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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 미상∼1362) 傳 - 송환기(宋煥箕, 1728∼1807)
고종(高宗, 1852~1919) 년간 간행된 송환기(宋煥箕, 1728~1807)선생의『성담집(性潭集)』30권에 탐진안씨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 미상∼1362) 장군에 대한 글이 있어 여기 옮깁니다.
안우(安祐, 미상∼1362)
고려 말기의 장군. 본관은 탐진(耽津).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낸 원린(元璘)의 아들이다.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최영(崔瑩) 등과 함께 평정하였고, 이듬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원나라에 방물과 황후탄생일의 예물을 바치고 돌아왔다. 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대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서북면부원수로서 홍건적이 침입하여 의주·정주 등지가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 철주에 이르러 소수의 기병으로 분전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 지금의 宣川)에 이르러 수백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다음해 상원수가 되어 재차 침입해온 홍건적을 박주·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나 절령(岊嶺)에서 패하여 개성이 함락되었다. 1361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하에 이방실·김득배(金得培)·이성계(李成桂)·최영·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으로 개경 탈환전에 참전, 적을 거의 섬멸하고 나머지 적을 추격하여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이때 재상 김용(金鏞)과 함께 정세운의 전공을 시기하여 죽였으나,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장군들을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로 소환하자 이에 응하여 복주로 갔으나 중문(中門)에서 김용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
오성군안공전(鰲城君安公傳) a_245_173c
高麗中書平章事安公祐。小字祓都。耽津人。以推忠定亂功封鰲城君。盖當恭愍朝紅巾之亂。乘輿播遷于嶺陬。京城淪沒爲賊窟。公爲都元帥。與副元帥金 得培,李芳實擊賊屢捷。竟得收復舊都。勳業甚大。及其奏捷於福州行在而未達。乃爲奸臣金鏞所惎。酷被槌殺於門外。李芳實,金得培次第就捕而受禍極慘。人皆穪三寃而傷悼不已。直翰林鄭圃隱夢周請王收屍。爲文以祭曰。嗚呼皇天。我罪伊何。嗚呼皇天。此何人哉。盖聞福善禍淫者天也。賞善罰惡者人也。天人雖殊。其理則一。古人有言曰天定勝人。人衆勝天。天定勝人。果何理也。人衆勝天。亦何理也。往者紅冦闌入。乘輿播越。國家之命。危如懸綫。惟公首倡大義。遠近響應。身出萬死之計。克復三韓之業。凡今之 人。食於斯寢於斯。伊誰之功歟。雖有其罪。以功掩之可也。罪重於功。必使歸服其罪。然後誅之可也。奈何汗馬未乾。凱歌未罷。遂使泰山之功。轉爲鋒刃之血歟。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吾知其忠魂壯魄。千秋萬歲。必飮泣於九泉之下。嗚呼命也。如之何如之何。公之子與李芳實子中文甫十許歲。共遊市街。人爭以物餽之曰今我輩獲安寢食。三元帥之功也。至有垂涕者。我太祖命立崇義殿於麻田郡。以祭麗太祖。而卜智謙以下諸名臣列次配享。公與金得培,李芳實皆與焉。豈不偉哉。公之遺蹟。雖眇綿無以 作昞。而若其立朝事業。昭載彤史者。奚特此也。大節如此。餘皆可推而知矣。觀其後承之趾美者多。則亦有以徵其垂裕甚盛也夫。公有一男顯兵判。玄孫三人。長起號平村。次止號皋隱。季逸號嘯臯也。平村行義夙著。累被除命。歷典州縣。茂績異凡。參佐翼原從功。詞章贍敏。扈駕時有應製詩載於東文選。世多傳誦。皋隱文章德學。與平村,嘯臯難爲弟兄。早闡大科。以提學承上命。與鄭麟趾諸公。述龍飛御天歌。前後奉敎撰者頗多。敭歷淸顯。典文衡掌兩銓。陞秩輔國。恩寵甚隆。卒謚文靖公。嘯臯卽當世隱 遯之士。而淸操高標。甚爲識者所愛重。後人之誦慕久而不已。至若平村之玄孫勿齋義以李一齋恒門人。有篤行明識。當壬辰亂。奮不顧身。馳檄倡義。往奉聖祖御容于井邑之深山中。經歲守護。及以朝命移奉於行在。乃間關自致。而䟽陳中興六策。優被睿奬。授六品職。其忠義之卓。尤豈非有光于先烈歟。謹按鰲城君卓絶之功。實我東士民雖至異代而終不可諼者也。當時恭愍所謂割肌膚尙不能報者也。豈不信矣乎。本朝梁文襄公誠之奏請立武成王廟。依文廟制度。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 德。高麗之庾黔弼等十四人配享。而公乃在其中。於戱盛矣。凡在後裔。何憂其始終徽蹟。久而湮晦也。公之十六世孫處命編成家乘。而德業之隆。肇自公矣。覽斯者其孰不興感於百世之下哉。
송환기(宋煥箕, 1728∼180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인상(寅相)의 아들이다.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때부터 《태극도설》·《역학계몽》·《가례》 등을 배웠다. 1766년(영조 42) 진사가 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99년(정조 23)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가 되고, 사헌부지평·사헌부장령·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807년(순조 7) 형조참의·예조참판, 1808년 공조판서, 1811년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당시 심성(心性)의 변(辨)으로 성리학계에서 논쟁을 벌일 때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저서로는 《성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