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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영남알프스, 능동산 천황산 재약산
1. 일자: 2023. 11. 11 (토)
2. 산: 능동산(983m), 천황산(1189m), 재약산(1119m)
3. 행로와 시간
[배내고개(04:07) ~ 능동산(05:00) ~ (임도)~ 샘물상회(06:30) ~ (일출) ~ 천황봉(07:33~42) ~ 천황재(08:20~48) ~ 재약산(09:25~40) ~ 사자평 억새밭(10:15~11;10) ~ (가파른 내리막) ~ 죽전마을(12:10) ~ 베네치아식당(12:25) / 15.3km]
영남알프스에 다시 간다. 대학 동문들과 함께다. 출발 며칠 전부터 카톡방에 불이 난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이들이라 '농'도 '흥'으로 변한다. 좋다.
처음 고려한 코스는 운문산-가지산이었다. 당연 영남알프스의 대표 산인 가지산에 마음이 먼저 갔다. 그런데 석골사 밑에서 운문산을 오르려면 1000미터의 높이 차를 이겨내야 하고, 새벽에 암릉 구간도 안전상 부담이 되고, 무엇보다 가을의 명물 억새 군락이 상대적으로 덜 화려한 게 마음에 걸렸다. 고심 끝에 시작 고도가 700m로 오르는데 부담이 없고, 사자평으로 대표되는 억새 군락의 화려함에 끌려 능동산-천황산-재약산으로 코스를 변경했다. 혼자라면 어딘들 어떠랴 하겠지만 처음 무박산행을 가는 분도 있으니 고려할 사항이 많아진다. 지난 산행은 배내고개에서 시작해서 표충사로 내려왔다. 이번과 거리는 비슷한데 채 6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크게 어렵지 않다는 말이다.
갈 길을 그려본다. 새벽 4시에 들머리 배내고개를 출발한다. 꽤 쌀쌀할 게다. 능동2봉까지 2.5km 1시간을 예상하고, 거기서 샘물상회를 지나 천황봉까지는 5km 2시간 반으로 천황봉 밑 전망바위에서 일출을 맞을 것 같다. 맑은 날씨가 예상되어 화려한 일출이 기대
된다.
천황재 쯤에서 아침 식당이 차려질 것이다. 산에서 맞는 아침은 감동적일 게다. 이후 재약산과 사자평을 지나 죽전마을까지는 정상적으로 걸으면 2시간이면 충분하다. 산에서보다 죽전마을에서 도로 따라 태봉교까지 걷는 게 더 부담된다. 전체 산행거리는 15km, 시간은 넉넉히 8시간을 예상한다. 뒤풀이는 태봉교 인근 식당에서 하고 찻집에도 들를 생각이다. 일행이 있는 산행이니 평소보다 마음이 더 분주하다. 산행 준비 과정이 실력으로 쌓여 주기를 바래 본다.
늦가을에 찾는 영남알프스는 어떤 감동을 줄까, 억새 평원에서 맞는 일출은 또 어떨까, 마음이 설렌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 배내고개 가는 길 >
사당역 밤 11시, 기영을 만나러 가다 신발 끈에 걸려 넘어졌다. 팔목이 아프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반복되는 부주의에 화가 났다. 액땜했다고 여긴다.
양재, 죽전에서 일행을 태우고 버스가 밀양을 향해 출발한다. 사위는 어둡고 고요하다. 밤을 가로지르는 여정이 시작된다.
대장이 코스 안내를 한다. 장황하다. 조금 짧았으면 메시지가 더 분명했을 텐데, 과유불급이다. 평소 나의 언행을 되돌아 본다.
밀양 얼음골을 지나 석골사 부근에서 운문산 가는 일행을 내려주고, 다시 구불구불 긴 도로를 올라, 버스는 배내고개 주차장에서 멈춰 선다. 망설이다, 짐이 될 것 같아 스틱을 두고 내린다. 시원찮은 손목 때문에 걱정이다.
< 배내고개 ~ 천황산 >
04:07 출발한다.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혼자 걷던 길에 다섯이 나란히 서니 든든하다. 능동산으로 향하는 길은 계단의 연속이다. 렌턴의 불빛이 어두운 새벽 길을 비춘다. 조금은 차갑지만 싫지 않은 바람도 느껴진다. 어둠과 친해지려 천천히 걷는다. 불빛에 비치는 관목과 참나무 숲이 꽤 근사하다. 나무들이 흰색으로 다가왔다.
05:00 능동산 정상에 선다. 카메라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다. 어스름 새벽 빛이 사진에 묻어난다. 훗날 추억이 될 모습을 담았다. 능동산을 내려서니 길은 임도로 변한다. 잘 정비된 널찍한 등로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별을 헤아리며 동녘으로 느껴지는 일출의 기운을 받으며 1시간 넘게 임도를 걷는다. 슬슬, 졸음이란 놈이 밀려든다.
