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43인의 대 탈출
수상쩍은 그들은 비 때문에 모두 배의 창고 안에 들어가서 감시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최부는 마음의 결정을 한다. 그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 말이다.
<"저들의 말과 행동거지를 보건대 매우 황당하다. 저 산이 이미 육로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사람 사는 곳과 통하고 있을 것이다. 이때에 잘 처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들의 목숨은 그들의 수중에 놓여 끝내는 반드시 바다 속의 원귀가 될 것이다”>
마침내 그가 부리(部吏) 등을 이끌고 먼저 배에서 내리자 여러 군인들이 잇달아서 배에서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수풀을 헤치며 달아나 고개 두개를 넘었다. 고개에는 모두 해안이 내려다보이고 바위가 마치 담장처럼 쌓여 있었다. 6, 7리 쯤 가자 한 마을의 사(社)가 나타났다. 최부는 부사와 군인들을 다시 불러서는 앞으로 임할 태도를 말했다.
<“(우리는) 생사고락을 같이 하여 골육지친과 다름없으니 지금부터 서로 돕는다면 몸을 보전하여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어려움을 당한다면 같이 그를 구하고, 한 그릇의 밥을 얻는다면 같이 나누어 먹는다. 병이 생기면 같이 그를 돌보아 한사람이라도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자 “모두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으며 “우리나라는 본래 예의지국이니 비록 표류하고 쫓겨 다니는 궁색한 지경이라도 또한 마땅히 예의바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예절이 이와 같음을 알도록 하라. 무릇 이르는 곳마다 부리는 나에게 무릎을 굽혀 절하고, 군인은 부리에게 무릎을 굽혀 절하여 예의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또한 혹 마을 앞에서, 혹 성 안에서 무리지어 와서 보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손을 모아 예를 표하여 감히 제멋대로 행동함이 없게 하라”>
그러자 모두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앞서 말 한대로 조선의 선비로서 중국이라면 어찌 해야 할지를 잘 가늠하고 있었다. 중국은 공자의 나라다. 세상은 뒤바뀌어도 공자의 인과 예로서 말하는 국가관은 다름이 없음을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하고 또 잘 알았다. 공자는 군주가 쥐고 흔드는 모든 것을 다 갖는 것으로서 행하지 못하도록 군주와 백성의 도리를 각각 부여했다. 일국의 조선만해도 창업 당시 정도전은 군주에게 권한 대신 명예를 보다 강조 하였던 것인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 아닌가. 아무튼 한 국가의 법과 질서는 지엄한 것이고 공공으로서 비로소 가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최부였기에 그는 기를 쓰고 사람이 많은 공공의 곳을 향하고 관을 향하여 나가려 한 것이다. 최부가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의 남녀노소가 다투어 괴이하게 여기며 쳐다보는 자가 빙 둘러싸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최부는 종자와 더불어 예로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읍(揖)을 하였다.
그런 최부 일행의 행위에 대하여 과연 그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소매를 모아 몸을 굽히며 답하였다고 글은 적고 있다. 아마 최부는 그 상황에 마음 속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살았다 하면서. 힘을 얻은 최부가 조선으로부터 오게 된 연고를 고하였다.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용모가 범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그들이 말을 했다.
<“그대들이 조선국 사람들이라면 어찌된 연유로 우리나라 경계로 들어오게 된 것인지, 도적인지, 혹 조공을 바치러 온 사람들인지, 혹 풍랑을 만나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들인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낱낱이 써서 가져온다면 여러 곳을 거쳐서 환국토록 하겠습니다.>
이에 힘을 얻은 최부는 조선국 사람으로 왕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 폭풍을 만나 표류를 당하여 해안가에 이르게 되어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인가를 찾아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을 하며 관부에 알려 거의 죽음에 처한 목숨을 구해달라고 힘주어 말을 했다. 그리고는 즉시 가지고 온 인신과 관대, 문서를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이 그것들을 살펴보기를 마치고 앞에 진무 부리 등이 이어서 무릎을 꿇은 것과 끝에 군인 등도 이어서 부복한 것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했다.
<“귀국이 예의지국임을 들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입니다>
그리고는 곧 큰 소리로 가동(家僮)을 불러 미장(米漿. 미음)과 차·술을 가지고 와서 권하였다. 군인들에게도 모두 돌아가게 하여 양껏 마시도록 하였다. 마을 앞의 불당을 가리키며 이 불당에서 머물며 편히 쉴 수 있다고 했다. 불당에 이르러 풍랑에 젓은 옷을 벗어 바람에 말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두 사람이 또 밥을 지어 보내 왔다. 과연 모두 충후한 사람이었다. 잠시 후에는 그 두 사람이 와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좋은 곳으로 보내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기에 최부가 좋은 곳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이 당황한 목소리로 또 다시 2리쯤 가면 된다고 하였고 그곳의 지명을 묻자 “서리당(西里堂)”이라고 했다.
