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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담엔카 원문보기 글쓴이: 명사십리
아!~소록도(小鹿島)
아래 글은 나환우들에 대한 네가지의 글이 게재(揭載)되어 있습니다.
좀 길더라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소 록 도(小鹿島)
정 명 수
국토의 동남단에 자리한 고흥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섬들이 그 파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이곳은 국립다도해 해상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전국에서 모여든다.
고흥반도의 끝자락에는 크고 작은 해상의 화물선이 오가며,
수많은 고기잡이배들이 드나드는 녹동포구가 있다.
이 포구는 조선 초기에 사도진 첨사가 다스리던 수군이
적 방비를 위해 진을 치기도 했다. 이곳에서 10여
리쯤에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집이 있다.
녹동포구의 맞은 편 바다 건너에 수목이 울창하고 은빛 모래 띠를
두르고 우뚝 솟아 있는 섬이 소록도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을 따라 이곳으로 도시락을 허리에
차고 10리 길을 걸어서 소풍을 가기도 했었다.
소록도는 녹동에서 불과 700여미터 거리에 있는 섬이다.
섬이지만 여객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지금은 연육교가
가설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곳이다.
산에는 하늘을 치솟은 삼나무와 껍질이 두꺼운 참나무가
무성하고 그림 같은 적송과 아담한 해송이 많으며 매화, 철쭉,
진달래가 철따라 피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숲이 푸르고 공기가 맑아 누구나 살고 싶어 했다.
1916년 2월 일본인들이 나병환자 치료를 목적으로 부지 2만평에
건물 47동을 지어‘자혜의원’으로 개원했다. 그 후에 병원의
이름을 나병원, 중앙나요양소, 갱생원등으로 불어오다가
1960년 7월에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환자 수가 6.100명이나
되었고 병원장은 일본 천왕이 직접 임명하여 배치했다.
150여만 평에 달하는 이 섬에는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누어
경계선을 치고 철조망을 쳐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도록 했었다.
지금은 ‘병사지대’라는 푯말만 세워 놓았고 그 옆에는
‘수탄장愁嘆場’이라는 간판이 있을 뿐이다. 나병환자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부모와 격리시켜 보육사에서 길렀다.
부모는 경계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갈라선 채
한 달에 한 번씩 미감아를 만나야만 했다. 지척의 거리에
두고도 혈육을 껴안아 보지도 못한 채 눈으로만 만나야 하는 비참한
광경이 이곳에서 이루어 졌었기에 ‘수탄장’이라 불렸다 한다.
나병은 자식의 병이 부모에게는 전염되지 않지만
부모의 병은 전염될 수 있다고 한다. 형의 병은 동생에게
옮겨지나 동생의 병은 형에게 옮겨지지 않으며 부부 중에 어느
한쪽이 나병이면 부부간에 전염이 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소록도에 수용되어 있는 환자들은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다.
한 번 수용되면 마음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
8.15 해방을 맞아 나라가 어지러울 때 나환자들이 소록도를
뛰쳐나와 길거리를 해매고 다닌 적이 있었다. 벙거지 모자에
깡통을 차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각설이 타령을 하고 구걸을 했다.
그것을 본 나는 벌벌 떨면서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모른다.
마을 근처에 있는 동굴에 거적을 깔고 두세 사람이 함께
생활하면서 무리지어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문등병은
어린아이를 잡아 간을 내어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헛소문이 돌아
어른들은 문둥이에게 잡히면 죽는다고 도망가라고 일렀다.
그 말을 믿고 나환자만 보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다. 나병은
눈썹이 없고 코가 문드러지고 얼굴은 험상궂게 일그러져
보기에도 흉측했다. 어른들은 전염될까봐
주의를 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었나 보다.
정부가 들어서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시작할 무렵부터
길거리에 나 돌아다니는 나환자는 많지 않았다.
나는 소록도와 가까운 시골에서 살았기에
피부색과 얼굴만 보고도 나환자임을 안다.
몇 해 전에 친구와 함께 소록도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소록도에 사는 친구가 있어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잘 정리된 가로수와 정원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나
병사지대의 많은 집들이 텅 비어있었다. 지금은 DDS라는
치료약이 개발되어 나병 치료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어 환자
수가 많이 줄어 수용 인원이 7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정부가 들어서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시작할 무렵부터
길거리에 나 돌아다니는 나환자는 많지 않았다.
