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오후 4시 ‘外國人觀光(외국인관광)’이란 팻말이 붙은 승합차 1대가 서울 중구 명동길 입구에 멈춰 섰다. 차에서 일본인 여자 관광객 4명이 내렸다. 일본인 아키노 요코(32)씨와 그의 친구들이었다. 아키노씨의 손엔 관광책자가 들려 있었다. 이들은 명동성당에서 소공동으로 이어지는 명동로를 따라 내려왔다. 명동로는 명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중심축이다. 명동의 중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은 중앙로다. 명동로 중간 부분에 위치한 명동예술극장 앞에서 명동로와 ‘T’자를 이루며 명동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하이 도조~(‘어서 오세요’란 뜻의 일본어)” “미나상 미테 구다사이!(‘여러분 보아주세요’란 뜻의 일본어)” “환잉꽝린~(‘어서 오세요’란 뜻의 중국어)” 아키노씨 일행이 중앙로로 접어들었다. 중앙로 양쪽으로 카페, 구두 가게,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가 즐비했다. 중앙로를 가득 채운 50여개의 매장 가운데 브랜드 화장품 로드숍(가두점)도 있었다. 화장품 브랜드 모델인 한류스타 장근석과 동방신기의 실물 크기 패널이 거리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매장 앞에선 호객 행위가 한창이었다. 추운 날씨에도 짧은 유니폼 치마를 입은 매장 직원들은 우리말과 함께 일본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손님 끌기에 바빴다.
아키노씨와 친구들은 제일 먼저 국내 화장품 브랜드 라네즈 매장에 들어갔다. 매장 안엔 20명 정도의 손님이 있었다. 서너 명의 한국인을 제외하곤 모두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아키노씨는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장 직원들이 일본어로 제품 상담을 해줬다. 아키노씨는 주간조선에 “명동의 어느 화장품 매장에 가도 직원들이 일본어로 상담을 해줘 놀랐다”고 말했다.
아키노씨처럼 관광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는 중국인 친로(26)씨도 “명동에 와서 화장품 가게만 여섯 군데 들어갔는데 다들 중국어로 제품 설명을 해줬다”고 말했다. 11월 14일에 한국에 들어와 3박4일간 머물 예정이라는 그는 이미 30만원가량의 화장품 쇼핑을 마친 상태였다. 그의 쇼핑백 안엔 더페이스샵, 미샤에서 산 10여개의 화장품과 화장품 구매 시 덤으로 받은 마스크팩과 화장품 샘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명동 중앙로 점령한 화장품
서울 명동 중앙로가 화장품 매장에 ‘점령’됐다. 길 양옆으로 라네즈, 더페이스샵, 잇츠스킨, 네이처리퍼블릭, 이니스프리, 바디샵, 미샤, 바비펫, 홀리카홀리카, 스킨푸드, 아리따움, 토니모리, 에뛰드하우스, 더샘, 바닐라코 등 화장품 브랜드 매장이 전시장처럼 늘어서 있다. 11월 15일 주간조선이 명동 거리에 나가 명동 쇼핑가를 관통하는 중앙로변 1층 매장을 조사한 결과 총 58개(공사 중인 매장 포함) 가운데 18개가 화장품 매장이었다. 명동 중앙로 매장 3개 중 1개꼴로 화장품 매장이 있는 셈이다.
명동을 찾는 사람들에게 중앙로는 ‘화장품 거리’로 통한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메들린 케이(38)씨는 “한국에 오기 전 인터넷에서 본 관광 정보에 명동 ‘코스메틱스 스트리트(cosmetics street)’라고 소개돼 있었다”면서 “이 거리엔 인상적일 정도로 화장품 가게가 많다”고 말했다. 일본인 관광객들 사이에선 ‘코스메로드’란 말도 생겼다. 코스메로드는 영어 ‘코스메틱스(화장품)’와 ‘로드(길)’의 합성어로 명동 중앙로를 중심으로 명동로 일부를 포함한 명동 거리 일대를 지칭한다.
코스메로드, 화장품 거리는 행정구역상 서울시 명동 8길에 해당하며,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부터 명동예술극장에 이르는 300m가량의 거리다. 명동의 유동인구는 50만~100만명으로 국내 최대 수준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이 길을 통과한다고 봤을 때 화장품 거리에 있는 매장의 브랜드 노출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명동 부동산업자들 사이에 ‘황금길’로 통한다.
