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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김 성 한
1
현준(玄峻)이 죽었다.
그와 나는 죽마고우요 사십고개를 넘을 때까지 서로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던 처지였다. 학교도 같고 졸업 후의 직장도 그의 주선으로 같은 대학에 근무하였다.
그러던 것이 6.25사변 후 그의 소식이 묘연하였다. 들리는 말로는 죽었다고도 하고 어디서 본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으나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방향이 있는지라, 친구를 그리는 서운한 추억도 차츰 희미해 가고 나는 나대로 나의 길읕 걸어왔다. 사실인즉 사변읕 계기로 나는 사람이 달라졌다. 떨어진 가방 속에 가치니 실재니 사생관이니 하는 선철의 이론과 내 머리에서 짜낸 보잘 것 없는 의견을 첨부한 노트를 집어넣어 가지고 후생을 양성도야하노라 하였고, 내 딴에는 마음속으로는 일세의 목탁, 만대의 사표를 기약도 하였다. 그러기에 너저분하다, 괴죄죄하다, 훈장을 집어치우라는 충고도 없지 않았으나 그릴 때마다 속세에 초연한 자신을 자랑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사변은 가치의 전도를 가져왔다. 기아와 생사의 백척간두에 선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관념이지 사실은 아니었다. 내가 본 남도 그러하였거니와 총부리가 내 자신을 향했을 때 나는 나를 똑바로 보았다. 허망한 공중에 너펄거리다가 무심한 어린아이의 두 손바닥에 치어서 순식간에 없어지는 하루살이였다.
모든 것은 이 하루살이의 구슬픈 운명을 위무하는 속임수밖에 안 되었다. 위대한 철학세계나, 과학이나,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이 엄연한 사질 앞에서는 어린애 앞에 던져진 노리개에 불과하였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나는 정반대 방향을 걷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닥쳐올 하루살이 운명의 위협을 잊읕 아편이 필요하였다. 치부(致富)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잘 먹고 잘 쓰고 뚱땅거리다가 쓰러지는 순간, 쓰러지면 만사는 끝나는 것이 아니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광산회사를 설립하는 애초부터 상대방의 트집을 잡아서 넘겨지고, 이권을 빼앗고, 이득만 있음직하면 요구하는 대로 술이건 돈이건 계집이건 거리낌 없이 바쳤다. 수없이 굽신거리기도 하였다. 안 나오는 금을 나온다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고 대부도 받았다;
다소의 난관도 없지는 않았으나 나는 성공하였다. 큰 삘딩에 희한한 사무실도 차렸고, 굉장한 짐도 샀고, 자가용도 샀다. 마음에 틈만 생기면 춤추고 먹고 마셨다. 과연 부는 최상의 아편이었다. 괴로움이나 죽음은 먼 옛날 얘기로 물러서고 말았다.
가을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기생 혜란(륙蘭)을 정식으로 맞아들인 피로연이 명동 A관에서 열렸다. 적어도 그날 서울 안에 있는 모모한 인사들은 대개 모여들었다. 나는 이날을 일생의 추억으로 삼으려고 글자 그대로 진수성찬을 다하였다. 내 옆에 앉았던 무어라고 하는 박사는 유사 이래 가장 호화로운 잔치라고 속삭였고, 어떤 고관은 일어서 나를 씨이저에 비하고 혜란을 크레오파트라에 비기면서 극구 칭찬하고 술을 부어 우리 두 사람에게 정중히 권하는 것이었다. 시간은 이 지점에서 딱 발을 멈추고, 나와 혜란은 고차의 세계로 승화하였다.
얼근한 기분으로 ㅎᅟᅩᆯ에서는 무도회가 벌어졌다. 악장의 지휘봉이 떨어지자 흘러나오는 가락에 맞춰서 파란 등불 아래 쌍쌍이 춤추는 선남선녀들은 인간 세상의 정수였다. 인간들은 여기 있었다. 나도 혜란과 함께 돌았다. 흘러간 사십여 년은 꿈 같고 앞날은 영원히 찬란하였다. 돌면서 나는 물었다.
“아 유 해피?”
“예에스!”
감격에 홍조된 혜란의 눈에는 눈물까지 고였다. 한바퀴 돌고 나서 그와 나는 긴의자에 기대 앉아 숨을 돌렸다. 화분에 만발한 국화를 만지면서 춤추는 군상을 바라보다가 나는 혜란을 향하였다.