나는 소록도와 가까운 시골에서 살았기에
피부색과 얼굴만 보고도 나환자임을 안다.
몇 해 전에 친구와 함께 소록도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소록도에 사는 친구가 있어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잘 정리된 가로수와 정원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나
병사지대의 많은 집들이 텅 비어있었다. 지금은 DDS라는
치료약이 개발되어 나병 치료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어 환자
수가 많이 줄어 수용 인원이 7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정부가 들어서고 질서가 바로 잡히기 시작할 무렵부터
길거리에 나 돌아다니는 나환자는 많지 않았다.
나는 소록도와 가까운 시골에서 살았기에
피부색과 얼굴만 보고도 나환자임을 안다.
몇 해 전에 친구와 함께 소록도에 간 일이 있었다. 마침
소록도에 사는 친구가 있어 안내를 받아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잘 정리된 가로수와 정원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나
병사지대의 많은 집들이 텅 비어있었다. 지금은 DDS라는
치료약이 개발되어 나병 치료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어 환자
수가 많이 줄어 수용 인원이 7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직원지대에서 병사지대로 갔다. 8.15 해방을 맞아 환자들이
자치권을 요구하다가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처참하게
학살당한 84인의 영혼를 기리는 추모비를 보았다.
비문을 보니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서 한센 가족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염원하는 상징적 기념비였다.
녹동포구가 바라다 보이는 바닷가에 우뚝 솟아있는 3층 백색의
건물을 본다. 한센병 환자를 돌보아 주는 국립소록도병원이다.
의사 10여 명과 90여명의 간호사와 조무사가 일하고 있다.
병원 옆에는 노인 병동이 있고 바로 그 뒤편에 환자들을 검사하는
검사실이 있다. 검사실로 들어가니 나무판대로 만든 이동식
수술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환자를 검시하고
정관절제 수술도 했다고 한다. 기분이 으스스하다. 정관절제
수술을 받은 환자부부는 동거생활을 허용했다.
건물 뒤로 돌아가니 쇠창살이 보인다. 죄를 지은 환자의
감방이다. 몇 해 전만 해도 교도관이 파견되었섰다고 한다.
문둥병 환자는 천형의 섬인 소록도에서 상실된 삶의 비애를
느끼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슬픔을 삭이고 서러움만이
쌓여가는 나날이기에 애처롭기 그지없다.
중앙공원에 들어서니 자연과 환경이 조화를 잘 이루어
남국의 정취가 물신 풍긴다. 6.000평이나 되는 드넓은 대지에
야자수, 향나무, 은사시, 종려수, 황금편백, 팔손이, 치자나무등이
아름다운 수목으로 가득하다. 이들 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대만에서 들어와 심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병원 옆에는 노인 병동이 있고 바로 그 뒤편에 환자들을 검사하는
검사실이 있다. 검사실로 들어가니 나무판대로 만든 이동식
수술대가 있었다. 이곳에서 죽은 환자를 검시하고
정관절제 수술도 했다고 한다. 기분이 으스스하다. 정관절제
수술을 받은 환자부부는 동거생활을 허용했다.
건물 뒤로 돌아가니 쇠창살이 보인다. 죄를 지은 환자의
감방이다. 몇 해 전만 해도 교도관이 파견되었섰다고 한다.
문둥병 환자는 천형의 섬인 소록도에서 상실된 삶의 비애를
느끼며 한평생을 살아간다. 슬픔을 삭이고 서러움만이
쌓여가는 나날이기에 애처롭기 그지없다.
중앙공원에 들어서니 자연과 환경이 조화를 잘 이루어
남국의 정취가 물신 풍긴다. 6.000평이나 되는 드넓은 대지에
야자수, 향나무, 은사시, 종려수, 황금편백, 팔손이, 치자나무등이
아름다운 수목으로 가득하다. 이들 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대만에서 들어와 심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 공원은 일본인 4대 원장인 수호마사스에周防正季가
병든 환자들을 동원하여 1936년 12월에 착공 3년4개월의
공사 끝에 완공하고 그 후 두 번에 걸쳐 확장공사를 했다.
수호마사스에는 벽돌공장과 도로공사에 환자들을 강제로
투입하고 벽돌굽기, 숯굽기, 가마니짜기, 등으로 고된 일을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돈까지 거두어서 자기 동상을 세워 원성을 샀다.
