴계와 두향의 사랑
두향(杜香)은 조선시대 단양(丹陽) 태생의 관기(官妓)로 시(詩)와 서(書) 그리고 거문고에 능하였다. 그리고 특히 매화(梅花)를 좋아하였다. 퇴계가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해 오자 그를 일편단심 사모했으나, 퇴계의 처신(處身)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退溪)이었던지라 한동안은 두향(杜香)의 애간장만 녹을 뿐이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그리고 두향(杜香)의 나이는 18세이었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는 그 빈 가슴에 한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杜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가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조선시대 고을 수령(守領)의 임기는 보통 5년인데, 퇴계의 넷째 형(兄) '온계 이해(溫溪 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형제가 같은 도(道)에서 근무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하여, 퇴계는 고개 너머 경상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인데, 이를 '상피제도(相避制度)'라고 한다.
짦은 인연 뒤에 찾아온 급작스러운 이별은 두향(杜香)에게는 결딜 수 없는 큰 충격이었다. 이별(離別)을 앞둔 마지막 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뿐이다 ' 두향(杜香)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시(詩) 한 수(首)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어 슬피 울 때 / 어느 듯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 날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가 단양(丹陽)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에는 두향(杜香)이가 준 수석(壽石) 2개와 매화(梅花)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는 평생을 이 매화(梅花)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지금 도산서원(陶山書院) 입구에 잇는 매화도 그때 그 나무의 후손이라고 한다.
퇴계는 도산서원 입구 한켠에 절우사(節宇祠)라는 정원을 꾸며놓고, 거기에 송(松), 죽(竹), 국(菊), 연(蓮)과 함께 매화를 심고, 자신을 포함해 절친한 ' 여섯 벗'이라 하며 즐겼다고 한다. 그는 선조(선조) 3년인 1570년 12월 8일 아침, 시봉하는 사람에게 ' 분매(분매)에 물을 주라'고 명한 뒤, 저녁 5시에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 말 속에는 그의 가슴에도 두향(두향)이 가득했다는 증거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절제력(節制力)이다.
한편 퇴계가 열 달 만에 단양군수 직을 떠나자 두향(杜香)은 신임 사또에게 ' 퇴계를 사모하는 몸으로 기생을 계속할 수 없다 '며 기적(妓籍)에서 이름을 없애달라고 간청하여 관기(官妓)를 면(免)하였다. 그 후 그녀는 구담봉(龜潭峰) 앞 강선대(降仙臺)가 내려다보이는 남한강 언덕에 초막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퇴계의 죽음과 두향
퇴계는 그후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말년에는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퇴계의 부음(訃音)을 들은 두향(杜香)은 4일간 걸어서 안동(安東)으로 찾아 갔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다시 단양(丹陽)으로 돌아온 두향(杜香)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다.
상사병(相思病)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과 퇴계가 안동에서 타계하자 강선대(降仙臺)에 올라 거문고로 초혼가(招魂歌)를 탄 후 자결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이렇게 유언(遺言)하였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강가 거북바위에 묻어다오. 거북바위는 내가 퇴계선생을 모시고 자주 인생을 논하던 곳이다.
두향(杜香)의 무덤은, 단양으로 들어서는 동쪽 문, 옥순봉(玉筍峰)으로 가는 물길을 따라 가다 건너편에 있다. 그녀는 유언대로 강선대 가까이에 묻혔고, 그로부터 단양 기생(妓生)들은 강선대에 오르면 반드시 두향(杜香)의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리고 놀았다고 한다. 그 후 200년이 지난 어느 날, 이광려라는 문장가는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首)를 읊었다. 외로운 무덤 길가에 누웠는데 / 물가 모래밭에는붉은 꽃 그림자 어리어 있어라 / 두향의 이름 잊혀질 때라야 / 강선대 바위도 없어지겠지. 두향의 무덤은 충주댐으로 수몰되었으나, 사전에 안전한 곳으로 이장되었다.
단구동문 丹丘洞門
단양팔경(丹陽八景)은 원래 '퇴계 이황'이 단양 군수(郡守)로 부임해서 정한것이고, 이 단양팔경 중 옥순봉(玉筍峰)은 원래 단양땅이 아니라 청풍(淸風) 땅이었다. 옥순봉(玉筍峰)을 '단양팔경'으로 정하고 싶었던 퇴계는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찾아가 옥순봉을 단양땅으로 넘겨 달라고 부탁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아쉬운 마음에 ' 단구동문 (丹丘洞門) '이라는 글귀를 새기게 된다. ' 단구(丹丘)'는 단양의 옛 이름이니 어떻게든 '단양팔경'으로 정하고 싶었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했던 것이다. 이후 처풍부사가 '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글귀를 보고 옥순봉(玉筍峰)을 단양에 양보하였다고 한다.
