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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분교리> |
Joannes.Kim
계시란 Revelare(드러나다, 나타나다, 열어 밝히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한다. 즉 감추어진 것, 가린 것이 자신을 드러내고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신학적으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것이다. 결국 계시의 근본 내용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 즉 하느님 자신이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계시를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고, 그 때문에 예수님은 하느님 계시의 전달자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 자체이다.
공적계시(Revelatio Publica)는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하느님의 뜻이 모든 사람에게 알여지고 주어진 것이다. 즉 구원을 위해서는 꼭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 한번 그리고 영원히’ 이루어진 공적 계시는 성령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보존되고 전달되어 세상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총을 입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새로운 공적 계시란 없다.
사적계시(Revelatio Privata)는 신자들이 공적계시의 내용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생활화 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 성심 발현(1637), 루르드 성모발현(1858), 파티마 성모발현(1917) 등이다. 이런 사적 계시의 식별 기준은 교리적으로 공적 가르침과의 일치여부, 심리적인 것으로 계시를 받는 주체의 인격적 상태파악, 마지막으로 주변 인물들 안에서 발견되는 영적 결실의 효과 등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느님의 공적 계시이다. 그러나 이런 성경은 당시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성령의 감도 아래 쓰여 진 것으로, 이것만으로는 모든 계시를 포함 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성경을 규정한 것도 바로 성전이다. 즉 신앙 공동체의 커다란 역사의 틀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전과 성경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상통한다. 이 둘은 동일한 신적 원천에서 솟아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를 이루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제 8항.9항)
믿는다라는 말은 신뢰개념과 종교적 개념이 있는데, 천주교가 전해진 이래 종교적 개념이 생겨났다. 우리가 신앙으로 추구하는 최종목표는 하느님 자신이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하느님과의 합일이 행복이요,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행복은 하느님 계시와 은총을 필요로 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의 필요성이 요구된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의하여 지성이 하느님의 진리를 믿는 행위이다.(T.A)
신앙행위는 한 인격체의 행위이다. 한 인격체인 하느님의 부르심에 한 인격체인 인간이 응답하는 행위가 신앙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신앙심과 본능인 종교심은 다른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과정이 신앙이다. 이것은 겸손과 신뢰, 회개를 요구한다. 즉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가톨릭 교회교리서, 제1편 제153항) 신앙은 구원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
하느님은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은 초월적인 분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려 하고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 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다. 거룩하신 분으로 우주만물을 능력과 사랑으로 다스리고 당신 지혜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또한 인간을 위해 인간역사 안으로 개입하시고, 이런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반대되지만 두 속성이 하느님 안에 존재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부자관계를 맺으신 하느님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언제나 우리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자비로운 분이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우리를 용서하고 당신자녀로 삼아 주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구원여부(만일 우리의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 것은 천국 영광으로 예정된 것이지 멸망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다.)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여 우리를 조정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를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이끄실 뿐이다.
하느님의 세상창조는 필연적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런 창조는 머나먼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지금도 천지창조를 계속하시며,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이런 창조는 하느님의 행위이며, 하느님의 계시이고, 신앙을 요구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당시 주변의 범신론과 다신론을 배격하고, 하느님의 창조론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제2이사야는 태초의 천지창조를 구원의 첫 단계로 설정,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하느님의 지속적인 창조 행위로 이해했다. 신악에서는 구약의 유산을 물려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재해석 했다. 그리스도는 창조사업의 중개자요, 원동력임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행위인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이다.(Creatio ex nihilo) 하느님은 선하심으로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창조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의 목적인 당신 영광을 드러내신다. 우리의 찬양이 그분의 영광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내적 영광에는 보탬이 없고, 하느님의 외적인 영광은 인간에게 행복이 되는 것이다.
천사는 그들이 맡은 직무와 사명을 뜻하는 말로 성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구약은 하늘과 땅 사이의 연락책, 전령이고, 바빌론 유배이후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 생기고, 품계가 나눠지기 시작했다. 신악에서는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천사들의 모습으로 그분게 경배와 봉사하는 이들로 표현되었다. 또한 사탄(방해자)과 디아볼로스(이간질하는 자) 등의 단어로 하느님 구원사업을 방해하는 자로 악마를 이야기 했다. 교회는 천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영적인 실체라고 본다. 그러나 천사 품계는 믿을 교리는 아니고, 6세기 초 위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지타의 작업이다. 따라서 천사를 성인성녀 이상으로 공경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피조물은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향하고, 인간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께 향한다. 따라서 인간은 보통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의 핵심이며 절정이다.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 맺고, 그분을 모시는 자유와 창조사업을 방불케 하는 노동 등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띄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 자신을 주시는 초성은혜와 고통과 죽음을 당하지 않는 과성은혜를 주셨다.
초성은혜와 과성은혜는 원조들의 범죄로 거두어 졌고, 이 원죄의 결과는 모든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총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노가 처음 사용한 원죄교리는 바오로 서간(로마서5장)에 기초하여 죄 속에 있는 인류의 연대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한 인류의 연대성을 증명되었다.
원죄는 죄 사함의 은총을 주는 세례성사의 성격을 강조했고, 유아도 포함되었다. 원죄는 은총의 결핍 상태로, 개개인이 그리스도와 직접 맺는 관계이기에 출생으로 자동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런 원죄교리는 4세기말 은총의 필요성과 세례성사를 부정한 펠라지오와 재세례를 주장한 재세례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원죄 교리를 부정하면,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원은총도 필요 없게 되기 때문에 교회는 이것을 학고하게 지키고 있다. 이런 원죄 교리는 인간의 죄스러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야 한다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돌아가셨고,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으로 다윗 가문의 후손인 마리아라는 처녀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나셧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 성자께서 사람이 되시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탄생은 마르코와 요한 복음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만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루카 복음의 호구조사 때 총독(퀴리니우스) 때문에 연대기적 불일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루카의 의도적인 것으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가게 되어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에 태어 났다고 본다. 이것은 헤로대왕과 아기들을 죽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2월 25일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기존에 있던 태양신을 숭배를 없애버리려고 의도적으로 정한 날인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 즉, 나자렛에서의 30년 생활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시기를 통해 예수님은 육체와 정신이 성장하였고, 율법을 공부 했으며, 생계를 위해 일하셨다. 그것은 성숙한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시간이었으며, 기다림의 의미와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일상생활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즉 이런 일상생활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요한1)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1)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인간적인 인기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올곧은 성품과 겸손의 자세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약 3년 간의 공생활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실제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가르치셨다. 만민 구원의 하느님 나라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암시하셨다. 그러나 이런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충만한 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되는 세상, 인간의 구원, 사랑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에게 기적을 베푸셨다. 이 기적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분이 전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고, 복음의 핵심 내용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이런 예수님은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안식일의 율법을 무시하고,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의 편이 되는 위험인물이요,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칭하는 신성 모독자였다. 때문에 그들은 로마제국의 힘을 빌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3차례의 수난 예고를 통해 이 죽음을 미리 알고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예수님의 수난은 구약에서 예고된 고난의 의미를 알려주고 완성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후에 만찬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고, 배반자에게도 그것을 주시며, 모든 이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번도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끝까지 용서하고, 기도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죽음은 한 인간의 죽음이고, 모든 이들을 위한 죽음이다.
