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moraz.egloos.com/1181189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아니 사실은 매우 많이, ‘암기하지 말고 이해해라’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구구단을 외우기 전에 곱셈의 원리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듯이, 무조건 외우지는 말라는 충고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역설적으로 입시를 위해 이해를 하던 말던 단순암기를 해야 하는 현실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암기만 하는 것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암기력 테스트의 전성기였던 80년대 중반- 90년대 초까지의 중고등학생들조차도 무조건 단순암기만 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른바 말 그대로 ‘암기과목’이 엄연히 계속 존재해 온 것도 사실이다. 또한 ‘국영수’ 공부도 암기에 상당부분 의존해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입시제도가 계속 변했어도 근간은 변한게 전혀 없다. 뜻도 모르고 하는 암기를 완전히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공자의 말은 대부분의 중고등학생들에게는 공허하게만 들릴 것이다.
이렇게 대량의 지식(?)을 머리 속에 주입하는 교육을 성실히 따라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는 지식의 수준이 다양화된다는 것이다. 문학, 어학, 수학, 역사학, 철학, 사회학, 정치학, 지리학, 법학, 물리학, 생물학, 화학, 지학 등 그 지식의 폭과 다양함에 있어서 세계 어느 나라의 학생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게 된다. 설사 암기한 내용의 상당부분을 잊어 버려도 그렇다.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다. 이건 결코 비꼬아 말하는게 아니다. 예를 들면 순수 암기 과목은 아니지만 한국 중고등학생들의 수학과 과학 실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물론 공식을 외워서 고난이도의 문제를 푸는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평가절하할 수도 있지만, 그나마도 못하는 나라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에 걸맞게 치뤄야 할 댓가가 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그것은 생각하고 나름대로 이해하는 훈련이 없다보니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암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였다고 착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암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였다고 착각할 수 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법칙’을 중고등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 ‘다음 중 뉴턴이 발견한 법칙은?’ 이라는 문제에 대해 답하기 위해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말을 뜻도 모르고 외우는 것은 분명히 단순 암기다. 하지만, 아무리 주입식 교육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까지 무식하게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지는 않는다. 뜻도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그 뜻은 한자 그대로 ‘모든 사물들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에서 말하는 이해라는 것들이 결국은 이런 것들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실제로는 단순 암기일 뿐이고 이해했다는 착각일 뿐이다. ‘모든 사물들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그냥 머리 속에 주입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따라서 TV나 영화에서 무중력 상태에서는 사람이 떠다녔던 것을 본 경험 정도를 떠올리게 될 뿐이다. 이렇게 간혹 암기와 이해조차도 구별 못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인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가공할 중등교육평가시스템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조차 단순히 암기하도록 할 뿐 이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체득할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단순 암기에 의존한 학습은 그러한 능력을 계발시키기는 커녕 퇴보시킨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단순 암기에 의존한 학습이 과연 다행(?)스럽게도 중고등학교로 끝나는가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게 내 생각이다. 겉으로 보기에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은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차이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닌 것 같다. 즉 서로 내놓고 얘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모두들 잘 알고 또 어느 정도는 동의하듯이 대학교육도 많은 부분 단순 암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시험이라는 것은 평가를 위해서 뿐 아니라 공부를 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인데 여러가지 이유로 상당수의 시험이 단순 암기를 유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학생수가 너무 많다 보니 현실적으로 단답형 문제 밖에 못내는 경우도 있고, 학생들이 그걸 원하거나 아니면 교수 편의로 그렇게 내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수학 같은 경우)에는 도저히 주어진 시간에 문제를 다 풀수가 없어서 외울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는 공공연히 과거 족보가 돌아다닌다. 물론 과거에 출제된 문제를 참고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나, 족보를 입수했느냐 안했느냐가 시험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국 모범 답안을 만들고 또 암기를 하게 된다. 물론 미리 여러 문제를 예시하고 시험 당일날 그 중에서 일부를 출제하는 경우도 모범 답안 작성 및 암기가 최선의 전략이 된다. 그렇다면 논술형 문제는 어떠한가? 시험을 봐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어떻든 답안은 채워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이해를 못했어도 답안지는 다들 채우고 나온다. 즉 이해를 충분히 못했지만 암기했던 내용을 채우거나, 외우지도 못했으면 속된 말로 ‘썰을 풀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해를 못하고 푼다고 반드시 점수가 잘 안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해 못했으면서도 아는 척 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며 나 자신도 외워서 풀거나 썰만 풀어서도 매우 좋은 점수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대학에서는 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많고, 또한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공부를 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주입식교육-암기 학습의 틀은 (중고등학교에서처럼 강제로 주입하거나 암기시키지는 않지만)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나도 그러했지만) 마치 중고등학교에서 그런 것처럼 대학생들도 기본적으로 교수가 지식을 하나하나 떠 먹여주길 바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 교수도 그렇게 가르쳐 준다. 사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혼자서 책 읽고 스스로의 생각에 의존해서 공부하려면 졸업장 받으려는 것 이외에는 학교를 다닐 까닭이 조금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대학교육이 단순히 떠 먹여주는 것뿐이라면 혹은 그런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논술형 문제를 풀고 리포트를 쓰고 조별 발표를 해도, 잘했는지 못했는지, 잘했으면 무엇을 잘했는지 못했으면 무엇을 못했는지 제대로 된 피드백조차 없는 상황에서는 주입식 교육의 틀을 탈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책을 읽느니 노트를 잘 받아 적고 나름대로 ‘얕게’ 이해해서--그리고 정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외워서--시험을 쳐도 학점 나오는데 별 지장이 없고,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주입식 교육과 암기 학습이라는 틀이 바뀌길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학 교육의 현실을 단순히 학생들의 잘못이나 그렇다고 교수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교수대 학생비를 줄여서 교육의 질을 높이고 싶어도 사립대학이 대부분인 상황에서 재정적으로 여의치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면서 취직을 위한 영어공부와 학점 경쟁 또한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값싼 비용으로 산업발전 단계(경공업-중화학공업)에 맞는, 상대적으로 양질의 노동력을 생산하여 ‘압축적 근대화’를 했던 지난 시절에 가르치고 배웠던 방식이 이른바 ‘제도적 관성’으로 계속되는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대학의 문제는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고의 교육기관인 대학에서조차 주입식 교육이 지배적이라면, 사회의 다른 부문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운전면허연습장에서는 운전면허 따는 법을 가르칠뿐 운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대학이 교육기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니 기업에서 따로 교육을 시킨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 전문적인 업무 교육이 주가 되는 것이지 일반적인 합리적 사고 능력 같은 것을 길러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결과는, 앞서도 말했지만, 지식을 주입하거나 암기해 놓고는 이해했다고 착각하거나, 아니면 매우 불충분하게 이해해놓고도 이해했다고 만족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이해가 무엇인지 이해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해란 과연 무엇일까?
