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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운다원 원문보기 글쓴이: 자운
[도움글] 우리나라 유교와 불교의 특수성 한국 불교는 현세 구복적이고 호국적인 성향이 남달리 강하며, 한국 유교는 삼강오륜의 덕목 중에서도 충, 효, 의가 강조되었다. 이는 우리 조상이 가족 질서에 대한 헌신과 국가 수호, 그리고 사회 정의 실현에 특이한 애정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비타협적이고 배타적인 경향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중국의 유학이 인(仁)을 중심 개념으로 설정하고 사회적 관용을 존중하는 것과 대비되는 |
1. 선사 시대의 전개 ☞인류가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2]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명의 탄생
3) 세계 4대 문명의 탄생 : 청동기 시대에 발생
☞ 인류의 발전 단계에 따른 생활 변화는 어떠하였는가? ▲ 원시 인류의 진화 ▲ 인류의 진화 요인 ▲ 빙하기 ▲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
(1) 선사 시대의 세계
[1]인류의 기원
1) 인류의 출현 : 약 300~350만년 전
① 최초의 인류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② 지역 : 아프리카에서 발견
③ 특징 : 두뇌 용적이 현생 인류의 1/3 정도, 직립 보행, 조잡한 도구 사용
2) 구석기 문화의 시작
① 전기의 인류
ㄱ. 호모 하빌리스 : 손재주 좋은 사람
ㄴ. 호모 에렉투스(곧선사람, 원인) : 불의 사용, 사냥과 채집, 직립 보행
② 중기의 인류 : 호모 사피엔스(슬기사람, 고인) - 석기 제작, 시체 매장
③ 후기의 인류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슬기사람, 신인)
ㄱ. 특징 : 오늘날의 인류와 거의 같음, 현생 인류의 직접 조상으로 추정
ㄴ. 크로마뇽인 : 프랑스 남부와 에스파냐 북부 일대에 벽화를 남김
1) 중석기 시대(BC 1만년 전후) : 잔석기, 이음도구, 활 사용
2) 신석기 문화 : 서기전 1만 년경
① 특징 : 간석기와 토기 사용, 농경과 목축의 시작, 정착 생활과 촌락 공동체의 형성
② 신석기 혁명 : 서기전 8천년 경에 시작
ㄱ. 지역 : 중동 지방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처음 시작(채도)
ㄴ. 의의 : 자연 채집 경제에서 생산 경제로 전환하여 생활 양식이 크게 변화됨
① 시기 : 서기전 3천년 경
② 4대 문명 :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황하, 인더스 문명
③ 특징 : 농경 발달, 도시 출현, 청동기 사용, 계급 발생, 문자 사용, 국가 형성
-오스트랄로피테쿠스
: 남방의 원숭이
-호모 하빌리스
: 손재주 좋은 사람
-호모 에렉투스
: 곧선 사람(원인)
-호모 사피엔스
: 슬기 사람(고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슬기 슬기 사람(신인)
인류의 진화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직립 보행이었다. 인류는 직립 보행으로 자유로워진 두 손을 이용하여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두뇌 용량이 커져 지능이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 소통을 하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북반구의 많은 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있었던 시기로, 해수면이 낮아져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문자 사용의 여부이다. 선사시대는 문자를 사용하지 못했던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를 말하고, 역사시대는 문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 이후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철기 시대부터 문자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Ⅱ. 선사 문화와 국가의 형성
1. 선사 문화의 전개
[1] 민족의 기원
1) 자연 환경
① 만주 일대와 한반도 : 약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
② 빙하기 : 해수면 하강으로 중국, 한반도, 일본 연결
③ 현재의 해안선 형성 : 기원 전후부터 해면이
낮아져 현재의 해안선 형성(빙하기와 해빙기 반복)
2) 한민족의 형성
① 중국 요령성, 길림성을 포함하는 만주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 아시아에 넓게 분포
② 한민족의 형성 :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에 걸쳐서
한민족 형성
③ 계통 : 황인종, 알타이어계, 동방 문화권 형성
☞구석기인은 우리의 조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
◈ 우리 나라의 구석기인
▲ 호모 에렉투스(곧선 사람) : 덕천 승리산 동굴. 단양 상시 동굴의
사람 화석
▲ 호모 사피엔스(슬기 사람) : 승리산 동굴. 상시 동굴의 머리뼈와 어금니 2개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슬기 사람) : 승리산 동굴, 상시 동굴의 사람 화석과
청원 두루봉 동굴, 평양 만달리 등의 머리뼈 화석 등
[2]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1) 시기 : 약 70만 년 전
2) 시대 구분 :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구분
① 전기 : 큰 석기 한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
② 중기 : 큰 몸돌에서 떼어낸 격지들로 각각의 석기 제작
③ 후기 : 쐐기를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돌날 격지
제작
3) 유적지 :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등 전국 각지에 분포
4) 유물 : 석기, 사람과 동물의 뼈 화석, 동물의 뼈로 만든
도구
◈ 우리 나라의 주요 구석기 유적 | ||
유적지 |
시기 |
특징 |
공주 석장리 |
전기~후기 |
12개 문화층으로 구성, 고래와 새, 멧돼지 조각품 |
단양 금굴 |
전기 |
70만년 전의 유적 |
상원 검은모루 |
40~60만년전 |
전기 구석기 |
청원 두루봉 |
전기~중기 |
구석기인 인골 출토 |
웅기 굴포리 |
중기~후기 |
|
제천 점말 동굴 |
중기 |
사람 얼굴을 새긴 코뿔소뼈 출토 |
단양 수양개 |
중기~후기 |
석기 제작소 발견 |
연천 전곡리 |
30만년전 |
주먹도끼 등 다수의 석기 발굴 |
[3]구석기 시대의 생활
1) 유물
① 뗀석기
ㄱ. 사냥 도구 :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
ㄴ. 조리 도구 : 긁개, 밀개, 자르개
② 뼈도구
2) 경제 : 수렵, 어로 및 채집 경제 - 뗀석기와 골각기 사용
3) 주거 생활 : 동굴이나 강가에 지은 막집(평남 상원 검은모루, 경기도 연천 전곡리,
공주 석장리)
4) 사회 : 가족 단위의 무리 이동 생활(평등 사회)
5) 예술 : 사냥의 대상이 되는 동물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
☞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그 시대의 생활 모습은?
6)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① 중석기 시대 :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로 넘어가는 전환기
(대개 B.C 10,000∼B.C 8,000경)
② 기후의 온난화→새로운 환경에 적응
③ 동식물의 번성 :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사용, 식물채집과 물고기잡이의
증가
④ 유물 : 잔석기, 이음 도구, 활 등
④ 생활 : 사냥, 고기잡이, 식물의 채취
[도움글] 중석기 시대 |
Ⅱ. 선사 문화와 국가의 형성
1. 선사 문화의 전개
(2) 우리나라의 선사 시대-2
[4]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1) 시기 : B.C. 8000년경부터 시작
2) 간석기
3) 토기
① 이른 민무늬 토기,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문 토기 : 대표 유적지(제주도 한경 고산리, 강원 고성 문암리,
강원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조개더미)
② 빗살무늬 토기 : 신석기의 대표적인 토기, 서울 암사동, 평양 남경, 김해 수가리 등 바닷가나 강가
4) 유적지 : 강가나 해안가에 위치
[5] 신석기 시대의 생활
1) 경 제
① 농경 생활 시작(신석기 혁명) : 조, 피, 수수 등
ㄱ. 유적 :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 유적의 탄화된 좁쌀,
ㄴ. 농기구 :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나무로 만든
농기구 등
② 수렵·어로 생활 : 통나무배,그물, 작살, 뼈낚시,
돌화살촉, 돌창 이용(조개더미)
2) 원시 수공업 발생 : 의복, 그물 제작-가락바퀴, 뼈바늘
출토
3) 주거지 : 강가나 해안가에 움집에서 거주
① 형태와 구조 : 원형이나 모가 둥근 방형, 중앙에
화덕 설치, 저장 구덩, 남쪽의 출입문
② 규모 : 대개 4∼5명 정도 거주
4) 사회 : 혈연 집단인 씨족을 기본으로 족외혼을 통해
부족 사회의 형성, 평등 사회
5) 신앙 :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영혼 숭배,
조상 숭배 등 - 농경과 밀접
6) 예술품 : 흙으로 만든 얼굴, 토제 인형, 조개껍데기 가면,
동물 조각물,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장신구, 조가비로 만든 치레 걸이 등 - 주술적 의미
☞ 신석기 시대를 특징 짓는 유물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당시의 생활 모습은?
[심화 과정] 신석기 시대의 변화
Ⅱ. 선사 문화와 국가의 형성
2. 국가의 형성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1] 청동기의 보급
1) 전개
①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 : B.C. 2000세기경
중국 요령, 러시아 아무르 강, 연해주에서 유래
- 신석기 말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500년 간 공존
하다가 청동기 시대로 넘어감
② 청동기 시작 : B.C. 2000년경~B.C.1500년경
2) 사회적 변화 : 생산 경제의 발전, 전문 장인
출현, 사유 재산제와 계급 발생
3) 유적·유물
① 유적 : 요령성, 길림성 지방을 포함하는 만주지역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도 같은 지역에서 출토) - 같은 문화권 반증
◈ 주요 청동기 유적
▲ 북한 지역 : 회령 오동리, 나진 초도, 강계
공귀리, 의주 미송리, 평양시 사동구역 금탄리
와 남경 등
▲ 남한지역 : 여주 흔암리, 파주 덕은리, 부여
송국리, 제천 황석리, 순천 대곡리 등
② 유물 : 간석기, 청동 제품, 토기 등
ㄱ. 간석기 :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 농기구
ㄴ. 청동 제품 :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화살촉 등
ㄷ. 토기 :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등
③ 무덤 형태 : 고인돌, 돌무지 무덤, 돌널무덤 등
☞ 청동기는 어느 지역으로부터 전해졌는가?