그리고 사흘 뒤에 예수님은 부활 하신다. 비어있는 무덤과 제자들의 돌변하는 태도는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런 주님의 부활은 우리 구원의 원천이요, 삼위일체의 계시의 완성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우리도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부활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회의 성립을 위해 40일 동안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신다. 이 승천은 예수님의 수난이 하느님께 인정받았다는 것과 하느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셨음을 의미한다. 또한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활동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부터하느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 시나이 산 발현이 하느님 백성의 출발점이었다면 성령강림은 교회의 출발점이다. 물론 하느님의 구원계획 속에 교회가 이미 존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이미 교회는 잉태되었지만, 이 세상 안에서 교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성령 강림을 통해서다. 성령은 "삼위 일체의 셋째 위격으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하나시며 동일하시고 같은 본체와 본성이다... 그러나 성부의 성령이라고만 말할 수 없고, 성부의 성령이심과 성자의 성령이심을 동시에 말한다."(DS 490) 이런 성령은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 방식이며, 진리의 수호자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신다. 또한 교회의 영혼이시며, 하느님 백성을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하여 이런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한다.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는 후대에 형성되었다. 인간은 시간적인 순서로 구약의 하느님 신약의 예수님, 초대교회의 성령님을 순차적으로 경험하였다. 이에 따라 삼위의 대내적인 관계를 숙고 하기에 이르렀다. 셋이 모여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여럿이라는 말도 아니다. 하나의 하느님이 세 위가 있다는 말이다. 이 세위는 사랑으로 서로 하나가 되고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완전을 모르는 우리 인간에게는 삼위일체의 신비는 믿을 도리이다.
교회가 탄생한 첫 순간은 성령강림으로 볼 수 있다. 근원적으로 보자면 천지창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이런 교회는 신비이다.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이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신비스런 몸이고,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이며 정배(淨配)이다. 이런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로 신자들을 출산하고 양육하기 때문에 교부들은 교회를 자모이신 성교회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교회를 직접 세우시고, 제자들을 불러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교회의 권한을 맡기신 것이다. 이런 교회는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사업을 계속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로 삼는 예언자직과, 세례를 베푸는 사제직, 그분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왕직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직은 교도권, 사제직은 성화권, 왕직은 사목권을 대표하는 것이다. 교도권은 주님께 받은 권한을 가지고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성화권은 성사를 집전하고 하느님과 사람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권한이다. 속지구법을 따르는 사목권은 하느님 백성을 다스리는 사명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 전체는 무류성을 가지는데 이것은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정의 할 때 그르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교 각 개인이 아니라 주교단이 공의회에 모여 선포하는 것은 무류성을 가진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을 이어받은 교황 또한 무류성을 가진다. 교황의 무류지권으로 선포한 교리는 성모무염시태(1854년 비오4세), 성모몽소승천(1950년 비오12세) 등이 있다.이런 무류성은 교회가 행위를 잘못할 수 없다거나 역사적으로 잘 못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신앙교리를 믿거나 선포할 때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사제직을 가지는 데 평신도들은 성사에 참여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며, 자기 희생등으로 공통 사제직에 참여하고, 성품성사로 축성된 성직자들은 직위적 사제직으로 하느님 말씀과 성사집전으로 사목한다.
참된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져오는 것이며, 가톨릭(보편되고 공번되다)이다. 이런 교회의 특징은 성령께서 교회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교회가 역사적으로 여러 갈래로 분리 되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교회 일치 운동(Oecumenism)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는 가톨릭 교회이지만, 타 종교를 이해하고,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른 교회가 가진 신비가 전부 무가치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중심된 생각을 통한 열린 마음의 일치 운동을 통해 교회의 유일성을 완성해야 한다. 일치 운동의 자세는 교회 쇄신의 의욕과 타 교파에 대한 올바른 이해, 대화의 자세와 공동노력 등이 요구된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약성경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평가 한다면 빈약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신약성경의 주요 관심사는 세례에서 부활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딱 두 번 마리아에 대한 구절(3,22;6,3)이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족보에서 5명의 여인들(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언급하며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계획을 실현시킨 여인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 뒤 동정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 알마(alma)는 젊은 여인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70인역 그리스어 성경(LXX)은 이 단어를 동정녀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메시아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마태오 사가는 마리아의 동정을 알리기보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간적인 방법을 초월한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성모님의 역할에 집중하여 특별히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부각시킨다.
루카 복음에서는 성모님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가브리엘 천사 예고, 예수님 탄생 이야기, 요한 세례자의 탄생이야기 등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또한 성경을 통틀어 한 번만 등장 하는 주님의 여종이라는 단어는 성모님이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드러낸다. 루카 복음 사가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믿는 제자로서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형제나 누구냐라는 말씀(8,19-21)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가 행복하다는 말씀(11,27-28)은 성모님의 모습이 그러하기에 성모님에 대한 칭찬으로 봐야 한다.루카 복음 사가는 성모 마리아를 참된 신앙인의 모범으로 묘사한다.
