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흐르는 마을 / 이원주
아직도 그곳은 먼 들녘을 훑고 오는 바람이 내 어린 추억으로 가만히 흔들고 있다. 미루나무가 사그락사그락 현을 켜고 낙동강은 보드라운 물결을 일렁이며 춤을 춘다. 강나룻가 모래사장엔 새들이 내려앉아 긴 발자국을 남기고, 해지는 서산의 그늘은 저녁밥 익는 마을을 서서히 덮어준다.
강둑옆 과수원의 외딴집, 그 집 앞 흙길따라 쭈욱 걸으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몇 채의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이 나온다. 어느 집엔 매년 제비가 날아들고 어느 집은 마당 한 편에 쌓아 둔 퇴비더미 속 지렁이들과 매 끼니를 나누며 산다.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정을 나누며 먹으며 사는 마을이다. 그곳은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까지 뒹굴며 놀던 곳이다. 손톱 밑에 때가 끼여 있어도 통지표에 '수'보다는 '가'가 더많았어도 자연의 모든 것들이 내 친구가 되어줬던 시절. 뽕잎 먹는 누에를 보는 눈빛이 맑고 그 마음이 순하고 둥글었던 시절. 그 시절을 소중히 안고 있는 곳이다.
살아오면서 늘 그리웠던 나만의 터, 그 터에서 게속 자랐다면 지금보다 좀 더 온순한 사람이 되었을까, 좀 더따뜻한 사람이 되었을까? 지금의 팍팍한 내 모습이 그 터를 너무 빨리 벗어나서 일까 생각해보게 한다.
그 만큼의 나이에서 딱 그 만큼의 감성이 더함 없이 덜함 없이 분출되었던 다시는 갖기 힘든 추억이 그 작은 마을에 얼기설기 얽혀있다. 볼 발갛게 익으며 숨바꼭질하던 일, 강가에서 모래성을 지으며 부수며 까르르거리던 일, 과수원의 풋사과를 몰래 따먹다 혼쭐난 일……. 그네 시소 따위는 없어도 마을 전체가 신기한 마술상자처럼 꺼내고 꺼내도 늘 즐겁고 새로운 놀잇거리로 가득차 있었다. 그 속엔 까까머리 단발머리 어린 친구들, 살갑던 어르신들, 지금은 어느 바람 잘 드는 곳에 계실 현재 내 나이의 아빠, 그리고 여동생을 업은 엄마도 함께 있다. 수많은 검은 머리들이 웅성웅성거리면서, 뜨거웠던 그날밤이 떠오른다.
바람이 창문을 부실듯이 흔들던 밤이었다. 우리집은 겨울에 과수나무 가지치기를 하면 그 가지를 엮어 말렸다가 겨울땔감으로 사용하곤 했다. 땔감이 쌓인 그곳이 높다랗게 포물선을 그렸듯이 아마도 겨울이나 봄일듯 하다. 그곳에 불이 났다. 그때에 119는 있었나? 전화도 없었는듯 하다. 잠이 든 후라 아빠가 일찍 발견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집까지 불이 붙었을 것이다. 과수원이 딸린 우리집은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도와줄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아빠는 동네로 급히 가셨고, 곧 우르르 동네 어르신과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우리집으로 모여 들었다. 양동이, 바가지 등 물을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은 불을 끄기 위해 동원되었다. 아이들도 놀란 눈을 부릅뜨고 어른들께 바가지 든 손을 내밀었다. 겨우내 힘들게 모아둔 부모님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두운 밤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첨보는 광경이라 무서웠고 집까지 타버릴까 안절부절했다. 집 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그 물이 불길 잡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크게 번질 것같은 불은 퍼다 나르는 수많은 손길에 무너져 주었다. 어른들도 그제야 한숨과 함께 수런수런 말들을 주고 받았다. 바람이 장작더미 반대로 불어주어 불길 잡는데 수월했고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순한 마을엔 거친 바람도 순한 일을 하는구나 싶다. 불이 난 원인은 찾지 못했지만 그 일로 인하여 이웃사촌 그 말이 무언지 끄덕끄덕하게 되었던 것같다. 강 건너 불구경이랬는데 그 추운 밤에 자다 일어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내 일처럼 물동이를 나르고 행여 집으로 옮겨 붙을 까 주변을 정리해 주시던 이웃분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날의 불길처럼 환하다. 사람이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것, 난 오래동안 그날 밤을 기억한다. 내 생이 이리 길어짐도, 길어진 내 생 한구석에 잊은듯 지내지만 사람을 향한 따뜻함이 늘 박혀있다는 것도 모두 이웃사람들이 보여준 정으로 인한 것임을 잊지 않고 살고 싶다.
바람이 흐른다. 거친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고요하다. 반딧불이 불 밝히는 여름 밤마다 원두막에 앉아 수박이나 옥수수를 씹으며 올려다 본 밤 하늘이 겹친다. 하늘엔 잔별들이 어찌나 많은지 후드득 이마 위에 떨어질 것만 같던 그 많은 별들은 어디로 사라진걸까. 다시 그 원두막에 고개를 길게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 보면 그 때의 잔콩 같은 별들이 나와 같이 고개를 내밀어 하나하나 눈을 맞추어 줄까? 순한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순한 마음을 간직하며 살던 마을. 어른이 되어 추억속의 그 집과 그 길과 그 놀이터를 밟았을 때 물론 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는 만날수 없었다. 다만 날 기억해 주고 반겨주는 친절한 친구 하나, 그 시절에 먼 들녁에서부터 강둑을 지나 마을로 흐르던 바람이었다. 바람은 내게 수줍게 귓속말로 한참을 속삭인다. 그리곤 순박한 시골아이처럼 휘리릭 키 높은 벼들을 파랗게 흔들며 마을로 숨어든다. 들판에서 허리숙인 어르신들, 그 들판에서 덜 익은 벼를 훝으며 씹던, 메뚜기 잡느라 벼를 밟고 달리던, 순한 눈망울의 내 친구들. 그들은 바람이 흐르던 어린날을 한 번 쯤은 추억하고 있을까?
해질녘이면 꼬챙이 하나 거머쥔 내 뒤로 쫄래쫄래 따라오던 늙은 염소들의 먹먹한 발걸음을 기억한다. 그 걸음이 내 맘에 사무치면 난 또 어느 때에 날 오래 기다려주는 바람을 맞으러 그 마을로 내려가 설움과 그리움을 한껏 토해내며 오래 머무르다 돌아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