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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애국지사
반민특위(反民特委) (1)
서 론
1. 문제제기 및 연구방법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반식민지를 경험한 국가에서는 과거사 청산이 역사적 과제로 대두되었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1945년 한간(漢奸) 처단에 대한 13원칙을 수립·추진하였고, 중국 공산당도 1946년부터 한간 재판을 단행하였다. 프랑스의 드골 행정부 또한 1944년 나치협력자 처단에 대한 훈령을 기초로 혁명정부 수립 후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와 다른 경우이지만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의 경우도 연합군 총사령부에 의해 전범(戰犯) 처리가 단행되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난 지 55년이 지난 1990년대 프랑스에서는 비시 정권의 라옹 지역 민병대장이 체포되어 최고형인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전후 그리고 현재까지도 과거청산은 신국가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 과제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친일파 숙청 문제는 해방 이후 역사적 과제였고, 신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적 요구였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민족세력은 친일파 숙청을 통해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해방은 곧 근대 민족국가 건설로 이어지지 못했다. 민족해방운동 세력이 해방과 동시에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한에는 미군정(美軍政)이 실시되었다. 미군정의 실시는 독립정부 수립이 단지 지연되었다는 시간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해방 직후 우리 민족의 당면과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반소반공(反素反共)기지 건설이라는 대한(對韓)정책을 수용하는 세력을 활용하였으며, 미군정의 정책에 위배되면 어떤 세력이든 배제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범(白凡) 김구(金九)의 임시정부와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는 배제되었고, 반면 친일파 세력과 친일파 비호집단으로 지목되었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은 미군정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미군정은 행정관료·군·경찰 등 사회 각 영역에 친일파를 등용했고, 친일파들은 미군정기 국가권력의 요직을 장악해 갔다. 일제강점기 관료가 여전히 미군정의 관료였고 민족해방운동 세력을 탄압하던 일본 제국주의 경찰이 미군정의 경찰이 되었다. 또한 친일파들은 1945년 찬탁(贊託)·반탁(反託)논쟁 과정에서 반탁운동·반소반공운동을 통해 민족주의자, 때로는 민주주의자로 둔갑했다. 이들은 반공이데올로기가 남한에서 증폭되는 과정을 통해 조직화되었으며 정부수립 당시까지도 여전히 부와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5·10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개원과 동시에 친일파 숙청을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反民族行爲處罰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위원회(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를 조직했다. 제헌국회가 반민특위를 구성한 것은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와 민족적 요구를 계승한 것으로, 일제잔재청산을 통해 왜곡된 한국사회를 개혁하려는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반민특위(反民特委)는 조직과 동시에 친일파와 이승만 정권의 방해공작에 직면했고, 친일파 조사활동을 시작한 지 단 6개월만에 국회 프락치 사건,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사건 등 일련의 반공정국 속에서 해체되어 갔다. 이런 의미에서 반민특위 전개과정에 대한 연구는 한국사회에서 왜 친일파가 숙청되지 못했는지. 그리고 한국현대사에서 친일파는 어떤 존재였으며, 친일파에 대한 미청산(未淸算)은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과제이다.
또한 반민특위는 1948년~50년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 연구주제이다. 일반적으로 1948년~50년 정국구도는 민족세력의 통일운동 대(對) 반민족세력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5·10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는 반민특위를 조직했고, 농지개혁안을 제정했으며, 심지어 미국군철수안까지 결의했다. 이 과정에서 제헌국회의원들은 남조선노동당 프락치로 음해되고, 때로는 암살음모·암매장의 위협까지 받았으며, 국회 밖에서는 ‘빨갱이’라는 성토대회가 연일 개최되었다. 이런 가운데 반민특위의 친일파 숙청 활동이 추진되었다. 이런 세력을 단정세력이라고 단순히 규정할 수 있을까?
더욱 중요한 것은 반민특위는 국회 내의 소장파 의원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5·10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남북협상 후 정부수립에 참여한 조소앙(趙素昻)의 대한사회당(大韓社會黨) 계열, 5·10선거와 남북협상에 모두 참여하지 않고 정부수립에 참여한 안재홍(安在鴻)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계열과 김병로(金炳魯)·김상덕(金尙德) 등의 조선민중동맹(朝鮮民衆同盟) 등이 반민특위 활동에 직접 참여했다. 국회 내의 소장파 의원들과 국회 밖의 정부수립 참여인사들은 1948년~50년 통일운동 대 단독정부 수립운동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친일파 문제를 제기하면서 남한정국을 이끌었다. 따라서 반민특위에 대한 연구는 1948년~50년 남한정국에 통일운동 대 단정운동이라는 양대 세력 외에 참여적 개혁운동이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주제이다.
반민특위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49년 자료적 성격의 책이 간행된 이후 1950·60년대에는 반민특위에 대한 간단한 소개조차 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반민특위만이 아니라 친일파 연구에서도 비슷했다. 친일파·반민특위에 대한 이렇다 할 소개조차 없었다는 것은 남한사회의 경직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 한일회담을 계기로 친일파·반민특위 연구가 시작되었다.