06:30 샘물상회 부근을 지난다. 길에 변화가 생긴다. 땅에는 억새 군락이 모습을 드려내고 하늘에는 일출의 기운이 완연하다. 기운이 난다. 그래도 천황봉까지는 2km 정도를 더 가야 한다. 좌측 위로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이 주홍빛으로 선명하다. 좀더 좋은 시야를 확보하고 일출을 맞으려는 마음에 발이 분주하다. 길게 이어지는 방해꾼 관목이 야속하다. 7시 무렵 전망 좋은 바위 위에 올라선다. 일출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끝모를 평원과 너울거리는 산들의 울렁임이었다. 검게, 회색으로, 붉게, 푸르게... 원근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색감이 최고다. 이 한 뷰 만으로도 오늘 산행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20여분, 사진을 찍으며 재미난 일출놀이를 하고 정상으로 향한다. 같이 또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며 새날을 맞는 기분이 최고다.
07:35, 천황봉 정상에 선다. 운 좋게도 이 너른 산을 독차지 한다. 이곳까지 오르며 인적이 너무 드물어 '차라리 신불산으로 가는 게 나았을 걸' 하며 들던 생각은 사라지고 오히려 조금 늦은 계절에, 그리고 남들이 찾지 않은 곳에서의 '독차지'에 만족한다.
정상에는 차가운 바람이 분다. 사진을 찍는다. 주위를 둘러본다. 모든 게 드러나 거칠 게 없다. 산 아래에서의 일들도 이처럼 분명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 해는 하늘에 자리를 잡았다. 태양빛을 받아 대지가 약동한다. 사위가 선명하다. 파노라마 사진을 찍는다. 지나온 케이블카 승강장과 샘물상회 건물 모습이 아스라하다. 모든 게 내 발 아래에 있다. 일행들이 감동하는 모습을 보니 새벽 어둠을 이겨내며 묵묵히 걸어온 보람이 느껴진다.
< 천황산 ~ 재약산 >
천황산은 오르며 보는 풍광도 좋지만 천황재로 내려서며 굽어보는 모습도 화려하다. 그 중심에는 바위와 먼 산들의 풍광이 있다. 바위가 있는 양지바른 언덕에 비박을 하는 이들의 텐트가 보이고 그 뒤로는 커다란 산들이 존재를 드러낸다. 날이 맑아 시야가 멀리까지 너울지는 산들까지 구분해 낸다. 복 받은 날씨다.
해 뜰 무렵부터 시작된 '사진찍기 놀이'는 지칠 줄 모르게 계속된다. 오늘은 정지된 상태 뿐아니라 걷고 움직이는 자연스런 모습도 많이 담았다. 사진은 찍고,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면 된다. 다만, 그 행위가 가벼워서는 안 된다. 인상적인 순간의 느낌과 함께 스토리를 담는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다.
08:20, 슬슬 배가 고파올 무렵, 천황재에 도착했다. 먼저 내려온 철희가 컵라면 다섯 개를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얼마예요?' 라며 농을 했지만, 그 정성이 고마웠다. 언제부턴가 도팔산 산행의 주식이 되어 버린 창용형 형수표 김밥, 성종형이 준비한 빵과 과일 등이 곁들여진 풍성한 아침 식탁이 차려진다. 아쉬운 건, 차가운 공기였다. 컵라면이 익지 않는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물을 데울 버너를 준비해 올 것 그랬다.
천황재에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등장한다. 시간은 9시를 향해 간다. 주위를 둘러 본다. 샘물상회 갈림에서 천황산에 오르지 않고 천황재로 바로 오는 등로도 있나 보다. 길이 어지럽다. 이제 재약산으로 향한다.
길 주변에 억새평원이 이어진다. 긴 계단이 시작되고 이내 바위지대로 들어선다. 등로가 헷갈린다. 길이 나뉜다. 바위 틈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자 커다란 데크가 나타나고 그 위로 생각보단 작은 재약산 정상이 있었다. 데크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드넓은 사자평 억새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철 지난 억새밭은 누런색으로 변해 있다. 약 보름만 일찍 왔어도 억새 꽃이 바람에 나붓끼는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미도 도착했다. 재약산 정상에 함께 올라 이곳에 다녀갔음을 알리는 사진을 찍었다. 다시 왁자지껄, 길에 활기가 느껴진다.