매월 20일을 ‘보은 감사의 날’로 정해 놓고 환자들을 동원
자기 동상 앞에서 절을 시키기도 했다. 나환자인 경북 성주사람
이춘상李春相은 수호마사스에가 ‘보은 감사의 날’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연단으로 가고 있을 때 수호원장에게 다가가
‘너는 환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으라’고
소리치며 오른쪽 가슴을 찔려 숨지게 했다.
이춘상은 총독부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형이
집행되어 숨을 거두었다. 지금은 독립유공자로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수호마사스에가 죽은 자리에는 나병환자를
구원한다는 희색의 구라탑이 세워져 있는데 날개달린 ‘천사탑’이다.
탑의 기단에는 ‘나병은 낫는다’는 비문을 새겨놓고 가엽게
살아가는 나병환자들의 삶을 위로하고 격려해준다.
눈을 돌리니 자연석에 음각된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시비가 보인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필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필닐닐... 환자들의
삶의 처연함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고단한 삶을 살던 나환자들에게도 희망이 있었으니
3공화국에서 추진한 고흥군 오마도 간척사업이었다. 이들을
간척사업에 동원하여 방조제를 쌓게 하고 냉대 받던
환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간척지 1,100정보를 나눠주워
음성나환자 1,150세대를 소록도에서 이주시켜 살게 했다.
그때에 한하운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어제 깡통을 들던 손은 이제 씨앗을 뿌리는 손이 되고 어제
문전걸식에 굽신거리던 허리는 이제
대지를 향하는 일하는 허리가 되었다.
어서 욕되었던 얼굴을 치 들어라 언제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눈으로 하늘과 땅과 산천초목을
마음껏 보하라" -(세월이여) 중에서
나병은 하늘이 주는 형벌이라고 했다.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한 세상 살다 죽어갔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등진 체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애잔하고 눈물겹다. 천형이라니, 그들이 그 누구에게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부쳐진 말인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천대하다니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어본다.
그때에 한하운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어제 깡통을 들던 손은 이제 씨앗을 뿌리는 손이 되고 어제
문전걸식에 굽신거리던 허리는 이제
대지를 향하는 일하는 허리가 되었다.
어서 욕되었던 얼굴을 치 들어라 언제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눈으로 하늘과 땅과 산천초목을
마음껏 보하라" -(세월이여) 중에서
나병은 하늘이 주는 형벌이라고 했다. 죄수 아닌 죄수가 되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한 세상 살다 죽어갔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등진 체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애잔하고 눈물겹다. 천형이라니, 그들이 그 누구에게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부쳐진 말인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천대하다니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어본다.
== 끝 ==
-소록도 문학기행에서-
김현길
소록도, 소록도,한하운님의 소록도
나는 님을 소록도에서 만났다
다른 분들의 시비는 다 서서 있는데 님의 시비만 누워있다
영원한 봄 언덕에 보리피리를 불며,
반가운 문둥이 동무들이 걸터앉아 쉬라고
아니, 그가 살다간 인생길이 너무 힘들어서 누워있다
너럭바위 시비에 걸터앉은 초로의 노인이 그를 쓰다듬으며
"시인 한하운은 내 친구여!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여!"
쓰다듬는 그의 손도 역시 조막손이다.
이제 님은 천안 삼거리 버드나무 밑에서
찌까다비를 벗어서 발가락이 몇 개 남았는지 헤아려볼 필요도,
황톳길 절름절름 전라도 천리 길을 찾아갈 필요도 없다
반가운 동무들과 지상낙원이 된 이 소록도에서
그는 영원히 살아있으니까.
*한하운: “보리피리” “전라도 가는길” (소록도 가는 길)을 발표하여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실제 그도 한센병
환자였으며, 6개월정도 그곳에서 살았다.
소록도 중앙 공원에 있는 “보리피리” 시비가
특이하게 너럭바위 처럼 눕혀져 있다.
소록도를 사랑한 두 이국인 수녀님
지 소은
전남 고흥군 도양리 소록도에서 봉사생활을 하시다
43년만에 고향으로 몰래 귀향하신
마가랫. 마리안 두 수녀님이 떠나신 소록도의 슬픔을 읽고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흐를만큼 진한 아픔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이땅에 마음과 몸을 아낌없이 주고가신 분들....