이쯤에서 또 다시 최부의 감정표현이 나온다. 그 두 사람은 당황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은 최부가 비가 심하여 길이 질척이고 게다가 날이 또 저물어가니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갈 곳은 멀지 않으니 근심할 필요는 없다고 말을 했다. 그들의 말을 따라 종자를 거느리고 길을 최부가 나서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와 검을 들고, 혹은 징과 북을 치며 앞에서 이끄니, 징과 북소리를 듣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큰 소리를 질러대고 이리저리 날뛰며 전후좌우를 에워싸며 몰아붙여 차례로 번갈아 호송하였다. 앞마을에서 이와 같이 호송하였고, 뒷마을에서도 또 이와 같이 하여 오십 여리를 지나니 밤이 이미 깊었다. 역시 최부가 그 두 사람이 당황했다는 표현대로 갈 곳은 2리가 아니었다. 마을마다 그들을 반기지 않고 떠미는 것으로 왜 그들은 혹독하게 취급했던 것일까.
아무튼 오늘로써 최부 일행의 표류는 끝이 났다. 표류 13일(뭍에 오른 것은 14일)만의 일이다. 이쯤 표류에 관련된 사항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선박의 선원조직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천호는 조운선30척을 통솔하고 통령(統領)은 조운선10척 통솔, 영선領船)은 조운선1척 지휘라는 것 하고 격군(곁군)은 노를 젓고 사공은 배를 지휘하는 책임자 정도라고 알려진 것 외에는 별 다른 것이 없다. 다행히 최부의 『표해록』에는 선인들이 항해도중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정리해 보면 조선시대 선원들의 역할과 임무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표해록』에 나타난 선박운항관련기사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O 진무鎭無) 안의가 “동풍이 알맞으니 떠날 만하다.”라고 하였다(윤 1월 3일)
O 5리쯤 노저어가니 군인 권산과 허상리 등이... “별도포로 몰아가 순풍을 기다렸다가 다시 떠나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윤 1월 3일)
O 안의가... “돛을 펼치고 가도록 소리쳐 명했습니다(윤 1월3일)
O 권산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대로 수덕도를 지나 서쪽으로 갔습니다.(윤 l월 3일)
O 권산은 배를 움직이며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고 총패 상리와 격군 구질회 등은 상앗대를 잡고도 어찌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윤 1월 4일)
O 신은 영선 권산, 사공 고면, 격군 이복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키를 잡아 배를 바로 잡고 있으니 방향을 몰라서는 안 된다."(윤 1월 8일)
O 권산은.. 있는 힘을 다해 배를 몰았습니다. 효자와 정보등도 또한 한 가장자리의 밧줄을 직접 잡고 풍랑을 보아가며 놓아주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였습니다.(윤 1월 11일)
O 상리 등이 새끼줄로 그 돌 네 개를 얽어 매어 합쳐서 임시 닻을 만틀어 배를 머물게 하였습니다.(윤 1윌 14일)
O 허상리, 권산, 김고면 등은 밤낮으로 부지런히 배를 운행하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윤 1월 15일)
이상이 최부의 『표해록』에서 선박운항과 관련한 기사들을 모은 것인데 이를 근거로 하면 조선시대 선인들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격군은 배를 움직이는 데 필수적인 노를 젓거나 얕은 곳에서는 삿대질을 하거나 돛을 폈을 때는 돛 줄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공은 일상적인 경우 키를 잡아 배의 항로를 조종하는 역할을 하면서 배의 운항실무를 책임졌다. 영선은 사공을 역임한 경력 있는 선원으로서 배의 운항실무를 총책임지는 지위에 있었던 듯하고 총패는 군역에 종사하는 선인들의 영솔자에 해당하나 그 또한 사공과 영선을 역임한 경력 있는 선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본 글에 영선이 키를 잡아 배를 몰았다는 기사가 많은 것은 당시는 악천후에서의 항해로서 사공보다는 경험이 많은 영선이 직접 키를 잡아 배를 조종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렇듯 최부가 탄배의 선원들의 계층구조는 4 단계로 짜여 있었다. 1775년 표류한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사공1인과 선부(船夫) 9인만으로 선원이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최부의 배에 격군17인, 사공1 인, 영선1 인, 총패1인 등 총 20인이라는 대인원이 승선하였던 것은 경차관(敬差官)이라는 최부의 지위에 대한 예우와 조운선의 선원조직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배의 출항을 무관직(武官職)의 진무(鎭撫뺀) 안의가 명령하였다는 점이다. 나아가 진무 안의는 “민간의 배가 뒤집혀 침몰되는 일은 잇달아 일어났지만 왕명을 받는 조신으로서는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된 것이 드물었다”면서 “돛을 펼치고 가도록 명령했다.