요한 복음은 성모님이 두 번 언급 되는데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마침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성모님의 역할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성모님은 믿음 깊은 여인, 전달자 그리고 예수님 구원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분으로 나타난다.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성모님을 언급한다. (1세기에서 3세기) 안티오키아의 주교 성 이냐시오는 가현설을 반대하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강생을 강조하며 성모님의 동정성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성 유스티노는 하와와 성모님을 대조시켜 불순종과 순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성 이레네오는 성모님을 참 교회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성모님의 모성을 교회의 모성과 동일시 하였다. 성 클레멘스 역시 교회를 성모님처럼 동정녀요 어머니로 생각하였다. (4세기에서 5세기) 니체아 공의회(325),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에페소 공의회(431), 칼체돈 공의회(451)에서는 여러 이단에 대해 반박하며 성모님에 대한 교리를 정립했다. 성 아타나시오는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라 불렀다. 또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영원 안에서 성부에게서 탄생과 시간 안에서 마리아에게서 탄생을 이야기 했다. 성 에프렘은 성모님의 어두운 밤을 강조했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신자들의 모범으로 강조하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페소 공의회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주제는 성모님의 무염시태 교리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마리아가 교회의 모범이고 교회의 참된 모습이기에 성모님의 완덕을 강조하면서, 성모님의 거룩함은 하느님의 선택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성 예로니모는 성모님의 동정성을 성서적으로 설명(형제를 사촌으로 설명)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오와의 논쟁에서 성모님이 원죄에 물들지 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부터 1517년 교회 분열까지의 중세기(5C-16C)는 성모님의 특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성 베르나르도는 성모님의 중재 역할을 논에 물을 대는 물길과 같은 것이라고 하며 비유적으로 설명하였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성모님의 거룩함, 동정성, 존엄성을 연구하였다. 그러나 16세기 루터가 Sola를 주장하면서 성모님을 비판하게 되자 가톨릭에서는 오히려 성모님 공경을 더욱 장려하게 되었다.(비오 9세(1854)의 무염시태 교리 선포, 성모님 발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는 교회 헌장 제 8장에서 성모님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라는 제목으로 그리스도, 교회, 마리아라는 주제를 가지고 각각의 관계를 다룬다. 서론에서는 동정성과 교회의 신비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 2절에서는 성모님의 역할을 성경과 교부들의 이론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3절은 성모님이 은총의 중재자이심을 밝히는 핵심이다. 4절은 성모님의 공경 문제를 다루고, 5절은 하느님 백성의 확실한 희망과 위로며, 교회가 앞으로 누릴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성모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성모님의 교리는 크게 평생 동정, 하느님의 어머니,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 하늘로 불러 올리심 받으셔다는 것이다. 평생 동정은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에서 “영원한 동정”이라는 표현과 라테란 공의회(649)의 “성모님은 해산 전에, 해산 중에, 해산 뒤에도 동정녀였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성모님을 항상 동정녀라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라는 표현은 형제라는 말의 의미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기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형제들이 있었다면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지 않으셨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선포되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치릴로는 하느님의 모친 이라고 하서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했고, 안티오키아 학파의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모친 이라고 일컫으며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그리고 451년 칼체돈 공의회는 이 것을 재확인 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은 1854년 12월 8일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이라는 교서를 통해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DS 2803) 라고 선포하였다. 이것은 초대 교회부터 있던 교리를 의심하는 자들을 위해 비오 9세가 교리로 선포한 것이다. 에페소서 5장 27절은 교회를 거룩하고 흠없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교부들은 이런 교회의 순결한 모습을 성모님에게 찾았다. (국모 선발 등의 예) 그리고 루르드의 성모님께서 직접 임마콜레 콘셉씨옹(원죄없이 잉태되신)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성모님이 하늘로 불러 올림 받았다는 교리는 1950년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선포되었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었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계시된 신앙의 진리다." 성모님은 예수님 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승천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로 불러 올림 받으셨고 그래서 성모 몽소승천이라고 한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받을 영광을 미리 받은 것으로 후세에 완성된 교회의 모습이며, 이 지상을 순례하는 우리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이다.
개신교에서는 천주의 성모 교리는 인정하지만 대부분이 무염시태와 몽소승천 교리를 이너정하지 않는다. 칼 바르트는 특별히 성모님의 동정성을 받아들였지만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성모님의 위치를 깎아 내리려 한다. 일부 극단적인 개신교 신자들은 성모님을 “씨받이”정도로 생각한다. 그들은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모상 앞에서 인사하는 것은 부모님의 영정사진, 대한민국 국기에 대한 경례 등을 생각해보면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탈출기 20장 4절의 우상숭배 금지는 가나안의 잡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었다. 신약에서는 이러한 성화나 성상 숭배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구약의 하느님은 인간이 볼 수 없는 존재였지만 신약의 예수님과 성모님은 볼 수 있는 인간의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물론 초대 교회 신자들은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지만 313년 밀라노 칙령이후 대성당에는 각종 그림과 성상으로 성당을 장식하였다. 오늘날의 성화 성상 논쟁은 동로마 황제 레오3세가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성물과 성화상을 공경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내렸고, 이때부터 교회는 120년 동안 성화상 논쟁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께는 전구를 부탁하는 것이지 기도하는 것이 아님은 기도서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성모님의 공경은 기본적인 가정교육의 예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성모님을 맡기신 것은 성모님을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목사 사모님께 드리는 공경의 반만이라도 성모님께 드리자.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로 갈라지게 된 시초는 16세기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이다. 멀리 보면 14세기 르네상스에서, 가까이에는 루터에게 신학적 배경을 제공해준 윌리엄 오캄과 에라스무스를 들 수 있다. 오캄은 토마스의 이성과 조화를 부정하고 인간이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 했다. 루터는 이런 오캄에게서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gtia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와 성서주의가 루터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 입회하여 2년 뒤 서품을 받았다. 그는 예정설에 몰두하여 늘 불안해 했다. 그는 비텐베르크 수도원에서 ‘탑의 체험’을 하고 의화(로마 1,17)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믿으면 구원받으리라”라는 전제로 신앙을 개인의 신뢰문제로 바꾸어 성사를 부정하고, 교회의 불필요성을 이야기 한다. 루터는 당시 베드로 대성당의 보수하고 교황청의 재정 확보를 위해 베풀었던 대사를 비판했다. 이 대사가 남발되고, 돈을 주고 대사를 받기 했기 때문이다. 이에 1517년 관할 주교들에게 루터는 95개 질의서를 보냈다. 그리고 독일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루터를 교황청에 고발했고,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과 성사의 불필요성, 공의회의 무류성을 부정, 교회의 불필요성을 이야기 했다. 때문에 루터는 레오 10세 교황은 41개조 오류조목 60일 이내에 취소하지 않으면 그에게 파문을 내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그는 파문을 당하고, 독일 귀족들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폐,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의 저서를 통해 교황과 교회를 공격했다. 그는 독일 귀족 프리드리히의 보호아래,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 전역에 널리 읽혔다. 당시 영주들은 교회의 재산을 뺏기 위해 가톨릭을 공격했다. 그리고 농민들은 루터의 저서에 자극을 받아 농민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루터는 후에 가서 농민들을 학살하라고 충동질하여 결국 농민들이 전멸하였다. 이로 루터는 민중을 떠나 귀족들에게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고, 귀족들은 루터를 이용하여 이익을 챙겼다. 애초에 루터는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고자 시작하였으나 결국은 가톨릭 교회를 뛰쳐나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류지권이 있는 것 처럼 행동하고, 난폭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1506년 22세에 사제로 서품된 츠빙글리는 오직 3대 원칙을 강조하여 급진 개혁안을 내 놓았다. 그는 성경을 토대로 생활 전체가 성서적이고 복음적이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와 미사를 없애고, 그 대신에 루터의 성찬식을 도입하려다가 시의회가 주저하자 결국 츠빙글리는 시의회의 입장을 따랐고, 열렬한 신봉자들 중에서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 츠빙글리를 배신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츠빙글리의 호의적인 유아세례 문제 때문에 그의 신봉자들은 결정적으로 갈라졌다. 결국 재세례파는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가서 자기네 교리를 전파하였다. 결국 그는 시의회를 완전히 장악하고 주변 도시를 끌어 들어드렸다. 결국 1531년 10월 가톨릭 도시와 프로테스탄트의 도시가 충돌하여 결국 츠빙글리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터는 츠빙글리를 미워하고, 광신자라고 욕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출생하여, 1534년 가톨릭 교회를 반대한 벽보사건 때문에 파리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그때 칼뱅은 스위스 바젤에 가서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였다. 그는 참된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작은 교회라고 주장했다. 1536년 제네바에 정착하여 이 도시의 설교가와 본당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떠나는 자신의 교리를 정한 새로운 규정에 모든 제네바 시민들이 서약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제네바를 떠났다가 1541년 다시 돌아와 제네바를 신국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는 “교회법규”를 만들어 법률로 시행했고, 교회 안에 4개의 직무(목사, 교사:목회에 전념, 장로:시민들의 품행 감독, 집사:교회 시설 관리, 가난한 사람 돌봄)를 규정했다. 그는 다른 두 사람들보다 가톨릭 신앙론에 가깝지만,예정설 때문에 많은 문제를 일으킬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그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는 가톨릭 뿐만 아니라 루터교와도 싸웠다.
