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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시편 51편
제목: 가장 먼저 해야 할 기도
내일부터 21일 새벽작정기도가 시작됩니다. 이 작정기도를 어떤 마음과 자세로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왜 우리가 기도해야 되며, 기도를 통해 무엇을 얻고 깨닫기 위함인가를 한 번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무기 또한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있고 사랑이 있고 보살핌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에게 ‘기대’이며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마는 기도를 지속시키는 것은 영적 갈급함입니다. 영적인 갈급함이 없다면 새롭게 거듭난 자의 특권이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혼자 하는 것이 아닌 것 아시지요. 성령님이 도와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도우십니까? 신령한 마음으로 창조시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하십니다. 영적으로 벌거벗은 자임을 보여주십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축복이 있다면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누구도 자기가 가난하고 가지가 궁핍하고 자기가 배고픈 것을 이해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겠다는 각오와 결심은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자인가를 인식할 때부터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고 영적인 충만함을 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성공을 했고, 세상적으로 고통이 없고, 세상적으로 답답한 것이 없다고 해서 기도제목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싸움입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네 벌거벗은 것과 가련한 곳을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불신자에게는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죄인임을 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배고픔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환경과 조건, 그리고 문제꺼리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것을 위해서 영혼에 관한 문제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것이 일차적입니다.
내가 비록 밖에서 볼 때는 배운 자요 잘난 자요 부족함이 없는 행복하기 그지없는 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영적인 존재로 서서 보면 우리만큼 부족함과 가난함과 더러움으로 쌓인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또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는가를 점점 알아가는 것이 기도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만큼 더러운 죄인이 어디 있습니까? 나만큼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아버지 제가 죄인의 괴수입니다. 제가 가난한 자입니다. 저 만큼 연약한 존재는 없습니다. 긍휼을 허락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지금 성령님을 통해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느냐 하면 내 욕심을 체우는 방법으로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 문제 거리만 들고 나옵니다. 물론 세상의 문제 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답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어렵고 힘든 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서 해결함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이 있고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영적인 것과 영원에 관한 것에 집중되지 않고 내 욕심만 차리고 내가 세상에서 잘난 것을 증명하고 세상의 것으로 치장하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면 그리스도를 봉으로 보고 ‘부’의 대상으로 보고 해결사나 변호사정도로 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면서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집으로 강도의 굴혈을 만드느냐?’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거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주었고 달라는 것 주었고 예배도 드렸으니 내가 원하는 것도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기도시간에 ‘천국증권거래소’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만족할 수 없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충만함과 거룩함과 그 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위해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해야 할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도할 때 예를 들어‘내 남편을 낫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내 남편의 잠든 영혼을 깨워주옵소서’가 일차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번에 제 남편을 병석에서 일어나게 하시면 제가 남편을 이번 기회에 아주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웃기지 마세요. 그래서 일어나면 아주 교회에서 산 답디까? 자기가 잘나서 일어난 것이고 치료를 잘 받아서 일어난 것이지 하나님의 도움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을 세상적인 문제를 초월해서 영적인 문제의 더럽고 추악한 죄인임을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합니다. ‘주여 필요하시면 병석에서 남편이 일년 누워있어도 좋습니다. 그의 영혼이 살고 주님을 붙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 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우리가 연약하며 가난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가지신 부요함과 영광과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분에게 가면 있다는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 그에게 못할 것이 없는 줄을, 그리고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를 우리에게 알게 하도록 성령님이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영안이 열려야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면 그 영광의 감격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 그의 영광, 그의 거룩함, 그의 의로우심 거기에 비하면 추악한 나, 벌거벗은 나, 감히 그 앞에 나갈 수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고 감사가 있고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좀 구체적으로 죄에 대해서 함께 나눌까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기도에 가장 중요한 것이 죄인 됨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이것만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고 능력의 삶을 살수 있고 거룩한 길을 걸아갈 수 있습니다.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가난하고 더럽고 추악한 존재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으로 들어가는 길이기에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기적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0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게 하셔서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제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성경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아니오’가 없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임을 아는 순간 실제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만일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머리 속에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 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는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예’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천가지로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머리에만 담아두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이것을 끄집어내어 마음을 감동케 하므로 실천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 날마다 거역함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길로 가는 것이 죄입니다. 로마서 14:32에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자 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죄는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저 인간일 뿐인데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인간이고 연약하고 미련하기에 성령을 보내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승리를 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인간일 뿐이다'는 말만큼 어리석고 예수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 안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곁은 인간일 뿐이지만 우리의 영은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영이 사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래서 우리에게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연합체이며 성령이 내주하셔서 우리를 도우고 계십니다. 이 엄청난 진리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알고도 주님께 저항한다면 '나는 인간일 뿐이다'고 항변한다면 이것이 죄입니다.
요한1서 3:4에 '죄는 불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법은 반역을 말하는데 반역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찌 ‘안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의 말씀은 ‘됩니다.’ 밖에 없습니다. ‘안 됩니다’가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안 됩니다’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주님이 주인이라면 ‘안 됩니다’가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21일 작정기도를 통해서 죄를 깨닫고 죄 씻음의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동일에게 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우리 안에 왜 권능이 없고 삶을 기쁨과 감격이 위로부터 임하지 않습니까? 성령의 기름부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가장 큰 근원적인 문제는 죄를 해결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21일 작정기도는 1907년의 성령의 역사가 저희교회를 통해서 재현되기를 원합니다. 그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회개를 통해서 나타난 다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다윗을 통해서 죄의 중요함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를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깨닫고 실질적으로 우리의 작정기도가 다윗의 회개기도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 시편 51편에서 보면 다윗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죄가 더 크고 심각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편51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아를 죽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잘 아시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음 즉시 나단 선지자를 보낸 것이 아닙니다. 1년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회개하도록 1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다웟은 회개는커녕 죄를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죄로 뒤틀린 다윗을 바로 잡기 위해서 나단 선지자를 보낸 것입니다. 나단선지자는 애지중지하는 암양새끼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윗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양을 많이 소유한 부자가 그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소리를 듣고 있던 다윗이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로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사무엘하 12:7에 있습니다.