당시 한일회담은 일본 신군국주의와 친일세력의 악수로 비추어졌고, 이는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킨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과 같은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70년대 반민특위 연구는 한국현대사에서 친일파·반민특위 문제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 5·18광주시민항쟁, 6월 민주화항쟁 등 사회민주화와 함께 반민특위 연구도 급증한 시기로, 이 시기의 연구는 반민특위에 대한 전반적 사실을 복원하고, 인식의 측면에서 반민특위 와해의 첫번째 원인을 미군정의 대한정책으로 지적하는 등 반민특위와 미군정의 친일파수용정책을 연관시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70·80년대 반민특위 연구는 친일파 숙청에 대한 각 정치단체의 입장, 반민법의 내용과 논의과정의 정리, 조직과 구성원의 제시, 반민특위 습격사건의 설명 등 선언적이고 나열적인 접근양상을 보였다. 당시로서는 반민특위의 실체를 일반에게 알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반민특위에 대한 분석적 연구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1948년~50년 한국사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고 반민특위 관련자료가 발굴되면서 그 기반이 되었다. 백운선은 반민특위 자체에 대한 연구는 아니지만 제헌국회 내의 소장파 세력을 주목했고, 서중석은 1948년 정국구도에 대해 통일운동 대 단정운동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5·10선거 참여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백운선과 서중석의 연구는 단정세력으로 인식된 제헌국회 내에서 어떻게 반민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조직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정운현은『반민특위재판기록』을《순국》에 번역·소개하고, 반민특위 조사관 등 관계자의 증언을 모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삼인, 1999년) 등을 간행했으며, 중국과 대만 등 외국의 과거사 청산 사례를 소개했다. 이러한 1990년대 연구기반의 확장 속에서《반민특위재판기록》의 기소현황 분석, 반민특위 구성원의 성격, 반민특위 방해공작의 사례와 친일파 비호세력의 실체 등 반민특위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상과 같이 최근 반민특위 연구영역이 확장되었지만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다. 첫째, 반민특위의 새로운 영역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시도되지 못하고 있다. 즉, 북한의 친일파 숙청 활동, 반민특위 도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반민족행위 피의자의 친일논리와 친일인맥의 실체, 반민족행위 피의자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려는 과정, 반민특위 와해 후 반민특위 피의자의 행적 등은 다루어지지 않아 반민특위의 총체적 복원은 미흡한 실정이다.
첫째, 1970·80년대의 추론적 연구경향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반민특위의 몇몇 기소현황을 기소로 ‘조사관→특별조사부→특별재판부’의 과정을 거치면서 반민 피의자의 숙청의지가 희석되었다고 단정했지만, 실제 반민 피의자의「조사서」·「소행조서」등 조사기록을 추가시켜 살펴볼 경우 조사부단계에서 처음부터 석방을 전제로 한 반민 피의자 조사도 있었고, 도조사부에서 중앙조사부에 반민 피의자 석방을 요구하는 경향도 있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와해되었다는 선언적 연구경향도 여전히 극복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에 친일파가 있다는 사실은 반민특위 와해의 배경은 되지만 직접적 원인은 아니다. 반민특위 와해의 원인을 친일세력과 연결시켜 분석하려면, 친일파가 반민특위 와해공작에 참여한 구체적 사례(예컨대, 반민 피의자를 석방시키려 했던 ‘증인’·‘탄원자’ 등의 분석)를 분석해서 친일인맥의 실체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럴 때만이 ‘반민특위 와해세력 = 친일파’라는 가설을 증명할 수 있다.
둘째, 자료이용의 측면에서도 신문자료와《반민특위재판기록》등 일부만이 활용되었고 사실 자체가 틀린 경우도 상당수이다.
마지막으로 반민특위 연구가 때로는 ‘반민특위’라는 객체만 있을 뿐 서술시점이 어느 시대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는 반민특위 문제를 1948년~50년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와 연결시키려는 문제의식이 부족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 글은 기존 연구의 한계를 염두에 두고 반민특위의 실체를 복원하고, 이를 통해 1945년~50년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첫째,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을 총체적으로 포함시켜 반민특위 전체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북한의 친일파 숙청활동, 반민법과 해방 이후 친일파 숙청논리의 비교, 반민특위 도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반민특위의 조사·송치·기소·재판활동, 반민 피의자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려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친일파를 비호했던 친일인맥과 그들의 친일논리, 반민특위 와해공작의 사례, 반민특위 와해 후 반민 피의자의 행적 등을 분석하여 반민특위의 전체상을 복원하고자 한다.
셋째, 1948년~50년 한국사회에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정부수립 직후 한국사회는 1948년 초의 남북협상을 중시하여 통일운동 대 단정운동의 연장으로 인식되거나, 한국전쟁의 전사로 이해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남북협상을 주장했던 한국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 내에서는 일찍부터 참여적 개혁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민족세력은 정부수립 참여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1948년~50년 남한사회의 최대 현안이었던 반민특위 문제를 통해 이 시기 남한사회에서 통일운동과 단정수립운동이라는 이분법적운동 이외에 참여적 개혁운동이 존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여 1948년~50년 한국사회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한다.
넷째, 1948년~50년 반공체제의 구조화 여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남한의 반공이데올로기체제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작동되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최소한 이 시기에 구조화되엇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수립 직후 반공체제를 어떤 세력이 구조화했고,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되었는지 등은 구체적으로 분석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에서 전개된 반민특위 방해공작과 반민특위 와해 후 반민 피의자들의 행적 등을 추적하여 1948년~50년 남한사회의 구조화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기존 연구에서 활용된 자료 외에 정부기록보존소의 소장기록, 국회 및 국회도서관·국사편찬위원회의 기록, 개인소장 자료, 반민특위 관계자의 증언자료, 미국 국가기록관리청(NARA)의 반민특위 파일군 등을 새로 추가하여 분석했다.