-성체 축성 : 루터는 “이는 내 몸이다.”라는 것을 그래도 받아들였다.
츠빙글리는 이것을 “이는 내 몸을 뜻한다.”라는 의미론으로 받아들였다.
칼뱅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영적 현존”이라는 둘의 중간 정도의 의미였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인척장애 관면을 받아 친형 아아더와 결혼했던 가타리나와 결혼했다. 그런데 18년 후(1527년) 그는 궁녀 앤 보레인과 결혼 하기 위해 이혼을 하려 했고, 교회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총리대신이었던 토마스 모어를 밀어내고 크래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여 결혼을 감행했다. 1534년 11월 “수장령”을 통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는 왕이 된다는 법령을 선포했고, 이에 서약을 강요했다. 그리고 서약하지 않았던 많은 수도자와 성직자들을 사형에 처했다. 이때 성 토마스 모어와 성 요한 피셔 등이 순교했다.
장로교의 시초는 칼뱅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구분했고, 장로에게 시민들의 품행을 감독하고, 처벌하는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교파를 장로교라고 불렀다. 제네바의 교세는 프랑스로 전파 되었고, 그들은 ‘위그노’라고 불렸고, 30년 이상 위그노 전쟁이 일어났다. 파리의 유혈 결혼식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가타리나가 샤를르 9세를 대신해 섭정했는데, 위그노들의 지도자인 나바라의 앙리 4세가 샤를르 9세의 누이와 결혼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결혼식에서 위그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그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전쟁을 하던 네덜란드에 들어가 북부에서 국교가 되었고, 스코틀랜드에서도 전파되었다. 그 후 1634년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개최되었고 교리 문답서를 채택하고 공동 신앙고백을 정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청교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우리 나라에는 1884년 미국 북 장로교 의료 선교사 알렌이 광혜원(->세브란스 병원->연세대 의대)을 설립하였다. 일제 시대의 근대 교육은 장로교와 감리교에 의해서 시작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1951년 고려파 장로교(고장)와 예수교 장로교(예장)로 양분되었다. 1953년 신학 방법론과 교회 일치운동 때문에 예장에서 기독교 장로교(기장)가 분리 되었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문제와 용공시비 때문에 예장이 통합 예수교 장로교와 합동 예수교 장로교로 양분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이런 장로교 교리의 핵심은 칼뱅이 주장하는 하느님의 주권과 예정설에 근거 한다.
로마 가톨릭-> 1534년 영국 성공회-> 1740년 메토디스트 협회. 존 웨슬레 의해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웨슬레를 따르는 사람은 감리교로, 화이트필드를 따르는 사람은칼뱅 감리교로 분열되었다. 원래는 성공회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었으나, 설교가 금지되면서 순회전도를 시작하면서 1740년 메토디스트 협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감리교의 시작이다. 그리고 웨슬레의 사후 영국 감리교회는 6개 분파로 분열하였다. 그리고 1766년 미국으로 감리교가 건너갔고, 노예 제도 때문에 폐지안을 찬성한 북 감리교회와 반대한 남 감리교회로 분열 되었다가 2차대전 이후 일치를 위해 노력한다. 우리나라는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래이가 한국 개화파 지도자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황제에게 선교허락을 받아 교육 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 정동에 감리교 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아펜젤러는 1885년 정동에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 근대 교육을 창시 했다. 그리고 1886년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설립하였다. 서재필의 독립혀회가 해산된 뒤 서울 남대무의 상동 감리교회가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친일 행동을 하던 사람들이 회개도 없이 계속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자, 교회 분열이 일어났다가 1949년 평신도들의 노력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감리교는 감독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조직이다. 이 감독은 주교와 비슷하지만 감독은 총회에서 선출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장로교의 핵심이 노회라면, 감리교의 핵심조직은 연회다. 감리교 교리의 핵심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화되었어도 거룩하게 되려고 끊임없이 힘써야 한다.
