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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4:9-10 역전의 기도 220626 찬양
1.야베스의 기도와 한국교회
오늘 본문은 소위 ‘야베스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본문입니다.
물론 우리 세대 중에는 이 기도를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 중에는 이 기도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성경에 딱 두 절밖에 나오지 않는 매우 짧은 기도지만, 한 때 한국 교회 안에서 “야베스의 기도” 열풍을 일으켰던 기도입니다.
마치 이 기도를 열심히 하기만 하면 복도 얻고, 재물도 얻고, 환난에서도 벗어나고, 근심도 다 사라질 것처럼 이야기 가 됐습니다.
그 여파로 당시 한국 교회 안에서는 야베스의 기도와 관련된 찬양과 설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저자의 말대로 아침·저녁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물론 말씀으로 기도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의미를 정말 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분명한 뜻을 모르고 믿고 전하면 문제가 돌수 있기 때문입니다.
2.야베스의 기도의 본문 배치와 해석의 어려움
이 야베스의 기도는 해석이 좀 까다로운 본문인데, 그 이유는 이 말씀이 매우 뜬금없는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성경의 각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문맥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야베스의 기도에는 ‘문맥’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는 이어지는 매우 긴 계보 속에 뜬금없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이 말씀은 본문 자체도 딱 두 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 자체는 10절 딱 한 절뿐입니다. 앞뒤 문맥도 없고 본문 자체도 너무 짧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 야베스의 기도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하지요?
그런 식으로 이 말씀도 역대기라는 거대 숲을 보면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습니다.
역대기라는 거대 문맥이 이 두 절을 읽고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즉 저자가 역대기를 기록한 목적과 역대기 전체의 신앙 안에서 이 두 절을 읽는다면,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먼저 역대기라는 거대 문맥 안에서, 문장 하나하나를 분해해보면서 그 의미를 해석해볼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이 기도는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전합니까? 함께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3. 역대기란 어떤 책인가?
어제 아침 제가 성경완독, 어제부터 읽기 시작하는 역대기의 대략에 대해서 카톡에 안내해 드렸습니다.
읽어 보신 분들은 쉽게 이해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1)우선 역대기라는 책 이름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히브리 성경에서 역대기(歷代記)는 ‘역사의 연대기’라는 뜻으로 한권으로 되어 있고, 히브리 성경의 제목은 ‘디베제 하야멈’(그 때의 사건들)이며, 최초의 헬라어 번역성경인 70인역의 제목은 ‘생략된 것들에 관하여’라는 뜻을 지닌 ‘팔랄레이 포메나’입니다.
이 70인역의 제목은 역대서가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에서 빠진 기록을 보충하고, 또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서 취하지 않았던 제사장적인 관점에서 본서를 기록했음을 의미합니다.
2) 저자와 기록연대
유대 전승 탈무드는 저자를 에스라로 지목합니다.
또 문체상의 유사점 등을 종합하면 역대서의 저자는 에스라 • 느헤미야의 저자인 에스라이고, 기록 연대는 에스라의 주활동 시기였던 바벨론 2차 포로 귀환 직후인 서기전 450년경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3) 기록배경과 동기
1차 포로 귀환민들이 서기전 537년에 귀환하여, 서기전 516년 스룹바벨 성전을 중건한 때로부터 약 70년 가량 시간이 경과했으나 아직 택한 민족에게 임하리라는 하나님의 영광은 임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적의 공격이 이어졌고, 내적으로도 여러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대기서는 하나님은 한번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해 주신 이상, 더욱이 이미 다윗 언약의 보존과 성취를 위하여, 자신들 포로 귀환 세대를, 과거 조상들의 범죄로 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계속 민족적 존재를 보존시켜 주시다가, 회복시켜 주신 사실에서도 입증되듯이, 절대로 변치 않고 보호해 주심을 확신시키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역대기 앞에 있는 열왕기는 앞의 사무엘서와 연결되어 서기전 586년 남 왕국 유다 마저 멸망하여 남북 왕국 모두가 패망한 직후에 쓰여진 것으로서, 끝내는 패망까지 자초한 과거 자신들 선민의 죄악사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과거 지향적, 그리고 선지자적 관점에서 쓰여졌습니다.