[2] 철기의 사용
1) 시기 : B.C. 5세기경부터 시작
2) 보급의 영향
① 철제 농기구 사용 : 경제 기반 확대
② 철제 무기, 도구 사용 : 청동기는 의기화(儀器化)
③ 명도전, 오수전, 반량전 사용 : 중국과의 교역 관계 형성
④ 문자(한자) 사용 :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의 붓 출토
⑤ 한국 청동기 문화의 독자적 발전 : 거푸집 발견
ㄱ. 비파형 동검→세형 동검,
ㄴ. 거친무늬 거울→잔무늬 거울
⑥ 토기 : 검은 간 토기, 덧띠 토기 등
◈ 철의 생산 |
[3] 청동기·철기 시대의 생활
1) 경제 생활
① 농기구의 발달 : 간석기의 다양화
→ 돌도끼, 홈자귀, 돌괭이, 반달 돌칼 등
② 농경의 발달 : 생산력의 증대(벼, 보리, 콩),
사냥과 고기잡이 비중 감소, 가축 사육
2) 주거 생활
① 위치 : 배산 임수의 지역에 취락 형성
② 형태 : 장방향의 움집, 점차 지상 가옥으로 변화
③ 구조 : 화덕이 한쪽 벽으로 이동, 별도의 저장 구덩,
주춧돌 이용
④ 창고, 공동 작업장, 공공 의식의 장소 설치
⑤ 크기의 변화 : 4∼8명 정도의 가족용 등 다양
3) 취락형태 : 농경의 발달, 인구의 증가로 정착생활
규모가 점차 확대, 넓은 지역에 많은
수가 밀집되어 정착
4) 무덤 형태
① 청동기시대 : 고인돌(계급 발생),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② 철기시대 : 널무덤, 독무덤
5) 사회의 변화
① 가정의 변화 : 부부 중심(일부 일처제), 부계 중심의
사회, 남녀간의 성적 차별화
② 계급 사회의 형성 : 생산 경제의 발달과 금속 무기 사용
ㄱ. 생산 증가 → 잉여 생산물 →사유재산→ 빈부의 격차→ 계급의 발생
ㄴ. 금속 무기 사용 → 정복 활동 →지배자와 피지배자→ 계급 발생
③ 계급 사회의 발생 : 고인돌 축조
ㄱ. 족장(군장)의 출현 : 권력과 경제력 장악
ㄴ. 활발한 정복 활동 : 지배와 피지배 관계 심화
ㄷ. 선민 사상의 등장 : 우세 부족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 하여 약한 부족 정복,
공납 수취
[도움글] 거석 문화와 고인돌 고인돌과 선돌(입석)은 거석을 이용한 구조물로 거석 문화의 상징이다. 크게 보았을 때 이집트나 마야의 피라미드, 중동 지방의 각종 석조물, 프랑스 서북부 대서양 연안 지역의 거석렬(거석렬)과 영국의 스톤헨지 등이 모두 이 거석 문화의 산물이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데, 형태에 따라 북방식(탁자식). 남방식(바둑판식), 개석식으로 구분한다. 유네스코 세계 위원회는 2000년 12월에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지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
[4] 청동기·철기 시대의 예술
1) 성 격 : 종교와 정치적 요구와 밀착
2) 돌널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제 의기(말, 호랑이, 사슴,
사람 손 모양을 사실적으로 조각)와 짐승,
사람 모양의 토우→ 의식과 관련
3) 바위 그림 : 풍요, 풍성한 수확 염원
① 울주 반구대 : 거북, 사슴, 호랑이, 새, 작살을 맞은 고래,
덫이나 울타리에 갇힌 동물
② 고령 양전동 : 동심원, 십자형, 삼각형 등 기하학적 무늬
(동심원은 태양 상징→생산과 풍요)
☞ 청동기의 보급은 선사 시대의 사회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
☞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어떠한 사회 변화가 일어났는가 ?
2. 국가의 형성
(1)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2
학습목표
1. 고조선의 역사적 의의를 파악한다.
2. 위만 왕조의 성립이 가져온 고조선 사회의 변화를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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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군과 고조선
1) 배경 :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 출현
2) 건국 : 단군 왕검이 B.C. 2333년 건국(삼국 유사)
2) 고조선의 세력 범위 : 요령 지방에서 한반도 북부
- 비파형 청동검과 미송리식 토기의 출토 범위와 일치
3) 건국 신화에 나타난 시대상
① 청동기 시대 문화를 배경으로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사실을 반영
② 선민 사상 : 태백산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
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우월성 강조
③ 농경 사회 : 풍백, 우사, 운사, 쑥, 마늘
④ 새로운 사회 질서의 성립 : 홍익인간 이념
⑤ 부족 통합 : 환웅족과 곰족의 결합
⑥ 제정 일치 : 단군(제사장), 왕검(정치적 군장)
⑦ 기타 : 족외혼, 계급 분화
4) 고조선의 발전
① 독자 문화 이룩 :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 중심
② B.C. 3 세기경 강력한 왕 등장(부왕, 준왕)
→왕위 세습, 관료 조직 마련(상, 대부, 장군),
요서 지방을 경계로 전국 시대 연과 대립
◈ 단군 이야기
◈ 단군신화의 이해
◈ 고조선에 대한 잘못된 이해
◈ 기자 조선
☞ 단군 이야기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2] 위만의 집권
1) 성립 : 진·한 교체기에 유이민 이동
→위만의 입국-서쪽 변경 수비
2) 집권 : 준왕을 축출한 후 위만 집권(B.C 194)
3) 발전
① 철기 문화의 본격 수용 :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한 수공업 융성, 상업과 무역도 발달
② 중앙 정치 조직 정비
③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영토 확장
④ 한(漢)과 예(濊), 진(辰) 사이의 중계 무역으로 이득 독점→ 한과 대립
4) 멸망 : 한 무제의 침입→고조선 멸망(B.C.108)→일부 지역에 한 군현 설치
→ 토착민의 반발→ 고구려에 의해 소멸
☞ 고조선의 건국은 어떠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가?
☞ 위만이 우리 민족으로 파악되는 이유를 알아보자.
☞ 위만 왕조의 성립은 고조선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도움글] 위만 조선의 의미 위만은 고조선으로 들어올 때에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왕이 된 뒤에도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았다. 따라서 위만의 고조선은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3] 고조선의 사회
1) 8조법 : 반고의「한서」지리지에 3조목 전함.
- 相殺以當償殺
- 相傷以穀償
-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爲婢欲自贖者入五十萬
婦人貞信不淫....(추측 조항)
▲ 노동력과 사유 재산의 중시와 보호
▲ 권력과 경제력의 차이 발생
▲ 재산의 사유화 (형벌과 노비의 발생)
……(고조선에서는)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를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여 결혼을 하고자 해도 짝을 구할 수 없다. 이러해서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절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술잔 같은 그릇에 음식을 먹는다. <한서 지리지> |
2) 사회 상태 : 인명 존중, 노동력 중시, 계급 사회, 사유 재산제, 가부장 중심의 사회
3) 성격 : 부여의 법률, 함무라비 법전과 같이 만민법, 복수법의 성격을 지님
4) 한 군현 설치 이후 : 법 조항(60여 조) 증가→ 엄한 율령 실시, 풍속 각박
2. 국가의 형성
(2) 여러 나라의 성장
학습목표
1. 연맹 왕국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2. 여러 나라의 정치와 사회, 풍습을 비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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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 여
1) 위치 :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
2) 정치
① 발전 : 1세기 초에 왕호 사용, 중국과 외교 관계 수립
② 쇠퇴 : 3세기 말 선비족의 침입으로 쇠퇴,
고구려에 편입(494)
③ 5부족 연맹체
ㄱ. 제가(마가, 우가, 저가, 구가) : 사출도를 독자적
으로 다스림
ㄴ. 왕권 미약 : 제가들이 왕을 추대, 수해, 한해를
입으면 왕에게 책임을 물음
3) 경제 : 반농 반목(특산물-말, 주옥, 모피 등)
4) 법률 : 4조목
5) 풍속 : 1책 12법, 순장제, 영고(12월), 점복(우제점법)
6) 역사적 의의 :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세력으로 계승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어떤 책인가?
☞ 부여에서 중앙집권체제의 모습과 연맹왕국으로서의 한계성을 보이는 예를 들어보자.
[2] 고구려
1) 성립(B.C 37) : 부여 계통의 주몽이 동가강 유역의 졸본에서 건국(삼국사기)
2) 발전 : 통구로 옮기면서 성장, 요동 진출, 옥저 정복(태조왕)
3) 정치 : 5부족 연맹체(계루부, 절노부, 소노부, 관노부, 순노부),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도 사자, 조의, 선인을 거느림.
4) 제가 회의 : 중대한 범죄자 처리
5) 경제 : 토지 척박(식량 부족), 약탈 경제(부경)
6) 풍속 : 서옥제, 점복(占卜), 조상신 숭배(주몽,유화)
, 동맹(10월)
☞ 고구려의 국내성 천도는 어떠한 목적이 있는가?
[3] 옥저와 동예 :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음, 연맹왕국을 형성하지 못함
1) 옥저
① 위치 : 함흥 평야
② 정치 : 군장 통치(읍군, 삼로)
③ 경제 :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 풍부, 토지 비옥
④ 풍속 : 민며느리제, 가족 공동묘(골장제)
2) 동예
① 위치 :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 지방(영흥, 덕원, 안변 등지)
② 정치 : 군장(왕이 없음)
③ 경제 : 농경과 어로, 방직기술 , 특산물(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
④ 풍속 : 책화(責禍), 족외혼, 무천(10월, 제천 행사)
3) 한계 : 선진 문화 수용이 늦었고 군장 사회에서 더 큰 통합된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함.
☞ 옥저와 동예가 크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
[4] 삼 한(한)
1) 성립 : 청동기 시대인 진(辰)의 토착민과
고조선의 유이민의 결합(철기 문화)
① 마한 : 경기, 충청, 전라도 일대 54 소국,
목지국의 왕이 삼한의 총 연맹장
→ 백제로 발전
② 진한 : 경상도 동부(낙동강 동쪽) 12개국
→ 신라로 발전
③ 변한 : 경상도 서부(낙동강 서쪽) 12개국
→ 가야로 발전
2) 정치·사회 :
ㄱ. 새로운 정치적 군장 등장 : 신지, 견지, 읍차, 부례 등
ㄴ. 목지국의 지배자 :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 삼한 전체의 주도 세력 형성
ㄴ. 소도 : 제사장인 천군이 지배하는 신성 구역(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 주관)- 제정 분리
[도움글] 마한 목지국 마한 목지국은 처음에 성환 · 직산 · 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백제의 성장과 지배 영역의 확대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 익산 지역을 거쳐 마지막에 나부 부근(오늘날의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복암리)에 자리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을 칭하던 국가 단계의 목지국이 언제 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근초고왕이 마한을 병합하는 4세기 후반까지는 존속하였고, 그 이후에는 백제의 정치 세력 하에 있는 토착 세력으로 자리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
3) 경제
①농경발달 : 철제 농기구 사용, 벼농사 성행(저수지 축조 : 김제 벽골제,밀양 수산제,제천 의림지)
② 철 생산(변한) : 낙랑·왜 등지에 수출,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
4) 풍속 : 반움집·귀틀집에서 주거, 두레조직, 제천행사(5월 수릿날, 10월 계절제)
5) 변천 : 철기문화의 발전→백제국, 가야국, 사로국이 성장 → 중앙집권 국가의 성립기반 마련
◈ 제천 행사의 사회적 기능
① 부족민의 단결과 결속 강화
② 계급 사회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해소
③ 집단 내부의 여러 문제를 토의, 검토하여 조정
④ 농경과 밀접한 관련을 가짐
☞ 삼한에서 제정이 분리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은 ?
☞ 초기 국가의 풍속을 서로 비교해 보자.