천형이라 불려지든 한샘병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뒤로한체
온 몸이 일그러지고 뒤틀린 그분들을~ 우리는 소록도로 귀양 보냈습니다.
천해의 고도에서 그분들은 몸 과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진심으로 감싸않고 어루만진이들이
먼~타국 오스트리아에서 손수 달려와 주신 당신들이였다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말 부끄럽습니다.
장갑도 끼지 않은체 그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료하고
함께 음식을 나눠먹기까지는 자애로운 큰사랑 없이는 꿈도 못꿀일입니다.
우리가 섬으로 밀어낸 그분들을
두 수녀님은 조국에서 보내오는 물품과 작은 돈 마저도 훌훌털어
아낌없이 주는 진한 사랑으로 보듬어 않았고 감싸 주셨는데
우리는 점차 그들을 잊어갔습니다.
동족으로서 큰 수치심을 느끼며~
늙어~ 짐이 될까봐 편지한장 놔둔체
빛바랜 40년전 가방하나 달랑 들고 떠나신 두 분
가시는 뱃전에서 내내 뜨거운 눈물로 인사를
대신하셨다 하니 그 마음 오죽 아팠을까요?
조국의 세평 방을 우리의 민속품으로 장식하시고
소록도의 옥빛 그 바다를 그리워하며 전라도 말이 더 익숙해져
오히려 낯설어진 조국 생활속에 자리잡은 두 수녀님.
먼 거리에서도 우리의 한샘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것입니다
* * *
나 어려서 학교길 방과후의 보리밭은 악몽이였습니다.
넓은 들이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내 고향은
벼 심기전 보리를 많이 심었고
그속에 문둥이들이 숨어있다 애들을 잡아 간을 빼먹는다는 헛소문 때문이였지요.
그당시 먼 동리도 한 이웃이였기에
간간히 누구집 며느리가. 딸이 아들이 그병으로 뒷방생활하다
멀~리 떠났다는 소리를 어른들을 통해 풍문으로 듣곤 했습니다.
소녀시절 우연히 접하게된 나병시인 한 하운님의 황톳길 시집을 읽으며
가도가도 끝이없는 황토길속에
빛 한줄기 보이지 않는 막막함과 고독 배고품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아픔을 내것인양 느끼며
서적을 접하다보니 나병 자체는 혈액으로 옮겨짐도 알게됐습니다.
수원에서 신접 살림을 하며 남편의 발등 습진 때문에
지금은 용인수지시가 돼버린 풍덕천의
깊은 산중에 자리잡은 영광약국을 가보니
닭을 생업으로 키우며 살아가는 그분들을 직접 접할수 있었습니다.
손과 얼굴은 일그러졌어도 그분들의 마음이
천사를 닮았슴을 그곳을 들락거리며 알았습니다!
들고온 삶은계란 곱은 손으로 건내주시던 할머니
고맙게 받아 맛있게 먹기만했지 드린건 없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저 산넘어 세상이~
인간의 냄세가 ~두고온 살붙이가 뼈져리게 그리웠든겁니다.
찡한 그리움과 고독을 싸않아 주시다 떠나신 두분이기에
일거리를 팽게친체 슬퍼함을 어이모르겠습니까?
현제의 소록도를 재 조명 해보고 우리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늦게나마 나누고
관광차원이 아닌 나눔의 차원으로 그곳을 들려봐야 할것같습니다.
소록도민 여러분 이젠 그만 슬퍼하시고
그분들이 찾은 조국에서 편히 여생을 마칠수 있도록 놓아 주십시요.
꽃다운 시절에 오셔서 은발이 성성할때 떠나신
진정 성자인 마리안(71세). 마가랫(70세) 두 수녀님께
고마운 감사를드리며 이 글을 바칩니다
소록도의 감금실(監禁室)
수필(隨筆) [ 사람과 삶]
지금 나는 일제시대 침묵 속에 갇혀있던 소외의 땅 소록도(小廘島),
그 중에서도 가장 나환자들의 아픔이 깃들어 있는 굴욕의 장소 감금실(監禁室)-
등록문화제 제 67호) 안에 서있다. 당시 고초를 당한 사람의 입장이 아닌 방관자,
일개 관광객의 입장에서 느끼는 기분이지만 엄습해 오는 우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약없이 이 감옥에 갇히어 치욕스런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까.
