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소설의 시점은 2017년입니다 >
91. 영국 수상의 마지막 친필 서한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 각료 회의실.
오전 9시가 막 지난 시각인데 총리 주재로 몇몇 장관들과 관계자들이 둘러앉아 긴급회의를 하고 있다.
“하우 국장님! 그러니까 그 괴한들이 금괴를 훔치기 위해서 캐나다 TD 뱅크 옆 지하 하수도로 침투했다는 말입니까?”
런던 경찰국장 `버나드 호간 하우`의 설명을 듣고 있던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하우의 말을 가로막고 확인을 위한 질문을 했다.
“예, 그렇습니다. 잉글랜드 은행 보안팀에서 우리 경찰청 본부로 금괴를 도난당했다고 조금 전에 연락이 왔습니다.”
“아니, 캐나다 TD 은행의 일인데, 왜 잉글랜드 은행에서 연락을 해요?”
메이 총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총리님! 잉글랜드 은행이 캐나다 TD 은행 지하 금고에 금괴를 위탁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그 TD 은행 빌딩 자리에 잉글랜드 은행 지하 금고가 있었고, 2차대전 때는 독일 폭격기의 공습을 피해서 캐나다로 잠시 옮겼다 온 사례도 있습니다.”
브렉시트 결정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경기침체가 예상되는 영국경제를 책임질 신임 재무장관인 전 외무장관 `필립 해먼드`가 보충 설명을 하고 나섰다.
“아, 그런가요? 그러면 그 도난당한 금괴에 대한 변상은 캐나다 TD 은행이 하게 되고, 우리 잉글랜드 은행의 손실은 없다고 봐도 되는 거지요?”
메이 총리가 다행이라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영국의 아들 격인 캐나다의 TD 은행이야 어찌 되든, 우선 자기 나라 잉글랜드 은행에 피해가 없을 것 같아 안심되는 모양이다.
“예, 두 은행 간에 특별한 약정이 없다면, 아마 금괴 보관 책임을 진 TD 은행이 전부 변상하게 될 겁니다.”
외무장관도 지낸 재무장관이 자기의견을 확실하게 제시했다.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전 런던시장이었던 신임 외무장관 `보리스 존슨`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들고나왔다.
그는 이번 총리 자리를 노리고, 외국 이민자의 유입을 막아서 영국인의 일자리를 뺏기지 말아야 한다며 국민을 선동하고, EU(유럽연합) 탈퇴라는 브렉시트(Brexit)를 사실상 주동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막상 브렉시트가 통과되고 나서 전 세계의 여론뿐만 아니라 영국 내에서도 브렉시트를 주장한 무리에 대한 비판이 일자, 총리후보로 나서는 대신 슬그머니 메이를 밀어서 총리를 시키고, 자기는 외무장관자리를 꿰어 찬, 잔머리도 있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다.
“존슨 장관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니요? TD 은행이 잉글랜드 은행의 도난당한 금괴에 대한 변상을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까?”
메이 총리가 무시할 수 없는 존슨 외무장관의 발언에 대해 진의가 무엇인지 물어본다.
“예, 그렇습니다, 총리님! 한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캐나다에서 TD 은행의 금괴 도난은 우리 런던 경찰의 책무인 순찰과 추적의 소홀로 빚어진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도난당한 금괴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국장 얘기로는 대형 트럭이 두 대나 동원됐다는데, 그런 눈에 띄는 큰 트럭을 놓친다면 당연히 우리 런던 경찰의 책임이라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존슨 외무장관이 자기 의견을 조리 있게 설파하자, 다른 참석자들도 그럴듯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표했다.
“존슨 장관님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하우 국장님! 도난당한 금괴의 양이 얼마나 된답니까?”
메이 총리의 질문에 모든 참석자의 시선이 런던 경찰국장 입으로 쏠렸다.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려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물어봐도 잉글랜드 은행 보안부서의 권한으로는 은행 외부에 함부로 발설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음, 흠.”
이번 사건으로 갑자기 죄인이 되어버린 `버나드 호간 하우` 경찰국장이 경관 모자를 벗은 허연 대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민망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럴 겁니다. 이따가 제가 잉글랜드 은행 총재에게 확인해서 총리님께 별도로 보고드리겠습니다.”