2. 친일파의 개념
본론의 서술에 앞서 친일파의 개념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친일파의 개념규정에 대해서는 해방 직후에 그리고 현재도 평가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친일파의 개념과 범주의 정리가 필요하다. 친일파 개념은 일제강점기부터 이미 논의되었다. 많이 알려진 임시정부 국가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주창한 ‘칠가살(七可殺)’이 대표적이다. 임시정부는 처단대상으로 “①일본인, ②매국적(賣國賊), ③고등경찰 또는 형사·밀고자, ④친일부호, ⑤일적(日敵)의 관리, ⑥불량배, ⑦민족을 배반한 자” 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칠가살’은 처단대상을 지적한 것이지 ‘친일파의 범주’를 의식한 개념은 아니었다.
친일파의 범주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 문제가 본격화되면서부터였다.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처벌대상을 정해야 했고, 이로 인해 친일파의 범위가 논란이 된 것이다. 해방 직후 남북한에서 친일파의 범주를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자료는 다음과 같다.
①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의〈친일파·민족반역자의 규정〉
② 1947년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친일파 숙청법’ 초안, 수정안, 최종안
③ 1947년 남조선노동당의(미소공위 제6호 답신서)‘친일파 규정’
④ 1947년 북조선노동당의(미소공위 제6호 답신서)‘친일파 규정’
⑤ 1948년 제헌국회의 반민법
이 글은 이러한 자료를 중심으로 친일파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친일파 개념은 역사적 평가를 위한 개념인가, 숙청을 전제로 한 개념인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역사적 평가일 경우, 친일파 개념은 친일적 행위만이 아니라 사상 등을 모두 모함하며, 친일적 경향도 평가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숙청을 전제할 경우 해방 직후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이 글에서 살피는 친일파 개념은 친일파 숙청이라는 관점에서 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을 위해 각 정치세력이 주장했던 친일파 문제를 역사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럴 경우 친일파 개념은 첫째,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해방 이전까지 한정된 역사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시기적으로 1894년부터 1945년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1894년은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한반도가 일제의 반식민지로 전락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개념을 대한제국기 자주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나온 개화세력에까지 확대시키는 것도 초역사적 개념이지만, 1945년 해방 이후 그리고 현재 일본에 우호적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인물에까지 확대·적용하는 것도 역시 초역사적 개념이다. 친일파 개념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된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까지로 한정시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친일파는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된 개념으로 ‘민족반역자’와 구별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친일파’는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자들로, 해방 직후 민족반역자의 대명사는 친일파였다. 이로 인해 민족반역자의 개념과 친일파의 개념이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선공산당은 1945년 말기 반파시즘투쟁 과정에서 반민주세력을, 북조선노동장은 통일전선 방해자에 대한 비판과정에서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를 새로 규정했고, 이승만·한국민주당 등은 민족반역자개념을 정치적으로 악용해서 ‘사회주의세력 =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세력”(일반적으로 “찬탁세력”) = 매국적·반민족자’로 매도했다. 즉, 우익과 좌익이 민족반역자를 규정한 의도는 명확히 차이가 나지만, 이는 해방 이후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정치적 개념이었다. 친일파는 민족반역자이지만 모든 민족반역자를 친일파로 규정할 수는 없다.
셋째, ‘처벌대상’으로 친일파의 범위를 규정할 경우, 친일파의 행위도 중요하지만 직위·직책이 더 중요했다. 혁명정부가 수립되었다면 특별한 구분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처럼 이미 친일파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친일파를 숙청하려면 친일파를 구분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규정이 필요하다. 친일행위를 기준으로 할 경우 친일행위의 객관성을 확보하기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친일파 처벌이 처벌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 처벌을 통해 사회구조의 개혁으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면, 사회에 영향력이 큰 인물을 중심으로 신속히 처단해야 했다. 이런 측면에서 친일파는 기급적 구체적 직위로 구분해서 일시에 처벌해야 한다. 중국 남경정부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간 재판을 단행할 때, 1945년 9월 28일 발표한 “괴뢰인물 처벌에 관한 13원칙”에서 다음과 같이 반역자를 직위·직책에 따라 규정하였다.
“처벌대상인물은 괴뢰관직원, 대학전문학교장 및 그 중요 직원, 금융·산업기관의 이사급, 신문사의 편집장 및 총무주임, 영화공사 및 광파전대(廣播電臺) 및 기타 선전기관의 이사·중요직원, 괴뢰정당, 국민참정회 조직 내지 유사한 기관에 관계한 중요인물을 포함한다.”
넷째, 당연범과 선택범을 구분해서 당연범을 중심으로 규정해야 한다. 해방 직후 각 정치단체는 한일합방 등 주권침해 조약관계자, 일본귀족원·중의원 의원, 조선귀족령에 따라 작위를 받은 자, 중추원참의·고문 등을 당연범으로 포함했으나, 그 이하의 경우 당연범의 기준이 문제가 된다. 친일파 개념은 현재적 관점이 아니라 당시 논의수준에서 그 기준이 제시되어야 하는 역사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처벌할 친일파의 직함은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에서 제시한 “~책임자 지위에서 근무한”, “~단체 및 ~운동의 지도자”식으로 막연히 규정할 것이 아니라, 행정관리와 국책단체, 친일단체 간부의 경우 동지사, 부윤, 군수, ~위원 등 그 직책을 정확히 제시하고 부득이한 경우 “~책임자, ~간부” 등으로 서술해야 한다. 특히 법적으로 친일파를 숙청할 경우 구체적 범위는 더 중요하다.