☞ 초기 여러 나라에서 행하던 제천 행사의 성격과 그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부여 계보
◇◆◇◆◇◆ 북부여 ◇◆◇◆◇◆
왕대
재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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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45
25
49
34
49
2해모수
모수리
고해사
고(해)우루
고두막
고무서B.C.239
194
169
120
108
59
◇◆◇◆◇◆ 동부여 ◇◆◇◆◇◆
왕대
재위년
이름
서력
1
2
3
해부루
금와
대소
해모수 ═╤═ 유화부인 │
소서노 ═╤═ 동명성왕 ═╤═ 예씨부인
│ │
┌┴┐ 유리명왕
비류 온조
1.동명성왕(재위BC37년~BC19년) :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이다.
휘는 주몽, 추모, 상해, 추몽, 중모, 도모 등이 있으며 동명왕, 동명제, 동명성제라고도 한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원래 성은 해이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2.유리왕(재위BC19~AD18) : 휘는 유리, 유류, 주류이고 유리명왕이라고도 하며 동명왕의 맏아들이다.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동명성왕이 남긴 징표 부러진 칼 조각을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BC 17년,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
BC 9년,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BC 6년,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 때문에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3년, 도읍을 홀본(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9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왕자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여 돌려보냈다.
13년, 부여가 침공해 오자 무휼은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후 군사 2만으로 서쪽의 양맥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유리명왕 ═╤═ 송양왕의 딸
│
┌──┬────────┼─────┬──┬──┐
도절 해명 갈사국왕녀╤대무신왕╤원비 여진 민중왕 재사╤부여태후
│ │ ┌───┼───┐
호동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무신왕(재위18년~44년) :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휘는 무휼이고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린다.
14년, 태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한다.
20년,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22년, 부여 정벌을 감행,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하였다.
26년, 개마국을 쳐서 복속시켰고 그 후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 송옥구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를 맡겨 내치를 다졌다.
28년,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저들이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32년,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하였다.
(삼국사기-호동왕자설화 :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서 정벌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이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정벌하였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으나,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원비의 참소와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자살한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4.민중왕(재위44~48) : 이름은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모본왕)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44년,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47년,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48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이라 하였다.
5.모본왕(재위48~53) : 대무신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해우, 해애루이다.
49년,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모본왕은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51년,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53년, 결국 신하에게 피살되었다.
6.태조왕(재위53년~146년) : 유리왕의 손자,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 휘는 궁이고 국조왕이라고도 불린다.
모본왕이 죽은 후 추대를 받은 재사가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거절하여 아들인 궁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55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았다.
56년,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하였으며, 68년에는 갈사국을 병합하였다.
70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파견하여 조나를 병합하였고, 72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병합한다.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태조왕은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고구려를 종래의 부족 국가적 형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끌어 올렸다.
또한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이후 고구려 왕 세차의 확실한 연대가 시작됨으로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된다.
98년에는 책성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 114년에는 남해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 예맥과 더불어 현도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자 태조왕은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는데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를 살해하였다.
그 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와 한나라가 협공을 펼쳐 크게 패하였고,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1년부터 태조왕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다.
122년,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146년, 동생인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
태조왕은 119세 나이로 서거하여 한국 군주 중 가장 장수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군림한(93년) 왕이다.
7.차대왕(재위146∼165) : 태조왕의 동생으로 휘는 수성이다.
태조왕 치세 후반부터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태조왕을 대신하여 국정과 군사를 통괄하였다.
146년,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태조왕이 먼저 선위하고 물러남으로 차대왕은 그해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차대왕은 사람됨이 용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고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147년,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국가의 주요 요직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였다.
148년, 태조왕의 태자 고막근을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결국 폭정으로 인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
8.신대왕(재위165년~179년) : 재사의 아들,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으로 휘는 백고, 백구이다.
둘째 형인 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산골에 숨어 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뒤 왕으로 추대받아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66년, 좌, 우보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패자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대왕의 태자 추안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 한나라 현도군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172년,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여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신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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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국천왕═우씨왕후 발기 산상왕 계수
9.고국천왕(재위179~197)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17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9년 신대왕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 있었다고 한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자 왕이 직접 출병하여 대승하였다.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풀고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았다.
194년,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진대법(3~7월에 곡식을 대여하여 10월에 환납하는 것)을 실시하였는데 이로써 빈농을 구제하고 귀족세력의 확대를 막아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10.산상왕(재위197년~227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 이이모이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이후 우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으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발기가 요동 태수에게 군사 3만명을 얻어 고구려에 쳐들어왔고 왕은 동생 계수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발기는 패하자 자살하였다.
198년, 환도성을 쌓았고 207년 서울을 환도로 옮겼다.
208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고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다.
이후 후녀는 아들 교체를 낳아 소후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하였다.
우씨왕후 ══ 산상왕 ═╤═ 후녀(소후)
│
동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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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나부인 ═ 중천왕 ╤ 연씨왕후 예물 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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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왕 달가 일우 소발 공주
11.동천왕(재위227∼248) : 아명은 교체(교제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의미), 휘는 우위거, 위궁(태어나면서부터 사물을 본 것이 태조왕 궁과 닮아서 붙여짐)이며 동양왕이라고도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213년, 태자로 책봉되어 22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때는 중국의 위, 오, 촉 3국의 대립시기로 동천왕은 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236년, 오나라 손권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왔으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보냈다.
238년,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을 토벌할 때 동천왕은 군사 1000여명을 보내어 위를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구려는 위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242년, 서안평, 구련성 지방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유주자사 관구검의 반격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북옥저로 피란하는 등 정복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247년,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평양성으로 일시 천도했다.
24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245년 신라와의 전쟁, 248년 신라와의 화친의 사실 여부는 의심받고 있다)
248년, 동천왕이 서거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12.중천왕(재위248년~270년) : 동천왕의 맏아들로 휘는 연불, 중양왕이라고도 한다.
243년, 태자가 되었고, 248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250년, 국상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다.
251년,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왕이 분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하는 처벌을 하였다.
254년,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으며, 255년에 왕자 약로를 태자로 삼았다.
259년, 위나라가 쳐들어 오자 왕이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13.서천왕(재위270년~292년) : 중천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약로, 약우이고 서양왕이라고도 한다
255년, 태자가 되었고 270년에 즉위하였다.
280년, 숙신이 쳐들어오자 동생 달가를 보내 이를 격퇴하게 했는데 달가는 단로성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부락 예닐곱 곳을 복속시켰다.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286년,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획책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입조하지 않자 서천왕은 이들을 재상으로 삼는다고 속여 입조한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서천왕은 276년, 288년 두 차례에 걸쳐 신성으로 순행하였는데 이는 신성이 서쪽 변경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288년의 순행은 3월에서 11월에 걸친 장기간의 순행이었다.
서천왕 ═╤═ 우씨왕후(우수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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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상왕 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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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천왕
14.봉상왕(재위292년~300년) : 이름은 상부, 삽시루이고 치갈왕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292년, 왕위에 올랐는데 숙부인 달가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음모하여 살해하였다.
293년, 동생 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다.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외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때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도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 또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여 백성들이 흩어졌고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15.미천왕(재위300년~331년) : 서천왕의 손자,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고 이름은 을불, 을불리, 우불로 호양왕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전전하였다.
300년,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초부터 중국 군현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며 국토확장에 전력하였다.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군 8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으며 낙랑군,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성공하였다.
313년, 낙랑군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았고 이로써 낙랑군은 멸망하였다.
위와같이 미천왕때에는 서안평을 확보,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정복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으며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여 경제적인 자원도 풍부히 얻게 되었다. 또한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고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317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요동지역을 지배해 오던 진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고구려는 영토 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했다.
318년, 진의 평주 자사 최비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319년,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다시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미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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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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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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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16.고국원양(재위 331년~371년) : 이름은 사유, 쇠이고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 태자로 책봉되어 331년에 즉위한 뒤 평양성을 증축하였으며 국내성을 수리, 신성을 축성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42년, 4만 대군을 이끈 모용 황이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고구려군은 남쪽길에서 크게 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은 피신하였으며 모후 주씨와 왕비는 포로로 납치되었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길로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험난한 남쪽길로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폈는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었다. )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5만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연나라에 파견하여 많은 조공을 바쳐 미천왕의 시체와 왕비를 찾아왔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55년, 다시 조공하여 왕모 주씨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369년, 고국원왕은 2만 군대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371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고 그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왔는데 고국원양은 이를 막다가 유시에 맞아 사망하였다.
17.소수림왕(재위371년~384년) : 이름은 구부이고 소해주류왕, 해미류왕이라고도 한다.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 고국원양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소수림왕은 새로운 체제로 국가를 정비해 나갔다.
372년, 전진 왕이 보낸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곧 불교는 호국불교, 현세구복적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불교를 도입한 이유는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한 것과 호국사상의 필요성 때문이다)
또한 유교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궁술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전이나, 사기, 한서 등의 사서가 읽혀졌고 옥편, 자통과 같은 사전류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373년,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하여 유학적 통치 이념 아래 고대 율령국가 체제를 구축하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돋음 할수 있었고 이러한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5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374년, 아도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기거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
375~377년에 걸쳐서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고 3만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겼다.
18.고국양왕(재위384년~392년) : 고국원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이련, 어지지이고 국양왕이라고도 불린다.
385년, 군사 4만 명으로 후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 및 현도를 점령하였다가 다시 빼앗겼다.
백제와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는데 고국양왕은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데 힘썼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389년과 390년에는 백제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392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여 국가체제 확립에도 이바지하였다
19.광개토대왕(재위392년~413년) : 이름은 담덕, 안이고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이 전해지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존시 칭호는 영락대왕이였는데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였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으로 알려져 있다.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392년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하였다.
그 해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 성을 함락하였고,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거란을 공격하여 500여 명을 노획하고 거란에 노획되었던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아왔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 395년에는 패수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 성을 쌓았다.
또한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395년, 비려(거란일파)를 공격하여 염수 일대의 3개 부락과 600~700개 영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400년, 백제,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자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왕은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같은해,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2년, 광개토왕은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보복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07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6개 성을 점령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408년,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우호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09년,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410년,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위의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다시 요약하자면, 서쪽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북연과 친선관계를 수립하였고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왜를 섬멸하였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읍루를 정벌하였고, 동예를 완전히 병합하는 등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이 남겨졌다.
20.장수왕(재위413년~491년) : 휘는 거련이고 100년 가까이 살았었다고 해서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바쳐졌다.
모습이 괴걸하고 지기가 호매한 대장부로 79년 동안 재위하였고 9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409년, 왕태자에 책봉,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해 동진과 국교를 맺었다.
427년, 내부적으로 왕권을 위상을 높여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외부적으로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내부를 안정시키며 국제 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은 세력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들 나라의 패권 다툼 중에서 북위와 북연의 싸움이 고구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의 진, 송, 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북연을 견제하였다.
430년, 북연왕 풍발이 병사하자 왕위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풍발의 아우 풍홍이 조카들을 제거하고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위 다툼은 조정을 동요케 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고, 북위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였다.