선지자적 관점이란 정의냐 불의의 관점을 말합니다.
선지자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를 외쳐왔고, 불의를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역대기는 남 왕국 유다마저 멸망한 지(서기전 586년), 150년이라는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 특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는 다윗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다윗 가문과 선민 역사를 다시금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 귀환이 이루어져 이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선민 역사를 재건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새 역사를 창조하여 축복을 받자는 제사장적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쓰여졌습니다.
즉, 역대기는 비록 전날 조상들이 하나님께 패역하여 심판받았으나 하나님은 크신 사랑으로 선민이 범한 죄에 대해서는 징계하셨으나 한번 택한 백성은 결코 버리지 않고 다시 회복시켜 주셨으므로 이제 새로이 각성하여 전 역사의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더이상 과거 역사의 전철을 밟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위대한 선민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교훈을 포로 귀환 세대에게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사실,
앞으로 여러분 역대기를 읽어 가면서 아시게 되겠지만 역대기 대부분의 내용이 열왕기서와 겹칩니다.
열왕기에 이어서 역대기를 읽다 보면 거의 똑같은 내용을 두 번 읽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는 기록 연대와 목적이 다릅니다.
열왕기서는 남유다가 멸망한 직후에 쓰여진 책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왜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목적인 책입니다.
역대기는 바벨론에서 2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진 뒤에 서기전 450년 경에 쓰여진 책입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다 재건한 뒤에 가장 마지막으로 주어진 책, 그 책이 바로 역대기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매우 큰 ‘기대’를 가지고 성전과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이렇게 ‘꿈’과 ‘소망’을 가지고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역경을 딛고 성전과 성벽을 재건해낸 역사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꿈과 소망은 곧 사그라들고 맙니다.
왜? 성전과 성벽을 다 재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바뀐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 성전과 성벽을 다 재건하기만 하면, 즉 신앙을 회복하기만 하면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이스라엘 위에 임하고, 과거에 누렸던 부흥이 다시 회복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의 책망과 리더들의 격려를 따라 힘을 다해 성전을 결국 완성해냈습니다.
하지만 성전을 다 재건한 뒤에도 실제로 바뀐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유다는 여전히 이방나라 바사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가난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이방나라들은 수시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믿음과 신앙이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바꿔주지 못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과 성벽을 재건해냈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유다 백성들의 기대와 열정이 빠르게 식어갔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정체성도 빠르게 상실해갔습니다.
이렇게 포로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체성과 소망을 다 잃어가고 있을 때,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 역대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역대기는 역사서입니다. 하지만 같은 역사서라도 열왕기의 강조가 ‘회개’라면, 역대기의 강조는 ‘소망’입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왜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가?”를 말해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 어떤 소망을 붙들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4. 역대기의 계보 정리 작업과 야베스의 발견
이와 같은 목적에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족보’를 아담에서부터 하나하나 다시 정리해 나갑니다.
그 내용이 역대상 1장-9장입니다.
그리고 ‘유다 지파’의 족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아주 신기한 한 사람, 곧 ‘야베스’란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야베스의 기도가 역대상 4장, 유다의 족보 속에 삽입되어 있는 이유입니다.
이 야베스는 성경의 다른 곳에 기록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베스는 성경 전체에서 이 본문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야베스는 그가 유다 지파란 사실 이외에, 아버지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야베스란 사람이 다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한 성읍의 조상이자, 지도자중의 한 명으로 자기 이름을 남긴 것입니다.
도대체 야베스가 누구기에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하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 주는가?
역대기는 이 야베스가 가진 한 가지 독특한 특징에 주목합니다.
오늘 본문 시작입니다. 9절을 봅니다.