< 재약산 ~ 죽전마을 >
걷기 10km가 넘어서자 무박산행의 피로가 나타난다. 다시 긴 계단을 내려선다. 표충사로 향하는 갈림을 지난다. 돌길이 계속되다, 너무 온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무렵, 그 유명한 사자평 억새 군락이 시작된다. 길 안내 데크를 따라 억새평원 안으로 들어선다. 철이 지났다 하지만 농익은 과일 마냥 진한 노란색을 띤 억새는 바라보는 눈에 가을이 지나감을 알리는 아쉬움과 함께 완숙함이 주는 여유도 느끼게 해 준다.
그저 걷고만 있는데도 지루하지 않다. 바람이 약하게 분다. 가을 바람소리,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억새는 바람의 풀이다. 억새가 가진 것은 저 자신 하나와 바람 뿐이고 작은 꽃씨 하나하나가 가을 빛을 품고 있다 했다. 늦가을 억새는 날마다 말라가면서 몇 개 남지 않은 꽃씨를 바람에 맡긴다. 꽃씨가 흩어지면 억새는 땅에 쓰러지고, 가을은 다 간 것이다. 언젠가 읽은 김훈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 하라 말한다.
행복하고 여유 있는 억새평언 걷기는 1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억새가 사라지고 죽전마을로 향하는 언덕이 나타난다. 길가에 새의 깃털이 보이더니, 한 생명이 생을 다한 모습을 본다. 어인 연유인지 모르겠다. 이 평온한 평원과 숲에서도 생명의 순환은 이어지나 보다.
길이 험해진다. 숨 가쁘게 올라서더니 이내 내리꽂듯이 거친 비탈이 이어진다. 트랭글 경로의 파란색은 비탈을 의미하나 보다. 1.5km 거리의 내리막은 그간 평탄한 길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영남알프스는 평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결코 만만치 않음을 알리는 듯 했다. 50여분 낙엽이 짙게 깔린 험로를 내려오며 많은 에너지를 쏟았나 보다. 힘에 겹다. 고도 500미터 이상을 내려와서야 펜션들이 보이고 도로가 나타났다. 준비한다고 했는데 막판에 이리 거친 등로가 있을 줄은 몰랐다. 더 깊게 산행 준비를 해야 함을 경고하는 것 같았다.
도로를 따라 걷는다. 길가 안쪽에 있는 감나무 사진을 찍고 일행과 합류했는데, 반가운 손님과 길에서 조우했다. 용욱이다. 얼굴 본 지가 20년은 더 된 것 같다. 반갑고도 마음이 짠했다. 굴곡의 시산한 세월을 겪은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이가 느낄 수 있는 공감하며 응원하며 더 잘 되기를 바라는 감정이 순간 일었다. 그는 이미 신불산을 올라 비박을 하고 다시 천황산에 올라 밤을 날 모양이다. 내가 알던 옛 느낌 그대로다. 바르고 생각 깊던 후배는 내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오늘 산행 최고의 선물이다.
< 에필로그 >
붉은 색 버스가 보이고 건너편에 음식점이 있다. 시원한 맥주의 목넘김이 최고다. 국밥은 산에서의 식은 컵라면에 대한 보상인 냥 뜨겁고 맛났다. 산에서의 일들을 복기하고 다음 산행지를 의논한다. 작은 일들에 행복해 한다.
잠은 최고의 보약이다. 푹 자고 나니 머리도 맑아지고 손목의 통증도 덜하다. 어제 산에서의 기억들 중 아쉬웠던 부분은 사라지고 즐거웠던 일들만 재편집된 느낌이다. 마약 같이, 등산의 매력은 이런 것이리라.
커피 한 잔 내려 앞에 두고 사진을 바라보며 어제의 산행을 복기해 본다.
능동산, 천황산, 재약산 세 개의 산에 오른 것, 천황봉 가는 길의 일출, 사자평원의 억새가 특히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반면, 능동산 지나 1시간 넘게 이어지는 새벽 긴 임도길, 사자평 끝에서 죽전마을 까지의 길고 가파른 비탈, 차거운 음식 등이 아쉬운 것들로 남는다. 세월은 기억을 연하게 만들어 다시 떠오르게 할 게다. 부디 행복한 것들만 되새겨졌으면 좋겠다.
내년 가을에는 조금 더 이른 시기에 배내고개-신불산-영축산-통도사로 이어지는 또 다른 영남알프스 산행을 꿈꿔 본다. 먼 길 함께 해 준 형, 동생, 친구이자 산벗들에게 감사에 마음을 전한다.
수 고 하 셨 습 니 다.^^
첫댓글 어찌도 이리 생생하게 복기할 수 있는 지 그저 부러울 따름이네. 참 든든한 대장을 뒀네 그려. 그래서 따라 다니는 난 더 게을러지고 ㅋㅋㅋ. 잘 읽고 간다~~
또 다른 먼 산을 그려 봅니다.
여유있게 산행하는 모습, 보기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