435년, 북위의 기세로 북연은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에 풍홍은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후에 자신이 의탁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436년, 북위는 대군을 동원하여 북연을 공격하였고, 풍홍은 급히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으며 후에 북위는 풍홍을 자신들에게 압송할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환영연에서 풍홍이 고구려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여 장수왕은 분노하였고 풍홍도 장수왕에게 신하 대우를 받자 이에 분노하였다.
438년,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는데 이에 풍홍은 분개하여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송의 유유는 고구려에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결국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은 참살당하였으나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으로 압송시켰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440년, 신라가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여 변방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고구려가 군사적 대응을 검토하자 다급해진 신라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사죄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미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들 동맹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454년, 장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는 백제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약조에 따라 연합군을 형성했고, 고구려는 나제연합군에 밀려 한동안 양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468년,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는데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개로왕을 충돌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고 백제의 경제적 혼란을 일으켰다.
475년, 장수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수도 한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죽여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고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연맹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장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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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다 승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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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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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왕 안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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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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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왕
21.문자왕(재위492년~519년) : 장수왕의 손자, 고추대가 조다의 아들이며 휘는 나운이고 문자명왕, 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 문자명왕 때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하였다고 한다
492년,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가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 하였다.
494년, 부여가 항복하여 고구려에 완전 복속되었고, 신라군과 살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3천 명의 구원군을 보내 공격해서 후퇴하였다.
495년,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패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507년, 장수 고노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 원산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22.안장왕(재위519년~531년) : 휘는 흥안이고, 문자왕의 맏아들이다.
498년, 태자가 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523년,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529년, 오곡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23.안원왕(재위531년~545년) : 휘는 보연이고 곡향강상왕, 향강상왕, 안강상왕이라고도 부른다.
안장왕의 동생으로 형의 사랑을 받았는데 후사 없이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534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동위와 양과의 양면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안정을 유지하였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540년,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물리쳤다.
당시 홍수와 지진, 전염병, 가뭄, 황충, 기근, 태풍 등의 재난이 계속되어 어려웠다
542년, 음력 3월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고 음력 4월에는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왕의 후사를 둘러싼 세력다툼으로 사회가 동요되는 가운데 추군과 세군의 무력충돌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24.양원왕(재위545년~559년) : 휘는 평성으로 안원왕의 태자이지만 안원왕 사후에 바로 즉위하지 못했다.
안원왕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서로 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자 다툼이 있었고 무력 충돌로 번져서 평성 태자 쪽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국상이였던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으며 100여 곡의 악곡을 지었다.
547년,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548년,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주진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실패하였다.
550년, 백제가 쳐들와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틈을 노린 신라군에게 고구려 두 성을 함락되었다.
551년, 돌궐군이 쳐들어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싸우게 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또한 신라가 다시 쳐들어와서 1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552년, 장안성을 쌓았다.
554년,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25.평원왕(재위559년~590년) : 휘는 양성이고 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
557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즉위하였다.
당시 수나라가 점차 고구려를 압박해왔고,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져서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평원왕은 중국의 진, 수, 북제, 후주 등 여러 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589년, 평원왕은 수나라가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평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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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영류왕 태양 평강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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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26.영양왕(재위590년~618년) : 휘는 원, 대원이고 평양왕이라고도 한다.
565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90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미리 알아낸 보급선을 격파하여 군량 보급을 끊었고 때마침 장마가 닥쳐 수의 30만 대군은 결국 대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고 만다.
600년,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수는 그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 무렵 백제가 자신들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수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진노하여 곧바로 백제를 침공했다.
603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고 이때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는데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607년,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석두성을 공격하여 포로 3천 명을 사로잡아 끌고갔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하여 군사 8천명을 포로로 잡았고 우명산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610년, 일본에 승려 담징, 법정을 보내 종이, 먹의 기술을 전하였고 담징은 일본 호류사 금당내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무렵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양제는 돌궐에 압박을 가하여 돌궐 왕이 장안으로 입조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에 조공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밖에 남지 않았다. 수 양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612년, 살수대첩 : 수나라 양제가 직접 113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이때 명장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활약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613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재차 침공하였으나 요동성과 신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본국에서 반란을 벌어져서 급히 퇴각하였다.
614년, 수 양제는 전국의 군사를 소집하여 다시 고구려 침공을 하려했으나 수나라 군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간파한 영양왕은 화친을 제의했고, 수 양제는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수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몇 번이나 계획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모두 실행되지 못했으며 무리한 잦은 대외 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수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27.영류왕(재위618년~642년) : 평원왕의 차남, 영양왕의 이복동생이고, 휘는 건무, 성이다.
618년, 영양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몰락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나라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벌을 제거하는 등 통일 작업에 몰두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영류왕의 온건주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친당 정책으로 이어졌고 두 나라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가졌는데 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였다.
626년, 당 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영토 확장 작업을 가속하였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하였다.
631년,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위해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가 축성 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자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 뒤를 이어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638년, 영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고구려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 것을 주장, 온건파는 왕태자를 보내 당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것을 주장)
640년,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의 주장을 따라 왕태자를 장안에 보냈고 당 태종에게 서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기 위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그후 당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한편,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강경파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에서는 그러한 강경파의 불만을 무시했다. 급기야는 천리장성 축성 작업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642년,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쳐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지절사를 고구려에 보내 조문하였다
28.보장왕(재위642년~668년) : 평원왕의 셋째 아들이자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의 맏아들로 휘는 장, 보장이다.
64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그를 새 왕으로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정권을 장악하였고, 보장왕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고구려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643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숙달 등 도사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을 받아들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백제의 공격으로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백제와의 공방전에서 점차 불리해져갔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흔쾌히 신라와 손을 잡게 된다.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며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당나라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요동과 서해안 일대의 수군 경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협공하였는데 당나라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거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645년, 당 태종의 30만 군대가 고구려의 성 10여 개를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의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 빼앗은 영토를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회유했고 이에 고연수는 당 태종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태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6천명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였고 그 과정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 명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였기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래서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지만 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시성의 사기는 점차 올라가는 반면 당나라군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도 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이 작전으로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고 말았다.
당의 패배가 거듭되는 가운데 겨울이 다가와 당나라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였는데 퇴로에서 많은 동사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군사들이 대거 몰살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당 태종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으나 싸우는 족족 퇴각하였다.
649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남기고 죽었고 이에 따라 두나라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658년, 당 고종은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패하고 퇴각하였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고 당 고종은 4만4천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 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패하였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그해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10만 대군의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 일대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패퇴했다.
662년,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으며 평양성을 공략하고 있던 당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황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이 신흥 대제국으로서 융성한 것과는 반대로 60여년에 걸친 수,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으며 동맹국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사이에 막리지의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고 이에 연남생은 아우들에게 쫓겨 국내성에 가서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으나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8년,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보장왕이 머무르던 평양성까지 함락되고 말았다.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며 당나라로 끌려갔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는데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지속되자 당은 677년에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하고 요동에 머무르게 하여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고구려 왕 계보
1대 동명성왕(주몽) : 기원전37년~기원전18년
성은 고, 휘는 추모. 동부여의 금와왕의 막내아들.
대소태자의 모해를 피하여 압록강 연안인 졸본천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함
2대 유리왕(유리) : 기원전 19년~18년
기원전 19년에 어머니 예씨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졸본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아버지를 만나 태자로 인정받고 고구려 제2대 왕이 됨
기원전 17년에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음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음
3대 대무신왕(무휼) : 4년~44년
유리왕의 셋째 아들.
14년에 태자로 책봉됨
22년에 동부여를 공격하여 고구려에 병합시킴
그 해 개마국을 쳐서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함
32년에는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함
4대 민중왕(해색주) : 44년~48년
대무신왕의 아우.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함
유언에 따라 민중원 석굴에 장사를 지냄
5대 모본왕(해우) : 48년~53년
대무신왕의 아들.
49년에 한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음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
결국 신하 두로에게 피살됨
6대 태조왕(궁) : 47년~165년
유리왕의 손자이다.
56년에 동옥저를 정벌,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함
72년에는 부족장인 달고를 파견하여 조나를 정벌함
121년 한나라의 요수현을 공격하여 서북면의 영토를 넓힘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함
165년, 119세로 죽어 한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 됨
7대 차대왕(수성) : 73년~165년
태조왕의 동생.
121년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 등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함
147년, 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148년 태조왕의 태자 막근마저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명림답부에게 시해 당함
8대 신대왕(백고): 165년~179년
태조왕의 계제이며 어머니는 부여 사람.
둘째형인 차대왕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대왕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함
166년 좌·우보의 직제를 국상으로 고치고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함
169년 한나라의 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함
170년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함
9대 고국천왕(남무) : 179년~197년
신대왕의 둘째 아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고 대승함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품
194년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줌
왕위계승 방법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꿈
10대 산상왕(연우);197년~227년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
208년에 서울을 환도(중국 퉁거우 지방)로 옮김
217년에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함
11대 동천왕(교체) : 227년~248년
산상왕의 아들.
236년 오나라 손권이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냄
242년에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인 서안평을 공격하다가
관구검의 반격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고, 남옥저로 피란함
이때 용장 밀우와 유유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김
248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음
12대 중천왕(연불) : 248년~270년
동천왕의 맏아들.
동생 예물과 사구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함
259년 위나라의 장수 위지계의 침입군을 양맥곡에서 격퇴함
13대 서천왕(약로) : 270년~292년
중천왕의 둘째 아들.
280년 숙신이 내침하자 동생 달고를 보내어 이를 격퇴함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일우·소발 등을 주살함
14대 봉상왕(상불) : 292년~300년
서천왕의 태자.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숙부 안국군을 살해함
이듬해 동생 돌고마저 사사함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의 침입을 격퇴함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함
15대 미천왕(을불) : 300년~331년
서천왕의 손자.
큰아버지 봉상왕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에 숨어 화를 면함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함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함
313년 낙랑군을 공략, 낙랑군을 멸망시킴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음
16대 고국원왕(사유) : 331년~337년
이름은 사유다 국강상왕이라고도 함 314년 태자의 책봉됨
331년 아버지 미천왕이 죽자 왕위에 오름
즉위하자 평양성을 증축 국내성을 쌓 342년 환도성으로 옳긴뒤
수차례 중국 연나라한테 칩입받음
그리고 선비족 모용괴가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자 모용괴가
아버지 미천왕의묘를 팜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과 왕모주씨 왕비를 납치당함
343년 동생을 연나라에 파견 미천왕과 왕비를 찾아옴
369년 백제의 치양(지금의 황해도 배천)쳤다 하지만 패하고
371년 평양성에서 싸우다 죽음
17대 소수림왕(구부) : 337년~384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18대 고국양왕(이연) : 384년~391년
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 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또, 남쪽으로는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19대 광개토대왕(담덕) : 391년~413년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는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전하는 바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20대 장수왕(거련) : 413년~491년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
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소환요청을 거절한다든지,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479년에는 흥
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21대 문자왕(나운) : 419년~519년
장수왕의 손자.