다윗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토해낸 죄의 결과입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의 울부짖는 기도소리를 우리는 들어야합니다. 그리고 저나 여러분들이 기도해야할 자세입니다. 그는 시편 51편 첫 줄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기서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긍휼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하나님께서 보류하시고 나에게서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께서 즉시 행하실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거두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마땅히 받아야할 벌이 죽음이었는데 가장 먼저 다윗을 그것을 알고 긍휼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할 기도 내용 중에 왜 긍휼을 구해야하는지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 죄를 도말해 달라'고 간구해야할 만큼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다윗은 또 다른 죄를 고백하는 내용이 시편 51:3-4에서 나옵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 그러니까 다윗은 어디서 죄를 범했느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에서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계시고 다윗은 하나님이 보고계심을 알면서도 고의로 죄를 범했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보시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분명한 지침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은 것이 주의 목적에서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다윗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고계심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는 아무도 모른다고요. 아닙니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짓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죄에 대한 징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죄에 대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무감각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해가 지기 전에 너희 죄를 해결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향해 1년을 기다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분명히 그냥 넘어가는 법은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상처를 준다든지 슬픔을 안겨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저 사람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길래 저렇게 살도록 내 버려두시는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순종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위한 믿음의 삶을 살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선포하는데 듣지 않거나 그 계명을 귀하에 여기지 않는 것 또한 죄입니다. 히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죄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하나님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믿는 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상 ‘너희가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나를 반대하는 것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고의로 거역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인들 죄를 실감나게 정확하게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짓밟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오셨는데, 죄 문제를 해결하셨는데 우리가 계속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거룩하게 한 연약의 피를 부정하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죄를 짓는 것은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하는 무시무시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서 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라’ 그리스도인이 죄 짓은 것이 불신자가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상대로 죄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 죄 중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것이고 또 우리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속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 오면 맨 날 죄인 취급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위로의 말씀이나 좀 희망적인 말씀을 들으러 왔지 죄인취급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진정한 위로와 평강은 없습니다. 우리는 죄가 가로막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기도의 응답이 막히고, 기쁨이 없고, 능력을 받지 못하고,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형식적인 예배와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네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지라’ 이번 21일 작정새벽기도가 회개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길 원합니다. 그래서 정결함을 받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소유하며,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능력을 받고, 삶의 변화가 일어나 문제가 해결되고 사업의 길이열리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21일 작정새벽기도의 방향성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난 것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했느냐 때문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하나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 목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을 무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하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대한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기도를 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로 때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난 기도했어!’, 난 성경 봤어!’ 그래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감당하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능력을 구하는 것이지 ‘난 기도했다’로 끝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데 힘이 되고 목표가 되고 방향이 되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위에서부터 힘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는 것이지 내가 할 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농부가 농사를 열심히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열심히 기도하면 됩니까? 봄에 밭을 열심히 갈고 다음에는 씨를 뿌리고 그리고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이런 것을 늘 해야 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 비가 와야 하고, 날씨가 좋아야하고, 기온이 맞아야하는 문제는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으려면 지혜가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하고 또 좋은 정보도 필요한데 그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로 농사를 대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를 알고 나약하며 가난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성품을 배우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을 모르고 하나님의 계획을 잘 모르니까 기도를 통해 성령님께 물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 분과 동행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할 책임을 감사함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는 반드시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기도는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했고 할일을 다 했으니 지금부터는 하나님께서 맡으셔서 잘 알아서 해 주십시오’이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윗이 시글락에서 부하들과 돌아왔더니 가옥이 불탔고 모든 식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총 책임자로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부하들은 그 원망이 다윗에게 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 곡식과 가축이 약탈됐고, 집은 잿더미만 남았고, 처자들이 붙잡혀 갔지만 아무도 누가 그들을 어디로 잡아갔는지 몰랐습니다. 실종된 가족들은 이미 죽었거나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상황 때문에 자포자기하거나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고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 숄을 내게 가져다 달라 에봇을 내게 가져다 달라’ 그는 기도 숄을 쓰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이야기 해 봐야겠어!’ 그런 모습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상상이 되겠습니까? 엄청난 혼란과 정서적 궁지에 빠진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을 젖혀두고 기도하러 갔습니다. 전혀 누군지도 모르는 미지의 적이 그의 모든 소유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약탈해 도망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기도시간을 가장 먼저 때어내어 기도했습니다.
모든 상황은 다윗에게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부하들의 불만과 낙심의 소리는 시간이 가면서 더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부하들의 한숨소리와 불평소리만 듣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절박한 위기 속에서 고민하고 고뇌했지만 다윗은 분노와 원망을 쌓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말씀을 받을 때까지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간단하고도 충분한 지시와 약속을 주셨습니다. ‘추적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너는 단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여기 너를 위한 계획이 있다’ 그래서 다윗이 기도하니까 저절로 잡혀간 식구들이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추적해야 되고 싸워야 되고 잡아 와야 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 지혜를 받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가는 행함이 없이는 기도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21일 작정기도 때 많은 성령의 감동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면 행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체험들이 있고 약속을 누리고 축복의 삶을 계획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기도해야 할 때 세상을 붙듭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져야할 때 겁에 질러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살 길의 해답은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가 맡기고 하나님의 음성과 응답을 받아야 될 때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낙심합니다. 먼저 회개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길을 보고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