앞에서 얘기한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예를 들어 이해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 물론 이해를 이해하는 방법에는 단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해를 해석학적 이해, 현상학적 이해 등 여러 가지 종류로 나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특히 ‘비판적 이해’에 국한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해에 대한 설명을 돕기 위해, 뉴턴은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일화를 일단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하지만 누구나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고 실제로 뉴턴 외에도 사과가 나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뉴턴과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다르길래 오직 뉴턴만이 중력/인력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을까?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현대의 우리도 그러한 것처럼) 물체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익숙한 사실이기 때문에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뉴턴은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즉 사과가 나무에서 아래로 떨어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한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그냥 받아들여 외우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도 뉴턴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단순암기는 앞에서 말했듯이 ‘만유인력이라 하는 것은 모든 물체들 사이에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사실만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만유인력이 무엇인지 이해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미 확립된 과학적 사실에 대해 도대체 그 이상 뭘 더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뉴턴 이전의 사람들이 물체가 무거워서 떨어진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뉴턴의 만유인력에 대해 단순히 암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아무런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왜 그러할까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과연 물체가 중력의 작용 때문에 떨어지는 것일까? 중력/인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물체가 떨어질 수 있을까?” 이렇게 비판적 거리를 두는 질문을 던진 이후에야 우리는 어떤 물체가 낙하를 한다면 그것은 그 물체가 낙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지구)가 그 물체를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낙하하지 않을 것이라는 뉴턴의 결론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요즘 우리도 상식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듯이) 물체가 낙하하는 까닭은 그러한 성질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즉 무겁기 때문이라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지만, 뉴턴은 물체의 낙하를 물체 자체의 ‘성질’이 아닌 물체들(지구와 사과)간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는 이론적인 혁신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비판적인 이해라는 것은, 어떤 지식이든 그 근거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고 스스로도 논리적으로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렇다고 뉴턴처럼 과학자-철학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깊이 이해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뉴턴의 만유인력 같은 건 이해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고대-중세와 다른 근대-현대에 살며, 뉴턴의 역학과 세계관이 우리가 사는 시대의 기본틀을 이루었다는 것은 결코 깨닫지 못한 채로 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태도로는, 어쩌면 본인의 삶에 중대한 의미를 지닐 수도 있는 다른 모든 것들도 그저 당연하게만 여기면서 살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순전히 무지로부터 결과된 고통을 받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 그리고 공자의 말처럼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앎(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 필요하다.
<보충>
내가 제시하는 이해에 대한 이해, 즉 비판적 이해에 관한 설명도 결국은 여러 가능한 많은 이해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첫째, 완벽한 이해라는 것은 없다. 앞에서 완전한/불완전이라는 말 대신 충분/불충분한 이해라는 말을 쓴 까닭은 그 때문이다. 간단히는 세상에 완벽하거나 완전한 것이 없다는 의미 정도로 생각해도 되겠다. 예를 들어 예술가도 자신의 작품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론가가 작가 못지 않은 혹은 더 나은 이해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해란 대상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뿐 아니라 능동적인 태도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둘째, 충분/불충분도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따라서, 말장난 같지만 완전하게 충분한 이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어떤 목적과 맥락과 관련해서만 상대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무명화가가 이해하는 사과와 뉴턴이 이해하는 사과는 다르다. 아무리 뉴턴이 이름난 과학자이고 화가가 무명이라고 해도 뉴턴의 사과에 대한 이해는 무명화가보다 못할 수도 있고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는 그가 만약 사과의 정물화를 그리려고 했다면 그의 예술적 이해는 상대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해에 대한 평가가 목적과 맥락에 관계된다고 해도 하나의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는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입시 대비를 하는 관점에서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는 불필요하며 따라서 “만물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정도만 이해하면 된다’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교육에는 입시대비라는 단순히 단기적인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보다 장기적인 목적들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어렵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목적이나 맥락을 사전에나 사후에나 확정지을 수는 없다. 넷째, 이해란 흔히들 생각하듯이 순전히 정신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더구나 어떤 것을 명확히 정의해야지만 이해한다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은 언어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이 모든 단어와 표현의 사전적 정의를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 그러한 것은 전혀 모른 채 산다. 그럼에도 인간이 언어를 이해한다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언어를 적절히 적용하고 사용할 줄 알기 때문이다--그리고 사실 이게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를테면 어떤 악기 연주자가 딱히 그의 음악을 말로 설명할 줄 몰라도 훌륭한 연주를 한다면 그는 음악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앞에서 이해/체득이라는 말을 쓴 까닭은 정신뿐 아니라 육체도 이렇게 이해에 관계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