로마 가톨릭-> 1534년 영국 성공회-> 1608년 침례교. 1608년 영국 성공회 신부 스미스의 활동으로 암스테르담에서 메노나이트파의 영향을 받아 유아세례 반대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침례교는 분파가 많고 제대로 조직을 갖추고 있지 않아 개별 교회가 독자적으로 운영된다. 침례교 목사는 신자대표 모임인 평의회에서 자신의 신앙체험, 소명감 등을 심사하고 합격하면 목사가 된다. 개인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라는 2대 원칙이 있다. 그리고 교리의 2대 원칙은 전신침례와 성경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 1534년 영국 성공회-> 1740년 감리교-> 1861년 구세군. 구세군는 19세기 영국의 윌리엄 부드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는 1875년 기독교 전도회를 창설하였고, 더욱 강력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바꾸고, 1880년에 교회 이름도 구세군으로 바꾸었다. 구세군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때는 1908년이다. 윌리엄 호가드 정령은 서울에 구세군 대한 본영을 설치하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복음전파, 신앙 공동체 형성, 그리고 빈곤과 사회악 타파를 통한 사회개혁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 1534년 영국 성공회-> 1608년 성공회 소속 스미스 신부에 의한 침례교-> 안식교. 탈출 20장 8-10절에서 나온 것처럼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는 교파이다. 제 7일 침례파(1639년 로즈 윌리엄즈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킴)와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파(1845년 윌리엄 밀러가 주님의 재림하시고 천년 동안 통치하신다고 주장했다.)로 나뉜다. 안식교가 우리나라에는 1904년 주로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서울에 본부를 설치하고, 삼육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신구약 성경은 신앙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
로마 가톨릭 교회-> 1534년 영국 성공회-> 1740년 감리교-> 1901년 성결교. 1901년 일본 동경에서 시작되었다. 존 웨슬레의 신앙정신에 입각해서 신앙으로 거듭남, 성결, 신앙을 통한 치유,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4중 복음을 강조 하면서 동경 성경학원을 설립하고 전도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907년 일제초기에 발전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해방 후 재건 운동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고통을 겪었다. 1960년대 초 대산성교는 두 교단으로 양분되었다. 성결교의 교리 근간은 사도 신경과 성경이다. 성경해석의 요체는 중생(하느님 은혜로 믿음으로써 거듭남), 성결(거듭난 사람은 거룩해 진다.), 신유(거룩해진 사람은 하느님의 치유를 받는다.), 재림(믿는자에게는 구원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미국 유타 주 솔트 레이크 시에 본부를 둔 자칭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이다. 요셉 스미스는 몰몬이 기록한 황금판을 그모라 산에서 발견하여 번역했는데, 이것이 몰몬경이다. 그리고 그는 계며의 책을 써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이야기 했다. 일부 다처제 때문에 가는 곳 마다 말썽을 일으켜 쫓겨다니다 사막을 개간하여 지금의 솔트 레이크 시에 정착했다. 이들의 선교열은 상당하고, 솔트 레이크시가 복지 시설과 교육 여건이 좋고, 근면, 정직, 명랑하기에 전도가 잘 된다.
여호와의 증인
공식 명칭은 파수대를 의미하는 “워치타워”이다. 럿셀은 칼뱅의 예정론, 예수님의 재림문제, 아리우스 이단을 조합하여 자신의 교리를 만들었다. 144,000명이라는 숫자를 구원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이야기 하고 1차 대전을 하르마게돈(아마겟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14년 종말 예언이 빗나가고 1916년 기차에서 죽었다. 그 후 루더포드가 교단을 계승하겨 1925년 1975년 10월 1일 등으로 예언했으나 모두 빗나갔다. 이들은 “새 세게 번역 성경”이라는 독자적인 성경 번역을 출간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어 놓았다. 1912년 홀리스터 부부가 입국하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왕국회관, 봉사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가톨릭 신자들을 집중 공략한다.
세계 140여 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사회사업도 상당한 통일교는 문선명이 식자층들을 대상으로 전파한 종교이다. 전국적으로 대학 내에 ‘원리 연구회’라는 조직이나 ‘국제 기독 학생회’, ‘남북통일 전국 학생 총연합’ 등이 그들의 단체이다. 문선명은 열여섯이 되던 1935년에 예수님이 자신의 인류구원 사업이 실패했으니 자신을 대신해 달라며 부탁했다고 이야기 하며, 한민족이 하느님의 구원 섭리 역사에 일치된 민족이며, 우리 민족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고 이야기 했다. 문선명은 이스라엘 수도원의 김백문의 “성서신학”,“기독교 근본원리”를 표절하여 ‘원리 강론’을 썼다. 1954년 그는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라는 교단을 창립했다. 그리고 1955년 연세대 사건과 이화여대 사건을 통해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에는 일본에, 1959년에는 미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1965년 세계 40개국을 순방하며 교를 퍼트렸다. 그는 1960년 부인인 한학자와 결혼하였고, 이날을 ‘부모님의 성혼식’이라고 하여 성대한 축제를 지낸다. 그리고 자녀들의 생일에는 ‘아무개님 탄신일’이리하여 축일로 지낸다. 문선명은 통일교 신자들 위에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며, 막강한 권위와 권력을 행사한다. 원리 강론은 556쪽으로 되어있고, 전편은 천지창조와 인간의 타락, 메시아의 재림, 부활,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며 후편은 모세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복귀섭리, 각 시대의 섭리역사에 관한 것이다. 그는 구약의 소생기, 신약의 장성기, 성약시대의 완성기로 나누어 자신이 구원역사를 펼친다고 주장한다. 통일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인류구원 사업을 실패로 규정한다. 또한 동정녀 잉태도 부정하고, 육신부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으로 야심을 가지고 각계 인사와 만남을 주선하고, 선거에 개입하며, 반공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통일교의 사업은 다양한 분야에서 장악하고 있다.
1960년 순복음 운동과 더불어 조용기 목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서대무에 천마교회를 지은지 15년 만에 동양 최대의 예배당을 지었고, 1973년 여의도에 1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예배당을 완공했다. 재적 신자가 10만명이 넘어 단일 교회로는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그는 그물 던지기를 통해 조직화한 선교 노력을 강조하고, 그물깁기는 목사들이, 천막치기는 자신이 담당한다. 구역, 조, 소교구, 대교구 등으로 조직적으로 신자를 관리하고, 영혼건강, 육신건강, 사업번창 삼박자 구원의 축복을 내세운다.
1253년 일본 일련이라는 중이 만든 신흥종교로 남무묘법연화경의 일본식 발음인 남묘호랭겟교는 교주를 신격화하며, 일본의 선민사상과 국수주의를 강조한다. 이 종파는 민족정기를 손상한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1964년 반국가적, 반민족 단체로 규정하고 포교금지조치를 내렸다.
천리교 역시 일제 시대에 들어와 우리 나라에 퍼진 일본계 신흥종교다. 여교주 나까야마 미끼가 1838년 일본의 나라에서 세운 종교로 신각과 감로대를 숭배 대상으로 삼는다.
1902년 강일순이 창시한 증산교는 동학에서 파생된 종교로 볼 수 있다. 보천교, 증산교 본부, 태극도, 대순진리회, 증산진법회 등이 이 종파이다. 이 종교는 강일순을 천지인 삼계의 대권을 가진 주재자고 하늘의 상제라고 본다. 그의 사 후 1911년 고판례 졸도 사건으로 재건 되었다. 이에 고판례를 교주로 하는 태을교, 그녀의 이종사촌 차경석의 보천교, 차경석의 정통성에 의심을 품고 떨어져 나간 이들의 교단 등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일제 말 지하로 잠복하였다가 1970년 대 학자들의 연구로 다시 활발해 졌다. 증산교의 핵심은 해원, 상생, 보은, 원시반본, 후천개벽 등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인간 고통의 근원을 원한이라 보고, 그 동안 원한이 맺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주한경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구원하려면 원한을 남김없이 풀어야 하며 우주 질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통일교의 경전은 “증산도 도전”이 있다.