`필립 해먼드` 재무장관이 하우 경찰국장을 옹호하며 보충 답변을 하고 나섰다.
“예, 알겠어요. 고마워요, 해먼드 장관님. 그런데, 그 큰 트럭이 한 대는 컨테이너 안이 텅 빈 상태로 바지선에 실려서 템스강 타워브리지 교각에 걸려있다면서요? 탈취한 금괴를 실은 걸로 추정되는 다른 한 대는 행방이 묘연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말씀입니까? 3천 명에 가까운 런던 무장경찰은 도대체 뭘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예?”
메이 총리가 하우 경찰국장에게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속사포를 갈겨 따지고 물었다.
“예, 그것이… 안개가 잔뜩 낀 새벽인 데다, 대로변을 달린 트럭도 CCTV도 없는 타워브리지 밑에서 괴한들이 예인선으로 옮겨 타는 바람에 제대로 얼굴이 찍힌 영상을 아직 확보하지 못해서 몇 명이나 되는지 파악조차 안 되고 있습니다. 다른 트럭은 잉글랜드 은행 앞을 지나는 모습만 포착되었고, 서쪽으로 간 것 같기는 한데, 어느 방향으로 튀었는지 영 찾기가 어렵습니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음, 흠.”
하우 경찰국장이 밤안개 핑계만 대며 궁색한 답변을 하느라고 진땀을 흘린다.
“저.. 하우 경찰국장님, 인원이 부족하면 우리 군의 SAS 부대원을 좀 동원해서 지원해 드릴까요?”
무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경찰국장이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국방장관 `마이클 팰런`이 나서서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예, 맞습니다. 이번 사건은 범인 검거와 도난당한 금괴를 찾는데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듣자 하니 일반 무장 강도들의 짓이 아니고 뭔가 국제적인 테러 집단이 개입한 정황이 보이는데, 군에서도 함께 나서면 훨씬 빠르게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각사무처장인 `제레미 헤이우드`가 나서서 지원사격을 했다.
헤이우드 내각사무처장은 아침 일찍 경찰국장과 통화를 하면서 뭔가 심상찮은 조짐을 느꼈고, 내무장관만 불러도 될 회의에 외무장관과 국방장관까지 오도록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경찰국장이 시티 오브 런던 현장을 떠나서 4km 거리의 총리 관저로 오기 직전에 TD 은행 지하 금고가 뚫린 것 같다는 전화를 해줘서, 내각사무처장이 메이 총리에게 보고했고 결국 재무장관까지 참석시킨 확대 회의가 된 것이다.
지난 7월 3일에 총리에 취임한 메이는 7월 14일에 새 내각 24명의 인선을 모두 마무리했는데, 브렉시트 반대파였던 메이 총리는 새 내각에 브렉시트 지지파 6명을 포함했으며, 여성 각료는 메이 총리 자신을 포함해 모두 8명을 임명했다.
이는 강인한 인상의 메이 총리가 이미지 쇄신을 꾀하면서, 국가통합과 양성평등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새 내각의 구조 속에서 `제레미 헤이우드` 내각사무처장의 노련한 수완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일반인들은 영국 내각의 내각사무처장이라는 직위와 역할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지만, 그 직책은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에 총리 다음의 막강한 위치에 있는 자리이다.
미국과 함께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양분하는 영국의 주 적은 현재는 러시아이다.
영국은 미국이나 러시아와는 달리 국토가 작고 런던 등 몇 개 대도시에 인구가 밀집해 있어, 러시아로부터 선제 핵 공격을 당하면 반격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
영국은 4척의 뱅가드급 전략 원자력 잠수함(전략원잠 SSBN)을 운용 중이다.
각 SSBN은 16기의 미제 트라이덴트 SLBM을 탑재하고 있는데 수상 배수량 15,000톤, 길이 150m, 승조원 160명으로 미국의 오하이오급 SSBN과 비슷한 제원이다.
보잉 747보다 두 배나 긴 거대한 SSBN이 전 세계를 소리 없이 누비면서 영국의 자부심을 지키고 있다.
