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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 하면 그 무엇보다도 마음에 속병이 없고 근심걱정이 없는 것이 제일입니다.
속병은 화병인데, 요즘 말로 하면 노이로제입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많이 앓던 가슴앓이가 노이로제입니다. 근심걱정은 항상 더 이루려 하고, 더 가지려고 하다 보니 늘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번뇌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취할 취取가 번뇌입니다.
끊임없이 취하려고 해서, 취하려는 마음 때문에 내세에 또 태어납니다. 취하려는 마음이 끊어지면 윤회는 없습니다. 계속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이 번뇌입니다. 요즘 말로 스트레스입니다.
노이로제는 화병이고, 스트레스는 근심걱정입니다. 그러면 근심걱정은 어디서 오느냐?
더 가지려고 하는 데서, 더 받으려고 하는 데서 옵니다. 팔십 먹은 노인도 대중 앞에서 말하라고 하면 긴장하고 떱니다. 잘 보이고 싶어서 떠는 것입니다. 팔십 먹은 노인이 남들한테 잘 보여서 무얼 하겠습니까? 근본적으로 더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취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늘 근심걱정합니다.
무엇을 이루었든지 무엇을 받았든지, 자기가 받은 것을 모르는 게 화병입니다. 노이로제는 자기가 가진 것은 모르고 갖지 못한 것만 생각합니다. 그게 노이로제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없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계속 더 받으려고 하니까 근심걱정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 없이 사는 게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근심걱정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자생력自生力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힘이 없는 데서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자생력을 보려면 나무를 보면 됩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싹이 나는데, 싹과 뿌리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나겠습니까? 반드시 뿌리가 먼저 납니다. 뿌리가 나지 않으면 싹이 못 나옵니다.
뿌리 없는 나무는 없습니다. 뿌리가 깊을수록 줄기가 높습니다. 또 뿌리가 단단할수록 강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태풍이 지나갈 때 보면 소나무는 좀처럼 쓰러지지 않습니다.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카시아나무는 쉽게 넘어갑니다. 아카시아나무는 위로만 위로만 뻗어 가고 밑으로는 들어가지 않으니까 쉽게 쓰러집니다. 뿌리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이 자생력입니다. 산에 올라가 보면 좁은 바위 틈에 소나무가 자랍니다. 소나무 뽀리가 바위를 뚫고 뿌리를 박습니다. 만져 보면 나무가 쇠처럼 단단하고, 추워도 가물어도 안 죽습니다. 이것이 자생력입니다. 그런데 어딘가에 의지하면 자생력이 없어집니다. 자꾸 자식에게 의지하고 남편에게 의지하고 부인에게 의지하다 보면 화병만 생기고 스트레스만 받습니다.
내 뿌리로 내 인생을 키워야 합니다. 자생력이 생기면 항상 자발적으로 움직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늘 스스로 구제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럴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생력이 없고, 자발성自發性이 없고, 자구력自救力이 없으면 남들만 따라다니다가 상처 받습니다. 그 상처 받는 것이 화병입니다. 대부분 남을 원망합니다. 원망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바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리를 스스로 내리지 않고 다른 어딘가에 의지해서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 신문에서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어떤 분에게 명문대를 나와서 고시 공부를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는데, 전화도 잘 받지 않고 전화를 받아도 목소리에 힘이 없었습니다. 걱정이 되어 찾아가 봤더니 아들이 다 죽게 생겼더랍니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여자친구가 명품 가방을 사 달라고 졸랐답니다. 가방을 사 주려고 가격을 알아보니 50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가방 사 줄 돈이 없어서 신장을 팔아서 가방을 사 줬답니다. 신장을 떼고 나니 기운이 없어서 혼자 앓아누운 것입니다. 아들 가진 분들은 아들의 신장이 무사한지 점검해 보십시오. 누구에게 떼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딸 가진 분은 용돈을 넉넉히 주지 않았는데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면 남의 신장을 떼서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아무튼 내 능력만큼 해야 하는데 자기 능력보다 많은 것을 바라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은 돈이 없다. 다음에 돈 많이 벌면 사 줄께." 라고 해도 될 텐데 빨리 사랑을 이루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것은 자생력이 아니라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 주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장기매매 광고를 보고 흥정을 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그 모습을 봤을 때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은 평생 신장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자생력은 없으면서 분위기를 믿거나 시대를 믿거나 또는 다른 사람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주 위험합니다.
