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님의 돕는 자
2024.10.13. 주일오전예배
‘봄 쭈꾸미, 가을 낙지’ 계절에 맞는 먹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을이 깊어 가는 이때는 군 섬김의 계절입니다. 군부대 섬김에 임하면서 이 시간 ‘내 주님의 돕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준비가 잘 되어있으면 섬김은 쉽습니다.
저는 여리고 성 전투와 1, 2차 아이 성 전투를 기억해보았습니다. 유익이 참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참된 준비 속에 힘찬 동행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전쟁을 허락하실 때에는 저들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지금의 우리들은 준비를 철저히 해야 될 줄 압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길갈에서부터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길갈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의 입구에 있는 지역입니다. 요단강을 배수진으로 치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물러나면 요단강이다. 주님 의지하고 나아갈 뿐이다. 그러나 그 길갈에서 내 육적 자아를 베어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강한 추구 속에 주님을 바라보고 깊은 묵상 속에서 주님의 양식을 먹고 주님이 주시는 작은 헤아림을 생각해보는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큰 성입니다. 그 성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루하루 순간순간 여호수아와 더불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겸손히 내 주님과 동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주님의 백성이라도 조금 일이 잘 풀린다고 교만해서는 큰일 납니다. 여리고 성의 전투 속에 큰 승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고 요한복음 13장처럼 주님 손으로 우리 발을 씻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전투에 임해야 했습니다. 아이 성 전투를 시작하기 앞서서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그 아이 성의 군사들이 수가 적으니까 다 갈 것 없이 이 삼천 명이면 족하겠습니다. 이러한 보고를 할 때 여호수아는 깊이 헤아리지 않고 여리고 성의 승리감에 도취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삼천 명만 내보냈다가 처절하게 패배하고 서른 여섯 명의 형제를 주검으로 받았습니다. 주님께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생각과 판단을 얻어 내는데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과 상관없이 이스라엘이 스스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1차 전투의 패배 후에 하나님의 성막 곧 주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에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과 엎드려서 눈물로 한 밤을 지새우고 있었습니다. “주님 슬픕니다. 위대한 군대가 패배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조금도, 눈꼽 만큼도 여호수아를 위로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패배감에 젖어서 울고 있는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엎드려있느냐? 일어나라! 너희가 패배한 것은 내가 준 명령을 어기고 나와의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었다” 삼천 명 아닌 삼만 명을 보냈어도 아이 성 전투는 지게 되어있습니다. 삼십만 명을 보냈으면 이겼을까요? 그 역시 대패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언약을 어기면 나는 너희들과 함께하지 않겠다.” 무서운 말씀이지요.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에 패배한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정신을 차리고 어디로부터 이러한 패배가 왔는지 지파별로 제비를 뽑을 때 유다 지파 아간의 가족이 뽑혔습니다. 아간이 이실직고를 합니다. 금과 은과 시날산 외투를 숨겼던 것을 다 발각했습니다. 모든 생물은 진멸하고 모든 물건들은 불태워 없애라고 했는데 아간과 그 가족들은 욕심에 범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아간의 가족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성결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략을 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전략에 따라 전투하도록 이끌어가셨습니다. 전쟁에 능하신 주님,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기도가 승리를 결정합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은 이러한 말씀을 남겼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믿음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중국 운남성과 라오스를 가로질러 도도하게 성난 파도처럼 흐르는 루강 계곡을 복음의 계곡으로 바꾼 제임스 O 프레지오 선교사님, 자기 본국, 영국에 계시는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는 팀에게 부탁했습니다. 어떤 말씀을 했습니까? “어머니 첫째도 기도요, 둘째도 기도요, 마지막 셋째도 기도뿐입니다. 기도해주십시오! 주님의 일하심을 따라 돕는 자로 역사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맡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근거로 승리와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님과 살아있는 관계,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하고 열매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토리교회가 군에서 섬기시는 여러 목사님들께 최근에도 회자될 정도로 우리를 많이 기대하고 있답니다. 군 섬김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중요한 일이지요. 교회가 정당한 허락 속에서 움직인다고 해서 자동으로 역사하고 자동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이 긍휼 속에서 일하시도록 말입니다.
로뎀 나무 아래 누워있던 기도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는 도무지 그곳에서는 영적 힘을 쓰지 못하는 패배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땅끝에 있던 무명의 사르밧 과부는 주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끝까지 준행했던 이기는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늘 보좌의 주님을 향해 전심으로 기도했던 중보자들을 기억합니다. 출애굽기 17장에 산 아래 있던 여호수아를 필두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전투하고 있습니다. 산 아래 전투의 승리는 산 위에서 기도하고 있는 그 팔십 노구의 모세가 두 손을 들고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고... 아론과 훌이 곁에서 모세를 붙잡습니다. 날이 새도록 붙잡습니다. 결국은 그 세 사람의 중보 기도 때문에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나와 있는 다윗의 용사들, 가족을 다 빼앗긴 후에 주님의 허락 속에 찾아와야 하는데 연약한 형제 이백 명을 브솔 시냇가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백 명의 형제들과 함께 싸워서 승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전리품을 전쟁에 나아가 싸운 형제들이나 남아서 기도했던 형제들이나 똑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똑같이 나누는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연약하다 할지라도 누워있더라도 마음은 일어서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있다고요! 사도행전 12장에 옥에 갇힌 베드로 사도를 위해서 교회는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기도 속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셋째, 살아 있는 편지
사도 바울 선생님이 신실한 형제들과 함께 직접 발로 뛰며 걸으며 먼 곳까지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고 곳곳에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하나님 나라의 부흥을 맛본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섭리 속에 감옥에 갇혔을 때는 주님을 섬기는 일이 중단된 것이 아니였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 사도 바울 선생님은 주님이 주시는 감동,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편지들을 써서 성도들과 주님의 교회들을 은혜 속에 견고하게 세워갔습니다. 고린도교회 같은 교회는 복음에서 벗어난 부끄러운 모습의 교회였으나 사도 바울 선생님이 보내신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통해서 그들이 믿음에 바로 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24절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을 주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너희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고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변화되고 주님과의 관계가 바로 세워지면서 복음의 길에, 하나님 나라의 길에 믿음으로 서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과 여러 사도들이 주님의 감동으로 편지를 쓰고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지금 후대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욱 주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역사하고 계시고 지금도 성서라는 위대한 선물을 교회에 남기셨습니다. 우리 몸 된 교회가 코로나 판데믹 이전에 주님의 허락하심을 따라 가정마다 전방부대로 직접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찬양을 부르고 맛있는 음식도 섬겼던 추억이 생생합니다. 그 역시 주님의 돕는 자로 섬겼던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길이 제한되어서 우리는 가지 못하지만 기도로 마음의 편지를 써서 ‘전선에 부치는 편지’라는 길을 통해서 장병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전과 비교해보면 초라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이 일은 결코 작지 않은 아주 소중한 주님의 일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라는 칭찬을 우리 주님께로부터 들을 수 있도록 내 주님의 돕는 자로 몸 된 교회 식구님들이 힘껏 기도하며 신실하게 군부대 섬김을 깨어 섬겨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