494년 물길족에게 멸망한 부여의 왕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임
497년에 신라 우산성, 512년에 백제 가불성·원산성을 점령함
광개토왕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함
22대 안장왕(흥안) : 519년~531년
이름은 흥안. 치세는 12년간
23대 안원왕(보연) : 531년~545년
이름은 보영. 치세는 14년간
24대 양원왕(평성) : 545년~559년
안원왕의 맏아들.
동위·북제 등에 조공하여 친선을 도모함
547년 백암성·신성 등을 중수함
551년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신라·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잃음
25대 평원왕(양성) : 559년~590년
양원왕의 태자
559년 즉위한 후 중국의 진·수·북제·후주 등 여러 나라와 수교함
일찍이 장수왕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국도를 옮긴 뒤
양원왕이 장안성(평양)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함
26대 영양왕(원) : 590년~618년
평원왕의 태자.
수나라와 화친을 꾀하다가 598년 말갈 군사 1만을 이끌고 요서를 선공,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섬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함
600년 태학 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함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 우명산성을 함락함
612년 수나라 양제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적을 섬멸함
27대 영류왕(건무) : 618년~642년
영양왕의 이복동생.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수나라 침공 때 포로가 된 이들을 찾아옴
631년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의 축조를 시작,
연개소문에게 역사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됨
28대 보장왕(보장) : 642년~668년
고구려의 마지막 왕.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의 추대로 왕위에 오름
645년 당나라 태종이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이 독전, 격퇴함
661년 당나라 소정방이 신라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연개소문이 다시 격퇴함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입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당나라로 압송됨
고구려 1대 국왕 추모성왕(추모)ㅡㅡㅡ (BC 37~19)
고구려 2대 국왕 유리명왕(유리)ㅡㅡ(BC 19~AD 18)
고구려 3대 국왕 대무신왕(무휼)ㅡㅡ(AD 19~ 44)
고구려 4대 국왕 민중왕(해색주)ㅡㅡㅡ(44~48)
고구려 5대 국왕 모본왕ㅡㅡㅡㅡㅡㅡㅡ(49~53)
고구려 6대 태왕 태조왕(궁)ㅡㅡㅡㅡㅡ(54~146)
고구려 7대 태왕 차대왕(수성)ㅡㅡㅡㅡ(146~165)
고구려 8대 태왕 신대왕(백고)ㅡㅡㅡㅡ(165~179)
고구려 9대 태왕 고국천왕(이이모)ㅡㅡ(179~197)
고구려 10대 태왕 산상왕(연우)ㅡㅡㅡㅡ(197~227)
고구려 11대 태왕 동천왕(교체)ㅡㅡㅡㅡ(227~248)
고구려 12대 태왕 중천왕(연불)ㅡㅡㅡㅡ(248~270)
고구려 13대 태왕 서천왕(약로)ㅡㅡㅡㅡ(270~292)
고구려 14대 태왕 봉상왕(상부)ㅡㅡㅡㅡ(292~300)
고구려 15대 태왕 미천왕(을불)ㅡㅡㅡㅡ(301~331)
고구려 16대 태왕 고국원왕(사유)ㅡㅡㅡ(331~371)
고구려 17대 태왕 소수림왕(구부)ㅡㅡㅡ(371~384)
고구려 18대 태왕 고국양왕(이연)ㅡㅡㅡ(384~391)
고구려 19대 태왕 광개토대왕(담덕)ㅡㅡ(391~412)
고구려 20대 태왕 장수왕(거련)ㅡㅡㅡㅡ(413~491)
고구려 21대 태왕 문자명왕(나운)ㅡㅡㅡ(519~531)
고구려 22대 태왕 안장왕(흥안)ㅡㅡㅡㅡ(519~531)
고구려 23대 태왕 안원왕(보연)ㅡㅡㅡㅡ(531~545)
고구려 24대 태왕 양원왕(평성)ㅡㅡㅡㅡ(545~559)
고구려 25대 태왕 평원왕(양성)ㅡㅡㅡㅡ(559~590)
고구려 26대 태왕 영양왕(원)ㅡㅡㅡㅡㅡ(590~618)
고구려 27대 태왕 영류왕(건무)ㅡㅡㅡ (618~642)
고구려 28대 태왕 보장왕(보장)ㅡㅡㅡㅡ(642~668)
고구려 : BC 37년 개국~AD 668년 멸망 (28代 725년간)
순번 |
왕명(이름) |
재위 연도 |
재위 기간 |
혈통 관계 |
1 |
동명성왕(주몽) |
BC37년~BC19년 |
18년 |
해모수와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의 외아들. 부인은 예씨<자-2대 유리>와 연씨<소서노 자-비류, 온조> 고구려 개국시조이며 초대 군주. |
2 |
유리명왕(유리) |
BC19년~AD18년 |
37년 |
주몽과 왕후예씨의 장남. 부인은 송씨<자-도절, 해명, 3대 무휼, 여진, 4대 해색주>와 화희와 치희와 후비 |
3 |
대무신왕(무휼) |
AD 18년~44년 |
26년 |
유리와 왕후송씨의 3남. 부인은 원비인 비류국 여인<자-5대 모본왕>과 갈사부여의 갈사왕의 손녀 해씨<자-호동> |
4 |
민중왕(해색주) |
AD 44년~48년 |
4년 |
유리와 첫째 왕후송씨의 5남. 무휼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 |
5 |
모본왕(해우) |
AD 48년~53년 |
5년 |
무휼과 성씨불명 비류국 여인 사이의 차남(호동의제). 부인은 원비 |
6 |
태조왕(궁) |
AD 53년~146년 |
93년 |
유리왕(琉璃王)의 손자이며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태후 금씨 사이의 아들로 모본왕(慕本王)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즉위함.119살에 서거하여 한국 왕 중 최장수 왕이며 93년간 통치한 최장수 재임군주임. 부인은 성씨불명<자-막근, 막덕> |
7 |
차대왕(수성) |
AD 146년~165년 |
19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2남으로 태조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추안> |
8 |
신대왕(백고) |
AD 165년~179년 |
14년 |
고추가 재사와 부여태후 금씨와의 3남으로 차대왕의 동생. 부인은 성씨불명<자-발기(拔奇). 9대 남무, 발기(發岐), 10대 연우, 계수> |
9 |
고국천왕(남무) |
AD 179년~197년 |
18년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男武) 혹은 이이모(伊夷謨)라 한다. 부인은 우씨 |
10 |
산상왕(연우) |
AD 197년~227년 |
30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하였다. 부인은 소후후녀<자-교체(동천왕)> |
11 |
동천왕(교체) |
AD 227년~248년 |
21년 |
산상왕과 소후후녀의 아들. 아명은 교체, 휘는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라함 부인 성씨불명<자-12대 연불, 예물, 사구과 후궁 동해녀 |
12 |
중천왕(연불) |
AD 248년~270년 |
22년 |
동천왕 아들.243년(동천왕 17) 태자가 되었고, 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부인은 연씨<자-13대 약로, 달가, 일우, 소발>과 관나부인<자-?> |
13 |
서천왕(약로) |
AD 270년~292년 |
22년 |
중천왕과 왕후연씨의 차남. 부인은 우씨<자-14대 상불, 15대 을불> |
14 |
봉상왕(상불) |
AD 292년~300년 |
8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 |
15 |
미천왕(을불) |
AD 300년~331년 |
31년 |
서천왕과 왕후 우씨의 차남. 부인은 주씨<자-16대 사유, 무> |
16 |
고국원왕(사유) |
AD 331년~371년 |
40년 |
미천왕과 왕후 주씨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7대 구부, 18대 이연> |
17 |
소수림왕(구부) |
AD371년~384년 |
13년 |
고국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18 |
고국양왕(이연) |
AD 384년~391년 |
7년 |
고국원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19대 담덕> |
19 |
광개토대왕(담덕) |
AD 391년~412년 |
21년 |
고국양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0대 거련, 승평> |
20 |
장수왕(거련) |
AD 413년~491년 |
78년 |
광개토대왕의 장남. 475년 백제 한성(漢城) 함락하고 개로왕 살해. 481년 신라 8성을 점령. 영토가 남은 아산만과 죽령(竹嶺), 서는 요하, 동은 홋카이도 훈춘, 북은 카이위안 개원까지 확장해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부인은 성씨불명<자-조다, 승천> |
21 |
문자명왕(나운) |
AD 491년~519년 |
28년 |
장수왕의 손자(조다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2대 흥안, 23대 보연> |
22 |
안장왕(흥안) |
AD 519년~531년 |
12년 |
문자명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 |
23 |
안원왕(보연) |
AD 531년~545년 |
14년 |
문자명왕의 차남. 부인은 성씨불명<자-24대 평성, 세군> |
24 |
양원왕(평성) |
AD 545년~559년 |
14년 |
안원왕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양성> |
25 |
평원왕(양성) |
AD 559년~590년 |
31년 |
양원왕의 아들. 제일부인 성씨불명<자-26대 원, 평강공주>. 제2부인 성씨불명<자-27대 영류왕, 28대 보장왕> |
26 |
영양왕(원) |
AD 590년~618년 |
18년 |
평원왕의 제일부인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30만과 113만 대군으로 침공해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대승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됐다. |
27 |
영류왕(건무) |
AD 618년~642년 |
24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장남. 부인은 성씨불명<자-환권> |
28 |
보장왕(보장) |
AD 642년~668년 |
26년 |
평원왕의 제이부인의의 차남. 제1부인 성씨불명<자-복남, 임무, 덕무> 제2부인 성씨불명<자-안승>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아 고구려가 멸망하자 체포되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복국(復國)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뒤 사망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
백제
1대 온조왕(溫祚, ?~28)(BC58년 ~BC19년)
고구려 동명왕의 세째아들(혹은 둘째). 위례성에 나라를 정하고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함.
BC 5년에 서 울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김. AD8년 마한을 병합함.
2대 다루왕(多婁, ?~77)
온조왕아들. 말갈족을 격퇴하고,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 생활을 안정 시켰 음. 37년 후한의 낙랑군을 멸망시킴.
3대 기루왕(己婁, ?~128)
다루왕의 맏아들.
4대 개루왕(蓋婁, ?~166)
기루왕의 아들. 132년에 북한상성을 쌓음
5대 초고왕(肖古, ?~214)
개루왕의 아들. 신라를 여러번 침공하고, 210년에 적현성, 사도성을 축조함.
6대 구수왕(仇首, ?~234)
초고왕의 맏아들. 가뭄과 홍수를 대비하여 둑을 쌓고 농사를 장려함.귀 수왕.
7대 사반왕(沙泮)
구수왕의 아들.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바로 폐위됨. 사비왕(沙沸)
8대 고이왕(古爾, ?~286)
초고왕 동생. 관제를 제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함.
9대 책계왕(責稽, ?~298)
고이왕 아들.
10대 분서왕(汾西, ?)
책계왕 아들. 낙랑군의 서현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낙랑군의 자객에게 살해당함.
11대 비류왕(比流, ?~344)
구수왕의 둘째 아들. 민간의 형편을 잘알아 선정을 베풀었다고 함.
