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포룸 앞에 세워진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기원전 44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의 측근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에게 암살당하자 로마는 오랜 기간 동안 내전에 휩싸였다.
혼란스런 로마를 평정하고 최강자로 우뚝 선 젊은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정적 안토니우스를 염두에 둔 듯, 수도 로마에 돌아와서는 로마시민들에게 자신의 뼈는 조국 로마에 묻겠다면서 자신의 영묘부터 세웠다.
기원전 27년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인간에게 붙여주던 최고의 칭호를 받고나서 기존의 공화정체제와는 다른 원수정체제를 구축했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후 14년까지 37년 동안 통치하고는 자신의 업적을 뒤돌아보며 "나는 벽돌로 된 로마를 물려받고 대리석으로 된 로마를 만들었노라"라고 했다.
사실 그는 수도 로마를 로마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우아하고 품위 있는 도시로 개조했을 뿐 아니라 효과적인 행정을 위해 인구 1백만 명의 수도 로마를 14개의 구(區)로, 또 각 구역은 4개의 동(洞)으로 조직했다.
수도 로마와 그 주변의 치안을 담당하는 일종의 수도경찰국과 곡물 및 생활용품 공급을 전담하는 관청을 만들고, 도시 곳곳에서 일어나는 화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소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로마제국 국경선 안의 영토에 안정과 평화를 뿌리내리는데 더 힘을 쏟으면서 국경선 확장에도 관심을 두었다.
현재 로마의 중심가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영묘, 평화의 제단, 마르켈루스 극장, 아우구스투스 포럼 등 당시에 세워졌던 건축물의 폐허가 군데군데 남아있다. 그중 평화의 제단은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평화의 제단
팍스 아우구스타(Pax Augusta), 즉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평화’를 상징하는 이 제단은 아우구스투스가 오랜 내란을 종식하고 로마에 평화를 정착시킨 것을 경축하며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기원전 9년에 세운 것이다.
그는 대대적인 국가재건사업에 손을 대면서 로마제국의 모든 시민이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그의 왼팔이며 문화와 외교를 담당하는 마이케나스(Maecenas)를 내세워 문화인들과 지식인들의 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마이케나스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저술을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이상(理想)을 칭송했는데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베누스 여신의 아들 아이네아스의 일대기를 그린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를 쓴 것은 바로 이때였다.
또 비트루비우스(M. Vitruvius)는 방대한 <건축론>(De Architectura)을 저술하여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쳤다.
참고로 오늘날 ‘문화예술 후원자’란 뜻으로 쓰이는 프랑스어의 메세나(Mecenat)는 바로 마이케나스에서 유래된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무찌른 것을 기념하여 기원전 2년에 아우구스투스 포럼(Forum Augusti)을 완공했다.
그런데 이 포럼의 폐허 앞에 세워진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을 보면, 얼굴 모양이 젊고 갸름해서 황제로서의 위엄은 별로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검소하고 겸허한 보통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받게 되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바로 그 점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젊은 모습으로만 등장하는 아폴로 신처럼, 나이든 자신의 모습을 전혀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상은 2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항상 신선하기만 하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홍보하는데 치밀했다. 하지만 오후의 태양빛이 그의 얼굴을 옆으로 비칠 때면 그의 눈빛은 매섭고 날카롭게 빛나는 듯하다.
아우구스투스는 77회 생일을 한 달여 앞두고 남부 이탈리아를 순방하다가 기원후 14년 8월 19일에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꼭 2001년 전의 일이다.
숨을 거두기 전에 그는 자신이 이룩한 일에 대해 크게 자부심을 느끼며 이제 막 공연을 끝낸 배우처럼 자신이 살아온 삶을 연극에 비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을 제대로 잘 소화해냈던 것일까? 그랬던 것 같다.
그가 굳건하게 다져 놓은 국가체제와 국경선은 그 후 적어도 2백 년동안 로마제국의 안?과 번영에 밑거름이 되었으니 박수를 쳐줘야 하지 않을까.
그는 신격화되어 젊은 시절에 자신을 위해 미리 세워 두었던 거대한 영묘에 묻혔다.
아울러 일 년의 여덟 번째 달은 그에게 바쳐져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불리게 되었는데 영어에서는 이것을 August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영묘 유적
글·사진/ 정태남 재 이탈리아 건축가
첫댓글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흑으로 만든 유적이라는 생각으로 지나쳤었는데 지금 보니 아우구스투스의 유적이 달라보이네요
세상 일이 다 그러지요. 어마한 비밀이기도 하구요 ~