화장품 거리에 인접한 건물 1층의 임대료는 무척 높다. 화장품 거리 상가들의 임대료는 1층 198~231㎡(60~70평) 기준으로 월 1억~2억원 안팎이다. 화장품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인 화장품 브랜드 네이처리퍼블릭 월드샵 매장의 임대료는 보증금 32억원에 월세 1억5000만원 선이다. 이 건물이 들어선 169.3㎡ 지대의 공시가는 2009년 이후로 ㎡당 6230만원을 유지하며 전국 최고 공시지가로 기록됐다.
전국 최고 임대료
‘부동산’이라고만 간판을 단 명동의 한 부동산업자는 “화장품 브랜드 점포들이 경쟁적으로 입점하면서 임대료가 높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중앙로에 있는 화장품 가게 매출이 50억원을 웃도는 수준”이라며 “화장품 브랜드들은 3층짜리 매장을 통으로 임대하기 때문에 건물주들도 화장품 브랜드 입점을 선호한다”고 했다.
화장품 브랜드 본사가 공식적으로 매출 규모를 밝힌 적은 없다. 명동 화장품 거리에 직영 및 가맹점을 운영하고 있는 아모레퍼시픽 홍보실은 주간조선에 “자사 방침상 매장별 매출액은 말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업계에선 ‘명동 화장품 거리의 한 개 화장품 매장의 매출은 적어도 50억~60억원은 된다’고 알려져 있다.
명동에 화장품 매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구역상 명동에서 봤을 때 화장품 가게는 명동 전체에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진 않다. 2010년 ‘서울시 명동의 시간대별 활성화 지구 분석’(김선아, 2010년 2월 한국교원대 교육대학원 석사) 연구 결과에 따르면 명동의 29.0%를 차지하는 것은 일반 사무실이었다. 화장품 매장은 76개로 전체의 2.8%에 불과했다.
화장품 매장은 대부분 눈에 잘 띄는 1층에 위치하고 있어 명동에서 가장 활발한 업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주요 도로에 접한 비율도 타 업종에 비해 높았다. 단국대 부동산학과 이호병 교수는 “중앙로는 명동 중에서도 핵심 상업지구로 전통적으로 ‘장사하기 좋은 입지’”라면서 “특히 같은 상호가 1층에 있을 때와 2층 이상에 있을 때를 비교하면 접근성과 행인들에 대한 노출 빈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11월 17일 오전 10시, 명동 거리는 벌써부터 외국인 관광객들로 찼다. 매장마다 평균 10명 안팎의 손님이 있었다. 점심시간이 넘어가면서부턴 사람들이 그야말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오후 4시 명동 화장품 거리에 있는 화장품 가게 안엔 최대 50여명의 손님들로 북적였다. 화장품 브랜드 이니스프리의 한 직원은 “주말을 이용해 여행 오는 사람이 많아 금요일부터 일요일 낮시간까지 가장 붐빈다”면서 “평일에도 오후 10시까지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원래는 일본 손님들이 많았는데 2년 전부터 중국인들이 늘기 시작해 요즘엔 일본과 중국 손님 비율이 반반”이라고 전했다. 화장품 업체 관계자들은 “요즘엔 일본 사람들보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 화장품을) 더 많이 산다”며 입을 모았다. 명동에서 부동산 소개업소를 운영하는 김대수씨는 “요즘 명동은 외국인들이 먹여살리는 것 같다”면서 “외국인 매출이 전체 매출의 60~70% 정도를 차지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한국 화장품 싹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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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 안에 표시된 화장품 매장은 45개. 명동 상권 전체적으로 최소 75개 매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지난 9월 대한상공회의소(회장 손경식)와 하나투어(대표이사 권희석)가 공동으로 ‘중·일 관광객 쇼핑 실태’를 조사한 결과, 화장품은 중국인 관광객의 86.9%가 구입한 1위 구입 품목이었다. 일본인 관광객은 75.3%가 화장품을 샀다고 응답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화장품 등 패션 상품이 인기가 있다”고 분석했다.
명동 화장품 거리의 한 화장품 매장 앞에서 만난 중국인 디아오링(34)씨의 손엔 3개의 종이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디아오링씨가 쓸 화장품과 중국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부탁한 것들이다. 그는 “한국 화장품은 다기능성이고 중국 화장품에 비해 끈적임이 덜해서 좋아한다”며 “게다가 (중국에 비해)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 사 갈 수 있는 만큼 사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온 에이버리 칭(28)씨는 “색조화장품의 경우 색이 예쁘다. 싱가포르에서 한국 브랜드 화장품을 사려면 백화점에 가야 하는데 한국의 로드숍에서 사면 가격이 싸다”고 말했다.
