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 더없이 말간 빛깔로. ‘정원의 연인들’은 모네와 아내 카미유의 연꽃과 같은 사랑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모델을 자주 기용할 만큼 넉넉하지 못했던 모네는 당시의 젊은 화가들이 그랬듯 자신의 아내를 여러 번 모델로 세웠다. ‘정원의 여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은 모두 같은 사람인데, 바로 아내 카미유다.
제각각 꽃과 풍경에 취해 어우러져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모델 비용을 아끼기 위해 기꺼이 여러 사람의 모델 역할을 해낸 카미유. 그것이 가난한 예술가의 아내로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으리라.
그리고 모네는 그런 아내를 더없이 따스하게 포착해냈다. 언뜻 봐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 여인들은 모두 체격과 인상이 비슷하다. 머리색을 바꿔 그리는 등 각각 다른 사람처럼 보이도록 표현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을 통해 모네와 아내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사랑이 있는 한 결코 마음만은 가난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 더없이 깨끗하고 맑은 빛깔을 자랑하듯.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젊은 시절 모네는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렸다. 1866년 빚쟁이들을 피해 파리 근교 빌 다브레이로 거처를 옮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옹플뢰르로 옮겼다. 역시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돈이 떨어지자 동료 화가인 바지유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사용했던 캔버스를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는 캔버스를 긁어내 다시 사용한다. ‘정원의 여인들’은 이처럼 처절했던 시기에 완성된 작품이다.
모네는 높이가 2백56cm나 되는 이 대작을 야외에서 그리기로 결심한다. 땅에 웅덩이까지 팠는데, 이는 그림의 아랫부분을 그 속에 넣으면 대형 이젤 없이도 윗부분을 쉽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 쿠르베가 방문했는데 해가 지자 그리기를 중단하는 모네를 보고 왜 계속하지 않는지 의아해했다고 한다. 이는 모네가 대상 하나하나에 대한 사실주의 묘사보다는 빛이 시시각각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빛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 결국 그를 인상주의의 대가로 우뚝 서게 했던 것.
이렇듯 ‘정원의 여인들’은 모네의 인상주의 화풍의 과도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그리고 이는 아내이자 모델인 카미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처음부터 화가와 모델로 만난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너무나도 가난했다. 등잔불을 켤 수도 없었고 심지어 양식과 물감을 살 돈조차 없어 작업을 중단할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 안에서 행복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모네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줄 수 있었던 카미유. 당시 모네가 그렸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거의 그녀였을 만큼 그들의 사랑은 돈독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 10년이 되기도 전인 1879년 카미유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카미유가 죽던 그해 모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집은 저당 잡히고,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이후 모네는 풍경화 대신 정물화를 주로 그렸다. 자신의 아내이자 가장 훌륭한 모델이었던 카미유가 그의 곁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죽은 뒤 인상파는 몰락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모네의 작품 속에서 가장 큰 빛을 선사한 인물이었다.
‘정원의 여인들’은 가난했지만 사랑만으로도 이미 충만했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이 무렵 모네는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볼수록 행복이 묻어나는 그림입니다.”
마음 깊숙이에서 우러나는 기쁨이 환한 미소를 짓게 하듯 아내에 대한 진실된 사랑이 행복이 묻어나는 그림을 그리게 하지 않았을까.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과 같은 사랑이 말해준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인상파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클로드 모네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소년 시절은 노르망디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랐다. 화가가 된 후 1874년 세잔, 드가, 르누아르 등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개최한 전시회에 ‘인상’, ‘해돋이’를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을 인상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18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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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