다섯째, 친일파는 사회 각 분야별로 규정해야 한다. 행정조직, 경찰, 군수공업 참여자 등은 친일파 규정의 공통분모였다. 여기에 남조선노동당이나 북조선노동당은 “검찰과 재판소” 관계자를 포함시킨 반면, 사회문화계는 구분 없이 “친일단페 및 황민화운동의 지도자”로만 규정했다. 제헌국회의 반민법은 “국책단체 참여자”와 별도로 “종교·사회·문화·경제 각 부문”의 친일파를 구분했다. 가장 세밀하게 구분한 것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초안으로, 초안은 문화단체를 “언론, 예술, 학교, 종교 등”으로 세분했고, 경제기관도 “은행, 회사, 조합, 농장, 산림, 어장, 공장, 광산” 등 각 분야별로 나누었다. 친일파 숙청을 통해 일제잔재를 청산하려면, 정치·행정·사법·군·경찰 등만이 아니라, 문화단체·교육계·종교계·예술계, 그리고 경제계 등 사회 각 영역을 세분하여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소극적 친일파는 구분해야 한다. 1948년에 간행된『친일파 군상』(민족정경문화연구소, 1948년)은 식민통치 협력 성격에 따라 자진협력자와 피동적 협력자를 구분했다. 해방 직후 각 정치세력이 친일파에 대한 단서조항을 이처럼 포함시킨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과거의 죄과를 엄정하게 자기비판하고 근신하는 태도로서 청산의 과정을 실천하며 나아가서 민주주의 건국을 위하여 자신의 학식·기술 능력을 모두 바친다면, 우리는 이것을 환영할 아량을 가지고 이러한 부류까지도 신건설의 일요소로 활용시켜야 할 것”이라면서 그들을 배제시켰다. 중국의 ‘한간(漢奸)’ 재판과 북한에서도 ‘가감형(加減刑)’은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친일파를 규정하는 데 친일파 숙청방향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친일파 숙청이 단순히 친일파 개개인의 처벌이 아니라면, 친일파 규정은 일재잔재 청산·사회개혁이라는 관점이 반영되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처럼 친일파 숙청이 일시에 단행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사회 각 분야별 청산과 친일파의 정치·경제·사회적 숙청 원칙이 반영되어야 한다. 친일파를 법적으로 처벌할 경우, 친일파에 대해 체형과 더불어 재산몰수·공민권 정지 등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처벌규정을 어느 정도 반영했느냐도 친일파의 범위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작용될 수 있다. 남한의 경우 친일파의 처벌규정은 친일파의 정치·경제·사회적 배제, 그리고 사회개혁의 디딤돌로 작동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친일파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해방 이전까지 한정된 개념으로 민족반역자와 구별된다. 그리고 숙청을 전제로 한 친일파 범위는 가급적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Ⅱ. 반민특위의 배경: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 활동
1. 미군정(美軍政)의 대한정책(對韓政策)과 친일파의 대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정책(信託統治政策)을 결정한 이후, 한반도를 친미·반공국가의 기지로 삼고자 했다. 미국의 신탁통치 구상은 해방 후 미군정에 지속적으로 전달되었다. 미국의 신탁통치정책은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일국의 직접 지배정책은 아니지만, 구(舊)제국주의 식민지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보장한 정책으로 군사·경제적으로 다른 국가를 압도할 수 있는 위치에서 친미·반공국가를 수립할 목적으로 구상된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구상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부딪혔다. 미국군이 진주하기 전부터 한국에는 “보다 잘 조직”되고, “목소리”도 큰 인민위원회가 건설되어 있었고, 소련의 영향력이 남한에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실제 1945년 8월부터 9월 사이 전국 90% 이상의 지역에 지방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우익의 사상적 지주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도 “농지개혁”을 주장할 정도였다. 반면 미국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는 단지 “수백 명”뿐이어서, “남한은 점화하기만 하면 즉각 폭발할 화약통”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친일파에 주목했다.
“정치정세 중 가장 고무적인 유일한 요소는 연로하고 보다 교육받은 한국인들 가운데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서울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였지만, 그러한 오명은 결국 점차로 사라질 것입니다.”
미군정은 인민공화국가 중경(重慶) 임시정부를 불승인·탄압하고, 일제강점기 관료기구를 유지하면서 친일파를 적극 활용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미국이 직접 개입해서 한반도의 상황을 바꾸겠다는 방침이었다. 1945년 8월 26일, 미국 국무성은 조선총독부 및 일본인 참모진을 한국의 행정에 활용할 것을 대한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제시했고, 1945년 9월 7일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도 포고 제1호를 통해 정부·공공단체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업무를 수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미군정의 일본인 관료 활용정책은 한국 국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에 부딪혀 일부 수정되었다. 9월 12일 아베 총독 등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아놀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이 취임했다. 9월 14일에는 엔도 정무총감을 비롯한 각 국장이 퇴임했으며 조선총독부 명칭도 군정청(Military Government:MG)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본인 관료들을 해임한 이후에도 비공식 고문으로 계속 활용했다.
