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너 자신을 알라
만일 행복이 쾌락적 감각을 느끼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생화학 시스템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만일 행복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보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좀 더 효과적으로 기만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견해는 행복이란 모종의 주관적 느낌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현대의 지배적 종교는 개인의 주관적 기분을 신성시 하는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선악, 미추, 당위와 존재는 모두 우리의 주관에 따라 결정되며 무엇이 좋은지를 알려주는 빅브라더는 필요 없다고 한다. 현대 인문학은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속임에 있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장 자크 루소는 이런 견해를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선이고,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이다.”라고 가장 고전적으로 표현했다. 유년부터 이런 구호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은 행복이 주관적이며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잘 아는 이는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그런 견해는 자유주의에 특이하며, 역사상 종교나 다른 사상은 가치에 대한 객관적 척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유주의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델포이의 아폴론의 신전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져 있듯이, 보통사람은 진정한 자신에 대하여 모르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주관적 느낌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견해는 기독교, 프로이트, 성 바오로, 성 아우구스티누스, 찰스 다윈이나 리처드 도킨스도 같은 견해였다. 사람들은 기도보다 성관계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다르면, 자연선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 복제에 좋은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때론 설사 그 선택이 개체로서 자신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체는 다 그렇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평화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대신에 노동하고 걱정하고 경쟁하고 싸우며 삶을 보내는데, 이들의 DNA가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따라 그렇게 조정하기 때문이다. 악마와 마찬가지로, DNA는 덧없는 기쁨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철학과 종교는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그 중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들은 2,500년 전부터 행복의 본질은 무엇이고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이 불교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신과 같은 외부 세계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동일시하고,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은 전쟁을 하던, 다리를 긁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즐겁고 결의에 차 있다가 금방 슬프고 낙담한다. 만일 즐거움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끝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여,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으며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에 사는 것이다. 그 결과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드려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 자유주의적 문화에서 이런 사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기우려야 한다.” 혹은 간결하게 “행복은 내면에서 시작된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주적 견해는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견해는 같다. 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길수록 집착도 심해지고 괴로움도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외적 성취의 추구뿐만 아니라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며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일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고대의 수렵채취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의 가설을 만들어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서전,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에 사는 것이다. 그 결과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드려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유발 하라리는 득도의 순간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그래 그래 번뇌야!
파도처럼 왔다가 가거라! 네 맘대로 왔다가 가거라~!
불교를 이렇게 잘 설명한 글은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