둘째, 자존감自尊感이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해 주지 않으면 아주 침울하고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봤을 때 옳은 일을 했으면 옳은 것입니다. 내가 분명히 옳은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몰라 준다고 거기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엄마는 아이가 "엄마 미워!"라고 하면 하루 종일 괴로워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엄마가 해 주지 않아서 기분 나빠서 하는 이야기일뿐입니다.
"엄마 최고!"라고 하면 또 하루 종일 행복해합니다. 어린 아이가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엄마로서 얼마만큼 잘하느냐입니다.
자존감을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면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노이로제도 없습니다. 자존감이 있어야 自强力이 생깁니다. 자강불식自强不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강해서 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강해지려면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 몸, 스스로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자존自尊이 있어야 자강自强을 하고, 자강을 해야 자성自成을 합니다.
내가 스스로를 형편없이 보는데 어떻게 강해지고, 무엇을 이루겠습니까? 자강自强, 자성自成하면 노이로제나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셋째, 자족감自足感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 만족滿足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계속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면 아무리 가져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힘이 행복의 기본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만족하면 오래 산 것이고, 백년을 살아도 '아, 내가 왜 백년밖에 못 사냐?' 하면 자족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소유所有와 자족自足은 다릅니다.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래서 자족이 중요합니다. 오늘 죽어도 '나는 오늘 죽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면 끝입니다.이것이 자족입니다. 자족을 하면 어떤 변화가 와도 항상 만족합니다[變足].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만족합니다. 자족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오든 항상 만족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법문을 하려고 법상에 오르셨습니다. 밑에서 문수보살이 손뼉을 세 번 치면서 "법왕의 법이 이와 같으니라." 라고 하자 부처님이 법문을 하지않고 그냥 내려오셨습니다. 이게 변족變足입니다. 왜냐하면 문수보살이 법문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그 변화를 보고 만족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딸이 어릴 때 서로 헤어졌는데, 생모 자격으로 그 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딸을 키운 부모님과 딸의 사이가 굉장히 친밀하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딸을 찾을 필요가 없다." 고 생각하고 그냥 돌아옵니다. 변화를 보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내가 해야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하든 이루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변족입니다. 변화를 보고 만족해 버리니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그 딸은 생모가 없어도 키워 준 엄마와 친밀도가 깊고 신뢰가 깊어서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서 "내가 진짜 네 엄마다." 라고 돌을 던져 놓으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도인 스님들이 법상에 앉아서 법문할 때, 청중의 질문 내용이 법문한 뜻을 잘 설명했으면 법상에서 그냥 내려옵니다. "왜 내 시간에 끼어드느냐?" 라고 물리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고 내려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날 법문 주제에 부합하는 한마디를 말했으면 그것으로 그 법문이 다 된 것이니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관기이변觀機而變이라고 합니다. 그 조짐을 보고 자기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을 보고 내가 변해 버립니다. 항상 변화하는 데 만족[變足]합니다.
항상 만족합니다[常足]. 있어도 만족하고 없어도 만족합니다.
끝으로 그 다음에는 자각自覺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나는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 나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전부 나를 위해서 사는데 '나는 무엇인가?'입니다. 그런데 나는 단순합니다.
몸을 떠나서 내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면 이 몸이 무엇이냐? 몸 전체가 전부 마음입니다.
코로 숨을 쉬지만 내가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손이 움직이지만 내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발이 걸어가는데 내가 걸어간다고 합니다. 눈이 보지만 내가 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몸에는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는데, 눈도 나이고, 손도 나입니다. 어떤 사람이 손으로 딱 때리면 "당신이 왜 날 때리느냐?"고 합니다. 손이 손이 아니라 나이고, 눈이 눈이 아니라 나입니다. 나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불성이 나입니다.
불성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항상하고 즐겁고 참된 나이고 깨끗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지육신四肢肉身이, 상락아정이 불성이라는 것을 아는 게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자각이 있고, 나아가 각타覺他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각만覺滿, 즉 각이 아주 만족합니다. 각이 만족하다는 것은 무엇이냐?