“일본인 관료의 해임은 여론의 견지에서 바람직하겠으나 당분간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은 명목상으로 추방되겠지만 실제로는 계속 업무를 수행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활용한 공식적 이유는 친일파들의 기술능력과 행정경험이었으나, 실상 친일파들이 일본을 위해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그들(미국)을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의 친일파 활용정책에 따라 미군정청 행정관료는 주로 친일파와 친일파 비호집단으로 알려진 한국민주당 계열에서 충원되었다. 미군정청의 관료 중 경무부장(趙炳玉), 수도경찰청장(張澤相), 대법원장(金用茂), 검찰총장(李仁), 보건후생부장(李容卨), 농무부장(李勳求), 문교부장(兪億兼) 등 주요 요직이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당원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들 중 이용설(李容卨)·유억겸(兪億兼)은 조선사상보국연맹(朝鮮思想報國聯盟)을 계승한 대화숙(大和塾) 위원이었고, 유억겸은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이사·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 경기도 위원 출신이었다. 이 외에도 체신부장 길원봉은 조선총독부 체신국 보험계약과장, 토목부장인 최경열은 조선총독부 교통국 인천건설사무소장, 경기도 인천처장인 정운갑은 1943년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하고 관료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보건후생부 부녀국장 고황경은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출신이었고, 중앙경제위원회 사무장인 한동석도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후 함경남도 경찰부 경무과장·황해도 참여관 겸 농산부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미군정청 조선은행 초대 한국인 이사인 백두진은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은행의 간부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미군정청 관리 중 후생부장(대리), 주병환(일제강점기 도부회의원 출신), 보건후생부 고문 오긍선(국민총력연맹이사 출신), 중앙물가행정처 감찰국장 권갑중(군수 출신), 공보부 여론국장 이창수(《매일신보》기자 출신) 등은 각각 반민특위(反民特委)에 체포되었다.
경찰의 경우 더욱 심각했다.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1명이 일제강점기 군수 출신이었고, 9명이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경기도내 21개 경찰서장 중 추천으로 된 8명을 제외한 13명이 모두 일제강점기 경찰에 복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1946년 11월 현재 재직중인 경위 이상 경찰 총 1천 157명의 82%인 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이었다. 경찰조직도 일제강점기에 비해 더욱 확대되어, 일제강점기 남한의 경찰 수는 약 1만 2천여명이었으나, 1945년 11월 1만 5천여명, 1946년 하반기 2만 5천여명, 1948년 4월 3만 5천여명, 1949년~50년에는 5만명으로 증가하였다. 패전국 일본의 경찰이 미국군점령기간 중 중앙경찰체계가 폐지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경찰조직은 단순한 치안유지만이 아니라 미군정의 강력한 물리력으로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친일경찰은 미군정기에 오히려 승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943년 경무국 보안과 출신인 최운하는 해방과 동시에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으로 출발하여 경무관,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장 등으로 승진하였다. 1937년 함경남도경찰부 경부, 1941년 경시로 평남경찰 보안과장을 역임한 최경진은 미군정기 경무부 차장으로 중용되었다. 1941년 평안북도 경찰부 보안과장을 역임한 전봉덕은 해방 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친일경찰 중 반민특위에서 논의된 인물만도 상당수였다. 반민특위에서 논의된 인물 중 경상북도 친일경찰의 핵심인물이었던 노기주는 미군정기 경찰부장으로 활동했으며, 평남 경찰부 보안과장, 1937년 경기도경부, 1945년 평남보안과장 출신으로, 일명 고문왕으로 불려왔던 노덕술은 1948년까지 수도관구 경찰청 관방장 겸 수사과장으로 활동했다. 강원도 고등계형사 출신 이명흠은 강원도경찰청 부청장이 되었고, 경남지역 고등계 형사 출신 장자관은 경상남도 경찰부장, 강원도 고등계 형사 출신 정주팔은 춘천경찰서장 등으로 활동했다.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출신인 최연은 1946년 경기도 경찰청 초대총감으로 취임한 후 1948년에는 수도경찰청 고문관으로 승진했다.
한국군은 “기술능력”을 축적한 항일무장투쟁세력·자생적 국군선걸운동을 전개한 세력을 배제시키면서 만들어졌다. 한국군의 창설과 관련해서 인민보사 습격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 직후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30여개의 국내 군사단체들은 신탁통치문제를 계기로 조선국군준비대와 광복군국내지대가 중심이 되어 군사단체통합운동을 추진하였고 1945년 12월 31일 통합을 선언하였다. 그런데 통합운동이 진행중이던 12월 29일 특별한 이유 없이 건국청년회(建國靑年會)가 인민보사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조선국군준비대가 출동하자 조선건국준비대와 건국청년회는 시내 한복판에서 총격전을 벌이면서 사건은 확대되었다. 남한 진주 직후부터 자생적·민족적 군대의 해체와 미군정 산하의 국방군 설치를 준비했던 미군정은 인민보사 사건을 빌미로 1946년 1월 8일부터 국군준비대와 광복군 국내지대 등 민족적 군사단체 모두를 ‘사설’ 군사단체로 규정·해산시켰다. 대신 1월 15일부터 국방경비대를 창설해서 현재의 국군을 만들었다.
그런데 창설된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은 만주 군의(軍醫) 중좌 출신인 원용덕(이후 제8연대장)이었고, 제1연대장 채병덕은 일본육사 49기, 제2연대장 이형근은 일본육사 56기, 제4연대장·경비대 총참모장인 정일권은 만주국군관학교 출신이었다. 일본육사 26기생으로 육군 대좌(대령) 출신 이응준은 미군정청 국방부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국방경비대 창설의 산파역을 담당하였다. 이후 일본육사와 만주국군관학교 출신, 지원병 등이 국군의 핵심이 되었다. 이응준(李應俊)은 초대 육군참모총장, 원용덕(元容德)은 초대 헌병사령관, 이형근(李亨根)·정일권(丁一權)은 합참의장 및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은 초대 국방부 참모총장, 백선엽(白善燁)은 1950년 제1사단장, 육군참모총장과 합참의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군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해방 전 군경력자 중 장군으로 승진한 자는 광복군 출신은 단 32명인 반면 일본군 출신은 226명, 만주국군 출신은 44명을 차지했다. 이는 미군정의 군사단체 재편정책의 방향이 무엇인지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미군정에 의한 친일파의 재등용은 남한사회 구석구석에서 친일인맥이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단지 일제가 물러났을 뿐 친일파들은 다시 미군정 권력기구의 주요 요직은 장악했다.