한류 열풍이 화장품 열풍으로
한류 열풍이 외국인들의 화장품 구매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도 나왔다. 아모레퍼시픽 홍보실의 김효정 부장은 “우리 드라마가 중국 동남아 지역에서 인기를 끌면서 송혜교, 카라, 김현중과 같은 한류 스타들처럼 ‘하얗고 깨끗한 피부’ ‘세련된 메이크업’이 선망의 대상이 됐다”면서 “한류 열풍이 분 나라에선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제품이 매우 선호된다”고 말했다.
명동 토니모리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경쟁 업체에선) 화장품을 사면 유명 연예인의 CD, 브로마이드를 주는 방식으로 외국인 관광객을 끈다”면서 “몇몇 한류 팬들 가운덴 이런 ‘덤’을 받으려고 화장품을 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화장품은 뭘까. 명동 화장품 거리에 입점한 화장품 브랜드 더페이스샵의 직원은 “품목을 가리지 않고 전체적으로 잘 팔리지만, 색조화장품보단 스킨로션이나 클렌징오일과 같은 기초화장품을 더 많이 사는 편”이라고 말했다. 명동 관광정보안내센터의 최수영씨는 “관광객들 중 화장품 매장 위치를 물어오는 경우가 많은데 20~30대 여성은 라네즈, 한스킨, 미샤 등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로드숍을, 40~50대 여성은 롯데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설화수 매장을 찾는다”고 말했다.
명동 화장품 거리의 외국인 마케팅은 매우 치열했다. 한 화장품 직원은 “각 매장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가끔 월급을 더 주고 다른 지점의 직원을 데려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곧 다가올 연말 시즌을 앞두고 한국을 찾을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정판’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대량 구매가 특징인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스페셜 패키지’를 만들기도 한다. 네이처리퍼블릭 명동점은 지난 10월 초 중국 국경절을 염두에 두고 중국어 통역 직원 30명을 추가로 배치하기도 했다.
중국어·일본어 직원 유치 경쟁
명동 화장품 거리는 상품성이 올라가면서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을 위한 관광코스 중 하나로 소개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하나투어 홍보실 정기윤 팀장은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위한 자유일정에 명동이 포함돼 있다”면서 “짜여진 코스는 없지만 명동에서 쇼핑을 하고 싶어하는 손님들이 많아 반나절 정도는 명동 자유일정을 넣는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중·일 관광객 쇼핑 실태’ 조사 결과 명동은 일본인 선호도 1위, 중국인 선호도 2위의 서울 관광명소로 꼽혔다.
지난 9월 서울시가 발표한 ‘2011 서울 방문 외래 관광객 실태조사’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서울 내 방문지로 명동(55.1%·복수 응답)이 꼽혔다. 그 다음으론 남대문시장(47.3%), 동대문시장(42.3%), 인사동(39.9%) 순이었다. 명동을 찾은 한 대만인 관광객은 “남산 한옥마을, 남대문, 명동, 인사동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하루 코스로 돌아다녔다”고 말했다. 2011 서울 방문 외래 관광객 실태조사는 “화장품 가게가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며 “응답자의 26.5%가 서울에 와서 화장품 가게에 가고 싶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새로운 랜드마크, SPA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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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명동의 한 화장품 매장 앞. 가수 김현중 사진에 일본인 관광객이 입을 맞추며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11월 11일 명동 화장품 거리에 변화가 생겼다. 중앙로 남쪽 끝자락에 SPA(Spectiality Retailor of Private Label Apparel·자사의 기획 브랜드 상품을 직접 제조는 물론 유통까지 하는 전문 소매점) 브랜드인 유니클로 점포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이 유니클로 매장은 해당 브랜드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플래그십 스토어’로 면적 3966㎡에 아시아 최대, 세계 두 번째 규모다. 2005년을 기점으로 명동에 자라, 스파오, 포에버21 등 국내외 SPA 브랜드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이 정도 규모는 처음이다.
11월 14일 오전, 유니클로 매장 앞엔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서 있었다. 오전 11시 30분 개장 시간을 10분 앞두고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70%는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유니클로 홍보실은 “대한민국 쇼핑 명소인 명동에 입지를 정한 덴 외국인 관광객 수요에 대한 고려도 어느 정도 있었다”면서 “SPA 브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가격대를 비슷한 수준으로 맞추지만 개별 상품으로 봤을 때 가격 차가 나는 경우가 있어 이를 노리고 쇼핑하는 외국인 고객들도 있다”고 말했다.
명동의 양지부동산 관계자는 “대규모 SPA 브랜드 등 브랜드 매장들이 명동에 진출하며 상권의 색깔이 달라졌다”면서 “여전히 화장품 매장이 명동 대표 매장이지만 다양한 업종의 브랜드 매장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결국 상권 내 매출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