“오늘밤의 기념으루 혜란이한테 푸레센트 하나 해야 할 텐데 뭐가 좋을까?”
혜란은 생긋이 웃으면서 궁리하는 눈치였다.
“생각 안 나?”
나는 다구쳐 물었다.
“……자가용 하나 어때요?”
“자가용이야 있잖아?”
“그래두 혜란이 걸루. 맨날 같이 탈 수야 있나.”
“요씨, 오케.”
나는 한 손으로 혜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는 바싹 몸을 기대왔다.
“사람은 죽으면 고만 아니예요? 우리 정말 멋들어지게 삽시다, 네?”
“물론이지.”
나는 껴안은 손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혜란도 슬며시 한 팔을 내 허리에 두르고 미소를 띠운 얼굴로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집어삼키고 싶도록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그 자세로 황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오직 우리 둘만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탁자에 놓은 커피잔에 손을 가져가노라 얼굴을 돌리니, 어느새 왔는지 뽀이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손님이 오셨는뎁쇼.”
뽀이는 두 손을 마주 비비면서 문간을 가리켰다. 입구에는 버티고 서서 이쪽을 주시하는 그림자가 있었다. 꼼짝도 않는 친구였다. 어느 사원이 급한 연락으로 왔으리라 생각하고 일어서 가까이 갔다. 사원은 아니었다. 작업복에 허름한 군모를 푹 눌러 쓴 검은 얼굴은 입을 한 일 자로 다물고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보따리를 걸머지고 지팡이를 짚었다. 색등 아래 몽롱한 내 눈은 얼른 알아보지 못 하였다.
“뉘 신데요?”
동냥 온 상이군인인 듯도 하여 호주머니를 만지락거리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사나이는 한 걸음 바싹 다가서면서 모자를 쓱 벗었다. 현준이었다. 나는 졸연간에 말문이 막혔다. 그냥 부등켜 안았다. 불빛에 그의 눈이 반짝하였다. 내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살아 있었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짜고짜 그를 끌어들이기 시작하였다. 몇 걸음 옮기다가 혜란의 시선과 부딪쳤다. 나는 움찔하였다. 땀냄새가 확 풍겼다. 순간 나는 생각을 돌렸다.
“가만 있자 시장하겠네, 우선 요길 해야지.
옆에서 쏘아보는 현준을 그냥 끌고 식다으로 들어갔다. 안 먹겠다는 식나서 억지로 주문하고 나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어찌된 일인가?”
“보는 대룰세.”
“오십을 넘겨다보는 사람두 전쟁인가?”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
“하여튼 장하네.”
그는 말똥말똥 건너다볼 뿐 말이 없었다. 어딘지 나를 놀리는 듯도 하고 어색도 하여서 다시 말을 던졌다
“오늘은…….”
그는 단박 가로막았다.
“소문 다 들었어. 사실 여부를 보러 왔을 뿐이야.”
가슴을 쿡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는 또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이쪽에서 입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빛나는 그의 두 눈 아래 나는 확실히 한수 지고 있었다.
“그래 이제부터 어떠컬 작정인가? 무얼 하면 나하구……?
“우선 제살 지내야겠네.“
“제사라니?”
“박경석(朴敬錫)이가 죽었다니 말이야.”
박경석이는 내 이름이다. 가슴이 뜨끔하였다. 다음 순간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들었다.
“이 사람 내 말을 들어 보게……”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에 듣지, 인젠 가야겠어.”
“식사두 안하구?”
그는 대답도 않고 보따리를 냉큼 쥐면서 문 쪽을 향하였다.
“이럴 수 있나? 영영 이별인가?”
“아냐, 만날 때두 있겠지.”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둠 속으로 절룸거리면서 사라졌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의 구두소리가 안 들릴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직도 탈피 못한 존재로구나.”
혼자 뇌까리면서 회장에 돌아온 나는 한층 더 열광적으로 춤추며 돌아갔다.
2
한동안 소식이 없던 그의 이름을 새로 나온 《창세기》라는 잡지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다. 창간사 밑에 대표 현준이라고 있었다.