동학-> 증산교-> 태극도-> 대순진리회. 이 증산교의 한 분파인 대순진리회는 박한경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이들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서울에 대진고등학교, 대진 여자고등학교를 세우고, 대학 내에는 대진회라는 동아리를 조직하여 대학생들을 포섭한다. 신조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 등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확산되기 시작하여 대중문화 속에 깊이 침투해 있다.뉴에이지는 ‘세속적 인본주의와 신비사상에 바탕을 둔 이시대 사탄의 고차원적 전략’이라는 말이 그 성격을 잘 설명해 준다. 이 사상은 일원론에 바탕을 둔 범신론 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단학선원(단월드)으로 기수련을 내세워 신흥종교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또한 국선도라는 단체와 천도선법이라는 도장 이 모두가 신흥종교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신앙체험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할 우려가 있고, 감상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을 조장, 개인을 강조하여 사회적 활동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 부정적 요인이다.
성사는 인간의 감각이 도달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외적인 행위와 감각적인 형태를 통하여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성사다. 성사의 설정자는 예수 그리스도(원성사)이고, 성사는 감각적인 외적 형식이 있어야 한다. 외적인 형식을 통하여 전해지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
일곱 성사는 크게 입문성사, 치유의 성사, 공동체를 위한 성사로 분류될 수 있다. 세례, 견진, 성체는 입문성사로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어주는 성사다. 고해, 병자는 치유의 성사로 죄와 질병으로 병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성사다. 성품과 혼인은 공동체를 위한 성사로서 교회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꾼들을 위한 성사다.
성세 성사라고 불리는 물로 씻는 예식인 이 성사는 가톨릭의 입문성사로 이 성사를 받아야만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게 된다. 세례 성사를 통해 사람은 원죄와 본죄 그리고 그에 따르는 벌까지도 온전히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다. 원래는 주교, 신부, 부제가 세례성사를 집전하지만, 위급한 경우에는 아무 신자라도 대세를 줄 수 있고, 신자가 없으면 비신자라도 가톨릭교회와 같은 뜻을 가진다는 지향이 있다면 세례를 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대세를 받은 사람이 건강해지면 기본 교리를 제대로 가르쳐 보충예식을 받게 하는 데, 이것을 보례라고 한다. 삼위 일체가 교리가 생기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베풀던 세례가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고,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믿음이 꼭 필요하다.
견진성사는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어 신앙을 성숙시키고 신앙을 증거하게 하는 성사이다. 이것은 세례성사를 완성시키고 인호를 남긴다. 초대교회는 세례와 견진이 함께 집전되었으나, 주교를 만나기 힘든 상황이 생기면서 6세기경부터 세례성사에서 견지성사를 떼어내어 성대하게 집전하게 되었다. 견진성사를 통해 신자들은 대신덕(신덕, 망덕, 애덕)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받는다. 그리고 성령칠은을 받는데, 슬기(지혜), 통달(깨달음), 의견, 굳셈(용기), 효경, 경외심(두려움)이다. 앞의 네 가지는 지성과 관계되는 선물이고, 뒤의 세 가지는 의지와 관계되는 선물이다.
교부들은 주로 참회의 성사라고 부른 이 성사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고백성사라 불리며, 죄를 용서받을 목적으로 성사권이 있는 사제 앞에서 죄를 남김없이 고하는 고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용서를 상당히 축소시킨 감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화해의 성사라는 용어가 등장하여, 죄인이 죄를 뉘우침으로써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화해한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런 교회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권한으로(마태 16,19; 요한 20,23) 사제 개인이 아닌 주님께 받은 교회의 권한으로 사제를 주는 것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죄인에 대해 형제적 사랑의 실천으로 귀착되었다. 그들은 일단 대죄를 지은 신자가 있으면 그를 공동체에서 제외시키는 치료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후 4세기 이르러 참회규정이 생기고 모든 대죄는 교회가 정한 규정에 따라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벼운 죄들은 기도와 단식, 자선행위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초기부터 6세기까지 죄 용서는 법에 따라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고백행위보다는 참회하는 행위가 중요시 되었다. 그러나 이런 법은 까다롭고, 일생에 단 한번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6세기 아일랜드 수도자들이 하던 비밀스럽고 사적인 고백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후에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규정지게 되었다.
고해성사의 과정은 성찰, 통회, 정개, 고백, 사죄, 보속 등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성체 모독죄와 교황 폭행죄, 제멋대로 주교를 축성하는 죄, 고해성사 비밀 누설죄는 교황좌에만 유보되어 있다. 그리고 보속은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보속(보상행위)과 사제가 정해주는 보속이 있다.
대사
고해성사 뒤 죄에 상응하는 잠벌을 사면하는 혜택을 말한다. 교회는 구원의 전달자로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보상의 보고를 합당한 마음자세를 가진 신자들에게 분배한다. 이것이 대사이다. 대사라는 개념과 잠벌을 면제하는 혜택은 11세기부터 생긴 것이다. 그리고 12~13세기경에 대사에 대한 올바른 뜻이 좀 더 명백하게 정립되었다.
초대교회는 공동체의 연대 책임 정신, 대속으로 이루어졌고, 2~5세기에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주교가 부과한 엄격한 공개적 보속을 실천하였다. 6세기부터는 신부들이 보속록을 기초로 화해예절을 집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한 대속을 허가했다. 9세기에는 잠벌을 면제해 주는 관습이 생겨났고, 10세기에의 교황들은 수도원이나 성당에 재정 후원을 하는 신자들에게 사면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사는 11세기에 스페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12세기에 이르러 전대사의 논의가 일어났고, 온 교회의 전구라는 교리에 따라 교회가 보속을 감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3세기의 토마스는 지정보속의 감면이 아니라 연옥벌의 면제로 이해했다. 이런 대사는 교회의 보고로 교회 속에 간직된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의 보화이다.
10세기까지는 대사가 한 개인이 해야 하는 보속을 다른 사람의 보속과 맞바꾸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보속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로 대사가 제한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는 교회의 보고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졌다. 이런 대사는 가톨릭 신자만 얻을 수 있고, 대죄가 없는 은총상태여야 하고, 정해진 기도나 선행을 정해진 시기에 합당한 방법으로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대사는 자신이나 죽은 이를 위해서만 얻을 수 있다.
