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인생, 특유의 향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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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특유의 향기]
고덕상 시집 / 오늘의문학시인선 314 / 오늘의문학사(2012.07.2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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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햇살 - 말장난 ․ 1
고덕상
혈기 왕성한 여름철엔
밖으로만 나돌더니
겨울철 혈기 떨어지니
집안으로 기어들어
일 년 치 생색을 동짓달에
행할 뿐이어니
아내의 하얀 침대에서
알몸으로 뒹굴어.
내 받은 유산 - 말장난 ․ 18
고덕상
어머니 힘줄수록 내 머리통은
아프게 조여들었다
뜻밖에 뜨건 양수 흘러넘치자
자궁 밖으로 내몰렸다
영영 죽을 것만 같아, 줄 하나 잡고
목청껏 울어댔다
목숨 부지하던 탯줄이 끊기자
눈 떠보니 유산은 빈주먹.
착시錯視 - 말장난 ․ 27
고덕상
마주앉은 냉면집 식탁 옆자리
올라붙은 스커트 가랑이 사이로
싱싱한 숭어 두 마리
물 좋게 팔딱거린다.
되쏘[反射]는 백중날의 햇살
내 눈은 지금 착시현상
왜, 아랫배는 빳빳해지는 걸가?
이에 바로 수컷의 본능이라는 거.
계엄사령관 - 말장난 ․ 36
고덕상
남자들은 늙어갈수록 거개가
아내에게 복종하고 산다
유교권儒敎圈에서 찌들어온
여인들의 구호, “늙어서 보자”
아내가 거침없는 명령조로
김장 마늘을 까란다
한 맺힌 여인들의 보복이라면
마늘처럼 홀랑 벗고 반짝여보자.
뒤란 가랑잎 태우기[茶毘式] - 말장난 ․ 53
고덕상
여름 내내 벌레들에게
발보시布施하고
뻥뻥 뚫린 누더기 차림으로
성철스님처럼
조용히 돌아와 누웠다
뒤란 가랑잎 태우기[茶毘式]
타다 남은 시체는 사리로 굴러
알알이 아롱진 서방정토의 미소여!
외진 시골 버스 - 말장난 ․ 63
고덕상
요즈음도 장날은 사람이 붐비다
손잡이 잡고 용틀임 하다가
아가씨 내리기에 털썩 주저앉았다.
굽은 길 돌아갈 때 엉덩이가 들썩
내린 그녀의 뜨뜻한 항문肛門 위에
내 그것이 꼭 맞게 포개졌다.
어쩌다 운전석 백미러를 보니
내가 황소처럼 웃고 있지 않은가!
고향영상映像․1 - 말장난 ․ 77
고덕상
솔내음 흙내음
부엉이 밤마다 울어쌓고
아낙들 적삼 속
하얀 젖무덤 같은 지붕 위 박덩이
소쿠리 곱삶이
찬물에 말면, 양푼 속에 달이 뜨고
해거름에 돌아온
엄니 치마폭엔 녹도 돔부 깻잎 가득
주막주막도 늙어 - 말장난 ․ 86
고덕상
활량들 분탕焚蕩질만 봐 온
꽤나 늙은 살구나무랑
늘 정情만 남기고 떠나가는
울도 없는 주막집
뭇발길 오르내리던 긴 섬돌엔
검정고무신 한 켤레
기껏, 이웃동네에서 마실 온
멧새 두어 마리.
민얼굴 같은 시 - 말장난 ․ 91
고덕상
노래방 찾아가는 빈도에 따라 음정 박자
하루가 다르게 빛난다는데
왜, 시는 한 편 쓰나, 수백 편을 쓰나
늘 그 자리가 그 자리 같아
간혹, 겉모양만 번지르르하게 꾸민 시보다
코등 싸한 등 굽은 농부의 마모된 손톱 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도 콩밭 매는 아픔 같은
난 찬물에 세수한 민얼굴 같은 시를 쓰고 싶어.
고구마 순 내기 - 말장난 ․ 94
고덕상
골방에다 고구마 통가리 만들어
가둬 놓고, 입맛 다실 것도
목 축일 것도 없이, 캄캄한 옥살이시키더니
큰 뜻 한번 펼쳐보라, 마련해준
썩은 내 풍기는 움 속에서
새순이 제 어미 파먹으며 잘도 자란다
나도 줄 하나 잡고
놓치면 죽을 세라, 어머니 젖을 빨아댔다.
나이年輪 - 말장난 ․ 102
고덕상
참, 먼데까지 떠밀려 왔구나
돌아보면 오도 가도 못할 지점地點
뭘 하러 왔나 뭘 하고 가는지, 흔적 없는 삶
나는 춥고 배고픈 이웃들의 아픔을 모른 척 했고
그늘지고 소외된 자들의 슬픔을 돌보지 않고
약자를 위하여 버팀목이나 디딤돌 역할도 못했다
서릿발 산국山菊을 바라보며 더 살고 싶어함은
진정 부끄러움이 아닐까, 불쌍한 과욕이 아닐까?
애증愛憎의 꽃 - 말장난 ․ 102
고덕상
늘 하루나 이틀 모자라는 음 이월
석보釋譜 판본이 있다기에 찾아간 우리를
스님은 부부로 착각 자비를 베푼다며
휘몰이 장단으로 쳐대는 목탁木鐸
시퍼런 창칼로 밀어 삭발한 비구니
빤짝빤짝 빛나는 파르스름한 머리 위로
하늘이 내려와 사바裟婆의 애증愛憎을
한 송이 꽃으로 활짝 피워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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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自序
시는 언어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언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고로 언어는 시의 뼈대요, 영원히 살아 빛날 넋(영혼)이다.
나는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말하려고 언어의 율동과 음향에 귀 기울여야 하는 고독한 작업으로 말장난을 한다. 가장 쓸모가 없으면서 참으로 쓸모가 있는 말장난(작업)을 한다.
간혹,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뒤에 ‘낯선 즐거움’이 전광석화처럼 스쳐가는 영감을 잡으려고 말장난을 한다. 다시 말하면 말장난을 하다보면, 값진 진주(진실)를 캐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잇는 이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시로써 대변하고 싶어서이다. 그 대변은 내 자신의 일상문제뿐만이 아니라 국가 사회 나아가 전 세계를 대변하고 싶어서이다.
또한, 내사 살아가는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붉은 심장에서 이글거리고 있는 생의 안타까움, 가슴에 사무치는 애절한 사랑까지 노래하고 싶을 뿐이다.
요사이 사람들은 복잡하고 지루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시형 짧은 여덟 줄(8행)로 구성해 봤다. 순서 배열은 창작된 차례로 배열했다. 그리고 더러는 이미 지상에 발표된 것도 있음을 밝혀둔다.
2012년 6월 24일
부창동 움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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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주말이면 봉사하는 날이라, 숨 돌릴 짬이 없다
먼저 떠난다는 서글픈 부곳장에
아들딸 여의 살이 시킨다는 기쁜 청첩장에
백일․ 돌잔치란 알림, 부모 고희연이란 전갈
내 평화 ․ 자유의 시간은 모두 소드락질
가벼워진 주머니, 동강난 하루 품
덕성을 품과 돌아보면 세상은 살만한 곳
이 모두 삶의 꽃이랄까? 인생 특유의 향기랄까?
―「인생 특유의 향기」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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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덕상 시인∥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35년간 교직생활
∙교평문학<교육평론>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논산지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논산지회 고문/ 한국문인협회 충남지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제25대 위원
∙교평문학 신인상/ 충남문학발전 공로상
∙시집『질러온 길』외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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