……구약의 창세기가 제1차라면 우리는 지금 제2차의 창세기를 맞이하고 있다. 혼돈은 질서를 예기한다. 이천년 축적된 자재는 바로 옆에 있다. 신은 우리 자신이다……
첫머리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나는 친구의 의리로 보아서도 이 광신을 충고 시정할 책임을 느꼈다. 이튿날 오후 주소를 찾아드니, 헐어빠진 적산 이층에 책상을 놓고 혼자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고는 역시 반감게 웃으면서 붓을 멈추고 일어섰다.
“완전히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숨이 팔딱이는 모양이군.”
이것이 첫말이었다.
이번에는 단단히 각오하고 온지라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기로 하였다.
“미치광이가 따루 있나? 바루 자네 같은 것이 미치광일세.”
“허어 이거 완천정히 죽었군. 가망 없는데.”
자리에 앉으면서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나는 의자를 끌고 바짝 다가앉으면서 따지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미치광이가 성한다더니반 하필 자네가 미칠 거야 무엔가? 내 말 들어 보게, 총알에 맞으면 죽지?”
“죽지 그럼.”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죽으면 썩지?”
“썩지.”
“수소탄 두 개면 삼천만이 몰살되구 오천년 역사구 뭐구 날아가 버리지?”
“그렇지.”
“맛있는 고기는 맛있지?”
“그런 건 왜 물어?”
그는 눈을 부룹떴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맛있지?”
나는 한수 더 뜨느라고 뻗댔다.
“맛있지.”
“잘 먹구 잘 쓰면 좋지?”
“알았다, 먹구 마시다가 죽으면 그만이라 이거지?”
“죽을 때 숨막히긴 일반 아냐? 지금이 어느 때라구. 역사는 흐르는 거지 만드는 건 아냐. 정신 차려.”
“응?”
책상을 가볍게 치는 그의 눈이 빛났다.
“응?”
나도 책상을 쳤다.
“왜 총이나 수소탄에 맞는 것만 생각하구 쏘는 건 못 생각하느냐 말이다!”
“꿈을 꾸지 마라. 수소탄은 누가 가졌구 누구를 향했는지 아직두 몰라?”
나도 지지 않았다.
그는 저물어 가는 창밖을 오랫동안 주시하다가 일어서서 전등불을 켜고 나를 향하여 앉으면서 조용히 말을 시작하였다.
“난국에서 얻은 교훈이 두 가지 있다면 자네가 그 하나를 얻구, 내가 다른 하나를 얻은 모양일세. 나두 자네 못지않게 생사지경을 방황했네. 모르는 배 아니야…… 그러나……”
“그것은 가정(假定)이지.”
나는 얼른 가로막았다.
“공동의 가정은 진리가 되지.”
“때가 지나면 무너질 거 아냐?”
“경우에 따라서는.”
“허무와 허무 사이를 팔딱이면서 넘어가는 것이 인간이 아니야? 조작은 집어치구 이 틀림없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옳잖을까?”
“그래서?”
“각각으로 닥쳐오는 내 운명 앞에선 먹고 마시고 잊어버리지 않을 수 없단 말이야.”
그는 물끄러미 나를 보면서 일어서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무슨 말을 할 듯하였으나 입을 닫아매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시장도 하고 그를 꺾을 수 있음직하지 않아서 모자를 들고 일어서면서 한마디 던졌다.
―그래서 결국 어쩐단 말인가?”
“역사는 각각의 우연과 몇 개 영웅적 행위로 창조된다. 신화가 바로 지금 전개중이란 걸 알아야지.”
“신화?”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돌아서 빈정댔다.
“신두 먹어야 살 거 아닌가? 저녁하러 가세.”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절룹거리면서 창을 닫았다.
나는 다시 한번 권하였다.
“저녁 안할 텐가?”
그는 역시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나는 어두운 층층대를 더듬어 내려왔다.
3
그렇게 통분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혜란이가 도망간 것이다.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다. 포근한 이불 속에서 나는 혜란이한테 넘어갔다. 시국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거니와 화폐가치가 매일 뚝뚝 떨어지는데 돈을 은행에서 잠재우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구나 재작년 같은 화폐개혁이 일어나면 쫄딱 망하는 판이 아니냐고 하길래 그것도 그럴싸해서 이튿날 당장에 몽땅 찾아다가 딸라로 바꿔서 혜란이한테 맡겼다. 그는 달라붙어 쪽 키쯔를 하였다. 나도 잘한 것만 같았다.
사흘 후였다.