도산서원 陶山書院
우리나라 역사상 '퇴계(退溪)' '율곡(栗谷)' 두 인물이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인문학적 역량의 중량감은 훨씬 덜 할 것이다. 보통 30년을 한 세대(世代)라고 하니 율곡(栗谷. 1536~1584)은 퇴계(退溪. 1501~1570)보다 한 세대의 후학(後學)이다. 퇴계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조종으로 주리론자(主理論者)이고, 율곡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조종으로 주기론자(主氣論者)로 불리운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 전개된 당쟁(黨爭)의 흐름인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도 이 두 인물의 학풍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니 조선시대의 정신 문화사를 거론함, 이 두 인물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퇴계와 율곡 退溪와 栗谷
율곡(栗谷)은 일생을 통해서 단 한번, 그것도 결혼하던 해 처가(妻家)가 있던 경상도 성주(星州)에 다녀오던 차에 안동(安東)을 들러 2박3일 동안 퇴계와 함께 지낸 것이 모두이었다. 율곡의 나이 23세요, 퇴계는 58세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짧은 만남이었건만 두 사람은 일생일대의 만남을 가졌고, 상대방의 인품과 학문을 알아보고 사제(師弟)의 연을 맺기에 이르렀다. 율곡이 서울로 떠날 즈음에 퇴계에게 간곡히 청했다고 한다. 한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잠언(箴言)을 한말씀들려주십시요...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이 잠언을 내렸다. 持心貴在不欺, 入朝當戒喜事 ... 마음가짐에 있ㅇ선는 속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함부로 일을 좋아하기를 경계하라.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었던 퇴계의 겸손함과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 그리고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인을 알아보는 통찰력을 지닌 율곡의 빼어남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짧았던 만남을 아쉬워 하며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詩)를 주고 받았다. 먼저 율곡이 ... 살림이라고는 경전 천 권뿐인 두어 칸의 집에서 회포를 푸니 맑은 하늘에 달이 떠오르는 듯하고, 담소는 거친 물결을 잠재운다...라고 하자, 퇴계가 이를 받아 ... 몸이 병들어 봄이 온 줄도 모르고 누워 이었는데, 그대가 와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나니 심신이 상쾌하구려. 자네가 명성마 높은 헛된 선비가 아닌 줄 알았으니 지난날 경신(敬身) 공부에 열심을 다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 열심히 공부하여 서로 친해보자.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詩)에는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는 중국 강남의 외래학문이었던 성리학(性理學)의 이(理)와 기(氣)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주자(朱子) 성리학을 주자(朱子) 이상으로 심화(深化) 발전시켰고, 율곡은 퇴계의 이러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주기론적(主氣論的) 조선 성리학을 완성하여 조선 중화주의(中華主義)를 창달케 하였다.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란 대륙에서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망하고, 문화적으로 열등한 오랑케인 만주족(滿洲族)이 중원을 물리적으로 탈취하였으니, 이후 조선이 진정한 중원문화(中原文化)의 계승자라는 사상이다. 따라서 그러한 중원문화의 바탕이 된 우리의 산하(山河)와 백성 그리고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한껏 고양됨은 당연한귀결이었다. 이로써 조선 후기 민족자존(民族自존)의 동국진경문화(東國眞景文化)를 발화시킬 수 있게 하였다.
퇴계는 동인(東人)의 조종(祖宗)이요, 율곡은 서인(西人)의 조종(祖宗)이라 두 사람이 마치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인 갈등이 있은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나 범인(凡人)들의 경지를 뛰어넘어 성인(聖人)의 풍모를 지녔던 이들 간에 그러한 소인배적(小人輩的) 갈등은 있을 수 없었다. 다만 학파(學派)를 중심으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한 후학들의 소아적(小兒的) 파쟁(派爭)이 문제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만남
기원전 506년, 중년의 공자(孔子)가 이미 인품과 학식으로 천하를 풍미하던 70대의 노자(老子)를 찾아가 예(禮)를 다하여 물었듯이, 1558년 봄에 23세의 청년 율곡(栗谷)은 예안(禮安 .. 지금의 안동군 예안면)에 물러나 있던 당대 최고의 원로 석학인 58세의 퇴계(퇴계)를 찾아뵙고 학문의 길에 대하여 물었다.