9절.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9절에는 야베스가 존귀한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10절을 마저 보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제 야베스가 존귀하게 된 이유가 나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부분을 옛날 성경, 개역성경은 더 확실하게 말해 줍니다.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바로 야베스는 이 ‘기도’로서 존귀하게 된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잘나서, 집안이 좋아서,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우 불우한 환경에서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드렸던 이 기도를 주님께서 허락해 주셨기에, 응답해 주셨기에 형제 중 가장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대기는 유다의 족보 속에 이 야베스의 이야기를 포함시킵니다.
왜? 바로 이 야베스의 이야기가 현재 소망을 잃어가고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환경은 불우했지만 기도로 그 운명을 뛰어 넘은 야베스의 이야기가, 똑같이 어두운 상황에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꼭 필요하다 믿었던 것입니다.
야베스의 환경이 얼마나 좋지 않았을까요?
9절 말씀에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9절은 야베스의 출생 배경을 설명합니다. 이 말씀은 딱 한 절밖에 되지 않지만, 이 기도의 해석을 위한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고통’ 또는 ‘슬픔’이란 뜻입니다.
9절 후반부를 보면 이 이름의 경위가 설명되는데, 바로 야베스의 어머니가 그를 “수고로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수고로이 낳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야베스를 낳을 때 힘들었다.”, “난산이었다” 그런 의미일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자기 자녀의 이름을 ‘고통’이나 ‘슬픔’이라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난산이고 힘들었어도 새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 슬픔이라 짓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보모의 믿음과 소망을 담아 최대한 존귀한 이름을 붙여주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 야베스의 어머니가 그를 “수고로이 낳아 야베스라 지었다”는 것은 단지 출산의 고통이 너무 컸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 성경 본문을 봅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우리 말 번역 성경에, 이 부분을 “내가 아이를 고통 가운데 낳았다”라고 번역하고
영어 성경, NIV 성경은 “I gave birth to him in pain”, “내가 고통 중에 그를 낳았다”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은 산고를 고통이라 하지 않고 이미 어떤 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 아이를 낳았다라는 뜻입니다.
야베스가 태어날 때의 상황이 뭔가 정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이를 낳았다고 기뻐하거나 축하할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야베스’의 경우처럼 ‘저주의 이름’을 붙여주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ex)야곱의 아내 라헬은 막내아들을 낳을 때 난산을 하여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라헬은 자기 아들을 ‘베노니’, ‘슬픔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자기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라헬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 지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 부를 수 없어 나중에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이라 이름을 바꿔줍니다.
ex)사무엘상 4장을 보면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 곧 비느하스의 아내 역시 자기 아들에게 저주의 이름을 지어줍니다. 출산 직전에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했다는 소식과,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고, 남편과 시아버지가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여인은 갑자기 출산을 하며 자신도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 자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도 전쟁에서 지고, 법궤는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과 자신까지 다 죽는 상황에서 그녀는 자기 아들에게 저주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처럼 자기 아이에게 저주의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는 오직 그 부모나 아이가 정말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을 때뿐입니다. 그 부모 또는 아이가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에 있을 때, 그래서 더 이상 어떤 소망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이런 저주의 이름을 짓습니다.
따라서 ‘고통’이란 뜻의 ‘야베스’ 역시 정말 소망이 없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태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대체 어떤 상황에서 출생했던 것일까요?
아이의 이름을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지어주는 것을 보아 출산하기 직전 남편이 죽었거나, 아버지가 없는 아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라헬이나 비느하스의 아내처럼 출산 중에 엄마마저 죽음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야베스의 몸에 선천적인 ‘장애’가 있었을 거라 추측합니다.
선천적인 장애 때문에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여기며 이런 고통의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설입니다.
짐작일 뿐입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야베스가 태어났을 때의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이름을 ‘고통’과 ‘슬픔’이라 지을 만큼, “앞으로 너는 고통과 슬픔의 인생밖에 살지 못하겠구나” 체념할 만큼, 야베스는 너무나도 불우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출생했습니다.
고통이란 이름으로 운명이 정해져 버린 야베스
야베스의 어머니는 자기 아이의 상황과 환경, 또는 육체적인 상태를 보고 그 아이의 운명을 정해버렸습니다.