점심 먹으러 돌아와 차에서 내리며 보니 혜란이 차가 안 보였다. 점심때는 반드시 집에서 손수 요리하는 그였다. 할멈만 나왔다.
“혜란인 어디 갔어?”
“인천에 있는 친구 결혼식에 가신다구, 어찌면 오늘 못 올는지두 모른다구 여쭤 달라구 하시던데”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서 미리부터 얘기할 것이지 뭐냐? 고 할멈을 닦아세우고 선자리로 나와 버렸다.
허전한 김에 술을 밤껏 마시고 밤늦게 돌아갔다. 통행금지가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할멈을 불러세워 놓고 한바탕 야단을 쳤으나 속이 풀리지 않아, 침대 밑에 둔 위스키를 꺼내 가지고 병째로 들이켰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마시고 자리에 쓰러졌다.
눈을 뜬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혜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할멈을 불러 무릎을 꿇어앉히고 주먹으로 온돌 바탁을 치면서 호통하였다.
“늙은 것이 응, 무슨 주책이야? 노망두 유분수지.”
말 나가는 태로 두서없이 꾸짖었다. 할멈은 입만 벌렸다.
“멍하니 있지 말구 술상 채려 와, 술상. ”
또 술을 양껏 마시고 쓰러졌다.
이번에 잠을 깬 것은 밤 열두시가 지나서였다. 달빛에 휜한 챵살을 쳐다보면서 아무리 생각하여도 허전했다. 또 술을 마실 양으로 일어나 앉노라니까 이상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부리나케 일어서 단스를 열어젖혔다.
돈은 모조리 없어졌다.
나는 펄쩍 뛰었다.
자는 할멈을 잡아 깨워 가지고 족쳤다.
“여깃 돈은 어쨌느냐 말이다!”
“돈이라께?”
“돈 몰라 돈? 여기 넣어둔 돈 만 불을 어쨌냐 말이다!”
할멈은 어쩔 줄 모르고 벌벌 떨었다.
“바른대루 말해!”
“즈 즈 증말 몰라요. 돈이라께.”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보기가 싫었다. 물러가라고 고함을 지르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세상에 이럴 법이 있나. 온몸이 막 떨렸다. 혜란이가 눈앞에 얼씬만 하면 오찰을 해서 죽이고 싶었다. 술을 들이켜도 취하지 않았다.
뜬눈으로 밥을 새우다가 해뜰 무렵에 기진맥진해서 어렴풋이 잠들었으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할멈이었다.
“왜 이 법석이야!”
나는 짜증을 냈다.
“안에서 부산에 계시대요.”
“뭐 부산? 누가 그래?”
나는 뛰어 일어났다.
“옆엣집 창수 아버지가 지금 부산서 올라왔는데 운전수하고 미진호텔서 나오는 걸 봤대요.”
가슴에서 불이 났다. 당장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밖으로 튀어났다. 당장 일어나서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밖으로 튀어나가 차에 들어앉으면서 ‘부산!’ 하고 소리를 질렀다. ‘부산?’ 하고 반문하는 운전수에게 ‘부산 몰라, 부산’ 하고 야단법석하였다. 차칸에서노 견딜 수가 없었다. 빨리 가라고 운전수만 녹여 댔다.
어두워서야 부산에 도착하였다. 미진호텔에 들어서 객보를 뒤쳤으나 그런 이름은 없었다. 분명히 있을 텐데 감추는 거 아니냐고 억설까지 하였다. 이러지러하게 생긴 여자 말이라고 발을 구르니 그제서야 ‘대동무역 사장 부인 말이냐’고 했다.
‘뭐 대동무역?’ ‘나이 삼십 남짓한 서양 사람 같이 생긴 미남자 사장 말입니다’ 하였다. 틀림없이 운전수였다. 터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해 가면서 지금 있느냐고 물으니 두 분 다 어젯밤 홍콩으로 떠났다는 얘기였다. 홍콩이 무슨 홍콩이냐고 달려나와서 그 길로 경찰에 연락하고 여관에 들었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있을 만한 곳은 어디나 뒤졌다. 경찰에서는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열흘이 지나고 보니 나는 쪽 빠진 것이 백골같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지쳐서 자리에 드러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일주일 후에 동경서 편지가 왔다. 주소도 없이 동경이라고만 쓰고 운전수와 혜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미리 꾸민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당신은 남의 재산뿐만 아니라 청춘의 약탈자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남에게 베푼 그 윤리를 당신 자신에게 베풀었다 해서 크게 죄될 것은 없지 않을까요?