퇴계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멀리 찾아온 젊은 천재 율곡(栗谷)을 정중하게 맞이하였고, 율곡은 ' 제자의 예(弟子의 禮)'로 인사를 올렸다. 퇴계는 율곡의 재능과 학식 그리고 열정에 깊이 감탄하고 무척 반겼는가 하면, 율곡 또한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율곡은 소회(所懷)를 담은 시(詩)를 한 수(首) 지어 올렸다.
과예안알퇴계이선생 過禮安謁退溪李先生
예안을 지나며 퇴계선생을 찾아뵙다
계분수사파 溪分洙泗派 냇물은 수수와 사수에서 갈라져 나왔고
봉수무이산 峯秀武夷山 드높은 봉우리는 무이산에서 빼어났네
활계경천권 活計經千卷 천 권의 경전으로 살아가는 계책을 삼고
행장옥수간 行裝屋數間 갖춘 행장이라곤 두어 칸 집뿐이라네
금회개제월 襟懷開霽月 흉금을 터니 가슴 속은 훤히 개인 달 같고
담소지광란 談笑止狂瀾 담소를 나누니 거친 물결도 그치는구나
소자구문도 小子求聞道 소자가 뵈오러 온 것은 도를 얻고자 함이요
비투반일한 非偸半日閒 한나절의 한가로움을 빼앗으려함이 아니외다
제 1구(句)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는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 있던 강(江) 이름이다. 곧 퇴계의 학문이 유하의 창시자인 공자(孔子)에게서 연원을 두고 있음을 말함이다. 제 2구(句)의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에 있는 명산으로 주자(朱子)가 은퇴한 후에 이 산 아래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작업을 하던 곳이다. 도산(陶山)에 있는 퇴계의 학문이 무이산(武夷山)의 주희(朱熹)처럼 높음을 말한 것이다. 제 3,4구(句)에서는 권세나 벼슬을 탐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는 퇴계의 살림살이를 묘사하였다.
제 5, 6구(句)는 노학자와 마주 앉아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해보니 비바람이 지난 뒤에 밝은달처럼 안목이 확 트이는 듯하며, 거친 물결처럼 격정적인 자신의 마음도 맑아짐을 말하고 있다. 제 7구(句)에서는 소자(小子)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한껏 낮추어 제자(弟子)의 입장에서 학문의 길을 여쭙고자 왔음을 말하면서도, 마지막 제 8구(句)에서는 그저 한 수 배우고자 함만이 아니라 질의와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다고 쓰고 있다. 예의를 지켜 조심스러우면서도, 여유 있고 당당한 율곡(栗谷)의 자세를 잘 나타내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이른 봄이었는데, 때마침 눈비가 섞여 내리는 날씨를 핑계 삼아 퇴계(퇴계)는 떠나려는 율곡(栗谷)을 거듭 만류하여 이틀 밤을 묵게 하였다. 노학자 퇴계는 젊은 율곡이 무척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천금 같은 2박3일 간, 두 사람은 함께 거닐며 한담을 나누고, 경서(經書)를 앞에 두고 깊은 뜻을 따졌으며, 밤에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시면서 담소를 하였다. 이렇게 이틀을 보내고 나니 두 사람은 마음미 서로 통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오랜 지기(知己)처럼 헤어지기를 못내 아쉬워했다. 퇴계(退溪)는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한편의 시(詩), 전별시(餞別詩)에 담아내었다.
