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고금 월송대 이순신 소나무
1597년 정유재란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으로 2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3월 4일 옥에 갇혔다. 선조의 국문으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4월 1일 옥에서 나와 경남 합천의 권율 진중에서 백의종군하였다.
1597년 7월 16일 새벽이다. 경상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해협 ‘칠천량’에서 원균의 조선 수군은 왜선의 기습을 받았다. 원균은 막다른 해협으로 함대를 끌고 가 스스로 불살랐고, 육지로 흩어진 병력은 모두 학살당했다.
그렇게 조선의 수군이 사라진 뒤, 7월 2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 되어 8월 3일 임명장을 받고 곧장 수군재건 길에 나섰다. 진도 벽파진에 통제영을 두고 9월 16일 명량에서 13척의 전선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쳤다. 10월 29일 목포 고하도로 통제영을 옮겼다. 이듬해인 1598년 2월 17일 완도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겨 7월 19일 녹동 절이포, 9월 20일 명군과 연합함대를 이뤄 여수 율촌의 장도, 10월 7일에는 순천 왜교성에서 왜와 싸웠다.
그리고 11월 19일이다.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해 퇴각하는 왜선을 노량에서 추격하던 중이다.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명의 제독 진린을 구하려다 왜의 유탄을 맞았다.
이순신의 시신은 남해 충렬사에 잠시 머문 뒤 곧장 완도 고금도의 삼도수군통제영으로 옮겨져 11월 22일 묘당도 월송대에 임시 안장되었다. 묘당도는 고금도 통제영의 작은 섬이고 솔숲 월송대는 달밤에 이순신이 거닐며 작전을 생각하던 곳이다.
12월 11일이다. 어전회의에서 선조는 노량에서 전사한 명 장수 등자룡을 이순신에 앞서 장례 지내라 했다. 이때 예조는 ‘듣건대 이순신은 해로를 통해 이미 아산으로 가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등자룡보다 먼저 장례를 치르고 싶어 노량에서 고금도로 옮겼지만 두루뭉술 고향인 아산으로 가고 있다고 선조의 마음을 슬쩍 떠본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들은 척도 않았다.
해를 넘긴 1599년 1월 11일이다. 이순신이 없는 조명 연합함대의 지휘권자인 명의 수군 제독 진린이 고금도에서 이순신의 제사를 올렸다. 그러니까 이때 이순신이 묘당도에 머문 날짜는 최대 80여 일, 최소 50여 일이다. 그런데 현지 안내판이 80여 일에서 10여 일로 바뀌었다. 선조의 어전회의 날짜 12월 11일에 ‘듣건대’로 보고한 예조의 발언을 기준으로 한듯싶다.
그렇다면 진린이 1월 11일 이순신의 시신도 없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단 말인가? 전시에 통제사 이순신의 시신을 누가 감히 맘대로 옮긴단 말인가?
그 제사 뒤 진린은 함대를 이끌고 고금도를 나왔다. 1월 11일 뒤 곧장 나왔다면 50여 일이고 2월 초라면 70일이 넘는다. 이때 진린은 등자룡의 시신은 자신이 직접 운송하여 2월 8일 선조 참여하에 장례식이 있었다. 선조의 뜻대로 등자룡의 장례를 먼저 치른 것이다.
이때 진린은 이순신의 호송을 처남인 두사충에게 맡겼다. 명의 장수이자 풍수지리가인 두사충은 아산 음봉의 금성산에 묏자리를 잡아 2월 11일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명군에 합류하여 진린을 압록강까지 배웅하고 지금의 대구에 귀화했다. 대구에 대명동이 있는 연유이다.
그때 이순신이 임시 안장되었던 묘당도 월송대 묘터에는 4백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풀이 자라지 않는다. 과학을 떠나 신비로운 일임이 틀림없다. 걸핏하면 역사를 왜곡하고 안내판 하나 정리하지 못해 오락가락하는 현실이니 우리 사회에 친일파, 토착왜구라는 말이 유효한 이유이다. 이순신이 이곳 묘당도 월송대에 얼마 동안 계셨느냐는 문제해결의 핵심이 아니지만, 그 월송대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를 보며 그저 한없이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