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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724년, 아미따 삼존불 금칠하고 염불하다 극락 간 선사 무용당
경종 4년 (1724)
영해 약탄(影海若坦), 『무용당유고(無用堂遺稿)』
「무용당대선사행장(無用堂大禪師行狀)」
무용당 대선사의 행장
선사의 법명은 수연 秀演, 자는 무용無用이다. 멀고 가까운 승속이 모두 ’무용‘으로 집 이름(軒號)을 삼았기 때문에 그대로 호를 삼았다. 속성은 오씨이고 용안龍安 사람이다.
고리(高麗) 태위문양공 연총延寵의 후손으로 집안이 끊이지 않고 조선까지 내려와 증조부 하몽下蒙은 통훈대부행정의通訓大夫行旋義와 무안 등에서 현감을 지냈고, 할아버지 응정應鼎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순천부사行順天府使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한성 좌윤에 이르렀으며, 아버지 섬무暹武는 절행벽단첨사節行碧團僉使를 지냈다.
누런 무늬 큰 곤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공중에 올라가다가 조금 뒤에 다시 떨어져 방 주의를 몇 겹으로 에워싸는 꿈을 꾸고 선사를 배어 순치 8년 (1651, 효종 2) 신묘년 3월 13일 경인 선사를 낳았다. 선사는 태어날 적에 특이하게도 체구가 깔끔하고 머리끝이 우뚝 솟았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말수가 적었다.
나이가 갓 여덟 살이 되었을 적 책과 역사를 읽기 시작하면서 한두 번 읽고는 곧바로 외웠으며 그 뜻을 남김없이 알아내었다. 아, 나이 13세에 느닷없이 부모를 여의고 오직 형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곤궁하고 외로운 처지에서도 삼분오전三墳五典과 제자백가 등을 모두 모아 보면서 글귀를 뽑아 글이나 짓는 작태는 조금도 없었으므로 이로 인해 이름이 원근에 널리 퍼졌다.
나이 19세가 되자 덧없는 인생이 순식간임을 살피고 출가할 큰 뜻을 내었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형에게 알리지도 않고 빠져나와 남쪽 길을 향하다가 우연히 조계산 송광사에 들어가서 혜관 노사惠貫老師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산 혜공慧空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선사는 체격이 장대하고 얼굴이 방정하였으며, 가슴속이 시원하고 깨끗하여 남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도道만 따르고 명리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었다.
나이 22세가 되었을 적에 양사養師 “예로부터 대도를 통하고, 깊은 근원을 깨닫는 자는 선禪과 교敎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문에 전념한다면 이치상 옳겠는가?”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바로 태도를 고쳤다. 처음에 침굉枕肱의 문하에 나아가서 한 번 현음玄音을 듣고는 다시 일러 주지 않아도 통달하였으므로, 침굉이 “원돈 圓頓 법계가 온전히 너에게 있다”라고 찬탄하였다. 다시 옷을 떨치고 백운산의 백운암에 들어가서 1년 동안 정혜定慧를 닦았다.
26세에 침굉의 부탁을 받고 조계 은적암으로 백암栢庵을 찾아갔는데, 백암이 한 번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겨 문도에게 “이 사람은 옛 성현의 자리를 빼앗고 불법의 문을 활짝 열 것이다”라고 말하니, 문도가 모두 경외하였다. 선사가 이로 인해 여기에 주석하였는데, 경전을 가지고 토론할 때마다 의견이 합치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새로 깨닫게 되는 점도 더욱 많았다. 그래서 몇 년 사이에 장경을 모두 섭렵하고는 용문산으로 이주하여 다시 내관內關을 닦았다.
경신년(1680, 숙종 6) 가을에 금화동 신불암新佛庵에 먼저 머물고 있던 선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매우 간절히 요청하자 선사가 그 인연에 응하였는데, 새로 참여한 자들이 또 많아서 그 장소가 비좁았으므로 본사 미타전彌陀殿으로 옮겼다.
또 임술년(1682, 숙종 8) 가을에는 선암사의 요청에 응하고, 계해년(1683, 숙종 9) 여름에는 또 송광사의 요청에 응하였다.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자신 일에 방해가 되자, 밤중에 희양산의 옛 거처인 백운암으로 몸을 피해 정혜 수행에 더욱 힘썼다.