12대 설왕( ,?~346)
분서왕의 맏아들
13대 근초고왕(近肖古, ?~375)
비류왕의 아들. 369년에 마한과 대방을 병합함. 고구려 평양성을 점령하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한문을 전파하고, 박사 고흥 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書記)'를
쓰게함.
14대 근구수왕(近仇首, ?~384)
근초고왕의 큰아들. 일본과 국교를 맺어 문물을 보급시키는 데 공이많음.
15대 침류왕(枕流, ?~385)
근구수왕의 아들. 불교(佛法)을 시행하고, 한산에 절을 창건 하였음.
16대 진사왕(辰斯, ?~392)
침류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에게 한강 이북을 빼앗기자 이를 찾기위해서 출정하 다가 병사함.
17대 아신왕(阿莘,
침류왕의 아들.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패함. 일본과 화친하여 태자를 볼모로 보냄. 아방왕, 아화왕.
18대 전지왕(琠支, ?~420)
아신왕의 아들.
19대 구이신왕(久爾辛, ?~427)
전지왕의 맏아들
20대 비유왕(毘有, ?)
구이신왕의 아들. 송나라와 왕래하고 신라와 화친을 하는등 외교를 통한 친선에 힘을 씀.
21대 개로왕(蓋鹵, ?~475)
휘는 경사(慶司). 비유왕의 맏아들. 고구려 장수왕의 습격을 받아 피살됨.
22대 문주왕(文周, ?~477)
개로왕의 아들. 서울을 웅진(공주)으로옴기고 국방에 힘씀. 병관 좌평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살해됨.
23대 삼근왕(三斤, ?)
문주왕의 맏아들. 13세로 즉위 반란을 일으킨 해구를 진로(眞老)로하 여금 토평하게함.
24대 동성왕(東城, ?~501)
이름은 모대(牟大).삼근왕의 동생. 493년에 신라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움.
25대 무령왕(武寧, ?~523)
휘는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 아들. 국내안정에 힘을 쓰고, 쌍현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함.
26대 성왕(聖, ?~554)
휘는 명농. 무령왕의 아들. 538년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라 함.
554년 신라 를 공격, 관상성에서 전사함. 성명왕.
27대 위덕왕(威德, ?~598)
휘는 창(昌). 성왕의 아들.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중국과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신라를 자주침
28대 혜왕(惠, ?~599)
휘는 계(季). 위덕왕의 아들로 즉위 하였다가 이듬해에 죽음.
29대 법왕(法, ?)
휘는 선(宣), 효순(孝順). 혜왕의 아들. 불교를 신봉하여 살생을 금하고, 왕흥사의 창건 을 착수함.
30대 무왕(武, ?~641)
휘는 장(璋). 수, 당나라와 화친을 맺고, 일본에 중 관륵(觀勒)을 보 내어 천문, 지리, 역본(曆本) 등의 서적과 불교
를 전파하였음.
31대 의자왕(義慈, ?~660)
백제의 마지막 왕. 무왕의 맏아들.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많은 영토를 얻었으나 만년에는 사치와 방탕에 흘러 나
당연합군에게 패하여 당나라에 압송되었다가 병사함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1대 시조 온조왕 <始祖 溫祚王 B.C18~28 재위기간 45년>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소서노는 우태가 죽
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
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
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
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 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
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
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
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
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
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
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
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
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는 설도 있
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
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
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원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저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왕이 그의 재종숙부 을음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 관계의 임무를 맡겼다.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쳤고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었다.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5년 겨울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면서 사냥하여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6년 가을 7월 그믐 신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8년 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점점 차지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만일 옛날
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투로 승부를 결정내보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
겠는가? 이는 당연히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
리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었다.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이를 마한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왕이 200명의 군사를 보내 곤미천에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을 거점으로 자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직접 100명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와 구원하였다.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퇴각하였다.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13년 봄 2월,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요즈음
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15년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17년 봄,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구곡까지 갔다. 그러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되돌아왔다.
20년 봄 2월,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그 위를 날았다.
22년 가을 8월, 석두·고목의 2성을 쌓았다.
9월, 왕이 1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도적을 만나 단번에 물리
쳤다. 이 때 잡은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4년 가을 7월, 왕이 웅천 목책을 세웠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그러므
로 내가 왕을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
의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이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허물었다.
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엄청나게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머리는 하나였으며,
몸은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우물이 엄청나게 넘친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난 것은, 대
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26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국세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해 버린다면 순망치한이 되어,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빼앗아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을 합병하였는
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28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그에게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31년 봄 정월, 국내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북부를 만들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5월, 지진이 났다.
6월, 지진이 다시 났다.
3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이들을 위무하여 안정
시켰다.
가을 8월, 동부와 서부의 2부를 더 설치하였다.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36년 가을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8월, 원산·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37년 봄 3월, 크기가 달걀 정도인 우박이 내려 새가 맞아 죽었다.
여름 4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
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38년 봄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까지 갔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모두 없앴
다.
겨울 10월, 왕이 큰 제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2백 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방어하였다.
41년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하여 등용한 것이다.
2월,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43년 가을 8월, 왕이 5일 동안 아산 벌에서 사냥하였다.
9월, 1백여 마리의 기러기가 왕궁에 모였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므로, 장차 먼 곳에서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45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말랐다.
겨울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다.
46년 봄 2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2대 다루왕 <多婁王 28~77 재위기간 49년>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붕어하자, 그 뒤를 이었다.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2월, 왕이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3년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4년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 왕이 횡악 아래에서 사냥하다가 두 마리의 사슴을 연이어 적중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6년 봄 정월, 왕의 맏아들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남쪽 주군에 명령하여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7년 봄 2월, 우보 해루가 나이 90세로 사망하였다. 동부 흘우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그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10년 겨울 10월, 우보 흘우를 좌보로 삼고, 북부 진회를 우보로 삼았다.
11월, 지진이 났는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11년 가을, 곡식이 잘 익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동서 양부를 순회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하여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일인당 곡식 두 섬을 주었다.
21년 봄 2월, 왕궁 뜰에 있는 큰 홰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었다.
3월, 좌보 흘우가 사망하자 왕이 슬프게 울었다.
28년, 봄과 여름이 가물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고 사형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29년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36년 겨울 10월, 왕이 낭자곡성까지 토지를 개척하였다.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으
나, 신라는 거절하였다.
37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
였다. 신라는 기병 2천 명을 동원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이들과 대적하여 물리쳤다.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백 명을 그곳에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쫓겨났다.
43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46년 여름 5월 그믐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47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48년 겨울 10월,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49년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였다.
50년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3대 기루왕 <己婁王 77~128 재위기간 51년>
기루왕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다루왕 재위 6년에 태자가 되었고, 50년에 왕이 붕어하자 즉위하였다.
9년 봄 정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여름 4월 을사에 객성이 자미 성좌로 들어갔다.
11년 가을 8월 그믐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13년 여름 6월,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주민들의 가옥이 무너졌다. 사망자가 많았다.
14년 봄 3월,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았다.
여름 6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쓰러뜨렸다.
16년 여름 6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17년 가을 8월,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한꺼번에 떨어졌다.
21년 여름 4월,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23년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박이 내렸다.
27년,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29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31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32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35년 봄 3월, 지진이 났다.
겨울 10월, 또 지진이 났다.
37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40년 여름 4월,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
6월, 열흘동안 큰 비가 내려서 한강물이 넘쳐서, 주민들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가을 7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게 하였다.
49년,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자 서신을 보내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52년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4대 개루왕 <蓋婁王 128~166 재위기간 38년>
개루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 기루왕이 재위 52년에 붕어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10년 가을 8월 경자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28년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우리 나라로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소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를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왔으나
모든 성이 굳게 방어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39년, 왕이 붕어하였다.
제5대 초고왕 <肖古王 166~214 재위기간 48년 >
초고왕[소고라고도 한다.]은 개루왕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에 붕어하자, 그의 뒤를 이었다.
2년 가을 7월,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두 성을 격파하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동쪽의 여러 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신라왕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까지 진격해왔다. 왕은 신라군이
많아서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이전에 빼앗았던 성을 돌려주었다.
5년 봄 3월 그믐 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21년 겨울 10월, 구름 없이 우레가 쳤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22년 여름 5월, 서울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랐다.
2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24년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25년 가을 8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 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26년 가을 9월, 치우기별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34년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39년 가을 7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요차성을 공략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왕 나해가 분개
하여 이벌찬 이음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을 치게 하였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정 성좌에 나타났다.
40년 가을 7월,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
43년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물어서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그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44년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45년 봄 2월,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고 동부의 민가를 그곳으로 옮겼다.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46년 가을 8월, 남쪽 지역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47년 여름 6월 그믐 경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48년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쳤다. 왕이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곡식 1백 석을
주었다.
49년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에 이르렀다.
왕이 붕어하였다.
제6대 구수왕<仇首王 214~234 재위기간 20년>
구수왕[혹은 귀수라고도 한다.]은 초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하였다.
초고왕이 재위 49년에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에 와서 포위했으나 성주가 굳게 수비하니 적이 퇴각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사도성 밖에서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병이
많았다.
4년 봄 2월, 사도성 옆에 두 곳의 목책을 세웠다. 동서의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5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을 포위했다.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7년 겨울 10월, 왕성 서문에 화재가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방어하였다.
8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40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한수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9년 봄 2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 명령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 서울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 신라의 우두진으로 군사를 보내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대패하고,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11년 가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이 침입하였다. 우리 군사는 봉산 아래에서 그들과 싸웠으나 승리
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4년 봄 3월,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곧 비가 내렸다.
16년 겨울 10월, 왕이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은 정예군 3백 명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18년 여름 4월, 밤알 크기의 우박이 내렸다. 이에 맞은 새들이 죽었다.
21년, 왕이 붕어하였다.
제7대 사반왕<沙伴王 234. >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붕어하자, 그의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
하지 못하였므로 폐하고 초고왕의 동복 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제8대고이왕<古爾王 234~286 재위기간 52년>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붕어하자, 그의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
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므로 초고왕의 동복 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3년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여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5년 봄 정월,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왕이 부산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갔다.
6년 봄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여름 5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7년, 군사를 보내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여름 4월,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내외의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겼다.
가을 7월, 석천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이 때 냇가에서 오리 한 쌍이 날아 가는 것을 왕이
쏘아서 모두 적중시켰다.
9년 봄 2월, 백성들로 하여금 남쪽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숙부인 질을 우보로 삼았다. 질은 성격이 충직하여 실수없이 일을 계획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서문 밖에 나가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10년 봄 정월, 큰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13년 여름, 크게 가물어 보리가 죽었다.
가을 8월, 위 나라 유주 자사 관구 검이 낙랑 태수 유 무, 삭방 태수 왕 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 보냈다.
14년 봄 정월,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진충을 우보로 임명하였다.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고 또한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16년 봄 정월 갑오, 태백성이 달을 덮었다.