안의는 전문적인 뱃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나 경차관을 호송해야 하는 관리의 우두머리로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이 글집에서 도드라지게 보이는 것은 단연 최부다. 그는 비록 바다나 배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세밀한 관찰력으로 조선시대의 항해술을 엿볼 수 있는 많은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먼저 최부의 배는 관선이 아니라 민간용 선박이었는데 경차관인 최부가 민간 선박을 이용한 것은 “수정사의 승려의 배가 튼튼하고 빨라 관선도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최부가 승선한 배에는 삿대, 노, 돛, 닻, 키 등의 항해도구가 갖추어져 있었다. 기본적으로 수심이 얕은 바다에서는 삿대를 사용하여 배를 밀고 나간 뒤 수심이 깊은 해역과 연안 가까운 바다에서는 노를 저었고, 대양에서는 돛을 사용했다. 배의 방향은 키를 사용하여 조종하였고 풍향에 따라 돛을 묶은 아딧줄을 잡아 당기거나 풀어 주어 바람의 양과 방향을 조종하였다. 배를 정박시킬 때는 닻을 사용하게 되는데 최부의 배가 초란도에 처음으로 정박할 때 사용한 도구는 정(矴)이었으나 닻줄이 끊어져 정을 잃어버려 중국 연안에 도착해서는 싣고 있던 돌 4개를 새끼줄로 묶어 정(碇)을 만들어 정박하였다. 矴 또는 碇은 서로 혼용되는 한자어로 돌의 무게를 이용하여 배를 정박시키는 도구로서 우리말로는 돌맞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배에 실을 짐이 없자 배에 돌덩이를 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조선인들이 ‘발라스트항해’(ballast sailing)를 했음을 의미한다. 배가 바다에서 항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방위를 파악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부는 “권산, 고변, 이복 등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키를 잡아 배를 바로 잡고 있으니 방향을 몰라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배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는 동안 바람이 변하는 방향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제주도를 출항한 윤 1월 3일부터 17일까지 15일 중 윤 1월 14일의 맑은 날 하루를 제외한 나머지 날들은 모두 흐리거나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최부는 바람의 방향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지남철을 사용하여 방위를 파악했음이 기술되어 있지만 최부의 『표해록』에는 지남철을 사용한 기록이 없다. 날씨가 흐린 가운데서도 최부가 지남철 없이 바람의 방향을 동풍이나 북서풍, 북풍 등으로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는 해와 달이나 별 등을 통해 방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부는 완전히 흐린 날인 경우에도 풍향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뱃사람들이 현대의 문명인이 소지하지 못한 지각능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판단할 수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전문 요트인들은 바람의 기온과 느낌, 세기 등으로 풍향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전문 요트인의 증언에 따르면 윤1월은 동절기로서 한반도 남해안해역에는 기본적으로 북풍계열의 바람이 탁월풍으로 불고 기압의 형성에 따라 북동풍, 북서풍, 북풍이 불기도 한다. 동절기 북동풍은 서늘한 느낌을 주지 않지만 북서풍은 시릴 정도로 차갑게 느껴진다고 하며 북풍은 약간 차갑게 느껴진다.따라서 방향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최부의 당부에 영선 권산은 “날이 개어 해와 달 그리고 별자리로 헤아린다 해도 해상에서는 사방을 가리기 힘든데 지금은 구름과 안개가 짙게 드리운 것이 여러 날 계속되어 새벽인지 저녁인지 밤인지 낮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바람의 변화만으로 사방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오니 어찌 바른 방향을 가려내어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방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도구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부 일행은 배가 서쪽으로 표류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결국 중국에 이를 수 있었다. 이는 해와 달 그리고 별을 통해 방위를 가늠할 수 있었고 안개나 구름이 끼었을 때는 바람의 온도와 느낌 등으로 방위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글의 항해에 대해서는 (출처 : 김성준, 표해록에 나타난 조선 시대 선원조직과 항해술, 한국항만학회지 제30권 제10호, pp.787~791, 2006.)을 참조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현행의 시대로서 파악해보자면 배 출항은 물론 돛을 펼치라고 명령까지 내린 안의는 거의 기소깜이다. 그리고 최부의 배에 격군17인, 사공1 인, 영선1 인, 총패1인 등 총 20인이라는 대인원이 승선하였던 것은 경차관(敬差官)이라는 최부의 지위에 대한 예우와 조운선의 선원조직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이 파악을 하였듯 목사 허휘는 공권력을 무단으로 사용한 자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인데 그의 프로필을 살펴보니 군관 출신으로 오히려 이 일로 상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종 19년 무신(1488) (홍치1) 7월 6일(정묘)
제주 목사(濟州牧使) 허희(許熙)에게 하서(下書)하기를,“지난번에 최부(崔溥)가 분상(奔喪)하려고 바다를 건널 때에 그대가 튼튼한 배를 구해 주었기 때문에 비록 표류(漂流)를 당하기는 했어도 같이 탄 43인이 모두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으니, 그대가 어찌 도운 것이 없겠는가?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표리(表裏)를 내려서 상을 주니, 이르거든 영수하라.”하였다. 【원전】 11 집 355 면>
말인 즉 튼튼한 배를 구해주어 43인 전원이 모두 살 수 있도록 하여 상을 준다고 성종실록에 당당히 적을 올리고 있다. 앞서 최부는 육지에 닿으며 튼튼한 배때문 난파하지 않았다고 적었는데 그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니겠는가싶다. 그리고 상 내용으로 보아 43인은 모두 무사귀환한 모양인데 참 지금도 아닌 옛적 참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부는 그 시대 조선의 엘리트로서 분명 대단한 리더였다. 뭍에 올라온 43인, 앞으로의 그들의 행적이 궁금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