교회의 역사 중에서 14세기에 특히 대사의 남용이 많았고, 15세기에는 돈과 관련되어 부정적인 면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대사는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에 따르는 보속과 잠벌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미사와 성체 성사는 동일한 것이다. 성체성사는 미사 전례와 완전히 부합한다. 성체성사에는 주님꼐서 참으로 현존하시며, 또한 성체성사는 제사로 이해 될 수 있다. 성체성사는 주님께서 구원의 절정인 파스카 신비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이것은 구원경륜의 핵심이다. 이런 미사의 기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 번제와 속죄제사로 이해되었음에 기인한다.
또한 최후의 만찬(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카 22,15-20; 1코린 11,23-26)이 감사와 제사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유다인들을 대상으로하는 예루살렘 전승, 루카와 1코린은 그리스어 사용하던 공동체를 위한 안티오키아 전승이다. 말마디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주님의 최후 만찬이 10년 안에 일정한 형식으로 고정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요한 복음은 최후만찬 때 성체성사를 설정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 복음 6장을 보면 이집트 탈출과 연관된 내용이 나온다. 이 연관을 보여 예수님의 입지를 강조하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찬례 기도문은 교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2세기 말엽에는 이단자를 반박하던 이레네오 주교가 성찬례에 관한 신학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까지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참으로 계신다는 교리가 일방적으로 강조되었다. 그런데 16세기 초 이론가들이 성체성사에 대한 이단적 주장을 하자 마사에 참례하고 성체를 자주 영하는 신자들이 늘어났다. 이에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체성사는 단순한 표지도 표상도 아님을 말하면서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재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계신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실체변화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미사 성제는 십자가 제사의 효과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그 효과를 산 이와 죽은 이들에게 적용시키는 참된 제사임을 이야기 했다. 즉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 완벽하게 이루어진 죄 용서를 날마다 실현시키는 것이 미사성제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사성제의 성사성, 교회와 미사성제의 관계를 새롭게 강조하였다. 또한 신자들의 역할을 재인식 시켰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사제는 그리스도의 집전자로서 미사성제를 드리고, 사제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든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성체성사를 이루는 당사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이다. 성체성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방법이다. 성체 성사는 공상으로 변하기 쉬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인시켜 주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우리를 결합시킨다.
이런 성체성사에서 성령은 특별히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교회는 이런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유일한 장소로 사제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사를 거행한다. 그리고 사제들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제사만을 드린다.
성품성사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신권을 주는 성사다. 세례성사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성사는 성품성사를 받은 성직자만이 합당하고 유효하게 거행할 수 있다.
부제는 제일 낮은 계급의 성직자로 신부와 주교를 도와 교회 안에서 봉사직을 수행하는 성직자다. 그 임무는 성체를 분배하고, 강론을 하고, 세례성사를 집전하고 혼인식과 장례식을 주례하며 그 밖에 주교와 신부를 보좌하는 일이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는 주교 밑에서 광범위한 일을 수행하였고, 현대에서는 사제직의 준비단계로 바뀌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 후 초대교회처럼 결혼한 평신도 중에 모범이 되는 이를 선발하여 교회의 직책을 수행하게 하는 종신 부제직이 도입되었다.
신부는 주교들의 일들 돕기 위해 선발된 협력자들이다. 그들은 주교가 정해주는 사목구역 안에서 사목하되, 철저히 주교의 사목지침을 따라야 한다. 신부들의 사목권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성품성사를 통하여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께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목권을 행사할 떄는 주교에게 종속된다.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주교와 신부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차이는 주교는 고유한 사목 직무가 있는 반면, 신부들은 주교의 사목 직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즉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이고, 신부는 주교의 협력자라는 것이다.
주교는 성직자 중에서 제일 높은 계급이다. 주교직은 교계제도의 핵심을 이룬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며 사도단이 당신을 대신하여 교회의 지도자로 교회를 이끌어 가도록 배려하셨다. 그리고 그 사도들의 후계자가 주교들이다. 성경에 ‘감독’으로 지칭된 그들은 그리스도께 사목권한을 받은 실권 있는 사목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에게 위임된 지역 교회에서는 고유의 사목권을 행사한다. 신부는 자기의 사목구역에서 자기 주교를 대리하지만 주교는 자기의 사목 구역에서 로마교황의 대리자가 아니다. 주교들은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예언자직과 사제직과 왕직을 수행할 고유한 사목권한을 받는다. 그리고 다른 교구의 사목에 간섭을 못할뿐더러 실제로 타교구의 사목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가톨릭 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나 세계 주교단의 단장인 로마 교황과 일치를 이루며 서로 긴밀한 일치를 이룬다.
교황은 베드로 사도의 수위권을 이어 받은 로마의 주교이다. 교황은 전 세계 주교들의 으뜸이며, 로마 교황은 주교들의 일치의 원천이기 때문에, 교황을 빼고서는 주교단의 일치성이 없어지고 만다. 교황은 전 세계 교회를 통괄하고 다스리나, 주교는 자기 교구만 통괄하고 다스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교황은 주교 임명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통하여 전 세계 교회를 통치한다.