2. 남·북한에서의 친일파 숙청 활동
ⓐ 남한의 친일파 숙청 논의
⑴ 제1기:정당통합운동기(1945년~1946년 초기)
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론에 대한 접근은 정치단체별로 접근하는 방식과 그 특징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이 가능하나 이 글은 후자를 따르고자 한다. 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 논의가 제헌국회(制憲國會)의 반민법(反民法) 제정의 배경이 되기 위해서는 친일파 숙청 논의의 특징은 무엇이고 그 특징이 반민법 제정과 어떤 유기적 연관성이 있는지 등이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친일파 숙청 논의는 찬·반탁 논쟁을 경계로 두 시기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제1기는 8·15 광복 직후부터 1945년 말기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직후까지의 시기로, 친일파 숙청 문제가 민족통일전선의 원칙으로 작동한 시기이다. 1945년 9월 5일 이극로(李克魯)를 중심으로 추진된 정치단체 통합운동, 1945년 10월 5일부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등 국내 주요 정당들의 정당통합운동시 친일파 배제는 정당통합의 기본원칙이었다. 이 시기만 해도 친일파 숙청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고, 친일파로 지목되는 인물들은 미군정(美軍政)에 재등용되었지만 그렇다고 마음놓고 활보하기도 힘든 시기였다. 친일파들이 스스로 애국자임을 자처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제1기 친일파 숙청론은 세 가지 방향에서 논의되었다. 첫째, 선거권·피선거권의 제한 등 친일파의 정치적 활동의 배제이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1941년 발표한〈건국강령〉에 “적에게 부화(附和)한 자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의 선거권·피선거권 박탈을 규정했고, 인민위원회도 1945년 11월 24일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친일파의 선거권·피선거권 제한을 규정하였다.
㉮ 이왕가(李王家) 일족
㉯ 유작자(有爵者)
㉰ 현직 및 퇴직의 중추원 고문, 참의
㉱ 일본 경찰 및 군대의 공연, 은연한 일벙(단 소속 군·도·시 인민위원회의 인정에 의함)
㉲ 일본 제국주의 치하의 장교·경관·옥리(獄吏)·헌병·관공리 공직자로서 식민지 정책 및 침략전쟁의 수행에 생존상 불가피한 정도 이상의 협력을 한 자(단, 소속 군·도·시 인민위원회의 인정에 의함)
㉳ 친일분자와 8월 15일 이후 조선의 완전독립을 방해하는 행위를 한 자(단, 소속 군·도·시 인민위원회의 인정에 의함)
친일파의 선거권·피선거권 제한은 이후 친일파 숙청론의 기본 조건으로 정착되었다. 친일파 숙청을 반대했던 미군정도 이 조항은 일부 수용하여 1946년 8월 24일 공포한〈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설치령〉, 1947년 9월 3일 공포한〈입법의원 선거법〉, 1948년 3월 17일 공포한〈국회의원 선거법〉등에 포함시켰다.
둘째, 8·15 광복 직후 친일파 숙청론은 일제강점기 사회구조의 개혁을 전제로 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는 1945년 8월 28일 창립대회에서 친일파 및 일본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공공시설·광산·대산업시설·공장들을 국유로 할 것을 결의했고, 조선공산당도〈토지문제에 대한 결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친일파의 토지몰수를 규정하였다.
一,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반역자의 토지는 무상몰수할 것.
五, 일체 몰수된 전 토지는 토지 없는 또는 토지 적은 농민에게 분배할 것이요, 그 관리권은 농민위원회 혹은 인민위원회에서 가질 것.
六, 하천·산림·소택(일본제국주의자 맟 민족반역자의 소유)을 국유로 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개방할 것(그 관리권은 농민위원회 혹은 인민위원회가 가질 것).
한국독립당도 환국하기에 앞서 1945년 8월 28일 개최한 제5차 임시대표자대회에서「당책」(행동강령)을 통해 다음과 같이 친일파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제거를 주장했다.
25조, 적산(敵産)은 그 관공사유(官公私有)를 막론하고 일률로 몰수하여 국유로 할 것.
26조, 매국적(賣國賊)과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를 징치하며 그 재산을 몰수하여 국영사업에 충용하고 토지는 국유로 할 것.
27조, 봉건파시스트 등의 일체 반민주의 경향을 숙청할 것.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1945년 9월 3일「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면서 일제치하의 법령도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일제잔재 청산을 통한 사회구조적 개혁은 해방 직후만 해도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좌·우익의 모든 민족세력은 일제강점기 사회구조의 개혁을 당면과제로 제시했다.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등 중도적 정치세력에서도 일반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남한 내 각 정치세력의 동향에 의해 미군정은 “모든 (한국인) 단체들은 일본재산의 압류, 한국으로부터의 일본인의 추방 및 즉시 독립의 성취라는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친일파 숙청은 신국가 건설운동의 일환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투쟁을 일차적 과제로 규정했고, 조선공산당도 1945년 9월 20일 발표한〈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에서, “일본제국주의자와 민족적 반역자”의 토지를 몰수하고 “인민위원회가 이것(몰수한 토지)을 관리”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중심과제로 이해하였다. 전국농민조합총연맹도 1945년 11월 28일 다음과 같이 친일파 숙청을 인민정부 수립을 위한 기본과제로 제시하였다.