재자흔봉이월춘 才子欣逢二月春 이른 봄날 천하 재사를 기쁘게 만나니
만유삼일약통신 挽留三日若通神 머문 지 3일 만에 마음이 통하는 듯하네
우수은죽소계족 雨垂銀竹銷溪足 비는 늘어진 은죽처럼 시냇가에 흩내리고
설작경화리수신 雪作瓊花裏樹身 눈은 구슬 같은 꽃이 되어 나무를 감쌌네
몰마니융행상조 沒馬泥融行尙阻 날 개어 지저귀는 새 소리에 풍경 새롭네
일배재속오하천 一杯再屬吾何淺 술 다시 권하며 어찌 만남이 짧다하리
종차망년의경친 從此忘年義更親 이제부터 망년지교 더욱 친해보세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 퇴계는 이미 율곡을 망년우(忘年友... 나이를 떠나 사귀는 벗)으로 삼았고, 더욱 돈독한 사귐을 갖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대하여 율곡은 물론 언제나 퇴계를 '스승의 예'로 대하며 극진하게 예우를 다했다. 한편 율곡이 그렇게 떠난 후에 퇴계는 자신의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 그 사람됨이 명랑하고 시원스러우며, 해박한 학식과 식견, 민첩한 문장력에 감탄하면서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옛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다 '며 극찬을 아끼지않았다. 진정 퇴계는 율곡의 뛰어난 재주를 무척이나 아끼고 큰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가 낳은 대성인이자 대사상가인 공자(孔子)와 노자(老子)의 만남이 세기적인 대사건이라면 한국이 낳은 위대한 철인(哲人)이자 대사상가인 퇴계와 율곡의 만남 역시 우리 역사상 최고이 대사건(大事件)이었다. 비록 2박3일의 짧은 만남이었으나, 율곡은 퇴계로부터 받은 지대한 영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 내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사나운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가시밭길의 거친 들판에 있다가 방향을 고쳐서 옛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 모든것은 실로 퇴계선생의 계발(啓發)에 힘입은 것이다 ' 라고 율곡은 술회하고 있다.
이후 두 사람의 학문적인 혹은 인간적인 교우는 퇴계가 먼저 타계(他界)할 때까지 계속된다. 편지를 통하여 학문에 관하여 질의와 답변을 나누는가 하면, 시(詩)를 통하여 서로 간의 안부와 심회를 전하기도 하였다. 퇴계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머무르게 되면 율곡은 으례히 찾아가 상면하곤 하였다. 35세 연상(年上)이었던 퇴계의 부음(訃音)을 듣자, 율곡은 위(位)를 만들고 곡(哭)하였으며, 외실(外室)에서 거처하며 스승의 예(예)로 상(상)을 행하였고, 아우를 보내어 문상(問喪)하도록 하였다. 또한 만시(輓詩)를 지어 죽음을 애도하였다.
곡퇴계선생 哭退溪先生
양옥정금품기순 良玉精金稟氣純 양옥정금 같이 타고난 기품 순수한데
진원분파자관민 眞源分派自關閔 참된 근원은 관민에서 갈려 나오셨네
민희상하동류택 民希上下同流澤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입기를 바라건만
적작산림독선신 迹作山林獨善神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 닦으셨네
호서용망인사변 虎逝龍亡人事變 범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 일 변했건만
난회로벽간편신 爛回路闢簡編新 물결 돌리고 길 열으신 저서가 새롭구나
남천묘묘유명격 南天渺渺幽明隔 남쪽 하늘 아득히 이승과 저승이 갈리니
누진장최서해빈 淚盡腸催西海濱 서해 물가에서 눈물 마르고 창자 끊어지네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두 거봉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도 달랐지만 학문적 관심의 초점도 역시 달랐다. 퇴계의 학문이 ' 수양론(修養論) '을중시하는 입장이라면, 율곡은 ' 경세론(經世論) '에 역점을 두었다. 곧 퇴계(退溪)가 수양과 인격 도야를 위한 학문을 추구하였다면, 율곡(栗谷)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였다.
성리설(性理說)에서도 퇴계는 ' 이(理 ..이치) '가 ' 기(氣 .. 기질) '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주리(主理)적 경향인데 대하여, 율곡은 이치(理致)와 기질(氣質)은 똑같이중요하다고 보는 주기(主氣)적인 경향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퇴계와 율곡 두 사람을 영남학파와 기호학파,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 남인(남인)과 서인(서인)으로 나누어 말한다. 하지만 이 두 인물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후세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지(立地 .. 학문과 권력)를 위하여 다분히 의도적으로 구분한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두 인물은 연령적, 지역적, 학문적 차이(差異)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서로 만나서 한편은 스승을 대하듯이, 다른 한 편은 아끼는 후학(後學)으로 대하면서 가슴 벅찬 교유를 하였다. 연로(年老)한 퇴계가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두 사람의 사귐은 끝났으나,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맑고 아름다운 만남의 주인공들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어떤 학설을 받들어 계승하거나 비판해서 넘어서는 단선적(單線的) 사상가(思想家)가 아니다. 그는 일찍부터 전해오던 한학(漢學)과 주자학, 양명학은 물론이요, 그 시대에 새로 들어온 청(淸)나라의 고증학, 일본의 고학(古學)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교리를 포함하는 서학(西學)에 이르기까지 사방으로부터 다양한 사상 조류를 폭넓게 수용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섭취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을 정립한 종합적 사상가이다. 말하자면 당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사상을 모두 모아 하나의 도가니에 담아 뜨거운 불길로 버릴 것은 태우고 취할 것은 녹여서 새로운 물질로 주조(鑄造)해 내는 장인(匠人)에 비유할 수 있다.