또 이듬해 봄에는 팔영산 제칠봉 아래로 거처를 옮긴 뒤에 빈터를 하나 얻어 띠 풀을 베어서 지붕을 얹고는 선관禪關을 정밀히 닦아 슬기로운 깨달음이 더욱 빛났다.
병인년(1686, 숙종 12)에는 또 대중의 청을 어기기 어려워 본사 능인전으로 옮겨 머물었다.
무진년(1688, 숙종 14)에 조계로 가서 다시 백암을 뵙고 『화엄소초華嚴疏鈔』를 받아 자세히 탐구하고 깊은 뜻을 찾아내어 그 고갱이를 모두 터득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 15) 봄에 백암이 징광사로 가서 『화엄연의華嚴演義』 및 『대명법수大明法數』 · 『간정기刊定記』 · 『정토서淨土書』 등을 펴내 사람과 하늘의 눈을 열어 주려 할 때 선사도 함께 그 일을 도왔다.
임신년(1692, 숙종 18) 봄에 선암사의 선오禪伍가 백암을 청하여 화엄회를 크게 베풀자 사부대중이 노루를 쫓듯 몰려갔는데 선사도 따라갔다. 그해 늦겨울에 백암이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기자 선사도 본사의 창파각滄波閣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때 대중 숫자가 100명에 이르렀다. 갑술년(1694, 숙종 20) 봄에 요청에 응해 송광사 은적암에 머물렀다. 기묘년(1699, 숙종 25)에 요청을 받고 동리산으로 갔다.
경진년(1700, 숙종 26) 7월에 백암이 지리산 신흥사에 머물다가 입적하자, 선사가 부음을 듣고 달려가 소리 내 울었다. 초 7일에 다비하고 나서 대중이 강석講席을 이어받기를 청했으나 선사가 겸양하며 거절하였는데, 대중이 더욱 간절히 청하자 비로소 문을 열도록 허락하였다. 이듬해 봄에 칠불암으로 갔는데 선승과 교학 승들이 더욱 많이 몰려왔다. 그래서 낮에는 강의하고 밤에는 참선하면서 남을 지도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일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갑신년(1704, 숙종 30) 봄에 갑자기 대중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부질없이 혀를 놀리기보다는 마음을 기울여 염불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옷자락을 떨치고서 용문 응봉암에 거하였다. 이로부터 가르치기도 하고, 그만두기도 하는 등 일정하게 따르는 기준이 전혀 없었는데, 학도가 추종하는 것이 마치 새들이 난새가 날아가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과 같았다.
경인년(1710, 숙종 36) 봄에 산양山陽 개흥사에서 조계 옛 절로 돌아왔다. 그리고 날마다 소리 내 읽고 외는 틈에 절 동쪽 시냇가에 손수 대를 쌓고 수석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는 서문을 지어 그 이름을 해석하였는데, 간추리면 이렇다.
石堅而靜 (석견이정)
돌은 단단하면 고요하니,
吾以慾存心而不動 (오이욕존심이부동)
내가 이를 통해 마음을 붙들어 흔들리지 않게 하려함이요,
水流而淸 (수류이청)
물은 흘러가면 맑으니,
吾以慾應物而無滯 (오이욕응물이무체)
내가 이를 통해 바깥 경계에 대하며 걸림이 없게 하고자 함이다.
이는 바로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든 간에 잡았다 놓았다 하며 걸림이 없어 바깥 경계를 대하는 도리로서, 선현들의 빛을 낳게 하고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었다.
기해년(1719, 숙종 45) 봄에 호남과 영남의 여러 사찰에서 남의 스승이 되고, 이름을 내걸 만한 자들이 3백 명 넘게 대거 이곳에 모여 화엄과 선문에 대해서 강의해 주기를 청하니, 사양하기를, “나 자신이 바르지 못한데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양을 하면 할수록 더욱 열성으로 청하였으므로 법좌에 올라 불자를 휘두르며 심오한 뜻을 설파하는데, 높고 큰 가르침이 끝없이 서로 비치자 강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위엄에 눌러 엎드렸으니, 이 어찌 비인秘印을 전해 받아 허리에 차고 임제 종풍을 크게 드날린 것이 아니겠는가.
아, 여름이 끝날 무렵 가볍게 아프셔 앉아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하였다. 겨울철 10월에 양공良工을 불러 아미따(彌陀) 삼존상에 금칠을 하게 하고는, 17일 병진일 오전 10시쯤 온 마음을 다해 염불을 하다가 왼발을 오른쪽 무릎에 얹고 서거하니, 나이(報齡) 69세요, 하안거가 51세였다.