부수비벼서 화로에 파묻고 방바닥에 뒹굴었다. 몸만 회복하면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동경까지 쫓아가서 뼈를 갈아마시고야 말겠다고 맹세하였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차츰 몸은 회복되어 갔으나 우선 이 마음의 상처를 어디에다 호소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심사였다.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괴벽스럽기는 하나 역시 현준이밖에 없었다.
4
문에 들어서니 그는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다. 가까이 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배짝 마른 얼굴에 두 눈만 덩실하게 크고 몹시 피로해 보였다.
“웬 일인가?”
“얘기나 할려구 왔네.”
권하는 의자에 앉았으나 막상 얘기하려고 드니 쑥스럼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큰소리 친 후라 좀처럼 입이 안 떨어졌다. 그련데 지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냈다.
“자네 부인 도망쳤다지?”
“어떻게 아나?”
태연을 가장하면서도 속으로는 놀랐다.
“서울 장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는 줄 아논가?”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은 답답한 심정을 호소하러 왔네……”
나는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왕 나온 말이라 앓던 이를 빼는 셈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얘기하였다.
"……그까짓 만불쯤 잃었다구 사업을 못할 내가 아니지만, 어디 기분이 나야지.”
이렇게 끝을 맺었다.
눈도 별로 깜박이지 않고 듣고만 있던 그는 쓱 일어서면서,
“대표적이군.”
하고는 옆에 세웠던 지팡이로 내 머리를 한대 딱 갈겼다.
나는 화가 나서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곤경에 빠진 친구를 위로는 못할망정 몽둥이질이 다 뭐야! ”
무뚝뚝한 얼굴에 웃음도 띠우지 않고 그는 지팡이를 책상 위에 놓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한 손으로 지팡이를 잡아채었다. 힘껏 갈겨주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구석지에 냅다 동댕이치고 나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미치광이 얘긴 듣기두 싫다!”
나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쓴웃음을 짓고 벽에 걸린 외투를 벗겨 몸에 걸치면서 나를 정시하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었다.
“쓰레기로구나!”
“친구두 모르구 괴상망칙 한 수작만 부리는 자네가 껍대길 홀랑 벗고 나서 보게!”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대여섯 번 갈기고 나와 버렸다.
그 후로는 한번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고 그도 물론 찾아오지 않았다. 혜란에 대한 미련도 차츰 사라지자 나는 또다시 사업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별로 그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를 생각하는 일도 그다지 없었다.
다만 금년 설날에 비교적 장시간 그를 생각한 일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우연이었다. 세말 선물로 받은 매를 싼 종이조각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한 것 이었다. 창세기라는 잡지장이었을 것이다. 나는 따끈따끈한 온돌 바닥에 배를 붙이고 찢어진 종이에 남아 있는 부분을 읽어 보았다.
……모든 것은 가정에서 출발한다. 기도를 가상(嘉賞) 할 신은 이미 죽었다. 이 창세기의 제일 과업은 새로운 신의 출현이다.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늙은 노예들은 허깨비로 화한 옛 신의 사당에서 절망을 부르짖고 넓은 벌판에서는 새로운 신들이 머리를 들고 있다. 그들은 오직 자기완결의 아들 딸의 머리속에서 가정의 주인공이 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먼동이 트면……
앞뒤가 잘라진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눈을 감으니 그의 환상이 떠올랐다. 광채 나는 두 눈으로 쏘아보는 그의 모습. 나는 허망하고 그에게는 어떤 알맹이가 있는 듯도 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였다. 설날도 지나고 봄이 와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고 나도 구태여 찾아갈 생각은 없었다. 따라서 그와 그의 일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알 길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신문을 보고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인사란에 창세기 대표자 현준이 뇌빈혈로 급서하였다는 조그만 기사였다. 가슴이 이상해지고 다음 순간 나는 목을 놓아 울었다. 괴물이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괴물이었다.
적어도 나는 이 순간 그렇게 느꼈고 애석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지금 그의 관을 어루만지고 있다. 조객도 없는 이층의 이 다다미방에서는 관 속에 든 그와 옆에 앉아 있는 나의 그림자만이 우두커니 벽에 걸려 있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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