누가 곁에서 증언해 준 이가 없어도 담 벽에 내 걸린 시(詩)
한수가 오롯이 그 아픔을 전 해주고 있다.
‘아무 죄가 없어도/ 불문곡직 가두어 놓고 /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찌하여 밥도 안주느냐? (이하 생략)’
이 이상 더 어떻게 분노를 표현할까. 건물은 붉은 벽돌로 견고하게 쌓아 올려 져 있다.
마치 H자 형자의 두 동에는 방이 다섯 개. 이곳에다 일제는 원생들이 규율을 어기면
가차 없이 가두고는 비열하게 밥을 굶기며 학대를 자행했다. 그것도 모자라 출감 시에는
나병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는다며 옆 동에 있는
검시실로 끌고 가 단종수술(정관수술)시키기도 했다.
이것만도 슬픈 사연인데, 병원 초입에는 또다른 아픔을 증언하는 안내판이
새워져 있었다. 하나는 수탄장(愁嘆場)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애한(哀恨)의
추모비(追慕碑)인데, 수탄이란 근심하며 탄식한다는 말로, 당시에는 환자를
수용하는 곳과 그 자녀들인 미감아가 머문 곳을
구분되어 있어서 철조망을 쳐서 차단을 시켰단다.
그래놓고는 감염차단을 한다며 한 달에 한 번씩만 먼발치에서 만나게 했단다.
사연을 적어놓은 글에는 그때마다 환자들은 함께 살지 못한 처지와
신병의 고통을 되씹으며 통탄의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애환의 추모비에는 더 아픈 사연이
새겨져 있었다. 소록도 병원은 1936년에
착공하여 1940년에 개원했는데, 그간 60200여명을 수용해온 가운데 크고 작은
불상사도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건은 1945년에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병원측과 맞서다가 원생 84명이 죽어갔다는 것이다.
비문은 그 아픔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었다.
나는 감금실 안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혹시 수감자들이 당시 절규하며
남겨놓은 흔적들은 없을까 하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녹슨 창살과 시멘트바닥, 변기만이 덩그마니 있을 뿐이다.
아마도 못하나 사금파리 하나까지도 몸에 지니지 못하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전에 독립투사들이 주로 수감된 서대문 형무소에는 저항의 흔적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으니 경비 또한
얼마나 삼엄했는지 알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만 붉은 감금소는 당시에도 있었을, 벽돌담을 타고 오른 담쟁이 넝쿨만이
질긴 목숨처럼 뻗어서 자라고 있을 뿐이다. 그걸 보노라니 저 유명한 작품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그들도 이 이파리를 바라보며
간절한 간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 간구란 다름 아닌, 어서 소름끼치는 이 지긋지긋한 감금소를 나가서
하늘이라도 맘껏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원이지 않았을까. 그런 소박한
소망을 위해 자기가 믿은, 예수님 부처님 천지신명께 빌고 빌었을 것 같다.
나는 감금실을 둘러보기 전에, 공원을 먼저 돌아보았다. 잘 가꿔진 정원수들이
어느곳을 둘러보나 빼어났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한센인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동산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 좋다’는 감탄사는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켜서 했건 자발적으로 했건 간에 그들의 한이
나무마다 깊게 맺혀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공원 위쪽에서 반석위에 새겨진 한 한하운 시인의 시
‘보리피리’를 만났다. 잠시 발길이 멈춰졌다.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리’ 라는 시구가 대번에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본명이 한태영(韓泰永), 함경남도 함주 사람. 인천에서 살다가 수용소로
끌려오며 ‘걸을 때마다 발가락이 한 개씩 떨어져 나갔다’는 그의
시처럼 여기까지 끌려오면서 얼마나 고된 고행의 길을 걸었을까.
나는 감금실 안 하늘이 트여 보이는 마당에 서서 새감스레 이 건물이
등록 문화재인 것을 돌이켜 본다. 무슨 서대문 형무소처럼 갇혀있던 사람들이
독립투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의 비인도적 강권통치에 인권이
무참하게 유린된 장소임을 증명하며 잊지 말자 함이 아닌가.
그런 의미를 짚어보는 마음 때문인지 머무는 내내 나의 전신은
감싸는 음산한 기운을 떨쳐버리기가 어렵다.
2011/11/18 夜 楊州에서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