초칠일 임술일에 절의 백호(우측 산) 밖 오도치悟道峙 아래서 다비하였다. 장례식에 승속이 모두 모였으며, 장례식에 깃발이 이처럼 성대한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불길이 바야흐로 일어날 때 갑자기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나며 숲과 산의 색깔이 변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이듬해 경자녀(1720, 숙종 46) 봄에 문인 낭형朗烱 등이 돌을 쪼아 절의 백호 밖 고봉원高峰原 위에 탑을 세웠으니, 이곳은 바로 선사의 옆이었다.
당시 벼슬하는 인사로서 사귀지 않은 자가 드물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영상 이광좌 李光佐, 대사성 최창대崔昌大, 참판 이진유李眞儒, 교리 임상덕林象德, 최양양崔襄陽 계옹季翁, 김삼연金三淵 창흡昌翕, 황순천黃順天 익재益再 등과 가장 친하게 지내었다.
참선하는 틈틈이 또 곧잘 게송을 읊고 글을 지은 것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정요한 것만 몇 편 간추려서 판각하였다. 선사에게 수업을 받고서 각각 가죽(皮)과 살(肉)과 정수(髓)를 얻어 남의 스승이 되거나 바위굴 깊이 숨어 자기 한 몸을 선하게 하는 제자들이 또한 많은데, 그 이름은 여기에 번거롭게 나열하지 않는다.
소승 약탄(若坦 影海, 1668~1754)은 일찍부터 선사의 문지방을 드나들며 자주 귀한 말씀을 듣고 이 도에 들어올 줄을 안 자이니, 어느 것 하나도 선사께서 귀를 끌어당겨 일러 주시고 손바닥을 가리켜 보여 주신 가르침 아닌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 은혜는 천지와 같았고, 그 정은 골육보다도 더하였으니, 은정이 그러하다면 비록 금수라도 목숨을 바쳐서 그 덕에 보답하려 하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눈물을 훔치고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은 자료를 모아 간행하려 하면서 삼가 이 행장을 쓰는 바이다.
옹정 2년(1724, 영조 원년) 갑진 섣달 ○일
卍 보정의 꼬리말 · 화두 놓고 염불하세 (2)
무용 수연無用秀演(1651~1719)는 비문에서 보듯이 선과 교에 능통하여 임제종의 법통을 빛낸 선사였다. 그러나 스승인 백암당 성총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는 결국 염불문을 선택하게 된다. 스승인 백암이 출가한 지 50년 만인 63세 때 염불하여 극락 가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면 무용은 19살에 출가하여 34년만인 1704년 모든 학인들을 물리치고 염불문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행장에서는 임제종과 화엄을 강조하느라 그 뒤 어떻게 정토를 수련했는지 전혀 기록을 하지 않았지만, 목숨을 다할 때 아미따 삼존불에 금칠하게 하고, 그 삼존상을 바라보며 온 마음을 다해 염불하였으니 그동안 어떻게 정토 수행을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장례식 때 상서로운 구름이 숲과 산을 덮었으니 이는 아미따 붇다가 성인들과 더불어 맞이하여 극락에 간 것이다. 이보다 더 훌륭한 수행자의 삶이 어디 있겠는가!
한 살이 동안 선과 화엄에 통달했지만 결국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 육도를 윤회하게 될 것을 알아차린 무용 스님이 염불문을 골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남은 삶을 염불하여 극락으로 가서 아무런 거침이 없이 수행을 계속하려 한 것은 겸손한 선사만이 할 수 있는 슬기로운 선택이었다. 이는 스승에 이어 이른바 ’화두 놓고 염불하세‘를 실천하는 것이고, 세속에 견주어 말한다면 직장에서 월급 받고 일하면서 연금 넣고 보험에 든 것처럼 탄탄한 설계를 한 것이다. 그리고 사미 때 염불 배우고 수많은 수행과 경전을 공부하다가 결국 다시 염불한다는 ’도로아미따불‘을 제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도로아미따불‘은 이처럼 깊은 도력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결과이지 사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애썼으나 결과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었다.
후학들도 선사들이 틈내서 휘갈긴 선시禪詩 해석하느라 시간 보내지 말고, 몇십 년 수행한 내공으로 거리낌 없이 염불을 골라 삼세의 생사 문제를 푼 고승들의 용기를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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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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