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편
건설자와 파괴자
요절: 35절
내용 관찰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계시록에서 완성되는 구속사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시오. 구속의 역사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등장하고 있는데 세우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입니다. 구속의 역사를 세우는데 수종 들다 고난을 받는 자들은 신구약을 물론하고 주인공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히11:26). 그래서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7)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그리스도가 당하실 고난을 예표적으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9편에는 신약성경에서 인용하여 그리스도에게서 응하여진 예언적인 말씀이었음이 증거된 귀절이 무려 다섯 곳이나 됩니다(4,9,21,22,24). 4절의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는 요한복음 15:25에, 21절의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는 요한복음 19:28-29에서 응하여졌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한마디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9) 로 표현될 수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2:17에서 주님께 인용되고 있는데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한 열성 즉 구속의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한 열성이었던 것입니다.
69편의 핵심은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한 35절입니다. 원수들은 멸망시키고 파괴하려 하나 하나님은 '구원'하시고 '건설'해 나가십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해집니까 18절에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를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하고 있는데 "구속하시며" "속량하심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31)으로는 불가능함을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40:6에 보면 다윗은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51:16에서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31절에서도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과 속량만이 시온을 구원하시며 유다 성읍을 건설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69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토록 예언적으로 강조된 이유입니다.
건설하신 그곳에 "무리가 거기 살며"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살리로다"(35-36)고 "거하게 됨”이 거듭 강조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할 집을 예비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또한 가셨습니다.
반면 구속의 역사를 파괴하려는 자들은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25) 하고 거함이 불가능하게 됨을 말씀합니다. 이는 사도행전 1:16, 20에 의하여 가롯 유다에게 응하여졌고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22)는 로마서 11:9에 인용되어 주를 배척한 자들에게 적용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69편의 주인공은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6) 하고 주를 바라는 모든 자들의 대표자로서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대표자로서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는 자 곧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를 인하여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합니다. 수치를 당하기는 커녕 그가 구원하시고 건설하신 도성에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입니다.
묵상해 봅시다.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절들은 어느 것들입니까?
69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구속의 역사를 위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의 종말이 어떻게 다릅니까?
적용: 구속의 역사에 쓰임 받고 있는 형제에게도 같은 싸움 같은 고난이 있음을 명심하십시오.빌(1:30)
암송: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35)
제 70 편
s.o.s.
요절: 5절
내용 관찰
70편은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 하고 긴급한 구원을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전체가 다섯 절 밖에 안되는 짧은 시속에 ‘속히'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고 이 시는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요청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누구로부터 무엇을 구해 달리는 호소입니까. 2절을 보시면 "나의 영혼을 찾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70편의 호소는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시는 영적인 S.O.S(save our souls)입니다. 마치 조난 당한 배에서 타전된 마지막 전문과도 같습니다. 서론도 없고 감사와 찬양으로 끝맺는 결론 부분도 없이 "속히 나를 도우소서"하고 타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0편의 긴급한 구원요청은 신학적인 문제요 "주를 찾는 모든 자"(4)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이러한 시기가 네 번 있습니다. 첫 번은 애굽에서의 구원요청입니다.(출2:23)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자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출해 내셨습니다
두 번째는 바벨론 포로 중에서의 구원요청입니다.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딘9:19)하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셔서 그들을 돌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예표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5)하고 간구하고 있는데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임하신 임마누엘 사건이었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 이 구원이야말로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의 구원인 것입니다.
마지막 또 한 번의 구원요청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입니다. 피조물들도 고대하며 성도들도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롬8:19-23).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문제는 성도들이 얼마만큼 주의 재림을 갈망하며 고대하고 있느냐 입니다. 기다리다가 지쳐있는 것은 아닙니까? 잠이 든 것은 아닙니까? ’주님 속히 오시지 아니하셔도 괜찮습니다‘하고 너무나 세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마라나타.
묵상해 봅시다.
70편은 어떤 상황입니까?
누구에 의한 위급함입니까?
그들을 도와주고 건져 주실 분은 누구이십니까?
적용 또 하나의 s.o.s를 들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의 구원요청입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보내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
암송: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