불성은 무이지성無二之性이라, 둘이 없기 때문에 하늘과 다른 게 아니고 땅과 다른 게 아닙니다. 일체 우주법계가 불성 하나뿐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게 각만입니다.
행복 중에서도 고도의 행복이 자각입니다. 일차원 행복은 자생행복, 이차원 행복은 자존행복, 삼차원 행복은 자족행복입니다. 사차원 행복은 내가 나를 깨닫은 것, 오온 색신이 청정불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들어가면 자각행복입니다. 내가 나를 깨닫습니다.
사지육신이 그대로 불성입니다. 이것이 자각입니다.
불성을 깨달으면 이 세상에 불성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전부가 불성이기 때문에 억울한 마음이 없습니다. 더 받으려고 하는 스트레스도 없습니다. 이것을 부처님의 청정심이라고 합니다. 노이로제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마음이 청정심입니다.
절에서 축원할 때 찬불송讚佛頌을 욉니다.
處世間如虛空 처세간여허공
如蓮華不着水 여연화불착수
心淸淨超於彼 심청정초어피
稽首禮無上尊 계수례무상존
부처님이 세간에 머무시는 것이 허공과 같고
연꽃이 물에 묻지 않는 것과 같다.
마음이 청정하면 가장 뒤어나니
위없는 존귀한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하옵니다.
세상에 머무시는 것이 허공과 같다는 말은 근심걱정이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머무는 것이 허공과 같고 연꽃이 물에 묻지 않는 것보다 마음이 청정한 것이 더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높은 존귀한 부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화병 같은 것이 없고 근심걱정이 없어서 마음이 아주 청정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불성을 깨달아서 유와 무를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둘이 없는 게 불성이니까 모든 것이 한 법계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법계가 아니고 죽느냐 사느냐, 있느냐 없느냐에 매달려 있습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무를 여의고 한 법계를 알면 그게 깨달음입니다. 유무를 여의고 생멸이 없는 일법계一法界를 깨달은 것이 불성입니다. 생사 없는 일법계를 깨달았으면 구할 마음이나 얻지 못했다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이것이 청정심淸淨心이고 불심佛心입니다.
그러면 조사祖師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는가?
『육조단경』에 '자금강自金剛, 본삼매本三昧'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금강이란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가 금강입니다. 금강은 사람이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물에 들어가도 썩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고 해서 금강에 비유했습니다. 불변不變이기 때문에 자금강입니다. 이것이 불성佛性입니다. 불성은 불변입니다.
『육조단경』「남돈북점제칠南頓北漸第七」에 "부증불감자금강不增不減自金剛 신거신래본삼매身去身來本三昧" 라고 했습니다. 불성은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게 자금강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으니 근심걱정이 없습니다. 또 수삼매修三昧와 본삼매本三昧가 있습니다. 마음을 조용히 닦으면 선정에 드는 것을 수삼매라고 합니다.
수삼매는 닦아서 얻는 삼매입니다. 반면 몸이 오고 가는 것이 그대로 삼매인 것이 본삼매입니다.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 자금강임을 깨쳤으니 무슨 근심걱정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자각의 행복, 4차원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제사 지낼 때 쓰는 말씀이 있습니다.
妙體湛然無處所 묘체담연무처소
山河大地現眞光 산하대지현진광
묘한 본체 맑디 맑아 일정 처소 없는데
산하대지 두두물물 청정법신 나타내네.
불성은 미묘한 본체인데, 묘체는 담담湛湛합니다.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고, 유무를 떠나서 처소가 없습니다.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쪽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쪽에 있는 것도 아니고, 처소가 없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도 처소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약 영혼이 있다면 교통사고가 나서 팔 한쪽 떨어져 나갔을 때, 그 영혼이 떨어져 나간 팔에 있었다면 나는 영혼이 없어서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합니다. 그런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예를 들어 밭일을 하다가 보면 지렁이가 삽에 끊어져서 두 토막이 난 채 꿈틀딥니다. 그러면 이 영혼이 이쪽 토막에 있을까, 저쪽 토막에 있을까? 이런 게 미혹한 것입니다. 영혼이 왼쪽 팔에 있다면 왼쪽 팔이 없어지면 오른쪽은 영혼이 없느냐? 그런게 아닙니다.
영혼은 담담해서 형체가 없기 때문에 없는 데가 없습니다.