테레사 메이 영국 수상이 취임 인사로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키스를 마치자마자 프랑스 니스 테러, 터키 쿠데타 미수 등이 터져 나와 유럽의 정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과 터키 간에도 신경전이 진행 중이며 터키는 시리아와 이라크 내의 IS 공습 핵심 기지인 남부 인지를릭 Incirlik 공군기지에 외부 전력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미군 1,500명과 NATO 남단을 방어하는 핵미사일 50 여기 이상이 배치되어 있다.
터키 `에드로안` 대통령은 군부 쿠데타의 배후로 미국에 망명 중인 귈렌(Gulen)을 지목하고 터키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여차하면 인지를릭 Incirlik 공군기지의 미군과 미 공군기, 핵미사일을 교환 카드로 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되면 영국의 주 적으로 러시아 외에 무슬림 세력인 터키도 등장하게 되는 셈이다.
만약에 영국이 주 적들로부터 선제 핵 공격을 받게 된다면 영국의 대응 방안은 무엇일까?
테레사 메이 수상은 집권하자마자 제일 먼저 국방부로부터 안보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국방부는 영국이 보유한 핵전력과 선제 핵 공격을 받을 경우 피해에 관해 설명했다.
이때, 제레미 헤이우드 내각사무처장이 나서서 보완설명을 했다.
“영국이 러시아 등 적대국으로부터 핵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을 경우, 남아있는 유일한 보복 타격력은 4척의 전략원잠에서 발사하는 SLBM뿐입니다. 오직 수상이신 총리님만이 잠수함 함장들에게 사전에 대응 방안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메이 총리는 헤이우드 사무처장이 제시하는 4가지 복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영국이 선제 핵 공격으로 정부 기능이 붕괴되고 수상과 수상이 지명한 각료 한 사람(이름은 공개되지 않음)마저 사망하고 난 상황에서 SSBN 함장이 취할 수 있는 조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친필로 적는 것이다.
소위 `Letter of Last Resort`로 명명된 친필 서한은
1. 보복 공격하라
2. 미국의 지휘하에 들어가라
3. 호주로 항진하라
4. 함장의 판단에 맡긴다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직 수상만이 자신의 양심과 책임을 걸고 4통의 편지를 직접 쓰고 밀봉한다.
내각사무처장은 편지를 받아 들고 국방부에 넘기고, 4통의 서한은 즉시 4척의 전략원잠 함장에게 전해진다.
(만약 이 과정에서 내각사무처장이 이 서한을 교묘히 조작한 다른 서한으로 바꿔치기라도 한다면 전 세계의 운명은 영국 수상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함장의 지휘통제실에는 회색의 평범한 금고가 있고, 금고를 열면 다시 작은 금고가 나타나는데, 수상의 친필 서한은 그 속에 보관된다. 물론 전임 수상의 서한은 개봉되지 않은 채 파기된다.
지금껏 역대 수상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은 `보복 공격하라` 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야 핵 강대국이 영국을 선제공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파스레인(Faslane)을 모항으로 한 4척의 전략원잠 중 적어도 1척은 상시 전략 정찰을 실시하고 있다.
해군사령부가 사전에 지정한 해역으로 들어가면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는 함장과 부함장 등 극히 일부 장교만이 안다.
160명 승조원의 대부분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하고 가족들과의 통신도 불가능하다.
그곳은 단 한줄기 가시광선도 들어오지 않는 칠흑 같은 심해이다.
전략원잠은 지정된 시간에 잠수함 통신센터와 정기적으로 통신 보고를 실시한다.
물론 노출 위험성을 고려해서 주로 짧게 수신만 한다.
그러나 통신 보고 체계가 끊기고 여러 가지 검증 수단 중에서 특히 ‘BBC Radio 4’가 보내는 아침 프로그램 ‘Today’가 중단되면(약 3일간) 함장은 런던이 파괴되었다고 판단하고 부함장과 함께 금고로 향한다.
그가 수상의 친필 지시대로 이행할지 말지는 오직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이 지구의 운명이 SLBM 16기를 탑재한 영국 전략 원자력 잠수함 SSBN의 함장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Radio 4’는 장파(long wave)로 송출되어 지구상 어디에서나 수신이 가능하다.
테레사 메이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