“너는 야베스다”, “너는 야베스가 될 수밖에 없다”, “네 절망적인 상황과 육체적인 문제 때문에, 앞으로 네 인생은 고통과 슬픔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그의 어머니는 그의 인생을 ‘야베스’라고 정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야베스의 운명을 ‘고통’이라 정해버린 어머니의 생각이 주어진 환경과 운명에 체념하는 우리와 닮지 않았습니까?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간혹 자신의 운명과 상황을 뛰어넘기도 하지만, 그게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대부분 주어진 환경과 운명대로 사는 것이 최선임을 은연중에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 한 때 유행했던 ‘수저론’입니다.
수저론은 그 기준이 대충 이렇다고들 합니다.
부모님의 자산이 20억이 넘거나 연봉 2억 이상이면 금수저. 10억이 넘거나 연봉 8천 이상이면 은수저. 5억이 넘거나 5천 이상이면 동수저. 그리고 그 미만의 사람들은 ‘흙수저’라고 말입니다.
“부모님의 자산과 연봉에 따라 물고 태어난 수저가 다르다,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가 그 사람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한다” 이게 수저론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웃으라고 만들어낸 이야기지만, 솔직히 웃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처음 태어났을 때 주어진 환경과 운명이 그 사람의 인생 가운데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났는지에 따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지는 것, 그것이 이 세상의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모든 인생이 다 공평하다고 말하기엔 사람마다 출발선이 너무나 다릅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누군가에겐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 인생의 꽤 많은 부분들이 우리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태어난 환경과 운명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리고 한 번 운명으로 정해진 것들을 뛰어넘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어렵습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우린 사람이 거의 태어난 운명대로 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운명을 바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끔 신문에나 나오는 이야기지,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게 너무 희귀한 일이니까 신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태어난 대로, 주어진 운명과 환경대로 삽니다.
‘야베스’로 태어났으면 ‘야베스’로 살아야지, 어떻게 ‘야베스’가 아닌 삶을 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야베스의 어머니처럼 우리 인생을 그렇게 정해버립니다. “나는 야베스다. 주어진 상황과 운명대로 살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조차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을 재건한 후에도 상황이 변하지 않아 침체되어 있던 유다 백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고통이라는 운명을 기도로 역전시킨 야베스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역대기는 야베스라는 기도의 용사를 내세워서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고통이요, 슬픔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야베스가 운명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여,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시고,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라, 슬픔이라 이름지어졌던 야베스는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야베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입니까?
야베스의 기도가 당시 절망에 빠진, 꿈을 잃어버린 유다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야베스의 기도대로 그의 불우하고 절망적인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의 불가능한 환경을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마치 야곱을 외삼촌의 굴례를 벗어나 거부가 되게 하신 것처럼 그 고통이라는 운명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대적들을 물리치고 땅을 차지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형제들 중 가장 존귀한 자가 되고,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자기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베스는 운명 앞에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던 이 기도로 말미암아 그토록 존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베스는 오직 기도로만 설명되는 인생, 또 기도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기의 저자는 이 야베스의 이야기를 실의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들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봐라! 하나님께서 이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느냐? 그의 절망적인 인생을 가장 존귀한 인생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운명과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그분 앞에 나아가 함께 기도하자. 우리의 하나님께 매달리자. 힘을 다해 부르짖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가장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을 바꾸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불우한 야베스의 인생을 가장 존귀한 인생으로 바꿔 주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내 앞에 나아와 내게 소망을 갖고, 내게 부르짖는다면, 이와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절한 기도가 야베스를 존귀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힘을 다해 기도합시다. 믿음을 갖고, 소망을 갖고, 기대를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읍시다.
하나님께 아무런 기대와 소망이 없는 죽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산 소망을 두고,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신앙을의 사람이 됩시다.
목숨 걸고 기도하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는 백성들이 됩시다. 야베스처럼 기도하여 존귀한 인생이 됩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응답하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한 것을 반드시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