“우리의 정권을 일부 친일파, 민족반역자와 대지주, 반동적 민족부르조아지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의 잔재세력과 전(前) 자본주의적 봉건적 잔재를 우리 사회로부터 소탕하고 우리의 기본적 요구를 달성하여 줄 수 있는 진정한 인민정권 수립을 전취하자.”
한국독립당도 친일파의 정치·경제적 숙청을 통해 민족국가·균등사회국가·공화주의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一, 국가의 독립을 보위하며 민족의 문화를 발양(發揚)함.
二, 계획경제제도를 확립하여 균등사회의 행복생활을 완성할 것.
三, 전민정치기구를 건립하여 민생공화의 국가체제를 완성할 것.
이와 같이 해방 직후 1945년 제1기의 친일파 숙청론은 민족통일전선의 기본원칙으로 작동하면서, 친일파의 정치적 배제, 일제강점기 사회구조의 개혁, 그리고 이를 통한 신국가 건설이라는 방향에서 논의되었다.
⑵ 제2기:신탁통치 파동기(1946년 초기~1947년 말기)
해방 직후 신국가 건설운동의 일환으로 여겨졌던 일제잔재 청산문제는 찬반탁논쟁을 계기로 왜곡되어 갔다. 제1기 민족통일전선에 입각한 친일과 배제원칙은 이승만의 귀국과 동시에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1945년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를 조직하고 선(先) 정부 수립 후(後) 친일파 숙청론을 제기했다. 이런 가운데 1945년 말의 찬반탁 정국은 친일파·민족반역자문제를 대혼란의 정국으로 몰아갔다.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진행 중이던 1945년 12월 19일부터 한국민주당 기관지인《동아일보(東亞日報)》는 공산주의세력이 신탁관리를 주장한다, 소련이 원산과 청진에 특별이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내보냈다.《동아일보》1945년 12월 27일자에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라며 소련은 신탁을 주장했고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왜곡 보도를 내보냈다. 이후 일련의 준비돤 계획처럼 반공(反共)이데올로기가 작동되었다.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등 좌익세력이 1946년 1월 2일부터 삼상회의 결정안을 총체적으로 지지하자 극우반공세력들은 ‘미국=즉시독립 주장=우익=애국’, ‘소련=신탁통치 주장=좌익=매국’이라는 이념적 도식을 만들었다.
친일행위 여부로 애국자와 매국노를 구분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반탁운동·반공운동여부로 애국과 매국을 구분하는 사상의 혼란상태가 시작되었다. 조선건국청년준비위원회(朝鮮建國靑年準備委員會)는 공산분자에 속지 말자는 담화를 발표했고, 반탁전국학생총연맹·조선애국부녀동맹은 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을 매국노집단으로 규정하면서 이념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도 “친일파 중에서도 극악”한 “민족반역자”의 범주를 설정하고 다음과 같이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를 추가시켰다.
1. 민주주의 단체 혹은 지도자를 파괴·암살하기 위하여 테러 단체를 조직하여 지도하는 자, 이 단체 등을 배후에서 조종 원조하는 자, 또는 직접 행동을 하는 자
2. 연설·방송·출판물 등을 통하여 애국적 지도자 및 그 가족에 대한 가해를 선동 교사하는 자
3. 관헌으로서 민주주의적 지도자를 무참히 검거·고문·투옥·학살하며 민주주의적 제 기관을 파괴하는 자
4. 미군정 또는 MP(헌병)에게 무고하여 이러한 불상사를 야기케 하는 자
5. 패잔 일본제국주의 군대 및 철수 일본인으로부터 물품을 대량 매점하고 암흑시장을 통하여 계속하여 국민경제의 우려와 대중생활의 파탄을 초래하는 간상모리배
좌익 계열이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 문제를 제기한 것은 1945년 말기와 1946년 초기의 남한정국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정국은 1945년 11월 19일 이승만의 반소·반공방송을 필두로 반소·반공운동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인민공화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괴문서’를 미국 국무부에 보내 좌파세력을 당황케 하였다. 또한 12월 31일 한국민주당 계열과 이승만 계열에 이끌어지던 건국청년준비위의 인민보사 습격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조선공산당 계열은 새로운 “파시즘의 대두” 곧 해방 후 민족반역자의 대두로 규정하였다.