사제 독신제
가톨릭 교회는 기혼자에게도 부제품을 준다. 그러나 사제품과 주교품은 미혼자에게만 준다. 3세기까지만 해도 기혼 남자에게 서품을 금지하거나 기혼사제의 부부관계를 금지한 법규는 없었다. 그러나 312년 안치라 공의회와 325년 니체아 공의회는 미혼자들이 일단 성품을 받으면 결혼을 못하며, 기혼자가 주교로 서품되면 아내는 수녀원에 들어가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동방교회에서는 17세기부터 이 규정이 완화되어 미혼으로 부제품을 받고도 결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라틴교회는 306년 스페인 엘비라 교회회의에서 주교, 신부, 부제가 결혼 할 수 없고, 만일 결혼하면 그 품은 무효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는 사제가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가 사제 독신제도를 재차 규정하였다. 그리고 1917년 교회법으로 사제 독신제를 명시하였다. 이런 사제 독신제는 교회 전체로 보나 성직자 개인으로 보나 여러 가지 점에서 선익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사목적인 이유로 성직자의 독신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수도자 신분은 하느님 백성의 생활 양식에서 온 것이다. 생황양식에 따라 수도자와 재속인으로 구분되고, 그 직분에 따라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된다. 수도자는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3대 서원을 통하여 자신을 오롯이 하느님께 봉헌하고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며 교회의 거룩함의 표지가 되고, 앞으로 완성될 교호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복음 삼덕을 일반인에게도 강요한다면 예전의 이단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점에서 유의가 필요하다. 성 안토니오 은수자로부터 시작한 수도생활은 3-4세기 사막교부들로 이어지고, 성 파코미오에 의해 공주 수도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의 수도규칙에 따라 성 바실리오도 규칙을 만들었고, 성 아타나시오 덕분에 서방교회에서 수도생활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후 성 암브로시오,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 성 마르티노 등의 성인들이 수도 생활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6세기의 성 베네딕토의 수도규칙서와 수도원 창립으로 수도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자를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남녀는 풀릴 수 없는 결합으로 나타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혼인을 인격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었고, 혼인의 본질을 ‘부부 사랑의 합법화’로 규정하였다. 부부 사랑을 합법화하려면 내적인 조건과 외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내적인 조건은 자유와 인식이고, 외적인 조건은 예식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혼인의 가장 큰 목적이 자녀출산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원론적 사고로 성과 출산은 동물적 본성에서 오는 것이고, 부부 사랑은 이성적 본능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성 유스티노는 “우리는 자녀를 얻는 목적으로만 혼인한다.”고 하였고, 성 이레네오는 혼인은 인류 번식을 위하여 제정된 제도라고 보았다. 성 클레멘스, 오르게네스, 성 요한 금구까지 대부분의 교부들은 자녀출산을 가장 중요한 혼인의 목적으로 보았다. 그 후 4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노는 혼인의 윤리적 가치에 관심을 두고, 혼인의 세 가지 선을 언급하였다. 자녀출산, 부부 상호신의 그리고 혼인의 성사성(불가해소성)을 이야기 했다. 그 후 스콜라 학파시기(12세기) 원죄 이전의 혼인은 인류번식이었고, 원죄 이후의 노아까지는 혼인은 자녀출산과 정욕의 치료라고 보았다. 그러나 노아의 자손 이후 인류 번식이 충분히 이루어진 다음 부터는 혼인은 의무적이 아니라 정욕 때문에 베풀어진 관용이라고 보았다. 라온의 안셀모는 혼인의 목적을 자녀 출산 및 간음을 피하는 것, 그리고 부부사랑의 증진으로 보았다. 빅톨 후고는 인류 번식과 정욕치료로 보았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혼인의 일차 목적은 자녀출산과 교육이고, 다른 것은 여기에 종속되는 이차 목적으로 보았다. 이 후 교황 비오 11세는 부부 상호간의 내적 향상과 완성이 혼인의 일차적 원인이며 이유라는 상당히 진보적인 견해를 보였다. 1917년 구 교회법 1013조는 세계대전 이후 바뀌어 가는 인간의 논의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일부 신학자들 사이에서 급진적인 이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혼인의 근본적인 특성이 사랑의 은약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기존의 일차 이차의 논의에서 융통성을 보였다.
그리스도교적 혼인의 두 가지 특성은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이다. 혼인의 단일성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 불가 해소성을 명시하여, 일부다처를 금한다. 이러한 단일성은 인격주의적 관점에서 풀어나간다. 그러나 마태에 복음의 예외조항 5장 32절과 19장 9절은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들고 있는데, 용서와 화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볼 때 이런 입장은 잘 선별해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도 바오로 특전이라고 해서 코린토 전서 7장을 근거하는 예외 규정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 받지 않는 남녀의 유효한 혼인에서 부부 중 한 쪽만 세례를 받고, 비 신자측에서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소성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영육 전체의 결합을 통해 인간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환자들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사회와 종교생활에서의 새출발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신약성경의 정신을 따라,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도유 성사는 죄 용서와 육체의 치유를 연결시킴으로써 죄를 질병의 원인으로 보고 병자를 치유하는 성사다. 야고보서 5,14-16은 병자성사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런 근거에도 불구하고 5세기 경에 이르러서야 병자 도유 예식은 시작되고, 8세기부터 빈번히 언급되며, 9세기에는 주교와 지방 공의회가 병자의 도유에 관한 지침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엄청난 사례금과 종부성사라는 이미지 때문에 신자들 사이에서 기피되기도 했다. 그 후 10세기 경부터 지금 처럼 고해, 성체성사와 함께 거행되었다. 그 후 12세기에는 임종성사로 전락하였고, 16세기에 루터에 의해 비판 받는다. 그 후 트리엔트 공의회는 임종자의 성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서품된 성직자만 집전 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병자성사의 이름을 되찾고, 그 안에 담긴 풍부한 내용을 되살렸다. 즉 환자들은 병자성사 덕분에 죄악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고 죄악의 결과인 질병과 고통을 이길 수 있게 된 것이다.
*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는 부정과 거부, 분노와 발악, 하느님과 타협, 우울한 상태, 죽음을 받아들임이다. (엘리자베스 퀴를러로스)
*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말을 이야기 함 (죽음, 심판, 천당, 지옥)
*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세올을 생각했다가 하느님 전능에 관한 교리와 충돌하고 유일신 사상을 확립했다. 그 후 죽음을 대속 차원에서 보게 되는 단계 등으로 발전했다.
*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죽음이고, 부활에 대한 희망이다.
* 교회는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모든 사람은 죽으며(죄와 구원의 보편성), 죽은 후에는 회개나 공로를 세울 수 없다고 가르친다.
* 천국은 공간 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천국은 우리의 전인적 구원과 희망을 잘 드러내 준다. 교회에서는 지복직관을 누리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죽는 즉시 지복직관을 시작한다고 가르친다. 교회의 공식 문헌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해 개별심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 연옥은 죄와 그에 해당하는 벌을 가지고 죽는 경우 정화과정을 거쳐야 영생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에는 이런 연옥 교리가 없다. 동방교회에서는 하느님과 만남을 준비하는 마지막 정화의 과정이라는 것에 역점을 두고, 서방교회에는 벌을 기워 갚는 고통스러운 감옥이라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둘 다 죄나 잠벌이 있는 상태로 죽은 사람들의 경우 정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동방교회는 5세기 경에 연옥교리가 완성 되었지만 서방교회는 중세기에 가서여 정리되엇고,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죽은 이들에게 선행을 양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교회는 소죄나 잠벌이 있으면 연옥에 간다고 하면서, 공심판 후 까지 연옥이 연장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 지옥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지옥을 실고(失苦), 각고(覺苦)라고 표현하면서, 그 영원성과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 벌이 서로 다르다고 가르친다. 지옥 교리는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이 절대자 하느님을 모실 능력이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생각해야 한다.
* 구약시대의 육신의 부활은 인간의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성경은 부활을 보편성(선인과 악인 모두)을 가르쳤다. 교회는 모든 사람은 세상 종말에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과 부활한 육신은 죽기 전의 육신과 본질적으로 같은 육신이며, 의인들의 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본받아 영광스럽게 변한다고 가르쳤다. 신학자들은 4기지은(상하지 않음과 빛남, 빠름, 사무침)등을 받는다고 이야기 했다.
* 중간상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없다고 보는 것과 육신과 영혼의 분리된 기간이라는 것, 육신의 부활을 향해 나아간다는 등의 견해가 있다.
1)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 뒤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인간적인 인기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올곧은 성품과 겸손의 자세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