영혼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머리에도 있고, 팔에도 있고, 손에도 있고, 온몸에 전부 영혼뿐입니다. 그러니까 산하대지 온갖 우주법계가 전부 영혼의 광명을 지금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은 조사들의 깨침입니다. 깨친 눈으로 보면 이 몸 전체가 영혼의 광명이고, 죽고 사는 게 전부 영혼의 광명이고, 우주 만법계가 전부 영혼의 광명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고 알고 극락세계에 빨리 가라고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만 들을 법문이 아니고 산 사람이 들어서 죽기 전에 극락 가야 합니다. 산하대지가 전부 영혼 광명 하나뿐입니다. 이것이 전부 자각의 행복입니다. 자각의 행복은 4차원의 행복이기 때문에 보통 행복과 다릅니다. 이것이 불조佛祖의 행복입니다.
깨닫지 못했으나 복을 많이 지어서 한평생 복을 잘 받고 죽는 것과, 깨달아서 그 깨달은 행복을 누리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중국의 풍혈風穴896~973 선사라는 분이 깨닫지 못하고 그저 사는 동안 잠시 복되게 사는 것은 '맹구치목찰나복盲龜値木刹那福'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 눈 먼 거북이가 바닷속을 떠다니다가 어떻게 어떻게 넓적한 나무토막을 만납니다.
계속 자기 힘으로 헤엄치며 다니다가 나무토막 위에서 잠시 쉬어 보니까 편안하니 좋습니다. 한평생이라고 해 봐야 정말 얼마 안 됩니다. 깨닫지 못하고 한평생 복되게 사는 것은 눈 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나서 잠시 쉬는 한순간의 복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깨달음을 얻은 복은 무엇이냐? '고목생화물외춘枯木生華物外春'이라. 마른 나무에 꽃이 피는 것입니다. 마른 나무는 오온 색신인데, 불성을 깨닫는 순간 여기에서 꽃이 핀다는 말입니다. 사물이라는 것은 유무와 시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러한 제약이 없는 것이 물외物外입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닌 그것을 초월한 세계의 봄소식이 있다고 멋지게 법문을 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고목처럼 말라서 항상 고생덩어리인데, 깨달으면 고목나무에 꽃이 피고 시간과 공간을 떠난 봄소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깨닫느냐?
현전일념現前一念, 지금 나타난 한 생각이 전부입니다. 지금 딱 나타난 듣는 것, 보는 것, 생각나는 것 그것만 찾으면 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볼 때도 '이것이 무엇인가?' 들을 때도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불성 광명光明이 확 퍼져 나옵니다. 그것을 고목에서 꽃이 피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꽃이 피면 사물 밖에 봄입니다.그러니까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이 현재 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늘보다 값이 나가고, 땅보다 값이 나갑니다. 이 세상에 지금 현재 한 생각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게 반야바라밀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청정불성입니다. 그놈을 늘 가지고 있는데 찾지 못해서 늘 생사에 허덕입니다. 그것을 딱 돌아보는 순간에 깨침의 행복의 길이 열립니다.그러니까 항상 내 한 생각을 찾아야 합니다. 누가 보기 싫어도 보기 싫다는 생각만 좇아가지 말고, '보기 싫다는 이 생각 이것이 무엇인가?'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걱정이 돼도 '이 걱정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걱정하는 그놈이 스트레스지만, 그놈이 또 청정불성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공부입니다. 현전일념, 현재 한 생각을 찾는데서 모든 문제가 다 풀립니다. 그것이 부처님, 조사가 느낀 행복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서방정토 극락도사 아미타불()()()

첫댓글 행복이라 하면 그 무엇보다도 마음에 속병이 없고 근심걱정이 없는 것이 제일입니다....지금 딱 나타난 듣는 것, 보는 것, 생각나는 것 그것만 찾으면 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볼 때도 '이것이 무엇인가?' 들을 때도 '이것이 무엇인가?'하면 불성 광명光明이 확 퍼져 나옵니다. 그것을 고목에서 꽃이 피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꽃이 피면 사물 밖에 봄입니다.그러니까 항상 제일 중요한 것이 현재 한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늘보다 값이 나가고, 땅보다 값이 나갑니다. 이 세상에 지금 현재 한 생각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감사합니다 무량공덕이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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