이와 같이 제2기는 찬반탁 정국을 계기로 애국과 매국의 기준이 친일행위 여부에서 반공운동 여부·반탁운동 여부로 바뀌어 간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과 같이 친일파·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족통일전선의 구축, 일제잔재 청산을 통한 신국가 건설이라는 구도는 성립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1946년 이후 친일파의 범주가 오히려 구체화되었다. 친일파의 규정이 구체화되었다는 것은 친일파 숙청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친일파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합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반영되었다. 사실 1945년까지만 해도 구체적인 친일파 범주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별도의 규정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찬반탁 논쟁을 거치면서 친일파의 범위가 논의된 것은 친일파의 범위에 대해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것이 필요할 정도로 친일파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된, 변화된 상황이 반영된 결과였다. 친일파들은 찬·반탁 운동의 과정 속에서 권력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명분까지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중심으로 친일파에 대한 규정이 구체화되었다. 민족주의민족전선의「친일파·민족반역자의 규정」은 해방 이후 민족반역자를 포함하는 등 한계는 있었지만 이후 각 정치단체의 친일파 규정의 근간이 되었다. 민족주의민족전선에서 규정한 친일파 규정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을 일본제국주의에 매도한 매국노 및 그 관계자
② 유작자(有爵者), 중추원 고문·참의, 관선 도·부 평의원
③ 일본제국주의 통치시대의 고관(총독부 국장, 지사 등)
④ 경찰·헌병의 책임자로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무리
⑤ 군사 고등정치경찰의 악질분자(경시 사관급 이하라도 인민의 원한의 표적이 된 자)
⑥ 군사 고등정치경찰의 비밀탐정의 책임자
⑦ 행정, 사법, 경찰을 통하여 극히 악질분자로서 인민의 원한의 표적이 된 자
⑧ 황민화운동, 내선융화운동, 지원병, 학병, 징용, 창씨 등의 문제에 있어서의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
⑨ 군수산업의 책임경영자(관리공장, 지정공장도 포함)
⑩ 전쟁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파쇼적 성질을 가진 단체(대의원·일심회·녹기연맹·일진회·국민협회·총력연맹·대화동맹 등)의 주요 책임간부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친일파의 범위를 행정관료의 경우 국장급, 즉 칙임관 이상으로 규정했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도 1947년 발표한 친일파 숙청법 수정안에서 “칙임관 이상”을 규정하여 해방 직후 각 정치단체의 친일파 숙청범위는 “칙임관 이상”으로 정리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자문서에 대한 남조선노동당의 답신에서는 다음과 같이 군수가 포함된 “주임관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① 귀족원 의원 및 조선귀족령에 의하여 수작한 조선인들
②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고문을 역임한 자들
③ 도회의원 및 부회의원을 역임한 자
④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및 도·시·군의 책임자 지위에서 근무한 조선인 관리들
⑤ 일제강점기의 경찰, 헌병, 검사국, 재판소의 책임자 지위에서 또는 악질적으로 복무한 조선인들
⑥ 자기 이익을 위하여 조선인들에게 독해를 주며,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주의를 돕기 위하여 군수품 생산 및 기타 경제자원을 제공한 자들
⑦ 친일단체 및 황민화운동의 지도자로서 열성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자들
이와 같이 1946년 이후 민족주의민족전선안·남조선 과도입법의원안·남조선노동당안 등에서 친일파의 범위가 제시되면서 친일파의 범위를 ‘행위’보다는 ‘직위’를 중심으로 규정해 갔다.
둘째, 이 시기에 친일파 처벌방법도 구체화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은 ‘일체 친일반도를 공개재판’으로 숙청할 것을 제시하였고, 우파의〈좌우합작 8원칙〉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벌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하여 처리할 것”이라고 하여, 친일파 숙청방법은 ‘공개재판’·‘특별법정 구성안’ 등이 제시되었다. 이후 1947년 6월 공포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친일파 숙청방법에 대한 질의에, 각 정치단체는 특별재판소 혹은 특별기관이라고 답변했다.
셋째, 친일파 숙청을 위한 구체적인 조사작업도 진행되었다. 1946년 2월 결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친일파·민족반역자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친일파 조사작업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조선사회문제 대책협의회의 중앙위원이었던 고정휘(高政輝)는 1946년 초순 친일파 민족반역자 실정조사회를 결성하였다. 고정휘는 1945년 11월 25일 조직된 조선사회문제 대책협의회의 중앙위원, 1946년도에 국내에서 조직된 대한독립협회 총무부장 등으로 활동한 인물이었고, 고정휘가 참여한 대한독립협회는 1946년 4월 국민당·신한민족당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으로 합류했다.
이런 가운데 1946년 9월 10일에는 선열·지사의 사적을 조사 편찬하는 동시에 ‘모리배·민족반역자 등의 범행을 조사·규찰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처리’하기 위해 신한정의사(新韓正義社)가 조직되었다. 신한정의사는 국민당 계열(유기태·장지필)과 한국독립당 계열(조경한)이 모두 참여했지만 사장인 조경한이 한국독립당 계열인 관계로, 당시 언론에서는 신한정의사가 한국독립당 계열의 단체로 보도되었다. 신한정의사의 설치목적은 선열에 대한 추모, 사적의 조사·편찬, 친일파의 조사 등이었다. 이것은 해방 직후 순국선열들에 대한 추모,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 친일파 조사 등의 문제를 각각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문제의 세 측면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이 중 한국독립당 계열 출신의 친일파 조사는 구체적으로 추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확인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인 김승학(金承學)의 유고 중《친일파 군상》과《참고건제일》등은 구체적인 친일파 명부를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참고건제일》은 평안북도 출신 친일파 50명을 중심으로, 중추원참의 17명, 도평의원 22명, 고등계형사와 특무 출신 10여명 등을 기록하였다.
《친일파 군상》에는 정계·관계·실업계 43명, 교육계·종교계 19명, 언론계·문화계·연예계 45명, 기타인물 11명, 다액 국방금 헌납자(10만원 이상) 19명, 1만원 이상 헌납자 73명, 지원병 36명, 지원병 혈서지원자 34명 등을 기록하였다.《친일파 군상》에는 다른 친일파 관련 책이나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 “지원병 혈서 지원자”를 추가시켰다. 이 자료는 1948년 민족정경연구소에서 작성한《친일파 군상》과 제목이 같으나 양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어 양자의 관련성 문제는 명확하지 않다. 김승학이 왜 친일파 명부를 작성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948년까지 김승학이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본 자료가 한국독립당 또는 임시정부의 조직적 대응의 결과물인지는 단정할 수 없어도 최소한 한독당 계열 내부에서도 친일파 조사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구체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듯하다.
☞ 이강수 한국역사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계속}
첫댓글 민족과 국민이 하나인 나라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