22년 가을 9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군과 괴곡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신라 장수 익종을 죽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24년 봄 정월, 크게 가물어 나무가 모두 말랐다.
25년 봄, 말갈의 추장 나갈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이 그 사자를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26년 가을 9월, 푸르고 보랏빛 나는 구름이 마치 누각 모양으로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27년 봄 정월, 내신 좌평을 두어 왕명의 출납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두 좌평을 두어 물자와 창고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 좌평을 두어 예법과 의식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 좌평을 두어 숙위
병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 좌평을 두어 형벌과 송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 좌평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달솔·은솔·덕솔·한솔·나솔· 장덕·시덕·고덕·계덕·대덕·문독·무독·
좌군·진무·극우 등을 두었다. 6개 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
은 푸른 옷을 입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월, 왕의 아우 우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28년 봄 정월 초하룻날, 왕이 자주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
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2월, 진가를 내두 좌평, 우두를 내법 좌평, 고수를 위사 좌평, 곤노를 조정 좌평, 유기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29년 봄 정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며, 종신 금고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3년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반격하
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36년 가을 9월,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났다.
39년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45년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을 포위했다.
5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53년 봄 정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9대 책계왕<責稽王 286~298 재위기간 12년>
책계왕[혹은 청계라고도 한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
고이왕이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
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략
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13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제10대 분서왕<汾西王 298~304 재위기간 6년>
분서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풍채가 걸출하였으므로 왕이 그를 사랑
하여 항상 옆에 두었다. 왕이 붕어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5년 여름 4월, 낮에 혜성이 나타났다.
7년 봄 2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제11대 비류왕<比流王 304~344 재위기간 40년>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끼며, 또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떨쳤다. 분서왕이 붕어하였을 때, 비록 여러 명의 아들이 있
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으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그가 왕위에 올랐
다.
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9년 봄 2월, 사신을 파견하여 민간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
는 늙은이들로서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 일인당 곡식 3석씩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10년 봄 정월, 남쪽 교외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이 직접 제물에 쓰일 고기를 베었다.
13년 봄, 가뭄이 들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 서울에서 우물이 넘치고, 그 속에서 흑룡이 나타났다.
17년 가을 8월, 대궐 서쪽에 활 쏘는 누대를 쌓아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18년 봄 정월, 왕의 이복동생 우복을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22년 겨울 10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풍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11월, 왕이 구원 북쪽에서 사냥하여 직접 사슴을 쏘았다.
24년 가을 7월, 적오와 같이 생긴 구름이 양쪽에서 해를 끼고 있었다.
9월, 내신 좌평 우복이 북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다.
28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풀과 나무와 강물이 말랐다. 가을 7월에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었다.
30년 여름 5월, 별이 떨어졌다. 대궐에 화재가 났는데 연이어 민가도 불탔다.
가을 7월, 대궐을 수리하였다. 진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우레가 쳤다.
32년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33년 봄 정월 신사에 혜성이 규성 성좌에 나타났다.
34년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41년 겨울 10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2대 설왕<契王 344~346 재위기간 2년>
설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전에 분서왕이 붕어하였을 때는 설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는데,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붕어
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3년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재위기간 29년>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설왕이 붕어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2년 봄 정월,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을 조정 좌평으로 삼았다. 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함
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다. 그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21년 봄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23년 봄 3월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사신을 시켜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26년,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27년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28년 가을 7월,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 성주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다.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
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
하지 않았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고기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와서 박사 고 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 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제14대 근구수왕<近仇首王 375~384 재위기간 9년>
근구수왕[휘수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 사유가 직접 와서 침
범하였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는 반걸양에 이르러 전투를 시작하려 하였다.
고구려인 사기는 원래 백제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나게 하였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었다.
그가 이 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고구려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 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태자가 이 말에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 도착하였다.
이 때 장수 막고해가 간하였다.
"일찌기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읍니
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중단하였다. 그는 즉시 그곳에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가?"
그곳에는 말발굽 같이 생긴 바윗돌 틈이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태자의 말굽 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2년, 왕의 외삼촌 진고도를 내신 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5년 여름 4월, 흙비가 종일 내렸다.
6년,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여름 5월, 땅바닥이 깊이가 다섯 길, 넓이가 세 길이나 되게 갈라졌다가 3일만에 다시 붙었다.
8년, 봄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가 나타나자, 왕이 나라의
곡식을 내어 대신 값을 물어 주었다.
10년 봄 2월,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5대 침류왕<枕流王 384~385 재위기간 1년>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9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진 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2년 봄 2월,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중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6대 진사왕<辰斯王 385~392 재위기간 7년 >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그는 사람됨이 용맹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붕어하였을 때 태자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
2년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문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길이가 청목령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닿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3년 봄 정월, 진 가모를 달솔로 임명하고, 두지를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관미령에서 말갈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5년 가을 9월,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6년 가을 7월, 혜성이 북하 성좌에 나타났다.
9월, 왕이 달솔 진 가모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2백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가모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7년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가을 7월, 왕이 서쪽 지방의 큰 섬에서 사냥하다가 직접 사슴을 쏘아 적중시켰다.
8월, 왕이 다시 횡악 서쪽 지역에서 사냥하였다.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붕어하였다.
제17대 아신왕<阿莘王 392~405 재위기간 13년>
아신왕[혹은 아방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그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
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
그가 장성하자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였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침류왕이 붕어하였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붕어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
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
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
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
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3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이복동생 홍을 내신 좌평
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낮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4년 봄 2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
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
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
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6년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7년 봄 2월, 진무를 병관 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다.
3월, 쌍현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동하여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진영에서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여 공격을 중지하였다.
9월,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였다.
8년 가을 8월,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니, 백성들이 병역을
9년 봄 2월, 혜성이 규성과 누성 성좌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11년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벼가 타들어가자, 왕이 직접 횡악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5월,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구하였다.
12년 봄 2월,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14년 봄 3월,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가을 9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8대 전지왕<전支王 405~420 재위기간 15년 >
전지왕[혹은 직지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에서는 영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붕어하자 왕의 둘째 동
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첩례가 훈해를 죽이고 자기가 왕
이 되었다. 이 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그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이 죽은 후
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
다"라고 하였다.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기를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가운데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
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이다. 그녀는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크
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고, 한성의 벼 1천 석을 주었다.
3년 봄 2월, 이복동생 여신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수를 내법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구를 병관 좌
평으로 임명하니 모두가 왕의 친척이었다.
4년 봄 정월,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이라는 직위가 이 때부터 시작
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었다.
5년,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오니 왕이 특별히 예우하였다.
11년 여름 5월 갑신에 혜성이 나타났다.
13년 봄 정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 좌평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14년 여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
15년 봄 정월 무술에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초하루 정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16년 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19대 구이신왕<久이辛王 420~427 재위기간 7년>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8년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20대 비유왕<毗有王 427~455 재위기간 28년>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그
는 용모가 훌륭하고 말을 잘 하여 사람들이 따르고 귀중히 여겼다. 구이신왕이 붕어하자 그가 즉위하였
다.
2년 봄 2월, 왕이 4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왜국 사신이 왔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겨울 10월, 상좌평 여신이 사망하자 해수를 상좌평으로 임명하였다.
11월, 지진이 발생하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았다.
12월, 물이 얼지 않았다.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7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8년 봄 2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좋은 금과 구슬을 답례로 보내 왔다.
14년 여름 4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21년 여름 5월, 대궐 남쪽 연못에서 불길이 일어 났는데, 불꽃이 수레바퀴 같았고, 밤새도록 타다가 사
그러졌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어 곡식이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들어간 자가 많았다.
28년,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두 발 정도 되었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곡식에 해를 입혀 흉년이 들었다.
29년 봄 3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날아갔다.
왕이 붕어하였다.
제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 재위기간 20년>
개로왕[혹은 근개루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이니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붕
어하자 왕위를 이었다.
14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15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병졸들을 나누어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18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
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
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
부마도위불사후장사 여례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
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
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이를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
의 조상 소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소의 머리를 베어 효
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
로 도망해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
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게 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연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
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
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
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
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
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을 벌 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 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초 장왕이 맨발로 다녔으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
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위 나라 현조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
하고, 사신 소안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 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5복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 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
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
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
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
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
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
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하는 큰 덕을 버린 것
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의 정성
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 월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
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
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보
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
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
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
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
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 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
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
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
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왕 연에게 조서를 보내 소안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
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소안 등
이 모두 돌아가니, 위 나라에서는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소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
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하여 위 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 나라에서는 듣
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21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
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 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중 도림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
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왕 근개루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
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
다. 왕이 그를 불러 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
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오,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
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
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어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
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
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
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
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
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
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 만치와 조미 걸취[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 [수서]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
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
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
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
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 475~477 재위기간 2년>
문주왕['文周'를 '汶州'로도 쓴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
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
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붕어하여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
다.
겨울 10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2년 봄 2월,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3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되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 좌평 곤지가 사망하였다.
4년 가을 8월, 병관 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경시하였
으나 왕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그를 해치게 하여, 왕
이 마침내 붕어하였다.
제23대 삼근왕<三斤王 477~499 재위기간 2년>
삼근왕[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왕이 붕어하자 왕위를 이었으니, 나이 13세
였다. 군사 임무와 나라 정사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좌평 진
남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이게 했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
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3월 초하루 기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겨울 11월, 왕이 붕어하였다.
제24대 동성왕<東城王 479~501 재위기간 22년>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라고도 한다.]이니,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붕어하자 왕위에 올랐다.
4년 봄 정월, 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 큰 눈이 한 길 넘게 내렸다.
5년 봄,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6년 가을 7월, 내법 좌평 사 약사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약사가 서해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
하여 가지 못하였다.
7년 여름 5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8년 봄 2월, 백가를 위사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대궐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10년, 위 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11년 가을, 크게 풍년이 들었다. 남해의 어촌 사람이 두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벼를 바쳤다.
겨울 10월, 왕이 제단을 만들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11월, 왕이 남당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2년 가을 7월,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
9월, 왕이 나라 서쪽 사비 벌판에서 사냥하였고 연돌을 달솔로 임명하였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17년 여름 5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다.
19년 여름 5월, 병관 좌평 진로가 사망하자 달솔 연돌을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6월,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고 무너졌다.
20년, 웅진교를 가설하였다.
가을 7월,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8월, 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탐라는 곧 탐모라이다.]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
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22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
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
아 버렸다.
여름 4월, 왕이 우두성에서 사냥하다가 비와 우박을 만나서 중지하였다.
5월, 가물었다. 왕이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실컷 즐겼다.
23년 봄 정월,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졌다. 남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웠는데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 좌평 백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
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붕어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13년 여름 6월, 웅천물이 불어서 서울에서 2백여 호가 떠내려 가고 물에 잠겼다.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6백여 호나 되었다.
14년 봄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 왕이 우명곡에서 사냥하면서 직접 사슴을 쏘아 맞혔다.
15년 봄 3월,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16년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자 포위가 풀렸다.