다산(茶山)의 학문의 뿌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거쳐 퇴계(退溪)에 닿는다. 실학자로서 성호(星湖)는 현실의 경제 문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깊은관심을 보였지만, 동시에 퇴계(退溪)의 학설을 계승하는 성리학자로서도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실학자이면서 주자학자라는 두 얼굴을 지닌 성호(星湖)는, 주자학에서 실학(實學)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茶山)은 성호(星湖)의 실학정신을 계승하였지만, 주자학(주자학)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호'와 중요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理)'와 '기(氣)'로 하늘과 인간 존재를 설명하는 주자(朱子)의 관념적 세계관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면서 그 기초부터 허물고 자신의 독자적 펄학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하여 다산은 퇴계의 철학적 기반인 성리학(性理學)을 계승하는 입장이 아니다. 다산과 퇴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단절(斷絶)이 가로놓여 있다.
그런데 다산은 주자(朱子)의 성리설을 에리하게 비판하면서도 퇴계의 성리설(性理說)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았다. 성리설의 원조인 주자(朱子)를 비판했으니, 그 계승자인 퇴계(退溪)를 비판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 그의 가슴 속에는 퇴계에 대한 인간적 존경심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 이 글은 다산문집인 '여유당전서(餘猶堂全書)' 제1집 제22권 첫머리에 실린 글이다. 정약용(丁若鏞)이 천주교 주문모(周文謨) 사건에 연루되어 우부승지에서 금정역(金井驛) 찰방(察訪)으로 좌천되어 그곳에 근무하면서 지은 것으로 총 33장으로 된 글이다.
다산이 퇴계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사모하여 '퇴계집'의 서찰 가운데서 필요한 부분을 뽑아 강(綱)으로 삼고, 거기에다 설명을 붙여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지은 글이다. 사숙(私淑)이라는말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직접 배우지 못하고 다만 그 분을 본받아 스승으로 삼고 그 분의 저서를 통하여 도(道)와 학문을 닦는 것을 이르는 말로,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다.
을묘년(乙卯年. 1795년. 정조 19) 겨울에 나는 금정(金井)에 있었다. 마침 이웃 사람을 통하여 퇴계집(退溪集)을 얻어, 날마다 새벽에 세수를 마치면 바로 퇴계선생의 편지 한 편을 읽은 다음에, 아전(衙前)들의 침알(砧謁)을 받았으며, 낮 동안에 그에 관한 상세한 연의(演義)한 대목씩을 기록하고 스스로 경계하며 성찰(省察)을 하였고, 금정(金井)에서 돌아온 다음에 이를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 이름지었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一代)를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 영남(嶺南)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退溪學派) '를 형성해 왔다. 그리고 덕천가강(德川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래로 일본 유학(儒學)의 기몬학파(岐門學派) 및 웅본학파(熊本學派 .. 구마모토학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開化期)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尊崇)을 받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東洋 三國)'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언행록(言行錄)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 퇴계선생에게는 성현(聖賢)이라 할 만한 풍모가 있다 '고 했을 때, 이덕홍은 '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聖賢)의 도(道)가 두절된 뒤에 탄생하여,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道)를 일신에 계승하였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先聖)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라고 퇴계를 칭송하고 있다.
이익(李瀷)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聖賢)의 예우를 받는, 한국 유림(儒林)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일본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끼(山岐暗齊)'는 퇴계를 ' 주자(朱子)이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 '고 하며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하였다. 그리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는 '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해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 '라고 찬양하였다. '구마모토학파'의 시조 '오스카'는 '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朱子)의 미의(微意)는 불명해 속학(俗學)이 되어버렸을것이라 생각된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