제25대 무령왕<武寧王 501~523 재위기간 22년>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
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겨울 11월,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게 하였다.
2년 봄, 백성들이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
리쳤다.
겨울, 물이 얼지 않았다.
6년,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과 연못물이 말랐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가을 7월,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7년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짜고 한성을 치기 위하여 횡악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
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10년 봄 정월,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히 하고 서울과 지방의 무직자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12년 가을 9월,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군사를 옮겨 원산성을 격파하니 죽이거나 약
탈하여 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 북쪽에 나가 싸우니 고구려 병
사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업수이 여겨 진을 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기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16년 봄 3월 초하루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21년 여름 5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 간 자가 9백 호였다.
22년 가을 9월, 왕이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23년 봄 2월,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
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3월, 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시호를 무령이라 하였다.
제26대 성왕<聖王 523~554 재위기간 31년>
성왕의 이름은 명농이니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령왕이 붕어하고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출전케 하니 그
가 적을 물리쳤다.
3년 봄 2월,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4년 겨울 10월,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웠다.
7년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좌
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
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10년 가을 7월 갑진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12년 여름 4월 정묘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16년 봄,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18년 가을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9년, 왕이 양 나라에 표문을 올려 [모시(毛詩)] 박사와 열반(涅槃) 등의 의미를 풀이한 책과 기술자,
화가 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양 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25년 봄 정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26년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이 예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
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
27년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질렀다.
겨울 10월, 왕이 양 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
하였다. 그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
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31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
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제27대 위덕왕<威德王 554~598 재위기간 44년>
위덕왕은 이름이 창이니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붕어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원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6년, 여름 5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8년, 가을 7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19년,가을 9월 초하루 경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24년, 겨울 10월, 신라 서부 변경의 주, 군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이찬 세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격파시켰다.
26년, 겨울 10월, 혜성이 하늘에 뻗었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지진이 발생하였다.
36년, 수 나라가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 전함 한 척이 탐모라국으로 표류하여 왔다. 그 배가 돌아가게 되
어 국경을 통과할 때, 왕이 물자를 풍성하게 주어 귀국케 하고, 사신을 보내 진 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
하는 표문을 올렸다. 수 나라 고조가 이를 훌륭히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백제왕이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는 말을 듣자 멀리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쳤다. 왕래가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니, 만약 풍랑이라도 만나면 사람이 상하고 재물을 잃게 될 것이다. 백제왕의 마음이 순박하고
지극한 것은 내가 이미 깊이 알고 있다. 거리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얼굴을 대하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하필 자주 사신을 보내어 서로 대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하지 말 것이며
나도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그리 알 것이다."
39년, 가을 7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41년, 겨울 11월 계미에 혜성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45년, 가을 9월, 왕은 수 나라가 요동 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군사의 향도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
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
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
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 우리 국경을 침략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붕어하였다. 군신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위덕이라 하였다.
제28대 혜왕<惠王 598~599 재위기간 1년>
혜왕의 이름은 계이니 명왕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이 붕어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2년,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혜라고 하였다.
제29대 법왕<法王 599~600 재위기간 1년 >
법왕의 이름은 선[혹은 효순이라고도 한다.]이니 혜왕의 맏아들이다. 혜왕이 붕어하자 아들 선이 왕위
를 이었다.[[수서]에는 선을 창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겨울 12월,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 주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2년,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하고 중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큰 가뭄이 들어 왕이 칠악사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다.
여름 5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법이라 하였다.
제30대 무왕<武王 600~641 재위기간 41년>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하였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3년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모산성[모산성이라고도 한다.]을 포위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항전하자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 네 성을 쌓고, 우리 변경에 침범하였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그 네 성을 공격케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 무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싸웠다. 해수
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 서쪽의 소택지로 퇴각하여 복병을 숨겨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
를 타고 갑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소택지까지 추격하여 왔을 때, 복병이 달려들어 갑자기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찌기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
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나머지 군
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해수는 겨우 위기를 모면하여 단신으로 돌아왔
다.
6년 봄 2월, 각산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신라가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7년 봄 3월, 서울에 흙비가 내리고 낮에 어두웠다.
여름 4월, 크게 가물어 기근이 들었다.
8년 봄 3월, 한솔 연문진을 수 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또한 좌평 왕 효린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라고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가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다시 석두성을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
로잡아 돌아갔다.
9년 봄 3월, 수 나라 문림랑 배 청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우리 나라 남쪽 길을 통과하였다.
12년 봄 2월, 수 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치려 하므로 왕이 국지모를 수 나라에 보내 행군 일정을 물으니
양제가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보내 왕과 상의하게 하였다.
가을 8월, 적암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신라의 가잠성을 포위하여 성주 찬덕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시켰다.
13년, 수 나라 6군이 요수를 건너자, 왕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하게 하여 수 나라에 협조한다고 성명하였
으나 실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여름 4월, 대궐 남문에 벼락이 쳤다.
5월, 홍수가 나서 인가가 유실되었다.
17년 겨울 10월, 달솔 백기에게 명령하여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19년, 신라의 장군 변품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회복하였는데, 해론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24년 가을, 군사를 보내 신라의 늑노현을 침공하였다.
25년 겨울 10월,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6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27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라는 갑옷을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상국을 입조하지 못
하게 한다는 사실을 호소하였다. 고조는 산기상시주자사에게 조서를 우리와 고구려에 보내 서로의 원한
을 잊으라고 달랬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를 죽였다.
28년 가을 7월, 왕이 장군 사걸에게 명하여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
잡았다. 왕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웅진에 주둔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이를 듣고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한 사태를 말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중지하
였다.
가을 8월, 왕이 조카 복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왕은 대대로 군주가 되어 동쪽 변방을 진무하고 있다. 먼 바다 한 끝에서 바람과 파도가 험한 것을 무릅
쓰고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계속되니, 왕의 아름다운 생각을 높이 평가하며 매우 기쁘게 여긴다. 내가
삼가 영광스러운 대명을 이어받아 천하를 통치하게 되었으니, 정도를 넓히고 백성들을 아껴 양육하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모두 천성에 따르며 모두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
고 있다. 신라왕 김 진평은 나의 번신이요, 왕의 이웃이지만 매번 군사를 보내 토벌하는 것이 그치지 않
는다고 들었다. 군대의 힘을 믿고 잔인한 행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나의 기대에 매우 어긋난다. 내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 신라 사신들에게 서로 화친하도록 타이르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하였
다. 왕은 반드시 전날의 원한을 잊고 나의 본뜻을 헤아려서 모두 이웃의 정을 두터이 하여 즉시 전쟁을
중지하라."
왕이 곧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쳐 사죄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하였으나 실제적으
로는 이전처럼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29년 봄 2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31년 봄 2월,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였다. 왕이 웅진성으로 갔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웅진에서 돌아왔다.
33년 봄 정월,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2월, 마천성을 고쳐 쌓았다.
가을 7월,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였다.
왕이 생초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34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35년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었으며 채색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매
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
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
37년 봄 3월, 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서있고, 그 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하
여,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자들도 여러번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라
고 불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우소에게 명령하여 갑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우
소가 옥문곡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기 시작하였다. 그는 안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다. 그 때 신라
장군 알천이 군사를 거느리고 몰래 기습하여 왔다. 우소가 큰 돌 위에 올라서서 활을 쏘면서 대항하여
싸우다가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그들에게 사로잡혔다.
6월,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왕이 망해루에서 군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38년 봄 2월, 서울에서 지진이 났다.
3월, 다시 지진이 났다.
39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41년 봄 정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2월,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42년 봄 3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무라고 하였다.
제31대 의자왕<義慈王 641~660 재위기간 19년>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무왕이 붕어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 나라 태종이 사부 랑중 정 문표를 보내 왕을 주국대방국왕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2년 2월, 왕이 주, 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
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
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3년 겨울 11월,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당 나라로 조
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왕 덕만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자 왕
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의 아들 융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5년 여름 5월, 왕은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을 보내 침공하였다.
7년 겨울 10월,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
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
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8년 봄 3월, 의직이 신라 서부 변경의 요차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옥문곡으로 진군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이들과 두 번 전투하여 크게 이겼다.
9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이를 맞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군
사들을 모아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재차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11월, 우레가 쳤고 물이 얼지 않았다.
11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이 조서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
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 저녁
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
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 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
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
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간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
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 환공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
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
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이, 변경에서 피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한 채, 남녀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
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13년 봄,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8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15년 봄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였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
축하였다.
여름 5월,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와서 불당을 돌면서 울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가을 7월, 마천성을 중수하였다.
8월,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
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16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
[혹은 정충이라고도 한다.]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
하였는 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
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
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17년 봄 정월, 왕의 서자 41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논밭이 붉은 땅이 되었다.
19년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침공하였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었다.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
소리가 들렸다.
ぃ 20년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
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
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
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
궐 안에 들어 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
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
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
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
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 정방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좌위장군 유 백
영과 우무위 장군 풍 사귀와 좌효위 장군 방 효공 등과 함께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공격
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 춘추를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 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
서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
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 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
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번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 나라 군사들이 들어 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
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
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
느 말을 따라야할지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 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
강[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
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
서 지키게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
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
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
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
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 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당 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 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
면서 들어 오고, 소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
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 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
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
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
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
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요청
하였다. 이 때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
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 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좌위 낭장 왕 문도를 웅
진 도독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
고 용서하여 주었다. 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 호, 진 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
다. 왕자 융을 사가경으로 임명하였다. 왕 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 인궤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 때 중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
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가있던 부여 풍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
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 인원을 포위했다.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 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왕 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보내 유 인
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 인궤가 기뻐하며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
했다. 그는 당 나라 책력과 묘휘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의 정
삭을 해외에 반포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
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당 나라 용삭 원년 3월이었다. 이 때
도침은 영군 장군으로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 장군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 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 나라
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
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인궤는 편지로 화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
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
그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다. 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당 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 흠에게 군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 흠이 고사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
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 흠이 갈령도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얼
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하였다.
복신 등은, 인원 등이 성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 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당 용삭) 2년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
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
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증파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새벽에 입성하여 8백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
통되었다. 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 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주, 청주, 내주, 해주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 장군 손 인사에게 이 군사를 주어 바다를 건너 인원의 군사를 보충하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 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
로 굴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
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 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
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
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
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왕 김 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 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 융은 수군
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
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
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 때 왕 부여 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
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당 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
다. 왕자 부여 충승과 충지 등이 부여 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고, 지 수신이 혼
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 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 정
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이 이길 수 없었
다. 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
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얻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과 지모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니,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인궤로 하여금 그곳에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영락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인궤가 이 때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며,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가설하고, 제방을 수축하고, 저수지를 복구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
인을 양육하게 하였으며, 당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과 묘휘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각각 자
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 나라 임금이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
된 감정을 풀고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인덕 2년, 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었으며,
이것을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 신라 종묘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기]에 보인
다.
인원 등이 귀국하니, 융은 군사가 흩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또한 당 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당 의봉 년간
에 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곧이어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 때 신라가 강성하여지니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
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 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
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